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자들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학자는 단연컨대 토마스 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나마 알다시피 그는 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패러다임은 과학자 집단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콰인에서도 그랬지만, 토마스 쿤에서도 직접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읽으시다보면 그와의 연관점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쿤의 혁명적인 주장 : 과학은 사회다

 쿤 이전까지는 과학을 평면적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나 반증주의는 아에 과학의 구조를 논하지 않았고, 콰인은 중심부-주변부의 구조를 제시했지만, 이는 매우 단순한 도식이었습니다. 쿤은 과학에 분명한 구조가 있으며, 그 구조는 콰인처럼 단순하게 평면적인 도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과학은 매우 입체적인 구조를 지닌다고 하며 과학을 하나의 사회로 여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그는 과학의 구조를 종교의 구조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쿤이 보기에 종교에는 핵심교리가 있고 주변적인 교리들이 있고, 교리들을 가르치고, 지지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쿤은 과학 역시 중심이론이 있고, 주변적인 이론이나 결과물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부분까지는 콰인의 이론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에 더해 과학에는 과학이론, 구조를 지지하고 가르치는 '과학자 집단(각 전공자들의 학회 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과학 역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하나의 사회이며 사회현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학이 사회현상에 가까운지를, 또한 사회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그만의 독창적인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패러다임(paradigm) : 과학의 이론적 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크게 '분야 매트릭스(disciplinary matrix)'와 '모범 예제(exemplar)'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분야 매트릭스(paradigm as disciplinary matrix)는 핵심이론, 이론적인 가정들, 실험방법에 대한 지침, 과학적 테크닉들(가령 미분방정식을 푸는 방법들), 무엇이 해당 과학분야의 연구방법인가에 대한 합의, 과학이 가진 형이상학적인 믿음 등을 총체하는 단어입니다. 모범 예제(paradigm as exemplar)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패러다임'의 의미인데, 과학적 연구의 모범 사례에 대한 합의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물리학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어떤 접근방식으로, 어떤 수식을 써서 그 문제를 풀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모범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입니다ㅡ물론 이는 분야 매트릭스로서의 패러다임을 전제합니다ㅡ. 가령 쿤은 뉴턴의 『Principia Mathematica(수학의 원리)』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합니다. 뉴턴의 저서에는 뉴턴의 법칙과 뉴턴이 제시한 실험테크닉, 수학적 테크닉(미적분)도 있지만(이는 분야 매트릭스), 뉴턴의 이론을 적용해서 당면한 과학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 제시되어있습니다(모범 예제). 뉴턴의 저서는 물리학적 문제(puzzle)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고전역학 시대의 과학자 집단은 그 방법론들을 받아들여 연구를 진행합니다.


 후차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쿤은 과학의 변화란 곧 패러다임의 변화이고, 이는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곧 정치적 혁명이며, 종교의 개종과 같다고 합니다. 누적적으로, 점진적으로 과학이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급격한 문제들이나 심각한 위기를 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ㅡ정확히는 여러 문제들이 쌓이다가 그것들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혁명이 일어납니다ㅡ. 마치 갑작스럽게 정치적 혁명이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고,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점진적일 수 없듯이, 패러다임의 변화 역시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간 것이 혁명적으로, 한순간에 바뀐 것과 가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에서 '개종'을 언급한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과학의 역사란 곧 패러다임 변천인데, 패러다임의 변화는 반증주의처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대담하게 가설을 내세우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례가 나올 경우 과학이론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과학자 집단에서는 그런 사례를 '오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는 실험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정짓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신고 있는 양말을 삼키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 콰인과 쿤은 비슷한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론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과학이론 자체가 붕괴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니까요. 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주장은 과학이론이 패러다임을 지닌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과학이 구조가 없이 단순히 원자론-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사례가 단 한가지만 나오더라도 패러다임은 붕괴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핵심이론들이 있고, 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관료제적인(즉 입체적인) 매뉴얼들이 있고, 각 이론들은 콰인이 주장한 것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 집단은 패러다임에 반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오류' 등으로 치환하고, 이론의 중심부가 큰 타격을 입을 때까지는 패러다임에 반하는 퍼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치명적인 타격이 왔을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비로소 일어나게 됩니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을 때,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 받아들인 패러다임은 서로 상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간의 논쟁은 될 수 있겠습니다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과학에는 진보가 없다'는 주장을 피게 됩니다. 그는 그에 대해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 패러다임의 곧 과학의 변화를 진보라고 할 만한 기준이 있는가?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을 때,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비교할 수 있는 직접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합니다. 즉, 둘 중 어떤 패러다임이 더 옳은 것인지, 더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보기 힘들듯이, 패러다임 역시 서로 다른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즉, 두 패러다임의 비교는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하는 공약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통약불가능성'의 개념입니다. 가령 17세기에 뉴턴역학이 등장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뉴턴은 그저 중력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는 혁신적인 방식이기도 했지만, 물질의 움직임이나 중력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 못했습니다.[각주:1]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등의 형이상학자들의 이론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형이상학적인). 그들에 비하면 뉴턴의 설명은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뉴턴역학이 받아들여지고 난 다음에는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부족 등을 기준으로 뉴턴을 바라보는 방식은 사라졌습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현대 물리학이 인정하는 네 가지 기초적이 힘이든)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뉴턴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설명으로 따지면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의 방식이 더 나을 수 있었습니다만, 사람들은 뉴턴의 기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둘은 서로 비교가능할까요? 쿤은 뉴턴 이전의 패러다임과 뉴턴의 패러다임으로 옮겨오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둘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쿤은 그러한 패러다임의 통약불가능성을 1.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 2. 관찰의 통약불가능성 3.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1.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Methological Incommensurability)


