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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24 언어철학(2) - 프레게 1
  2. 2015.10.24 언어철학(1) - 예비사항 2
  3. 2015.09.07 신천지, JMS,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접근방법과 교리적 모순 1
  4. 2015.09.06 나. 8
  5. 2015.08.16 블로그를 또 만들었습니다 7
  6. 2015.08.13 전체론 1
  7. 2015.08.08 후.. 5




 프레게는 철학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논리학도 없고, 언어철학도 없고, ZF(C) 집합론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프레게는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혼자서 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기반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 이전으로 이런 시도를 했던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논리학적 관점으로는 논리주의를 주장했고, 이는 이미 연재한 바가 있습니다(티스토리의 경우 수학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고, 네이버의 경우 철학-프레게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의 언어철학적인 기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일성 문제 : identity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a=b"라는 문장을 봅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서술되는 두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보면 매우 어려운 문제를 표출합니다. 만약 동일성에 대한 표현이 a와 b가 같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같은 대상을 두 번 나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a=a"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a=b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도대체 우리가 같은 대상이 같은 대상임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정보를 주는 걸까요? 만약 동일성에 관한 표현이 대상이 같다는 표현에 불과하다면, 분석적인 명제밖에 되지 않고 어떤 정보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일성 문제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많은 정보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가령 과학적으로 전혀 관련없어보였던 개념들이 사실은 같은 개념이고, 같은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즉 어떤 물리적인 두 수식 K와 M이 있을 때 K=M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근데 만약 우리가 동일성 문제를 대상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면 이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일성 표현이 K와 M이 만약 같은 대상이라는 표현에 불과하다면, 같은 대상을 같다고 하는데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프레게는 그래서 동일성에 관한 표현이 대상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사용되는 기호에 관한 표현이라고 한 번 해보자고 합니다. 가령 RO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석기 = RO의 수장"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동일성 표현이 기호들에 관한 표현, 언어에 관한 표현이라면, "=" 앞뒤에 사용된 기호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프레게에 따르면 이 역시 배제되어야 할 가설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동일성을 표현할 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되는 언어들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석기"라는 표현이 "RO의 수장"이라는 표현과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그 대상들에 대해서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기호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우리가 저 문장을 보았을 떄 "오 이런!!!!"하고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프레게는 이 가설의 경우 사용과 언급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a=b"의 문장에서 a와 b는 동일성 기호 하에서 사용되고 있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프레게식으로 이해하려면 ""a"="b""가 되어야 합니다)


 프레게는 그래서 의미/뜻(sense, sinn)과 지시체(reference, bedeutung)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우리가 동일성 표현에서 표현되는 두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놀랄 수 있고, 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서술되는 두 가지가 지시체의 각기 다른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각각을 표현할 때 그 안에는 말하고자 하는 어떠한 바가 있습니다. 프레게는 그 추상적인 무언가를 '의미'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의미가 표현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를 '지시체'라고 불렀습니다. 의미란 우리가 표현을 발화할 때 놓치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이고, 지시체는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입니다. 의미는 지시체의 어떤 측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어느 날 뉴스를 보았는데 "이석기 = RO의 수장"이라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가 "허걱!"하고 놀랄 수 있는 이유는, "이석기"와 "RO의 수장"가 표현하는 지시체는 동일하지만 각각의 표현은 서로 전하고자 하는, 함축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에 담겨있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 지시체가 서로 다른 측면(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즉, 동일성 표현은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 표현들이 말하는 바가 같은 지시체의 측면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를 얻고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만 지시되는 줄 알았던 지시체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란다고 프레게는 말합니다.




 프레게는 논문에다가 이런 류의 삼각형을 넣어두었습니다. 각각의 빨간 선분을 a,b,c 라고 합시다. 각각의 선들이 교차하는 곳에 어떤 점 D가 있습니다. 프레게는 의미는 D라는 것을 다르게 서술하는 그러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D는 a,b의 교차점으로 서술될 수도 있고, b,c 혹은 a,c 혹은 a,b,c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만약 D가 무게중심이라면 A,B,C 좌표의 수치를 더하여 3으로 나누어 나온 점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프레게는 이럴 때 D에 대한 제시방식(mode of presentation)이 다르다고 합니다. 즉, 의미는 같은 대상을 달리 서술할 수 있습니다. a,b의 교차점이라고 말할 때 D에 대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삼각형의 중점이라고 말할 때 D에 대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다릅니다. 프레게 식으로 말하자면 표현들의 지시체는 같지만 표현의 의미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동일성 문제는 지시체가 가지는 서로 다른 측면(의미)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이 됩니다.


 지시체와 의미는 모두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관념이나 느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두 가지가 주관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일상대화가 무의미해집니다. 모두 공통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 엇나가며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일상대화는 분명 주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공통된, 동시에 객관적인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금천구청역'을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서로가 공유하지 않는 주관적인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천구청역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할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객관적인 무언가를 상정하며 말합니다. 따라서 지시체는 객관적입니다. 의미 역시 똑같습니다. 만약 "1+1=2"이라는 표현을 말할 때 우리가 공통적으로 전달하고자 바가 없다면, 수학적 체계는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무의미할 것입니다. "1+1=2"이 표현하는 바가 객관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이를 인지하고 같은 수식을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는 객관적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문장의 지시체는 진리치(T/F)이다


 의미와 지시체라는 개념의 도입과 함께 프레게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의미는 문장에 나타난 각각의 요소들의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문장의 지시체는 문장에 나타나는 각각의 지시체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이는 프레게 이후 분석철학자들이 수용하는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의미의 경우 우리가 그 문장이 전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지만, 문장의 지시체의 경우 그것이 직관적으로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도 "이석기는 RO의 수장이다."라는 문장에서 "이석기"의 표현이 지시하는 지시체와 "RO의 수장"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지시체는 같지만, 문장 전체의 지시체가 어떤 것인지는 알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문장의 지시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두 가지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1. 지시체 = 명제 2. 지시체가 없음


