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자들 :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


 철학자들은 대개 어떤 것을 접하고, "이건 뭘까"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 내부에 있는 어떠한 생각에 빠져서 "이건 이거지!"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언어 자체가 독립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요소들을 배제한 채 그 언어의 의미를 고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서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배제한 채 탐구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들이 철학이라는 거대한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이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휴가를 갔을 때 생기는 질병이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언어현실을 따지지 않고 살다가 언어사용이 꼬여버린 존재라고 말합니다. 철학은 언어사용의 잘못됨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을 파리병에서 탈출시킬 때 철학 내부에서 어떤 해답(solution)을 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사고와 언어가 꼬여있는 부분을 해소(dissolve)하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전까지의 철학과 자신의 활동을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활동을 하나의 '치료(therapy)'로 제시합니다. 철학은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치료는 실제적인 언어실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형이상학이란 헛도는 바퀴와 같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자들의 사적언어로 인해 비롯된 것이며, 현실의 언어를 왜곡함으로써 탄생합니다. 이들은 사적언어를 사용하고 실제의 언어를 비틀어 다르게 사용합니다. 이들은 항상 뭔가 거창한 이론을 세우려고 하고, 철학을 통해 뭔가 진리를 수립하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철학이란 이론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밝히기 위한 활동이라고 합니다ㅡ깨우침을 주기 위한 활동ㅡ.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공격하지만 형이상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시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는 정보전달을 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 비유 등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만약 누군가 시를 읽으면서 "이 시에는 도대체 무슨 현실적인 정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시는 그럴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또한 그렇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은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형이상학이 무의미해지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과학적인 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형이상학을 통해서는 과학적인 뭔가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 표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은 의미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철학자들은 언어의 맥락을 무시한채 본인의 상상을 통해 사적인 언어사용을 해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철학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했고, 철학은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현존재라고 불리는 인간(항상 존재존재존재하면서 존재에 관한 언급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은 여러 현실적인,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탄생하고 살아간다는 개념입니다. 인간이란 구체적인 삶의 맥락 하에서 고려될 때 의미가 있다는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벗어나서 과학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에서 전체론을 주장한 콰인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토마스 쿤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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