 뉴턴 이전과 뉴턴 이후는 서로 비교방법이나 비교기준이 달라졌고,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뉴턴 이전에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당대의 기준에 일관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랐으나, 뉴턴 이후는 뉴턴의 방식대로 눈 앞의 현상을 잘 설명하기만 되면 되었습니다. 쿤에 따르면 서로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둘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각주:2] 각각의 패러다임은 해결하려는 문제가 다르고, 그에 대한 접근방식도 다릅니다. 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에는 기계적으로 우위를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자 집단의 decision making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첫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


2. 관찰 통약불가능성(Observational Incommensurability)


 쿤은 각각의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각자의 분야 매트릭스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이론들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콰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론의 관찰의존성(theory-dependence of observation)'을 제시합니다. 과학자 집단은 패러다임에 속한 기존의 연구들, 실험결과, 이론들을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같은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다른 결과를 내놓습니다.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에 의해 현상을 해석하는 테크닉이나 추론방식은 패러다임에 의해 달리 됩니다. 쿤은 패러다임들이 현상에 대한 동일한 추론방식, 동일한 해석방식을 내놓더라도, 각각의 패러다임의 주어진 데이터/현상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고 합니다. 즉,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데이터로부터 정보를 얻는 추론방식이나 데이터의 해석방식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 데이터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는 각각의 패러다임에 의해 달리된다고 합니다ㅡ즉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세계를 봅니다ㅡ. 이것이 두 번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


3.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Semantical Incommensurability)


 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끼리의 용어는 서로 치환되거나 번역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같은 과학적 용어라도 패러다임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그 의미는 각각의 패러다임의 한쪽으로 속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가령 고대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등장하는 '원자(atom)'와 근대 물리학의 개념으로서의 달톤의 '원자(atom)'라는 개념은 서로 치환되거나 겹치는 부분이 없다고 합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개념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위해 도입된 철학적 개념이고, 근대물리학의 원자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니까요. 실제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결코 쪼개질 수 없고 세계를 구성하는 무한한 질료이자 서로 독립적인 가장 기본 단위'의 개념이지만, 근대의 원자개념은 현대에 와서 더 작은 단위(쿼크 등으로)로 나뉠 수 있고, 유한한 실체들입니다.


 쿤은 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질량(mass)'에 대한 개념 또한 서로 포함관계에 있거나 하지 않고 완전히 공통성이 없다고 합니다. 가령 뉴턴의 질량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라 질량의 총량은 변하지 않지만, 아인슈타인에서는 질량은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쿤은 둘은 같은 용어이지만 서로 논리적으로 치환되거나 하지 않고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뉴턴-아인슈타인 이론의 정설은 뉴턴은 거시세계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유용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거시와 미시세계를 모두 설명하기에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적 진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쿤에 있어서는 사용되는 개념마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다름'이 강조되게 됩니다. 이것이 셋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각주:3]