 1부터 살펴봅시다. 프레게는 우선 지시체가 명제라고 가정해보자고 합니다. "1+1=2"라는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2 대신에 4/2를 집어넣읍시다. 2와 4/2의 지시체는 같습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요소들에 의미는 다르지만 같은 지시체를 넣으면 문장 전체의 지시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문장 전체가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면, 그 대상은 문장이 서술하는 어떤 방식에 의한 것일텐데, 그 대상은 우리가 문장의 지시체들에 의해 뭔가를 판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장에 뭔가 지시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1+1=2와 1+1=4/2가 가지는 지시체가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프레게에 따르면). 만약 이 생각을 따른다면, 지시체가 명제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두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2는 자연수 2에 대해서 말하고, 후자의 4/2는 4를 2로 나눈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다릅니다(하지만 2와 4/2의 지시체는 같습니다). 문장의 지시체가 요소들의 지시체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는 지시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기각되어야 합니다. 프레게는 대신 명제는 문장의 지시체가 아니라 의미라고 합니다.


 프레게는 지시체가 없다고 또한 가정해보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1+1=2"라는 문장이 주어졌을 때, 서술되는 양항의 지시체를 생각하는 것은 뭔가 문장의 지시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문장의 지시체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서술되는 대상들의 지시체를 파악하려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문장의 지시체가 없다면, 우리가 단어들의 지시체를 찾는 것은 헛짓거리이고, 따라서 이 가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프레게는 놀랍게도 프래그머티즘의 사고로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문장의 지시체는 True라는 대상이거나 False라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것이 지시체인가에 대해서 그는 우리가 어떤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파악하려고 할 때 문장의 구성요소의 지시체를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단어들의 지시체를 파악하려는 그 습관이 설명이 된다면, 참/거짓이 지시체가 아닐 이유가 뭐냐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무슨 개소리인가"할 수도 있지만, 이는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로 꽤나 흥미로운 논증입니다. 여튼, 프레게는 우리가 "1+1=2"에서 각각의 지시체를 찾는 것은 전체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프레게는 T/F라는 지시체는 고정적이며, 문장 안에 있는 표현들을 다른 의미이지만 같은 지시체를 갖는 표현으로 대치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지시체는 같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논증은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습니다.


 흥미로운 결과들 : 지시체가 없는 선언적인 표현들


 프레게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지시체가 없는 선언적인 표현들도 있다고 합니다. 가령 "가장 빠르게 0으로 수렴하는 수열은 특정한 유한한 열 k뒤에 다른 수열들의 k번째 항보다 항상 작다"는 표현이 있다고 합시다. 프레게는 이 경우 이 표현의 지시체를 가릴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가장 빠르게 0으로 수렴하는 수열은 없기 때문입니다(0으로 수렴하는 임의의 수열에 1/n을 곱하면 제시된 수열보다 더 빨리 0으로 수렴). 즉, 프레게는 표현의 일부가 지시체를 결여하고 있다면, 표현 전체의 지시체를 논하는 것이 nonsense라고 합니다.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참/거짓을 논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게의 생각입니다.


 또한 프레게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문장이 아닌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양상표현 : It is necessary that ...

2. 마음에 관한 표현 : I believe that ..., I know that..., I hope that...,  


 위의 표현들은 선언적이지만 문장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that절 이하에 나오는 표현들에 대해 의미는 다르지만 지시체가 같은 표현을 대치했을 경우 표현이 다른 진리치를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봅시다.


3. It is necessary that 7<9.

4. I know that kant wrote the critique of pure reason.


 3, 4는 언뜻 보기에 모두 고정적인 참/거짓을 지닌 문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3에서 7대신에 the number of days of one whole weeks을 넣어봅시다. 7<9는 수학적으로 필연적인 문장이지만, 일주일의 날짜의 수<9는 필연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르게 정의할 가능성도 있고, 또한 지구의 위치나 여러 환경이 달라졌다면 일주일 날짜의 수가 7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즉, 7 대신에 다른 수를 집어넣는다면, 3의 문장의 진리치는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3과 같은 양상에 관한 표현들은 문장이 되지 못합니다.

 4도 똑같습니다. kant 대신에 the writer of groundwork of the metaphysic of morals라는 표현을 넣읍시다. I가 지칭하는 대상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것은 알지만,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저자가 순수이성비판을 썼는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단어의 지시체가 바뀌면 문장의 지시체가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에 관한 표현들도 문장에서 제외됩니다.




※쓰다가 빼먹은 게 있는데, 서로 다른 의미가 같은 지시체를 가질 수는 있지만, 서로 다른 지시체가 같은 의미를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의미가 주어지면 지시체는 자동적으로 결정되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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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게 됩니다. 분석철학의 기반은 언어철학, 논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있습니다. 언어철학을 전개하는데 있어 비전공자들이 가져야 할 예비사항에 대해서 이번 시간에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용과 언급(use and mention)


 어떤 발화를 할 때는 발화되는 언어적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도, 혹은 그 표현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철학적으로 표현이 '사용'된다고 하고, 후자의 경우 표현이 '언급'된다고 합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언급할 때는 따옴표를 사용합니다. 사용과 언급은 직접 사례를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래의 표현들을 살펴봅시다.


 1.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이다.

 2.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이다.

 3. 순수이성비판은 한글로 쓰였다.

 4. "순수이성비판"은 한글로 쓰였다

 5. "유루유리"는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다.

 6. 1+1=2 는 참이다.

 7. "1+1=2"는 참이다.

 8. "1+1=2"는 분석적이다. 

 9. 1+1=2는 분석적이다.

 10. 1은 숫자이다.

 11. "1"은 아라비아 숫자이다.


 1의 경우 "박근혜"라는 표현은 언어가 표현하는 대상을 직접 지시하고 있습니다. 즉, 현실의 박근혜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의 경우 나타난 ""박근혜""라는 표현은 사람이 아닌 따옴표 안에 있는 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 경우 비문이 됩니다. 3의 경우에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표현은 칸트가 독일어로 쓴 철학책을 직접 말로써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글로 쓰였다"가 아니라 "독일어로 쓰였다"라고 해주어야 맞습니다. 4는 따옴표 안의 말이 한글로 쓰였기 때문에 맞는 문장입니다. 비슷한 논지로 5도 비문입니다. 유루유리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유루유리"는 한글자모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철학적으로 좀더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부터입니다. 6의 경우 실제로 수학적인 명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1+1=2"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7은 비문입니다. 7의 ""1+1=2""은 글자로 이루어진 표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수학적 명제를 표현하지 않으므로 문장에 불과하며, 7은 비문입니다.

