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리적 사건은 물리적 원인을 가진다"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리면서, 스스로에게 안심을 주거나, 자신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거나, 타인을 분석할 때 내가 항상 명심하고 있는 문장이다. 너무나 당연한 문장이니까 이 신비롭지도 않은 문장을 소개해서 뭐하나하겠지만, 나는 이 문장을 과학적 대상을 관찰하는 데만 놓지 않고,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물리적 사건이 원인을 가진다면 자연세계에 속한 나라는 인간이 어떤 반응을 했을 때, 반드시 거기에는 물리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생각하는 과학법칙들의 적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내 신체/의식이 인지하는 모든 반응과 행동들은 모두 과학법칙의 적용을 받고, 이것들은 우주가 있었을 때부터 그리 되어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법칙의 일관성을 인지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진 심리적 상태들과 나의 행동방식들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계는 그저 그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구성되어있었을 뿐이다.

 

 오랜기간 동안 나는 내 머리속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리적인 방어를 위해서 싸워야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미 지나갔지만, 뇌는 당시의 감각자료를 저장하고 특정 자극이 주어졌을 때 그 감각자료를 꺼내왔다. 내게는 내 눈앞에 그들은 없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렇게 인지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 내 앞에 있을 때 내 뇌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자료이고, 내 뇌에서 그 기억을 꺼내올 때 나타나는 것도 당시의 감각자료다ㅡ물론 정보의 손실은 발생한다ㅡ. 눈은 특정 자료를 선별해서 뇌로 보내기 위한 수용체에 불과하고, 실제로 보는 것은 뇌이니, 사실상 그들이 내 눈앞에 있든 없든간에 나는 동일한 것을 계속 보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눈앞에 있든 없든 그건 상관없다. 뇌는 모두 같은 감각자료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내 신체는 같은 방식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ptsd 환자들의 삶이 그렇게 끔찍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다. 그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같은 장면을 지속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냥 인간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타인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이 두렵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까봐 무섭고,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 인격적인 비하를 할 것이 무섭고,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볼 것이 무섭다. 내게는 타인으로부터의 모든 공격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고, 그것들에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나는 그것들에 대항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피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나는 심리적 안식처가 없었고, 내가 이게 필요하다고 인지했을 때는 이미 인간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에 원천적으로 누구를 감정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기에 심리적 안식처를 찾는 것이 불가했다.

 