셋째 통약불가능성은 특히 쿤의 전체론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질량'이라는 언어의 의미가 변한 것은, 각각의 패러다임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방법론에, 과학적 테크닉도 다릅니다. 또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패러다임 내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이름은 같더라도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는 원자론-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각각이 어떤 언어체계 내부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왔다고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쿤은 위와 같은 세 가지 통약불가능성을 기준으로 패러다임은 서로 치환이 불가능하고, 어느쪽이 어느 쪽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패러다임은 서로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에 상대주의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즉, 과학에 진보가 없고 다를 뿐이라면 도대체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무슨 의미가 있냐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진보가 없다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달톤의 원자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뉴턴으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논쟁입니다. 진보를 논할 수 있으려면 그를 논할 어떤 기준이 필요한데,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서로 다를 뿐이기에 그에 대한 공통적인 기준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통약불가능성에서 그가 논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쿤은 그러한 비판에 대해 자신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며, 패러다임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설명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정확성(accuracy) 2. 일관성(consistency) 3. 범위(scope) 4. 단순성(simplicity) 5. 생산성(fruitfulness)


 '정확성'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을 때 패러다임의 이론이 동일한 과학분야 내에서 기존의 관찰들과 실험들에 대해 모순을 낳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관성'은 동일한 과학분야뿐만 아니라 관련된 과학이론들과 모순을 낳지 않아야함을 의미합니다. '범위'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나타냅니다. '단순성'은 패러다임이 단순하면서 어떠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 '단순성'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 혼란스러워지거나 고립되는 경우가 적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을 때 향후 과학연구에 불을 붙일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패러다임을 통해 이러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고, 과거에 밝혀지지 않은 관계들을 설명하고 밝힐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쿤은 정확성이 높고, 더 일관적이고, 설명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단순하고, 생산성이 높은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패러다임들이 통약불가능할지라도 비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위와 같은 기준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각주:4]


 쿤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가지고 과학이론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지금부터는 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의 역사 : 패러다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쿤은 과학의 역사의 구조를 '전과학(prescience)-정상과학(normal science)-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새로운 위기-...'로 제시했습니다.


 '전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 이전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패러다임'이 부재한 학문단계를 의미합니다. 정상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어떤 것이 '패러다임'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분야 매트릭스, 모범 예제로의 패러다임이 말해주지만, 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학문 공동체입니다. 패러다임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100%에 수렴하도록 같은 분야 매트릭스, 모범 예제를 수용해야만 합니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기가 아닌 시대(곧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모든 학자들이 한 현상에 대해 같은 해석을 내놓아야 하며, 모순되거나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동일한 학문적 방법론이나 세계관, 과학적 테크닉, 현상에 대한 해석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학문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주 이론에 대해 이견(異見)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학문 공동체 내에서 만장일치에 가깝게 인정된다면(사실상 일상적인 수준에서 만장일치라고 보는 게 좋습니다), 비로소 그 학문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 간의 메커니즘을 따지는 현대의 어떤 학문도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학, 통계학, 심리학 등을 사회'과학'이라고 부르지만 쿤의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꽁트나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양적 연구가 대세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긴 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현상에 대한 해석이 양적 연구만으로는 완전히 하나로 겹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에 대해 실증주의적 연구(양적 연구)와 해석학적 연구(곧 질적 연구), 변증법적 연구방법 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합니다. 쿤의 기준에 따르면 과학에서는 그런 논란 자체가 불가능해야 합니다. 게다가 사회과학에서 모든 학자들이 하나의 세계관, 동일한 연구방법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론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가 있지는 않습니다.[각주:5] 즉, 사회과학에는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각주:6] 결론적으로, 어떤 학문이 과학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전환기가 아닐 때에 유일한 패러다임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전과학에서 비로소 패러다임이 탄생하면, 그 학문은 과학이 되며, 그 상태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합니다(혹은 통상과학이라고도 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패러다임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며, 각종 퍼즐들을 풀게 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 항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예외사항이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상과학 시기에 패러다임의 문제를 발견한 사람은 과학자 집단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가령 뉴턴시기에 아인슈타인을 주장하게 되면, 그 사람은 패러다임을 벗어난 과학자로서 고전역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에게서 공격을 받습니다. 혹은 문제가 있는 부분만 일부수정하거나 변칙사례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고 합니다. 이는 반증주의적인 생각과는 반대이며, 콰인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서 예외나 변칙사례가 쌓이고 강력하게 제시되어서 패러다임의 중심부, 세계관, 기본적인 가정들을 흔들게 되면 그때가 바로 패러다임 '위기'의 때입니다. 쿤은 위기의 때에 정상과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론적 혁신을 주장하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문제를 잘 해결해줄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나타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과의 경쟁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때에 위기에 처한 과학을 '비통상적 과학(extraorinary science)'라고 부릅니다.기존의 패러다임을 지닌 비통상적 과학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줄 것으로 보이는 과학이론 사이에 경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통약불가능성에 의해서 이들의 논쟁이 결코 어떤 것이 더 논증적이고 옳은 것인가를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경쟁하는 과학자들은 서로 인신공격도 하고,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학문(주로 철학)적 영역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하고, 각각의 과학이론이 함축할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따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쿤은 패러다임의 논쟁은 논증의 문제가 아닌 '설득'의 문제이며, 이는 곧 과학자 공동체의 문제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생활양식이 전혀 다른 공동체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하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쿤은 이때에 과학자 집단이 위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기준으로 패러다임을 고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쿤은 이것이 과학이론의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비통상적 과학에서 새로운 과학이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것과 같으며, 종교에서의 개종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패러다임의 전환은 갑작스럽게 혁명적으로 일어납니다. 비통상적 과학은 이제 더 이상 패러다임이 되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긴 과학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의 시기가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고 나서는 전에 있었던 형이상학적 논쟁들과 과학 분야 이외의 논쟁은 모두 종료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과학자집단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따르게 됩니다. 새로운 정상과학은 다시 위와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거치게 되며, 이는 지속됩니다.