 8의 경우 칸트의 분석명제/종합명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칸트의 분석명제는 주어 안에 술어가 포함되는 '표현'입니다. 8은 문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이는 문법적으로 타당한 문장입니다. 물론 칸트에 있어 수학적 문장들은 종합적이므로(즉, 주어에 술어가 포함되지 않음) 이는 진리치에 있어 F를 배당받습니다. 9에 나타난 "1+1=2"라는 표현은 수학적 명제를 직접 사용하고 있으므로 비문입니다. 수학적 명제는 추상적인 것으로 어떤 문법구조를 지니지 않습니다.

 10도 비문입니다. 10에 나타난 "1"이란 표현은 숫자가 아니라 수학적 대상에 다루고 있습니다. 수는 추상적인 대상인 반면에, 숫자는 수를 표현하는 언어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1"은 숫자이다."나 "1은 수이다."라고 문장을 고치는 것이 문법적으로 타당합니다. 11은 문법적으로 옳습니다.


 혹시 사용과 언급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셨다면, 제가 위의 문단들에서 왜 따옴표를 어떤 것에는 하나를 쓰고, 어떤 것에는 두 개를 썼는지를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튼 정리하자면, 사용은 표현에서 사용되는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며, 언급은 표현하는 바로 그 표현과 언어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명제, 문장, 진술(proposition, sentence, statement)


 철학적으로 문장이란 'sentence is declarative grammatically right expression whose thought is true or false'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장이란 무언가에 대해 선언적으로 말하는 문법적으로 옳은 표현이자 참 혹은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생각의 담지자입니다. 즉 "음식"는 사전에 있고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지만, 어떤 생각을 표현하지도 않고 참이나 거짓을 말할 수도 없기에 문장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타당하며 이 문장이 사용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철학적으로는 문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윤리학적인 표현들은 참이나 거짓을 담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우선 논리학적 전통 하에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합니다). 비슷한 식으로 기호나 취향과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담는 표현들은 문장이 되지 못합니다. 문장으로 나열될 수 있는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2. 1+1=2

3. 일차논리에서 참인 문장들은 모두 증명가능한 문장들이다.


1-3은 모두 문법적으로 타당한 표현입니다(2의 경우 수학적 문법). 또한 표현의 내용들이 주관적인 판단이나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참/거짓이 나뉘기 않고 참/거짓이 객관적으로 나뉘기 때문에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장들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는 문장이 표현하는 어떤 생각을 명제(pro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의 머리에 있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들의 결합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문장은 명제를 표현하며, 명제는 문장을 통해 파악됩니다. 명제는 어떤 주관적인 판단이나 취향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추상성을 지닙니다(그것이 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전통에서 명제를 이해합니다).


 문장과 명제의 관계에서, 다른 문장들은 같은 명제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4. It rains.

5. 눈이 내린다.

6. 雪が降る。


 4-6은 모두 다른 언어에서 쓰였고 다른 문장이지만, 그것들이 표현하는 바, 문장이 담고 있는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4-6는 같은 명제를 표현합니다. 다른 문장들을 봅시다.


7. 나는 한국인이다


 이 문장은 발화자에 따라 옳은 문장일 수도, 틀린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발화자에 따라 다른 명제를 표현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철학에서는 '진술(statemen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문장을 state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문장이 다른 명제를 표현하게 됩니다. 가령 제가 7을 발화했을 경우, 특정 시공간에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저라는 인물이 말하는 진술하는 문장이고, 이 경우 참인 문장이 됩니다. 만약 제가 아닌 다른 한국인이 이 문장을 진술했다면 이 역시 참인 문장이지만, 서로 표현하는 내용은 다를 것이고 따라서 다른 명제를 표현하게 됩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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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교,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여러분, 영에 총맞을 준비가 되셨나요? 여러분은 제가 쓰려는 글이 여러분이 배운 바와 같이 방사능보다 천배, 만배 해로운 총이라고 배웠지만, 사실 이 총은 사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총이며, 여러분을 옳은 길로 인도할 성스러운 총입니다. 여러분이 의심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에게 "나를 만져보라(눅24:38-39)"며 믿음의 증거를 주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의심이 드신다면, 여러분이 가진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제 글을 읽고 직접 판단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네이버 카페에 신천지 글을 올렸을 때 신천지 분들께서 광속으로 신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티스토리 블로그에 관련 글을 작년에 올렸다가 하나님의 교회 성도분이 티스토리에 신고하셔서 글이 날라간 기억도 있네요. 네이버 블로그는 잘 모르는데, 이글도 신고당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저는 JMS에 잠시 있었던 사람이고, 최근엔 신천지에게 넘어갈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분들은 집까지 찾아오셔서 '크리스챤 신문'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시더군요.. 여호와의 증인은 요즘은 검은 양복 남녀 두분이 팜플렛 걸어놓고 관심있는 분들께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JMS를 다녔었기 때문에 JMS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고, 신천지에 대해서는 최근에 엮이면서 약간 알게 되었습니다만,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다만, 이들의 행각으로 봐서는 결코 '예수'를 믿는다고 볼 수도 없고, 대충 아는 교리로도 이들이 기존의 기독교와는 엮일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들이 기독교계 '이단'이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시작하며, 이들이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성경을 곡해하는지를 대략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접근방법


