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의 연속성(1)

 세상에서 매우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인과는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물리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한다는 것은 그 현상과 관련된 인과들을 정확히 기술한다는 것이고, 어찌보면 이는 매우 복잡한 연속함수일 것이다. 만약 시간이 어느 정도 동안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모든 인과룰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지능력과 기억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현상을 단편적으로, 혹은 그 몇 가지 단편들의 종합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떤 것을 먹고 싶다고 할 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이 현상과 관련된 단편적인 기억들만을 꺼내놓고 거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가령 기억에 없는 어린시절부터 나는 그것을 먹는 것에 익숙했다든가, 뇌가 어떤 성분이 부족해서 그것이 필요했다든가 그에 관한 전체적인 인과는 파악할 수 없다. 내 이전의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고도 말이다. 만약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인과들, 가령 내 유전자의 형성배경들을 논하게 된다면 나는 아주 부분적인 사실밖에는 알 수 없다. 즉, 우리는 현상을 분석할 때 아주 단편적인 사실과 인과들만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수식을 써서 물리적인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려할 때는 우리가 연속적인 인과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t=a라는 식으로 시간을 잘라서 멈추게 한 다음에 그에 연관되는 아주 몇 가지의 함수들로 사태를 바라본다. 그 다음에는 a<t<b로 영역을 넓힌다. 이때 모든 인과가 고려되지도 않고 시간을 짤라서 우리가 원하는 함수만을 고려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수학을 제외하고 과학적 현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에서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한다. 특정 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몇 가지 변수만을 가지고 시간축을 단절시켜 아주 단순한 인과만을 따진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그 결과가 모든 인과와 연속된 시간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면 우리는 모든 인과를 파악하기 어렵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들로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과들의 경우 우리에게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경험들이 충돌하는 경우 문제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은 경험들이 충돌할 때 서로에 대한 다름의 인정과 관용이 필요함을 알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예외적인 것이다. 왜냐면 이것은 내게 주어져 있지 않은 정보로부터 판단과 추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받지 않았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들, 특히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것들로부터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산다. 사람들 사이의 경험이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로만 판단하고 굳이 경험에 없는 예외들을 가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가령 1+2을 계산하는데 우리는 3이라는 값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 우리 경험에 주어진 것이 없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수학과에게 내가 1+2=1인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ㅡ적어도 관련된 인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면ㅡ. 그렇기 때문에 경험의 충돌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나, 교육받지 않았거나, 특수한 성격이 아니거나 매우 자연인의 삶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경험 외의 것을 상정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위의 의미에서 자연인들이 가질 수 있는 반응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히여 이해하거나, 뇌가 수용을 거부하거나, 공격적이 되거나. 훈련되지 않는다면 타인의 경험과 자기의 정보밖에 있는 현상들은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것을 최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하려하고 그래서 "그거 이거 아니야?" 혹은 "그건 이거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대답은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나머지 영역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적어도 그에 대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인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적었듯이 이런 현상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지만 더 큰 인과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항상 인과의 단편만을 보고 살기 때문이다. 개인이 하는 경험은 한정되어있고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인과의 고리도 한정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외의 경험, 미지가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는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알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가령 여러분이 가장 신뢰하는 학문인 수학에서도 우린 알 수 있는게 별로 많지 않다(사실 그게 수학의 재미이자 강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함수들로 표현할 수 있는 함수는 매우 적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수도 별로 없다. 애초에 대부분의 실수는 유리수 방정식의 근이 되지 않고, 심지어 5차 이상의 방정식의 해는 대수적으로 표현자체가 불가하다. 미분방정식에서는 해가 뭔지를 떠나서 근 자체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방정식들이 많다. 이런 진실 하에서 자신이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세상 모든 인과의 고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더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 열린 자세로 상대방에게 경청하고 자신과 다른 경험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뭔가를 모른다는 것은 이제 상대의 책임이 아니다. 인과를 파악하지 못한 나의 무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논리적인 이유로는 위에 상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험의 충돌을 겪어보지 않았거나 그걸 넘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으로 모든 것이 되었던 사람들. 후자의 경우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경우 사람들은 자기의 추론의 성공에 대한 높은 기댓값을 부여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수학적인 세계에서밖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뢰도 1의 확률함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적어도 그들의 경험이 완전한 실패를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갈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는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의 패러다임은 대개 바뀌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고정되어있기 때문이고 그 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들과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이 일정하므로 그 이외의 것을 굳이 상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현상에 부여하는 기댓값은 사실상 1에 가깝다. 물론 나머지 이유들도 많이 있다.

 나는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만 했을 뿐이고, 실제 삶에서의 작동은 이보다도 더 복잡하다. 거기에는 아주 많은 사회적 환경의 문제와 심리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이 실패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도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집착해서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가령 전쟁과 절대적 빈곤을 경험한 세대는 그것이 그들이 삶에 부여하는 가중치에서 가장 높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나머지 것들은 큰 가중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다른 경험들을 우선순위밖으로 놓을 수 있다. 심리적으로 매우 몰려있는 경우 자신의 방어기제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이 취하는 행동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삶에서 다른 행동들은 매우 나쁜 결과를 불러왔고 삶이 그 치명적인 사실에 매우 큰 가중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동의 좋은 결과/행동들 이라는 함수의 값은 어느 시간축에서나 0에 가깝다. 어떻게보면 그들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이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다른 경험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중치를 두고 있는 경험들을 박살낼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결국은 많은 경험을 접해야하고, 아니라면 이론적으로 위에서 적은 인과의 연속성와 인지의 한계를 설파하는 수밖에 없다(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인간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패러다임/사고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 경험들과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도 파고 들어야만 한다.



