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용도의미론(the use theory of meaning)'으로 불립니다. 그는 전기 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선험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경험적인 방법론을 채택합니다. 즉, 언어와 세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여 1-1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언어에는 반드시 하나의 존재가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로 인해 언어는 세계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입장을 거부하고, 언어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즉, 언어란 인간에 의해 구체적인 상황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됩니다. 용도의미론은 정확히 '언어란 사용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경우는 언어는 초월적으로, 관념적으로 미리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놀이(lanugage ga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언어놀이 : 우리는 현실에서 모두 언어를 가지고 일종의 놀이를 하고 있다

 

 도제식으로 제자를 기르는 목수가 있다고 합시다. 장인은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자에게 수업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벽돌'이란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벽돌'이 꼭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벽돌'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상황A : 목수가 제자에게 집을 짓는 현장에 나가서 벽돌을 어떻게 쌓는지를 보여줍니다. 목수는 제자에게 조금씩 일을 시키기 위해 제자와 제자 옆에 있는 벽돌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벽돌!"

 

상황B : 시간이 지나 제자는 어느 정도 성숙하였고, 목수와 함께 벽돌로 집을 짓는 현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는 제자가 벽돌을 쌓는 부분을 보면서, 벽돌 한 장 만큼의 빈틈을 발견합니다. 목수는 그 빈틈과 제자를 동시에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벽돌!"

 

상황C : 제자와 목수가 착실히 벽돌로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목수와 제자 뒤에는 집에 사용될 수많은 벽돌들이 위로 길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맨 윗쪽의 벽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당장 떨어지려고 합니다. 제자와 약간 거리가 있던 목수는 제자를 바라보며 황급히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벽돌!!"

 

 

각각의 상황에서 목수는 제자에게 모두 "벽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각각의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의 '벽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A에서는 제자에게 "벽돌을 건내라"라는 의미로, B에서는 빈틈에 벽돌을 채우라는 의미로, C에서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하나의 언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상황들이 모두 일종의 '언어놀이'라고 합니다. 언어를 가지고 상황에 따라 놀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는 상황 A, B, C에서 '벽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놀이를 하는 방식은 반드시 하나로만 정해져 있지 않고, 여러 합의에 의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놀이와 같이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A, B, C는 상황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언어의 맥락의존성을 나타냅니다. 어떠한 언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언어가 사용되는 구체적인 언어상황 즉, 언어의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후기 사상에 의하면 언어적 상황/맥락에 따라 수많은 언어놀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언어가 초월적으로/관념적으로 자체적인 어떠한 1-1의 의미나 힘을 지닌다는 전기 사상은 부정됩니다.

 

 인간은 언어놀이에 따라 언어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종교경전의 특정 구절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고, 동시에 동일한 언어가 기도로 사용될 수도 있고, 노래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혹은 적절한 상황에 따라 가벼운 농담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는 여러 언어놀이에 의해 의미가 달리 규정될 수 있습니다.

 

 

 언어놀이 : 본질은 존재하는가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어떠한 대상이든 그 대상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본질(substance)'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substance란 'sub-'과 'stance'의 합성인데, 대상의 '밑에 서 있음'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대상의 밑에 서서 대상을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본질이란 대상에게 내재해있으면서, 불변하는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만들어주는 것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인데, 이는 다른 모든 대상과는 공유하지 않으면서 사과만이 가지고 있고, 사과를 사과로 만들어주는 어떤 불변하는 속성이었습니다. 전통철학에서는 대상에는 이러한 본질이 숨어있으며, 각각의 언어에도 그러한 성질이 있음을 전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언어자체를 분석하여 그 안에 숨어있는 어떠한 속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관념론적인 철학자들에게, 현실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사용되는 언어에는 어떤 관념론적인 것이 숨어있지 않고, 다만 '사용'에 의해 언어가 규정되는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즉, 그는 세계에 미리 내재되어서 대상과 언어를 완전히 규정하는 어떤 언어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란 태초부터 미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놀이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자들이나 본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대상과 대상을 구분지을 수 있는 어떠한 본질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각각의 대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가? 사과와 바나나를 구분지을 수 있는 어떤 본질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 하고, 바나나를 바나나라고 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본질이 없다는 것이 곧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령 게임에는 '게임'이란 단어를 다른 모든 언어, 대상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속성이 존재할까요? 모든 게임에는 사람의 수가 정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며, 승패가 없어도 상관은 없으며, 점수가 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게임에 대해 어떠한 관념적인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실제적인 상황(즉 언어게임)에서 어느 정도의 무언가가 게임이겠고, 어느 정도의 무언가는 게임이 아니겠구나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를 '본질'이 아닌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에서 찾습니다.

 

 

가족 유사성 :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와 언어의 사회성

 

'가족 유사성'이란 가족들을 보면 그들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떤 닮은 꼴을 공유하듯이, 언어에는 어떤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언어가 가진 어떠한 유사성이 있다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언어를 둘러싼 언어게임을 모두 꿰뚫는 본질은 없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딱딱하게 언어란 '이러한 것'이라고 일축된 언어로 언어의 의미를 하나로 고정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는 '대체로 그러한 것' '어느 정도 그러한 것'만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본질이 없고 직관적으로 파악할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념에 시작과 끝, 완전한 한계를 정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서버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위와 같은 입장을 '반본질주의'라고 합니다. 본질은 없고, 가족 유사성 정도만 언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의 의미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간단합니다. 가령 '신사(gentleman)'의 어원은 현대에 쓰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사'란 영국에서 유서 깊은 집안, 귀족 집안의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신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신사들을 보면서 '진정한' 신사란 돈이나 가문이 아닌 그 사람의 품성에서 나와야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발언에 의해, 현재 누군가에게 '신사'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자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만약 언어에 어떤 본질이 있다면, 위와 같은 언어의 변천사에서 완전히 상이한 두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보기에 우리의 눈에는 저 상이한 두 의미를 완전히 꿰뚫는 어떠한 '본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어놀이에 의해 의미가 변천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신사'라는 언어에는 '신사'라면 해야 한다는 어떠한 인식이 '신사'에 합쳐졌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태도로서의 '신사'라는 의미를 만들어낸 사람의 관념에는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사실'로서의 신사와 '태도'로서의 신사는 이상성 안에서 어떠한 대략적인 모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대략 이정도가 '신사'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가족 유사성입니다.

