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은 과학철학(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 반증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후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철학자인 콰인, 쿤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콰인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과학철학에 그대로 적용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하지만, 실제로 콰인은 비트겐슈타인을 배운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는 다른 이유에서 전체론을 주창한 인물입니다. 콰인 이후에 나타나는 쿤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콰인은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독립적으로 글을 써야하지만, 토마스 쿤과 후기 사상의 전체론을 생각해봤을 때 콰인을 같이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카테고리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경험론에 관한 두 가지 도그마들(two dogmas to empiricism) :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 비판

 콰인은 주로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반박하면서 전체론으로 넘어간 인물입니다. 「경험론에 관한 두 가지 도그마들」은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반박하는 기념적인 논문으로, 논리실증주의가 전제하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과 '환원주의'라는 두 가지 도그마를 비판합니다.



1.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이라는 도그마


 논리실증주의를 기존의 철학을 공격하면서, 철학의 임무는 과학적인 명제 즉, 종합명제에 있는 분석명제들을 엄밀히 정하여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콰인은 두 명제가 구분될 수 있기는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콰인은 분석명제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A bachelor is a unmarried man(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문장은 논리실증주의에서는 분석명제에 해당합니다. '총각'이라는 개념 자체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콰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A bachelor is a bachelor'가 분석명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bachelor 자리에 이음동의어를 넣는다고 그것이 분석명제가 되는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A bachelor is a unmarried man"가 분석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언어체계(영어)를 미리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만약 위의 문장이 분석명제가 되는 언어체계를 알지 못한다면, 위의 문장은 분석명제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분석명제란 엄밀하게는 "A is A"같은 명제만이 가능하고, "A is B"나 "A is C" 등은 분석명제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들이 분석명제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만이 아니라 언어체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지에서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생각만큼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분석명제에 대한 분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전제하기 때문에 세계와 명제에 대해 원자론-환원주의의 1-1대응관계를 전제합니다만, 언어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명제에서 '조선'을 분석명제로 분석한다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있었던 국가를 의미하는 문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단어는 항상 그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헬조선'과 같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하는 용어로도 사용되고, '조선인'의 경우 조선이 없었던 일제강점기에는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2. 환원주의라는 도그마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과학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생각을 펼쳤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그대로 과학에 옮겨와서 과학은 '검증가능한 명제들의 총합'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귀납-검증가능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명제들을 기계적으로 총합한 것이 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콰인은 과학은 그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학의 전체에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냈을 때 그것이 검증이 되고 그것들이 쌓여서 과학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 역시 환원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콰인은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근거로서 전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과학은 구조를 지닌다 : 과학의 중심부와 주변부(전체론)


 콰인은 언어체계는 '중심부(center/core)'와 '주변부(periphery)'로 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언어의 중심부는 쉽게 변하지 않고, 주변부는 주위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고전역학으로 따지자면 뉴턴의 법칙들이 과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뉴턴의 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과학의 주변부를 이룬다고 합니다.


 콰인은 언어체계는 그물망처럼 얽혀있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변부와 중심부도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콰인은 언어체계에서 중심부는 중요한 신념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주변부는 중심부에 비해서 잘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가령 고전역학은 뉴턴의 법칙으로 시작됩니다. 고전역학의 결과들은 모두 뉴턴의 법칙들에 기초하여 그 법칙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과학 역시 각각의 결과들이 중심부-주변부로 강력히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콰인은 고전역학에 반하는 어떤 증거가 나온다면, 뉴턴의 법칙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주변부에 대한 일부 결과만 달리 해석하는 식으로 주변부만 바뀐다고 합니다. 이러한 콰인의 생각은 논리실증주의와 반증주의를 모두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자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들을 벽돌로 쌓아 과학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콰인은 그들이 과학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으로 공격합니다. 과학은 단순한 실험적 결과들의 총체가 아닙니다. 각각의 실험결과들은 뉴턴의 법칙과의 연계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작동하며, 각각의 이론들은 과학의 중심부에 있는 법칙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과학이 단순한 종합명제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뉴턴역학을 부정하는 결과가 고전역학 내에 있었다면 그런 지식 역시 당대의 과학에 포함되었어야 할 것입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과학이 뉴턴을 중심부로 두고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과학이 단순한 실험결과들의 총합이 아닌 중심부의 유기적 관계 내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콰인은 포퍼에게는 "가설을 담박하게 세우고 그것이 반증되면 그대로 폭파하면 되는가?"라는 공격을 합니다. 즉, 과학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학이론에 대한 어떤 반증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이론 전체가 부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심부에는 타격이 (거의) 없고, 주변부만 조금 바뀔 뿐이라고 합니다(이 글을 쓰면서 포퍼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것 같아 비트겐슈타인(6)-전기 사상의 영향(2)의 포퍼 부분에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포퍼는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반증되면 가설을 버리고 다른 가설로 옮겨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뉴턴역학이 보여주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콰인은 위와 같은 전체론으로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관찰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대에 널리 알려진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개념입니다.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 객관적 관찰이란 가능한가?