 내 머리에서는 항상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같은 사람을 매도하는 말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고, 나는 그것들을 일일히 쳐낼 수 있는 감정적 능력이 없었다. 내 의식의 저편에서는 누군가가 내가 도망만 치고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약아빠진 놈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그러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용기도 없는 겁쟁이라고 한다.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가만 나두고 지켜보기만하고 방치하기만하는, 도태된, 아무 가치도 없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의지도 없는 놈. 그딴 식으로 사니까 계속 그렇게 되는거지라고 내 머리속에서 울려왔다. 매우 답답하고, 자기라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거고 이게 보통 사람들의 삶인데 너는 그렇지 못하니까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매도당해야 한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뭐든 받아먹기만하고 스스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인 놈이라는 소리가 내 신체에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울린다. 그 외에도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 매일 이 목소리를 들으며, 이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듣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도 긴장하고 살아왔다. 머리에서 나는 아니야 라고 온갖 이유를 찾아보고 말을 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그 상황에 매몰되었다.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나를 질린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초점을 일부러 흐리게 하고 걷거나, 땅을 보거나, 45도 정도 시선을 아래로 하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상대방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이야기하면 온갖 공포와 긴장 불안 등등으로 인해 뇌가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의식이 없는 시간이 가장 편했다. 눈을 뜨고 사고를 하다보면 그들이 나타나니까. 물론 아직도 그런 일들이 많다. 눈앞에 없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앞에서 대답했다고 말하겠다. 기억에서 감각자료가 주어지든, 오감을 통해서 주어지든, 뇌에게는 모두 동일한 감각자료이니 다르게 처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적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의식 속에서 하나하나 여러 정보처리를 해야하는 것이 보통 여러 이유로 매우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여러 과정은 백그라운드에서 처리하고 의식에서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큰 사건들만 의식으로 올려보내면 된다. 이런 영역은 내 의식이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고, 그런 영역에 의식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개인사적인 정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가 필요하고, 방화벽인 심리적 기제를 강제로 꺼야 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내게 없는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나는 내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학게 되었다. 인식에 관한 모든 것에 관한 내 철학적인 관점은 물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내가 사고할 때 가장 기반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에, 상담을 받고, 성찰해보고, 비교적 여러 가지를 하면서 나는 나의 삶에 이것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게 내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이었고,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로 인해 여러 철학적 생각들이 바뀌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서론이 길다. 이것은 내 성격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습관이다. 머리에 있는 것들은 적어도 내 의식 안에서는 모두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찝찝함을 풀기 위해서 서론이 길어지는 습관이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세상엔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자연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그저 스스로 그러한채 흘러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의지조차 자연의 일부이고 이것조차 자연의 흐르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 미리 주어져있는 법칙, 물리법칙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물리법칙이 일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는 내 의식 속에서 증명할 수 없지만, 내 삶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나는 모든 것이 그저 그러하게 흘러간다는 것, 따라서 이상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신체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활성화되어있는 이상, 내가 손을 베인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래야 하고, 그런 것이다. 이를 심리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겠다. 왜냐면 적어도 나의 의식 안에서는, 내 심상세계에서는 물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인지된 적이 없고, 나는 태어나서 내 신체에 물리적으로 주어진 기능 외에 사용해지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 사고한다는 것은 내 의식세계 속에서는 결코 비물리적인 과정이 아니다. 내가 뭔가를 느낀다는 것은, 내 의식이 뭔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비물리적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뇌 없이 의식이 존재하는 것을 목격한 것도 없고, 뇌 없이 의식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정직하게 관찰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의식활동은 항상 뇌가 관여해왔다. 비물리적인 무언가 있어서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내 의식에 주어지는 것은 물리적인 반응들 뿐이었다. 내게서 신경의 일부를 잘라버리면 나는 의식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물리적인 것밖에 인식할 수 없다. 내 심상세계, 철학적 의미로서의 마음(mind)이 하는 모든 활동은 내 심상세계에서 물리적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나는 심적 세계와 일상에서 흔히 말해지는 외부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물리법칙 하에서 굴러가는 메커니즘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 결론은 오래전에 내린 것이지만, 삶을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최근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 심상세계를 과학적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분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내 심적 세계는 모두 물리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물리법칙은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물리적 대상에게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 법칙은 누구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불리하게 작용하지도 않는다.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대상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물리법칙이 이끄는대로 간다. 그렇다면 나의 심적 사건들, 나의 심적 세계는 어떤가? 내 심리적 반응들, 체계가 물리적인 대상이라면 내가 하는 어떤 반응도 이상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내 유전자는 물리법칙에 종속된 특정한 정보들의 체계로 이루어졌고, 모체에서 뇌가 생기면서부터 뇌가 그 법칙에 따라 작동해온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반응은 물리적으로 정당하다. 그저 내가 가진 유전적 정보와 내가 신체와 뇌가 처리해온 방식대로 감각자료를 입력해주면 그냥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결론에 도달하고 비로소 나는 내가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결론은 필연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의식세계, 내 심상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독립적인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ㅡ언젠가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저 자유의지라는 말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ㅡ. 일상에서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고유한, 무언가 다른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심상세계 안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는 매우 어색하게 들린다. 내게 보이는 것은 뇌 안에 의식의 스위치가 있다는 것과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들이 뇌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과 뇌는 자연법칙에 따라 입력받은대로 출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내게는 그저 의식이 뇌의 연산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뭔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판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뇌는 그저 네트워크 망처럼 감각자료가 주어졌을 때, 과거의 데이터들을 유기적으로 연동해서 가능한 시뮬레이션을 이미지로 만들어서 감각중추와 운동신경에 전기신호를 보낸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나는 내 세포가 내 몸속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키보드를 치고 있을 때 수많은 신경들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엄청나게 빨리 처리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유의지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긍정적인 뇌과학 실험들도 있다(논문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읽고 결과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용은 머리에서 지웠기 때문에) 그렇다고 내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자유의지는 물리적인 개념이고, 간단히 보자면 방금 내가 적은 방식대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인간고유의 기능, 인간의 존엄성인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직관적으로는 불편하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우리의 뇌는 그런 방식의 처리밖에 하지 않아왔으니까. 아주 예전에 쓴 적이 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여기에 간단히 적겠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법적 처벌, 책임이라는 개념은 매우 인간중심적인, 나쁘게 말하면 허구적인 개념이다ㅡ아주 오래전에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이를 논한 적이 있는 것 같다ㅡ. 원시적인 인간이 현재의 나같은 생각을 했을리가 없고, 단지 눈앞의 갈등상황을 종결지어야 하고, 관찰자의 뇌가 인식하기에 유의미하게 관찰할 수 있는건 특정 감각자료(사람)가 물리적인 피해를 발생시켰다는 것이었고, 그런 인물들을 없애왔을 때 집단 내에서 문제가 사라졌고, 또한 집단을 유지하는데에도 좋았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내 심상세계에서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지만, 원시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그저 입력받은대로 법칙에 따라 결과를 내놓았을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책임이라는 개념을 끝까지 밀고나가면 물리법칙을 처벌해야 한다는 웃긴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법칙의 책임을 엉뚱하게 인간에게 전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웃음). 여튼, 나는 책임이란 개념은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개그요소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들어와있는 모든 인식을 나는 이런 식으로 환원하여 이해한다.