A. 소속과 목적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설문조사


 이들은 대개 길가는 사람을 잡아서 '심리학' 설문조사를 한다며, 시간을 잠깐 내주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심리학 설문조사를 미끼로 이야기는 모두 성경공부로 귀결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실제로 심리학 설문조사를 실시하며, 그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혹시 이러이러한 심리학 센터가 있는데, 이쪽에 '멘토'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요. 이쪽으로 연구를 하기도 하니, 혹시 관심있으시면 참가해보실래요?"라고 접근합니다. 이는 제가 직접 당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설문조사, 특히 대학원생들이 하는 설문조사의 원칙은 미리 자신의 소속(소속된 대학과 구체적인 전공)을 밝혀야만 합니다. 또한 자신의 '구체적인' 연구목적이 무엇이며, 이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밝혀주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을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기독교계 이단일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나 의문이 가신다면, 제대로 된 소속은 어디이며, 지도교수는 누구인지, 자격증시험이라면 어떤 자격증에서 이러한 것이 필요한지 제대로 물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대개 심리학 연구조사는 대학 자체에서 학부생들에게 공지를 띄워서 돈을 주고 대학원생이 연구하는 경우가 많으니 밖에서 MBTI나 애니어그램 등을 미끼로 말을 거신다면 우선은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이 심리학 조사를 미끼로 하고자하는 것은 '센터(복음방)'라는 곳에 데려가서 그들의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입니

다. 평범한 교계, 교단에서는 결코 교회, 검증된 기독교 단체 외(IVF, CCC 등등)에서의 성경공부를 권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나와볼래?"라고 접근하지, 결코 "성경공부해볼래?"라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를 밖에서 권하는 것은 그들의 교회에서 그것들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고(이단임이 들통나기에), 교회에서는 이를 결코 권하지 않습니다.


B. 신분을 위장한 도움 구하기


 동아리 후배가 신천지에 걸렸던 방법입니다. 후배는 자신을 '웹툰작가(지망생)'이라고 소개한 분에게 걸렸습니다. 그분은 웹툰소재로 쓰는데 참고가 될 수 있냐고 물었고, 그를 통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만 차리면 잘 될 것 같죠? 신천지를 그렇게 얕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결코 '혼자서' 일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신천지와는 무관하게 위장한 사람이 있어서, 자신을 신천지로 몰고 갑니다. 아무래도 의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독립적인 사람에게서 "이거 해도 좋을 것 같지 않아"라고 들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천지는 결코 혼자서 하지 않고, 옆에서 다른 사람과 모르는 척까지 해가면서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접근을 합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센터방에 같이 가셔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센터방 가기 전에 말씀을 잠깐 듣게 되었는데, 옆에서 여러분과 비슷하게 오신 분이 있는 것 같다면, 그분은 100% 신천지입니다. 당신이 신천지에 잘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분이죠. 성경공부를 하게 되시면, 대개 같이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강의를 유의깊게 들으면 아시겠지만, 그 강의는 옆사람이 아닌 여러분에 초점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옆의 분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않고, 저에게 집중해서 공격을 가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하는 식이었습니다. 강의 중간에도 시선이나 초점이 저에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된다면 100% 신천지이니 아에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C. 재능기부단체, 문화예술단체에서 주관하는 강의들


 실제로 재능기부하고 순수하게 문화예술을 싼 값에 제공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제 지인의 어머니께서도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드려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제 친구가 이쪽 사례로 JMS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노래강좌를 단체로 해서 약간 싸게 하는 곳이었는데요, 안타깝게도 JMS였습니다. 제 친구는 기존의 개신교도였는데, 노래를 가르치던 강사분은 수강생들에게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에 관한 여러 조언과 상담을 하면서 이 친구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강의가 끝날 즈음에 이 친구에게 신앙이 좀더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성경공부를 권하였습니다. 이들은 수개월간의 유대와 신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그분도 스스로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교회밖에서 강의를 듣는 것이었고, 알고보니 JMS였습니다.


 제가 JMS에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JMS에서는 문화선교라는 목적으로 지역사회단체에서 주관하는 여러 강의를 출강합니다. 무용부터 노래, 악기 등등 분야는 정말 다양합니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 값싸게 해준다든가, 강의를 수강하는 조건이 성경공부 몇회를 그냥 듣는다든가, 아니면 성경공부를 같이 하면 좋겠다든가, 이야기가 교회나 자신의 신앙에 대한 상담 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들의 결론은 기승전 '성경공부'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신뢰를 얻어서 성경공부에 같이 참여하자고 한다면, 제가 단언컨대 이들은 기독교계 이단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정상적인 교계에서는 교회나 기독교 단체 밖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숨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작전을 짜서 이단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D. 신앙상담


 제가 JMS에 빠진 계기였습니다. 저는 당시 새신자로 교회를 출석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만, 신앙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 상담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이야기하기 편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친구는 교회를 옮기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교회에 한번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해서, 저는 친구를 믿고 그쪽 교회에 갔습니다. 그쪽에서 한번 '강의'를 듣고나니 "아! 참 진리가 여기에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교회에서 속시원히 긁어주지 않는 부분을 긁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튼,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결코 '강의'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도사님이나 강도사님, 목사님께 이야기를 상담을 하는 정도이지, JMS처럼 체계적으로 가령 1강부터 30강까지 매일 몇 시간씩 들어야하는 커리큘럼이 있지 않습니다(교회에서 이런 부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새신자 커리큘럼이 있어서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전도사님이나 교회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만, JMS에서는 대개 1-1강의가 이루어집니다. 여러 명이 있을 경우 의심도 많아지고, 질문도 많아지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까닭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어떻게든 '성경공부'를 하게 만드려고 합니다. 신천지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신천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여서 꾐에 넘어가게 만드는 수도 있고(제가 당했죠^^), 신뢰관계를 만들어서 의심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접근방법은 다양합니다만, 결국은 정상적인 교회나 기독교단체가 아닌 카페나 복음방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합니다. 결코 어떤 교단도, 어떤 교회도 '성경공부'를 빌미로 신자를 만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한 번 와볼래?"나 "나 CCC하는데 우리 예배에 한 번 와볼래"가 아닌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는 것은 기독교계 이단이나 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교묘하게도 기존의 교회 자리를 사서 이름도 안 바꾸고,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패를 걸어두기도 합니다(제가 있었던 JMS는 침례교 명패를 달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외관은 충분히 여러분을 속이기에 적합하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2. '성경공부'의 특징과 반박


 이단들은 놀라울 정도로 교리가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한국의 이단은 일제강점기 즈음에 모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통일교부터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은 대개 비슷한 것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들이 채택하는 비유풀이 같은 것들은 이미 이들 이전에 17-18세기에 계몽주의가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자유주의적인 해석이 이미 세계에 나돌고 있었고, 이들이 독특하다고하는 것도 대부분 기독교의 긴 역사속에서 어떤 이단들이 주장했던 것들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메시아를 자청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니까요. 제가 언급할 부분들은 대개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부분입니다.