 콰인 이전까지 과학이란 매우 객관적이고 엄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는 '관찰'한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적이라는 전제를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였습니다. 과학은 그러한 관찰과 실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콰인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며, 종래의 과학관과는 완전히 선을 긋습니다.


 콰인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장자의 붕새같이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관찰을 할 때 이미 관찰자는 어떠한 기대나 선입견,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관찰합니다(언어체계라는 건 굳이 영어 한국어 그런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이 전제하는 학문 공동체나 집단의 언어체계도 됩니다). 말하자면, 관찰자는 관찰이라는 행위 이전에 본인만의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존하여 관찰을 시행하고, 그것과 연관하여 현상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설명하자면, 우리가 어떤 실험결과에 어떠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사실을 관찰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해석이 가능하려면 해석틀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관찰 이전에 이미 이론/해석틀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상을 단순히 '본다'라는 것으로만 인지하지 않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ㅡ만약 어떤 이론도 가지지 않고 현상을 바라본다면, 바라본다는 현상만 존재하지 현상에 어떤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ㅡ. 따라서 콰인은 아무 편견 없는 관찰이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콰인은 종래에 투명하게 관찰을 하고 그것이 과학이 된다는 입장을 부정합니다.


 위와 같은 콰인의 견해는 그의 전체론으로 유도된 것이었습니다. 언어란 그물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고, 각각의 언어는 서로서로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적 관찰이라는 것도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생활양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관찰은 그와 관련된 주변 언어와의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고전역학시대에 어떤 것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역학체계에 일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고전역학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미리 전제해놓고 관찰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 외에도 기존의 과학자집단이 고수하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실험방식, 실험에 대한 이론을 관찰의 '이론'으로 두게 됩니다. 과학을 제외하더라도, 개인이 일상에서 가지고 있는 생활양식 또한 하나의 이론으로 작용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본인의 신념과 삶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대한 '이론'을 만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관찰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콰인의 입장에서는 종전처럼의 객관적 관찰이란 불가능하게 됩니다.


 콰인은 이러한 충격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더욱 치명적인 결정타를 날립니다.



 근본적 번역의 미결정성 : 과학은 단 하나만의 사실을 가리키는가?


 누군가 어떤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당연하게도 그 대륙에 사는 사람들과 그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알기 위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발화를 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가령 관찰자가 보기에 원주민들은 토끼가 나타날 때마다 "gavagai"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고, 그 결과 선택지를 "토끼가 나타났다!", "토끼" "토끼새끼다" "토끼 모양을 한 것이 있다!" 정도로 줄였습니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되는 "토끼"를 "gavagai"의 번역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번역은 옳은 것일까요? 콰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우선, 원주민과 관찰자는 전적으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그가 원주민을 관찰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가진 언어체계에서 관찰하기 때문에 원주민이 어떤 의미로 "gavagai"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gavagai'를 '토끼'로 번역한 것은, 그의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보았을 때 가장 흡사한 것이 '토끼'가 아닐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언어 사이에 번역이 확실하려면 같은 현상에 대해 원주민의 언어체계(L1)와 관찰자의 언어체계(L2)가 동일한 관찰/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L1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L2의 방식이 일치되면, 'gavagai'와 '토끼'는 정확한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서로는 다른 이론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현상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다른 언어체계 사이에 근본적인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번역을 지지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번역이 옳은지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콰인의 '근본적 번역의 미결정성'이라는 개념입니다.


 콰인의 이러한 견해는 과학의 미결정성을 주장하는 논고가 됩니다. 과학적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현상에 대해 여러 관찰을 할 때, 모든 결과는 항상 하나의 결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경험적 자료는 수학적 논증과는 달라서, 100%의 수렴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실험결과는 그래프 상에서 딱 한점에 unique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문제는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일 것입니다. 콰인은 해석결과는 꼭 하나에 수렴하지 않으며, 실험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다른 결과들을 모두 제외하고, 직선이나 어떤 함수에 수렴하게 그래프를 그리는 것(즉 해석)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기존의 과학적 언어체계와 일관적이고, 현상을 설명하기에 효과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gavagai로 보자면, 세계에 내재하여있는 물리법칙이라는 거대한 언어체계이자 원주민이 보여주는 표현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언어체계를 투영하여 번역을 내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법칙'도 아니고 물리법칙을 소유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에 내재된 물리법칙이라는 언어체계에 대해, 우리의 과학적 방법론, 기존의 이론 등의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그들을 관찰합니다. 세계는 어떤 작용을 보일 때 본인의 어떤 법칙 등의 언어체계에 의해 어떤 현상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가진 언어체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관찰을 하고 해석을 내놓는다하더라도, 물리법칙이 아닌 우리로서는 그것이 '옳은 번역'인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결과들과 해석을 제외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콰인의 견해는 과학은 하나의 이론만을 지지하고, 완전한 객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콰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기로 하고, 다음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나마 알고 있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과학철학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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