 

 종교에 관해서도 그렇다. 나는 모든 종교적인 언어는 특정한 물리적인 현상을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심상세계에서는 그렇게 인식된다. 이런 인식 하에서 종교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할 수도 있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나는 물리주의자인 기독교인이다), 과거부터 언뜻언뜻 글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의식 안에서 비물리적인 영역은 발견되지 않는다. 자유의지도 사실은 위와 같은 물리적인 현상을 지시할 뿐이다. 종교의 가능성은 인간의 삶의 방향제시와, 그 방향을 종교에 속한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연합시킬 것이라 기대되는 관념은 사람들 사이에 유대를 만들고, 비슷한 행동을 유발하고, 사고관을 비슷하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요소를 선동이나 세뇌라는 단어를 써서 비하하지만 그건 매우 잘못된 것이다. 현대에서는 종교의 기능을 미디어가 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매일매일 모든 것에 선동당하고 세뇌당하고 살고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100% 확실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고, 대부분의 정보를 타인의 지적 능력과 나의 추론 능력에 의존해서 받아들인다. 진보/보수 지역에서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가정/학교/또래 등을 통한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우고 받아들이는 모든 방식은 종교적이다. 나는 내가 부모라고 부르는 사람이 부모인지 알길이 없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테스트해본 적이 없는데 잘 믿고 있다. 그리고 철학하기 전에는 자연법칙이 일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흄을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냥 믿고 있다. 그게 내 삶에는 도움이 되니까.