이글은 예전에 쓴 글의 연속선상에 있다. "욕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과 비슷한 류의 제목으로 썼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왜냐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는데 그것에 맞지 않는 것이 나올 경우 대개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경험의 충돌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릴 때는 대개 인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것 또한 자연스럽다. 자연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시킨다. 왜냐면 나에게 속하는 성질들을 상대방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대개 많은 것들이 표준화되어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는 교육제도에 의해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동아리를 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같은 문화권에 속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고.. 등등 타인과 나에게 보이는 것들이 대개 비슷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타인에게 투영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생각되는 개인의 고유한 면모를 찾는다. 대개는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성으로 대표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문제의 상황에서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없거나 경험이 충돌할 때 타인의 인성을 문제로 삼는다. 이 또한 맨 처음의 문제에 속한다. 실제 사람들이 판단할 때 삼는 재료는 이것들보다 복잡하겠지만 아무리 복잡해봤자 유한한 정보들이고 한정된 정보들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에 관한 모든 인과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을 문제삼으려고 한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나는 항상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타인의 인성을 문제삼을까?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처럼 그 사람 고유의 무언가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 고유의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위와 같다. 우리는 모든 인과를 알 수 없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정보로 최대한의 판단을 하고 경험들을 바탕으로 신뢰도를 매기고 여러 가중치를 매기고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다. 우리의 몸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인과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판단은 (심리적인 원인을 포함해서) 오류를 내고 마는 것이다. 사실 개인의 고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인 경향이며 습관일 뿐이다. 물리적인 인과에서는 모든 것은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흘러간다. 개인의 고유성은 모두 그 원인과 인과가 있다. 다만 그걸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유하다는 표현을 쓸 뿐이다. 인격은 고유한가? 그 사람에게 큰 원인이 있어 무언가 그에게만 속하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 그런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인과들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인격, 성격이라는 건 그 사람의 태아 때부터의 환경과 그가 접한 경험들과 유전자가 결부된 복합적인 문제다. 만약 고유한 것을 묻고 싶다면 그 유전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전자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부모의 환경과 경험들, 부모의 유전자의 문제, 그리고 확률적으로 물려받았거나 부모와는 다른 형질의 유전자들. 이것들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인과가 연속적이라는 나의 말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개인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할 수 없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임이라는 건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과의 단편을 잘라만든 것이며 이는 인간의 습관에 의해서나 대개는 법적 처벌을 위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물론 이는 정확한 진술은 아니다. 그냥 흐름상 이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제외하고 쓴 것이다). 물리적인 인과에는 책임이란 단어는 없다. 단순히 인과들의 작용만이 존재할뿐. 만약 누군가 고유한 인격의 문제로 개인을 문제삼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사람과 연관된 모든 인과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물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인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표현을 쓰는가? 물론 미묘한 감이 있다. 책임이라는 개념의 성질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이야기를 진행하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타인의 인성을 문제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이럴 때 우리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연관된 인과의 고리를 찾아 거기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도움을 주거나(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므로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그러고싶지 않다면 차라리 그 사람을 그대로 나두는 편이 본인의 감정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낫다. 이해하고 싶지 않거나 어려울 경우 나는 차라리 그 사람을 그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추천한다(불쌍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그 사람은 여러 작용에 의해 그렇게 된 사람일 뿐이니깐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씁니다. 흐름을 해치기 때문에 쓰지 못한 것들이 후반부에 있습니다. 책임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인과가 자연물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하는 문제도 있고, 만약 위의 논지와 같다면 책임을 묻는다는 행위가 과연가능한지의 문제도 있습니다. 우선 결론만 말하자면 책임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는 연속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현상들을 그대로 나둘 수는 없습니다. 가령 위의 논리만을 따라가면 살인이나 강간 같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을 묻지 말아야하는가하는 문제도 발생합니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최소한의 제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적으로만 본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본다면 공동체의 안정과 개개인의 안정을 위해서는 위협적인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현상이 지속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연속적인 인과를 끊고 그 상황을 직접적으로 만든 자를 처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감정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많은 경우 타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큰 의미가 없거나 묻기가 곤란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적어봤습니다.

 여러 사건을 겪다보면 저도 사람인지라 화도 나고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저는 그런 경우 많이 생각해보다보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너무 슬픕니다. 사람이 연약한지라 그냥 책임을 묻고 거기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많은 경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움으로 나아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삥뜯는 노숙자들이 그냥 엿같을 수 있습니다. 저도 여러 사연 들어가면서 진짜 현실성있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삥 많이 뜯겨봤습니다. 화도 많이 내고 속으로 욕도 많이했습니다. 버린 돈들도 너무 아까웠고. 그러나 그 사람들은 매우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삶이 그들을 거기로 내몬 것이죠. 사실 사람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도움을 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들을 그냥 욕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이야기를 요청하거나 교회에 데려가거나 센터에 보내거나 친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들의 비열함에 치욕을 떨며 그들은 보살핌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바쁘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보내버리죠. 왜냐면 하고싶지 않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외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기 쉽습니다. 삶이 힘들기도 하고 이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과를 생각하다보면 그들이 과연 잘못이 있는가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에 부닥쳐있을 때에 사람들에게 속은 것이니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만큼 몰려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등등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하는 대처법을 들어왔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한결같아서 너무나 슬펐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그렇게 되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단들에게는 사실 자기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그들을 깔보고 무시하기보다는 정확한 성경구절을 읊어주고 그들이 그렇게 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었고, 종교는 다를지라도 친구는 될 수도 있었을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그곳으로 보냈죠. 너무나 슬픈 사실입니다. 이런 큰 주제들 외에도 친구들 사이의 문제, 인간관계 등등 많은 사례들이 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아주 많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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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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