A. 선한 거짓말과 악한 거짓말


 이 부분은 JMS나 신천지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잘 모르지만, 비슷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은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부모님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고, 다니는 교회에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두 구절을 언급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롬3:7)"


 자신들의 말씀은 천국의 말씀이기에, 일단 다 들어보기 전에는 여러 가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오히려 말씀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합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3장 44절의 천국의 비유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교단의 목회자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들은 선한 거짓말도 있다면서 로마서 3장 7절의 말씀을 끌고 옵니다. 가족들에게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든가, 교단의 목회자에게 최근 일이 있어서 못가게 되었다든가의 거짓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은 여러분이 이단의 교육자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수없이 사용할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선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신뢰관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단체로 끌고 오기 위해서 어떤 거짓말을 해도 됩니다. 그 거짓말에는 자신이 신천지가 아니라는 거짓말도 포함되고, 자신이 장로교 신자라는 거짓말도 포함됩니다. 모두가 여러분을 그곳으로 이끌기 위한 '선한 거짓말'이니까요. 그러나 위 구절은 저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은 반드시 문맥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의미가 곡해될 여지가 큽니다.


 로마서 3장 7절의 바로 뒷구절인 8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3:8)"

이 구절은 거짓말하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선을 높이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그런 일들을 하면, 결국은 선을 위해서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은 정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거짓말을 조장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시편 101편 7절에는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고 말하고 있고, 5편 6절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의 양심과 신앙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12사도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수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거짓말을 해도 좋았다면, 이들은 응당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숨을 버려가며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B. 개역개정, 개역한글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


 JMS는 개역개정이든 개역한글이든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신천지는 개역한글만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개역개정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개역개정에 800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여 개역한글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고 가르칩니다. 그 근거는 아래의 기사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2256569&sid1=001

 

 그러나 이들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기사에 적힌 부분에는 표현상의 차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부정한 여인'이나 '부정한 창녀'나, '방성대곡'이나 '소리 내어 울어'나 의미론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뉘앙스의 문제일 뿐이지,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해, 예수에 대해 왜곡하여 없는 구절을 만들어 내거나, 있는 구절을 없애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은 현재 4판으로 표현이 부족하거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지속적으로 수정해나가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개역한글 시대에 비해서 바뀐 한글 문법체계에 맞게, 또한 기존의 성경의 뉘앙스를 침해하지 않도록 만든 권위있는 성경입니다. 위키 백과에는 개역개정에 대해 "개역한글판에서 난해한 한자어나 한국어 문법에 맞지 않은 번역, 한글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 명확하지 않은 뜻을 수정하여, 개역한글판보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천지가 그렇게 개역한글을 따지는 것은, 그들의 교리가 현대어로 풀이되면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JMS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쓰는 성경만이 일획 일점 틀리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성경은 '번역'으로 만들어지고, 번역의 특성상 어떤 번역본도 원어를 100%맞게 번역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뉘앙스의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어느 성경을 보아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여러 성경을 보면서 비교하며 읽는 것이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히브리어, 헬라어 원본을 기준으로 현대어에 맞게 번역한 '새번역'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개역개정과 새번역을 동시에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실제로 새번역으로 위의 로마서 3:7-8절을 본다면, 의미는 더욱 분명합니다.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롬3:7, 새번역)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행하자"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롬3:8, 새번역)


새번역으로 보면 애매모호함이 없죠?


C. 성경은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예, 성경을 문자적으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냐로 보면, 자유주의적 색채로 비유를 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비유로 보아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기독교계 이단이 말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이단들이 공통적으로 내거는 구절은 마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세 가지 번역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마13:34,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마:13,34 새번역)"


"Jesus spoke all these things to the crowd in parables; he did not say anything to them without using a parable(Matthhew13:34, NIV)"


 예,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무리들에게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비유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기독교계 이단은 개역개정(혹은 개역한글)을 기준으로 위 구절의 뒷 부분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 번역본을 보면, 예수가 '모든 무리'에게 비유를 사용했다고 나오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무리에게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만약 예수가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만 말했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니라 하시니라(막10:33-34)"


 만약 성경이 비유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인간이 상식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니 육체로는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되살아났다고, 그것이 '부활', 즉 '영적 부활'이라고 주장할겁니까?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마14:17-20)"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이는 사람들이 말씀을 많이 듣고, 말씀이 많이 들었고 말씀이 끝나고 남은 무리들이 12명의 사도(12바구니)라고 주장할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성경을 비유로만 보는 것은 성경의 모든 기적을 거짓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을 천천히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예수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고, 육체로 부활을 했다고 합니다.


 JMS가 부정하는 육체 부활은 다음과 같이 증명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심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7-28)"

도마는 예수가 육체로 부활했다는 것을 당시에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가 창에 찔린 자국을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육체에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래 구절이 가장 치명적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영은 살과 뼈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육체'로 부활했기 때문에 살과 뼈가 있습니다. 성경을 비유로만 보면 육체 부활이 아닌 영적 부활을 지지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가 비유를 말할 때 "마치 ~와 같으니라"와 같은 문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비유와 비유가 아님을 구별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치명적으로, 예수는 제자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비유를 직접 풀어주었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마16:5-7)"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1-12)"

예, 예수님은 의문이 있으면 비유를 그 자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이를 본다면 이단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이 봉하여져 있고, 성경은 비유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리들은 이를 결코 알 수 없다든가하지 않습니다. 제발 성경을 천천히 제대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D. 죽음과 부활


 JMS는 자유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의 육체 부활을 부정합니다. 예수는 영적으로만 부활했지, 예수의 육신이 부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는 스스로 육체로 부활했음을 주장했고,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말합니다. 초대 기독교는 실제로 '육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맥락에서 '부활'이란 몸이 죽고 저 세계에서 영이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런 맥락 하에서, 예수 역시 그런 맥락 하에서 '부활'을 말했으니, 영적 부활론은 가능성이 배제됩니다.