 결국 패러다임의 문제는 과학자 집단이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맨 처음에 언급했던 '과학은 사회다'라는 문장의 의미입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이론에서 언어는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또한 언어의 의미는 언어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생활양식,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체론적인 관점도 쿤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쿤 역시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에서 뉴턴의 '질량'과 아인슈타인의 '질량'개념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유기성 안에서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콰인에서 언급된 '관찰의 이론의존성' 또한 쿤에서도 '패러다임'에 의해 관찰이 달라진다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각주:7] 이는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비판하는 논거가 됩니다(구조의 유기성). 구조에 관해서는 콰인 역시 구조를 이야기했지만, 쿤만큼 상세하게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콰인은 전체론을 전제한 단순한 중심부-주변부의 이론이었다면, 쿤은 그에 더해 과학자 집단의 논쟁들, 과학자 집단의 세계관, 연구방법 등 입체적인 구조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상이 언급할만한 쿤의 과학철학입니다. 이렇게 해서 2014년 5월 4일에 시작한 비트겐슈타인 11부작 연재가 2015년 8월 11일(현재 새벽 1시 50분)에 끝나게 되네요.. 정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집중할 문제도 있고 곧 학기 시작이라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아마 Yudwig님께서 요청하신 '크립키'의 언어철학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ㅡ프레게의 언어철학부터 시작할지 아니면 크립키만 할 것인지는 차후에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ㅡ. 다음 학기에 두 학교에서 불완정성 정리를 배우기도 하기 때문에 마저 못한 괴델을 완성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가설에서 과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뉴턴의 법칙은 그저 과학적 '기술'만 있고,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2. 과학주의를 고수하시는 분들은 약간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현상만 잘 설명하면 되지, 도대체 왜 형이상학적 설명이 필요한가하는 인식 때문에요. 그러나 형이상학과 과학 중에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보시면, 이 문제는 단순히 뉴턴이 낫다는 식으로만 결론이 날수는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3.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은 모르겠습니다.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극한을 취했을 때 나타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니까요. 쿤의 주장은 이해하지만 과학에 진보가 없다는 주장은 섣불리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4. 이 부분은 비판이 많습니다. '통약불가능성'에서 패러다임의 비교불가능성을 논했으면서, 스스로는 진보라 부를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으니 사실상 완전히 일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패러다임끼리의 통약은 불가능하지만, '효용성'의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그가 완전히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5. 가령 고전역학 패러다임 시기에는 자연에 대한 고전역학 이외의 설명방법이 존재한다고 학자들에게 여겨지지 않으며, 이를 부정할 가능성조차 부정됩니다. [본문으로]
  6. 패러다임의 의미가 넓어져서 사회과학에도 쓰이긴 하지만, 쿤의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오로지 '자연과학'에만 패러다임이 존재합니다. [본문으로]
  7. 물론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콰인은 관찰의 이론의존성에도 불가하고 다른 언어체계를 효과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매뉴얼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완벽히 옳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언어체계 내부에서 대략 이 정도의 의미이겠다 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쿤에 있어서는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번역 매뉴얼이 불가능하고, 서로 통약불가능합니다. 콰인에 있어서는 그대로 비슷한 것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쿤에서는 다른 패러다임의 과학자들은 아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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