(단상 카테고리 맨 앞에서부터 한두개 글 읽다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의식 속에서는 종교 경전들이 전하는 영적 세계나, 초월적인 세계, 관념은 모두 내 머리 속에 있는 감각자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해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적 세계를 상상할 때 우리는 사실 물리적인 세계를 수정하여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모두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다. 나는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한다. 저런 가능세계를 머리에 넣고 살아가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또한 나는 종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는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 하에서 종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종교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고, 나는 비도덕적이지 않은 영역 안에서 믿고 행위할 자유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서 나는 종교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의식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는 특정 종교가 맞거나 틀렸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심상세계 안에서 일상적으로 생각되는 개념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최종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나는 결국 모른다. 나는 이 공격받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도피하여 종교를 정당화하고 싶은 건 아니다ㅡ나는 그저 이러한 것들을 모두 구분해보고 싶은 것이다ㅡ. 설령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해도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의 인간으로서의 선택이고, 내가 내 신체가 이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의 행복(여기에는 주위 사람의 행복과 도덕관이 포함된다)을 저해하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삶의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선택하는 것 자체에 대해 타인에게 침해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몇몇 기독교인들에게 삶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을 받았고, 그들의 신념을 매우 존경하고 성스럽게 여긴다. 나는 그들의 행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리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거기에 나의 가치관이나 삶에 대한 판단구조, 사회관, 정치관을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나는 긍정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것이 내게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큰 물리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ㅡ내가 믿는 신은 달리 생각할지도 모른다ㅡ.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신념을 갖든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삶에 대한 선택을 한 것처럼 그들도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특정 감각자료를 처리해왔기에 기독교인인 것뿐이고, 그들은 다른 감각자료를 처리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내 의식 속에서는 이 이상의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본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겠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inner peace를 얻을 수 있었다ㅡ굳이 inner peace를 쓰는 이유는 쿵푸팬더2를 보고 시후(?) 사부가 inner peace를 언급할 때 그 몸가짐을 내가 약간은 얻은 것 같아 그 장면이 계속 기억나기 때문이다ㅡ. 나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내 의식에 있는 과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인 존재다. 이걸 깨닫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나의 과거를 좀더 침착하게 볼 수 있었고, 왜곡된 인지를 교정하도록 길을 틀 수 있었다. 내 뇌는 이런 방식의 삶을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감각자료를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논리적 가능성에 있어서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여담이지만, 나는 물리적 영역이 논리적 영역에 앞선다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개 나같은 우울증 환자나 인지왜곡이 일어난 사람, 심리/행동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저런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뇌는 정직하다. 있는 그대로, 입력받는대로 내놓는다. 내가 내 머리속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도 내게는 기억에조차 남을 수 없다. 내 뇌는 한번도 그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감각자료를 처리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단어들을 들었을 때 그것을 그들처럼 처리하는 신경망이 없다. 경험 없이 가상적으로 상상하여 그들의 결론에 도달해서 그걸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결론을 지시하는 감각자료가 내게는 없다. 인간이 생동감있게 추론하려면 자신이 뇌에 저장하고 있는 감각자료들을 바탕으로 정보손실을 최소한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타인의 언어나 해당하는 감각자료가 저장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추론하면, 추론규칙에 의해 뭔가 결론은 나겠지만 뇌는 단기기억 정도로만 넣고 잊어버릴거다. 도달한 언어적 결론을 뇌에 효과적으로 기억시키려면 그에 해당하는 감각자료가 신체에 입력되어있어야 한다. 머리에 없는 자료로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는 뇌는 입력된 언어에 해당하는 감각자료에 필적하는 정보들을 꺼낼 것이다. 자신에게 없으면 타인의 경험, 미디어 등등 간접적인 것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추론을 한다. 문제는 그렇게 판단할 때는 단순한 변수들만 고려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가 과거와는 다르게 반응할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직접 경험으로 사건을 접할 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온 감각과 신경이 그 사건에 집중되어서 연관되는 모든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그 경험을 기억에 저장하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추론할 때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매우 정확히 자신의 신체에 개연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간접적으로 추론하면 그런게 없다. 따라서 어떤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뇌는 그런 가능성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자신의 신체에 있어 개연적인 추론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곧 머리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에게 다른 가능세계 이야기를 해도 왠만하면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간 = 자유의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뇌가 인식하지도 못할 사이에 저런 판단을 백그라운드에서 내림에도 불구하고ㅡ즉 많은 부분에 있어 의식의 작용이 아니고, 의식이 관여하더라도 그들이 의도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ㅡ 우울증 환자 스스로가 그의 자유의지가 의식이 그렇게 일부러 처리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에게 비물리적인 자유의지같은 건 의식세계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만들어진대로 반응할 뿐이다. 우울증 환자가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겨먹은 분자구조가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고 보면 편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내가 많은 언어를 뇌 속에 넣었음에도 실현하지 못해서, 자학하던 것을 많이 없애주었다.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상태와 반대되는 물리적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추론가능하다. 그걸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또 어려운 문제지만. 여튼, 자학하는 습관을 많이 없앨 수 있었다. 오늘 실패해서 세상이 엿같고 저주스럽고 좌절스러울 때,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한다.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물리적인 기회는 앞으로도 존재하고, 계속 실패하더라도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성공하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과정 하에서 inner peace를 찾고 있다. 스스로의 감정과 독립적인 평안. 모든 건 그러기 마련이라는 걸 깨달으니, 굳이 내 의식이 원하지 않는 반응을 신체가 내놓는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단하는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머리에 넣어두고, 그것을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정당화하고, 단기적인 것들이 실패할 때 그것을 떠올리면 된다ㅡ물론 떠올리게 되는 계기는 물리적으로 여러 번 있어야 할 것이다ㅡ.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다 성공하면 뇌가 그것을 처리하는 신경망을 만들어내고 다른 신경망들과 연동되어 그것들을 바꾸고 뇌에 자리잡을 것이다. 나는 이걸 정당화하고, 내가 신체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한 추론을 믿는다. 이렇게 나는 inner peace를 어느 정도 찾았고, 그렇게 노력 중이다. 여러 감정이 들 때 내가 정당화한 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떠올린다.

 

 또 한 가지, 타인과의 비교도 많이 멈추게 되었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좌절은 자신의 심리적 내집단 안에 넣어둔 타인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속성이 자신보다 월등하고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인식하여 내집단에서 도태될 것 같을 때, 또한 객관적으로 그 원인이 자신에게 귀속된다고 판단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 자체가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그르다.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결합, 배열은 그 사람과 같지 않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되도록 물리적으로 되어있었기에 그리 된 것뿐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뿐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거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과 유사한 정보를 처리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비슷한 감각자료를 입력받았다면 그리 되었을 것이다(물론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내가 그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복사되지 않는 이상 불가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어서,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와서라고 묻는건 좋지 않다. 그건 물리법칙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일관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해 너는 왜!!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넌센스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저 그런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는 넌센스다. 나는 이런 물질이고, 저 사람은 저런 물질이다. 나는 내 방식의 삶이 있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두 개가 같을 수는 없으니, 나는 내 방식대로, 그 사람은 그 사람 방식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물론 이런다고 좌절을 발생시킨 물리적 상황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것은 inner peace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의 정신승리(?)를 위한 정당화다. 내게는 이게 잘 맞는다. 내가 남들보다 못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원리적으로 그냥 그런 것이다. 좌절을 하면 더 괴롭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그러하다는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안정을 찾기 위해 내게 맞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면 된다.

 

 

더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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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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