 신천지는 어떨까요? 이만희는 이긴 자(뭘 이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일까요? 이만희는 정말로 '육체'가 영생하고, 이만희를 믿는 자들은 죽지 않는 것일까요? 성경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예,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반드시 인간은 '한번'은 죽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지만, 생명나무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3:22-23)"


 이만희든 하나님의 교회 전 교주든 현 교주든, 그들을 믿는 사람들이든 모두 반드시 죽습니다. 적어도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3.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는가(필독)


 성경에서는 2000년전에 이미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과 같은 존재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대처법 또한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24:23-26)"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여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예.. 여러분의 지인이 빠져 있거나, 여러분이 빠져 있거나 빠질 가능성이 있는 곳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가지 말라고 하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만희, 정명석, 안상홍을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 시대에 맞는 예언자? 메시아? 시대의 구원자? 말씀을 푼 자? 이긴 자? 결국 다 법정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발언했다는 것을 피하기 위한 편법입니다. 다 똑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씀으로는 부족하다구요? 그렇다면 아래 구절들을 봅시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5)"


 예..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신천지, JMS의 정명석, 안상홍이 내려올 때 우리 모두가 그를 봤습니까? 아직 중간단계라 14만 4천명이 꽉 차거나, 때가 꽉 차야 마지막날, 완전한 재림이 온다구요?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어떠합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딱 JMS,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의 교회들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기독교계 이단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예수님의 명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때를 알고 있으며,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하였더라(행4:12)"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

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마라(눅21:8)"


 예. 그때는 예수님도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만 아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통일교 등의 무리들은 예수를 부인한 자들이며, 2000년전에 오신 예수님이 아닌 그들의 교주에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주장하면 이단임이 들통나기 때문에, 예수의 영이 자신에게 씌였다든가 예수님의 사역이 불완전한 것이라든가(요19:30에서는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직통계시를 받는다든가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10:35)"을 꺼내듭니다. 이말은 곧 예수(성자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는 그들이 재림 예수 곧, 성자 하나님이자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두 자신이 예수이고, 시대의 선지자이고, 시대의 선생이고, 하나님이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제가 반박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성경에서 결코 이런 이름들을 언급하신 적이 없고, 그런 자들이 있으면 따라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4. 제언(提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 다른 이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이성(reason)'이라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능력을 하나님께 받은 이상,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디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직접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면 좋겠습니다.


 기독교계 이단은 결코 명확한 자료를 제시하거나, 명확한 논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누구에 따르면 그렇다더라"라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더라" "(구절을 정확히 문맥에 의해 제시하지 않고)성경에 이렇게 쓰여있더라"라거나 하는 식입니다. 신천지 경험이 있으신분은 개역한글을 써야하는 주장을 계속 들었겠지만, 그들은 결코 개역한글을 주장했던 그분께서 무엇을 말했는지 정확히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은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선동하여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바른 판단은 스스로 모든 걸 찾아보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 그리고 중간의 입장을 모두 보고 판단한 다음에 세워도 늦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구절들을 직접 찾아보고 잘 생각해보세요 과연 그런 해석만이 존재할 수 있는지요.


 무엇보다도, 성경에 쓰여진 예수님은 결코 이단 같은 행보를 띠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겪은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는 어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막12:30-31)이 성경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있으신 곳은 전도만 외쳤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배운 기억이 있나요? 혹시 그 이웃을 '예수'님이라고만 하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라고 안 배우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그곳에서 '기성교회'라고 부르며 증오하고, '장로교'를 세계 최대의 마귀집단, 이단이라고 부를 때, 성경에서는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10)"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또한 신천지에서 부모를 대적하고, 이단상담소에 데려가면 더 이상 가족도 아니라고, 마귀라고 하는 그것들에 대해 예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마19:19)"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자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엡6:1).


 여러분, 예수님이 전하는 사랑은 모든 것을 감내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온유한 것이고, 시기하지도 않는 것이며, 무례하지 않은 것이며, 화내지 않는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13:1-8). 여러분은 그렇게 배웠나요? 아니, 여러분 주위의 사람과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계신지요.





** 2019년 7월 6일 내용을 조금 첨가합니다.

1. 육체와 구름
 기독교계 이단에서는 자신들의 교주를 하나님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하나같이 구름을 육체로 해석합니다. 초림예수가 구름타고 왔는데, 문자적 의미에서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고 실제로는 육체를 입었으므로 '구름=육체'라고 주장합니다. 재림예수도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였으므로 재림예수 역시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다니엘 7장 13절 '내가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를 인용합니다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다니엘 7장 특히 9-14절을 보면 13절에서 말하는 상황이 종말/심판의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3절은 초림예수와는 무관한 구절입니다. 또한 상황이 성자가 성부에게 인도되는 상황인데, 초림예수는 적어도 육체로 한정하자면 성부를 떠나 인간세계로 왔으므로 이 구절로부터 초림예수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말을 이끌어낼 수도 없을 뿐더러 구름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더 정확한 내용으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다니엘 7장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으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계시록의 이긴자

 개역개정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전혀 쓰지 않는 한자들과 어휘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의외로 해석하기 편하실 겁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긴자' 구절들은 문맥상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긴자가 나오는 부분들은 일곱교회의 문제들에 말하고 있고, 이 교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긴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초반부를 꼭 자세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좀더 정확한 글로는 https://researchheresy.com/column/2344  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신천지에 대한 정확한 여러 교리적 문제들은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List.html 에서 '신천지 포교전략과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평'을 검색하시면 이덕술 목사님의 여러 글이 뜹니다. 처음부터 읽어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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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

나.

일상 2015. 9. 6. 03:27



페북에 올린 글입니다.


1. 교회에 형제님께서 family chords를 알려달라길래, 순간 난감했다. 왜냐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모르겠고, 나는 영어는 잘 듣고 잘 읽어도 말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와서 3시간 정도 노트에 10페이지 정도로 family chords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설명을 붙였다. 내일 드려야지! 근데 음악은 귀납적으로 가르칠 때 이해하기 편한데, 너무 연역적으로만 설명한 것 같음..


2. 수련회 때 선물받은 <아버지 빈자리>가 은근히 내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수업 에세이 도서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최근 읽었는데, 같이 생각해보면 참 놀랍다. 과거에 나는 자기성찰도 했지만 그 방향은 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이거나 주로 타자였다. 그러나 최근 위의 책을 포함한 일련의 도서들은 시선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저렇게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고 깊은 자기성찰을 하는 저서들은 쉽게 쓰여져도 진짜 넘사벽이다. '와.. 어떻게 이 정도까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거지??'하는 감탄사를 계속했다..


3. 최근은 스스로에게 무한히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니체가 그러지 않았던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혹시 네이버 수요웹툰 닥터 프로스트 보시는 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프로스트가 나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하고 성찰을 계속하다보니, 내가 이런 감정들과 이런 존재였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페북에 이런 말들을 써도 되련지 모르겠지만, 최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분노를 겪고, 증오도 일어난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이게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예전에는 아니었던 수많은 나들이 보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루에 수십번이라도 고문해서 반xx를 만들어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오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특정인일 수도 있고, 불특정다수일 수도 있고, 대상은 다양하다(스스로를 포함). 요즘 이것 때문에 고민이다. 참는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없는걸로 여긴다고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지금까지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막아놨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상당히 자기기만적이고 무뎌진 상태였다. 왜냐고? 과거엔 이런게 인생에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누군가를 격렬히 쳐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면서 살아가는걸까. 아, 그러나 걱정은 마시길.. 저는 상당히 스스로를 잘 통제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티내지 않습니다. 이 모든건 제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5. 욕망. 나는 삶에서는 칸트주의를 지향하고,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편이다. 왜냐면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내 욕망을 따르는 것은 공리주의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성찰은 "야 정말?"이라는 의문을 불러온다. 도대체 인간에게 욕망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특히 기독교 내부에서 이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걸까. 내가 이해하는 바에서는 성경은 예수의 오심과 부활을 통해 육체의 긍정을 하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상당히 금욕주의적인 구절들이 많다. 당장 잠언만 봐도 모든 구절이 그렇다. 바울 같은 경우는 "임마, 육적인 것은 다 버려."라고 하고, 야고보는 "임마 욕하지마. 하나님께서 다 똑같이 만드셨는데 어찌 그 입으로 저주를 할 수가 있냐?"라고 했다. '건강한 분노' 같은 담론들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성경에서의 대다수의 구절은 분명히 '분노하지말라'고 말하고 있다.


6. 물론 이는 성화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내 문제일터이다. 또한 율법주의적으로 삶을 생각하고, 성경을 대하는 내 태도 때문일터이다. 여튼 요즘은 이것 때문에 괴롭다. 욕망에 솔직하면, 진짜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에게 할 수 없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도 많이 들기 때문에 괴롭다. 성경에서는 욕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문자적으로 그를 대해서, 욕도 안하고(난 아에 일상에서 욕이 차지하는 비율이 0에 가깝다)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 끝없는 분노와 여러 욕망들의 근원을 찾아보고 있는데, 몇가지 개인적인 시원도 보이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사탄(그게 뭐든간에)의 꾀임에 넘어가기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안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고통도, 분노도, 두려움도, 가난함도 모두 끌어 안고 성부께 드렸다. 근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내가 비용서의 모든 것들을 끌어안는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나의 이 끝없는 욕망들을 가져갈 것인가.. 난 아직 신뢰가 부족하다(나는 유물론적 사고관에 익숙하고 아직도 이를 가지고 세계를 쳐다본다).


7.
"주님 저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만큼은 죽음을 불사하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결단코 말하는데,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야, 너 예수랑 같이 다니는 거 우리가 봤어, 맞지?"
"나...나는 결코 그런 사람 몰라!"
"여러분, 이 사람이 갈릴리 예수랑 같이 있던 사람이에요!!"
"아니, 나는 아니라니까? 하나님께 맹세컨대 모른다고.."
"임마, 니 표정에서 예수무리라는 게 나타난다니까?"
"아..아니 모른다니까? 나사렛 예수같은 놈 나는 난 진짜로 모른다고!!!"
(닭이 운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난 딱 베드로 같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항상 베드로 부분에서 멈추게 된다. 위 구절은 내 인상에 강렬히 박혀있다. 개인적으로 통곡하며 도망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성경에서 내가 가장 슬퍼지는 부분이다. 베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고 해야하나 여튼..


 사실 나는 엄청난 겁쟁이라 베드로가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겁쟁이고, 정말 두렵다.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내 선택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러가지로 돌로 쳐맞아가면서 개독개독들으면서 사는 것도 싫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도 많은게 두렵다.


 나는 진짜 사람을 어떻게 잘 고문해서 죽여야할지 수없이 상상해봤고, 심지어 "오 이거 진짜 참신하다"라고 생각할만큼, 별 미친 생각까지 해봤지만(사실 이는 인생사에서 형성된 부당한 권위로부터의 폭력에서 저항할 수 없었기에 망상을 하는 요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나에게는 두려움이 많다.

나는 단언컨대, 나는 내가 온/오프라인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 겁쟁이다. 이에 인생사적 분석은 말하지는 않겠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원인을 찾는 것에 익숙해서 "왜"라고 묻게 되지만, 이는 나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당시의 기억을 강제로 불러오게하기에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고 싶지도 않고, 듣는사람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여튼, 나는 진짜 겁이 많다. (여기까지 읽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글을 읽는 그 누구보다 그렇다고 감히 자부한다.

 

 ivf에 있으면서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서 니체이상의 극심한 분노와 증오, 혐오, 불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된다ㅡ오해하지 말라. '인간'이라고 함은 스스로를 포함하는 것이다ㅡ. 역설적이게도, 나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강한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내 목숨과 타인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중적인 존재다(젠장). 이 이중성은 최근 나를 괴롭게하는 중요한 요소다. 또 다른 이중적 요소가 두려움이다.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갈망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느것이 먼저인지 혹은 동시다발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려움과 갈망을 동시에 놓는 것에 대해서는 심리적 거부감이 없지만,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놓는 것은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떻게 나는 인간에게 분노와 동시에 두려움을 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참 인간이 두렵다. 나는 그 누구든 사람이랑은 친해지기가 참 어렵다. 나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이고 소외적인 존재다.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존재이며, 소외되는 존재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존재다.


 난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심히 두렵다ㅡ내가 원하는 방식이란 나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이면서 철학적인 담론을 할 수 있는자ㅡ. 집단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난 참 두려워진다. 모든 게. 그냥 거기서 베드로처럼 도망가버리고 싶다. 없어져 버리고 싶다. 나는 한마디도 걸 수 없으며, 노력한다한들 무한히 실패할 뿐이다. 그리고 집으로 도망가면서 "아.. 어째서 나는 오늘도 실패했는가.. 다음에는 꼭.."이라고 되뇌인다. 누군가는 해보면 될 것을 왜이리 병신같냐고 물을 수 있다. 실제로도 지금은 인연을 끊은 누군가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고. 나는 논문은 없지만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웃기게도 거의 본능적으로 나는 그런 대화의 구조를 성찰하게 되기도 했다. 여튼, 나는 그런 인물이다.


 분노와 함께 두려움은 내 인생을 지배하는 큰 요소다. 혼자 인맥도 학연도 지연도 없이 돈도 안되는 철학 수학 물리학 이런거나 공부하다가 시간강사하다가 굶어죽을 내 인생도 참 두렵고, 망쳐버린 여러 관계들도 두렵고, 지금의 관계들도 참 두렵고, 다 두렵다.


 나는 이 두려움들의 심원이 내 기본적인 성품과 환경들에 상당히 깊게 연관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나는 결코 인생에서 두려움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없애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지(동시에 인정받고 싶어하는지)를 보았으나, 그는 평생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그늘 아래 있어야 했다. 나도 그럴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할 것은 아니다. 또 시도하고 좌절하면서,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ㅡ이런 인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당췌 이 인간이 왜이리 병신같은 짓거리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dna도 너무나 다르고 살아온 세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ㅡ.


 뭐 그래도 한줌의 빛이 있다면, 그건 단언컨대 예수일 것이다. 하도 기독교가 망해가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ivf공동체는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나를 유일하게 받아준 곳이었다(완전히는 아니지만)ㅡ유약한 니놈을 탓해라!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런 인간이니까ㅡ. 나는 아직도 단한명의 타인도 사랑할 수 없고, 너무나 두려워서 목매달아 죽어버리고 싶지만, 예수는 그나마 인생에서 죽지 않도록 끈을 잡아주는 통로인 것 같다.


 여튼, 최근의 고민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인생 내부의 깊은 두려움(과 좌절), 그리고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끝없는 분노와 두려움과 좌절이 동시에 올라왔다(최대한 자제하면서 글을 썼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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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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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새로 블로그를 열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imnt79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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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0 새로 수정을 가합니다. 티스토리 블로그는 보존용으로만 남겨둘 생각이기에 앞으로 관리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필요하신 사항이 있다면 메일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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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론

단상 2015. 8. 13. 21:48



 비트겐슈타인 후기 이론, 콰인~쿤의 전체론을 인간 개인의 삶에 대입해보면 꽤나 흥미로운 결론이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인간의 삶을 전체론적으로 이해하면 효과적으로 많은 걸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하나의 해석틀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무신론, 유신론과 같은 근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일상에서 변하는 판단들은 이렇게만은 설명되기가 어려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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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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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일상 2015. 8. 8. 16:42


 1년 3개월만에 비트겐슈타인 연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연재한다는 걸 까맣게 있고 있었네요;; 콰인까지 썼으니 딱 토마스 쿤까지만 쓰면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에서 언급할만한 과학철학은 끝날 것 같습니다.

 총 11개의 글로 비트겐슈타인의 글이 끝나게 되네요.. 분량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한명의 사상가를 이해하는데는 정말 많은 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정말 큰 빚을 졌습니다. 전기의 "침묵"을 듣고는 칸트를 곧장 떠올렸고, 그런 것들은 결국 학문보다는 현실의 삶과 믿음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이데거, 흄의 영향과 함께 후기 이론은 제게 관념론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현실에 눈을 두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비판했던 대로 저 역시 하나의 단어에 꽂혀서 그 단어에 뭔가 신비한 것이 있는마냥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주하는 사상가들 모두에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지만, 가끔씩 글을 쓰거나 사고를 하다보면 그들이 조금씩은 들어가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사상가였습니다. 저는 현재 제 생각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들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누군가 비트겐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제 글들을 읽으신다면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토마스 쿤까지 쓴 뒤에 어떤 글들을 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쓸 당시에는 플라톤부터 철학전반을 훑어볼까 했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분량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배운지 오래되고 구체적인 내용을 잊어버린지 오래된 철학자도 많기 때문에(가령 플라톤이라든가.. 이상하게 이데아를 주장했던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네요ㅋㅋㅋ 휴학하여 철학수업을 안들은지 1년이 넘었기 때문에 솔직히 많이 잊어먹었습니다..)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철학개론이나 이쪽 정보를 얻고 싶으시면 파깨비의 '철학노트'라는 책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생각해보니 지인께 철학전반을 간단하게 한번 훑어준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제 기억으로는 6시간인가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_=... 그 정도 분량이니 논리를 보충하여 글로 쓰려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긴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21살 여름에 저는 급격한 사상적 변화를 겪어서 상대주의자가 되었습니다만, 최근에 여러 계기가 생겨서 또 다른 사상의 전환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토마스 쿤이 끝나면 한동안은 그쪽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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