 

 본질 없이 가족 유사성 정도로만 언어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확정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는 대략적으로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가령 '손목'이라는 언어에 대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손목인지를 명확히 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에 대한 의학적인 기준이 있더라도, 그것은 편의상의 기준이지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서로서로 달리 이해되고 달리 사용되는 '손목'이라는 언어 전체를 규정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언어에 대해 명확한 기준(곧 본질)은 없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언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손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손목과 다른 부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질이 없으면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본질이 없어도 가족 유사성에 의해 언어는 이해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정확한 말뜻이 없는데 어떻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언어놀이에는 '일정한 합의'나 '규칙'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목수가 제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벽돌!"이라고 말했을 때 제자가 벽돌을 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그러한 규칙이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높은 목소리로 "벽돌!!"이라고 외쳤을 때 제자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한 것은 제자와 목수가 긴장된 높은 목소리와 '벽돌'이라는 언어의 결합 사이에 어떠한 규칙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의미는 사람들이 합치한 규칙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입장을 '규약주의(conventionalism)'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어떠한 규약들이 가족 유사성을 확보해준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막연하게/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약은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를 배제합니다ㅡ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의미합니다ㅡ. 가령 누군가는 1+1이 3이라는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는 수학적 약속(공리)에 의해 1+1은 2이게 됩니다. 전자는 비록 '규칙'이지만, 규약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동의나 합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적 언어는 언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가족 유사성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규약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가 완전무결한 이성의 법정에 서서 이러이러한 것을 합의된 규칙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정도의 가족 유사성을 통해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며 현실에서 무리 없이 살고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판단의 합치(agreement of judgement)'에 의해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판단의 합치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생활양식 :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생활양식'을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판단의 합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떠한 기호에 대해 이러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 삶에서 그 기호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생활양식의 공유되어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가령 어느 나라에서는 젓가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는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먹습니다. 또한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이러한 음식이 높이 평가받지만, 이러이러한 음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것이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각각의 사회나 국가가 공유하는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생활양식을 공유하지 않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문화적 실례가 일어날 수도 있고 의사소통이 아에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활양식에는 여러 가지가 녹아들어있습니다. 거창하게는 역사에서부터, 공동체의 여러 조직/기구들, 어떠어떠하게 형성된 여러 사회적인 인식들 등등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그러한 것들이 녹아있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언어에는 그 공동체가 기초로 하는 생활양식의 모든 것이 포함되게 됩니다. 즉,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하고 있게 됩니다.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이 언어에 대한 전체론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전체론 : 언어는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전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자론과 환원주의부터 알아야 합니다. 원자론이란 어떠한 대상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입장이다. 환원주의는 전체를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부분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원자론과 환원주의가 합쳐져서 전체는 부분의 정확한 합이며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원소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이 나타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입장으로 보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자사실, 요소명제로 환원될 수 있고, 이것들이 세계와 언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언어와 세계에 내재된 1-1대응관계를 발견할수만 있다면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거부합니다.


 전기 사상의 원자론과 환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임의의 단어, 낱말의 의미는 우리가 달리 사용하든 말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낱말의 의미는 언어의 사회성이나 언어 외적인 요소를 고려할 필요 없이 낱말 자체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 이론에서는 언어란 다양한 언어게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초월적 관념론적인 사상은 부정되었습니다. 언어에는 사회성도 들어있고, 게다가 공동체 내적인 요소(생활양식)가 언어에 영향을 미칩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한 의미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언어체계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를 둘러싼 언어체계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체스에 비유합니다. 낱말이란 체스판의 말입니다. 하나의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체스판에 있는 다른 말들의 위치, 하는 역할/해야하는 역할 등도 알아야 합니다. 알고자 하는 체스 하나의 역할과 그 말이 다른 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알아야 비로소 그 체스말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주창한 언어의 전체론입니다.


 그의 전체론에 따르면 언어는 결코 각각의 단어들의 합이 아닙니다.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단어들을 제외하고 그 부분만 따로 빼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각의 단어들은 생활양식, 사회성 등의 영향을 받아 유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그 단어와 관계에 있는 언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원자론과 환원주의처럼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를 단어 각각 낱개로 분석한다면, 단어에 관련된 다른 언어들의 지위와 관계들이 모두 무시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언어가 결코 각각 단어의 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생각을 '밧줄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밧줄은 여러 가지의 실로 만들어져있습니다. 각각의 실들(부분)이 모여 밧줄을 구성합니다. 실들 각각은 약하지만, 실들이 모여 밧줄을 만들게 되면 실들 각각이 가지는 힘보다 강한 힘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끊어지지 않는 밧줄이 됩니다(실들을 위아래로 쌓아놓기만 하면 가위로 한번에 쉽게 짤리지만, 밧줄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밧줄과 같이 언어란 낱개로 보면 엉성하지만, 모두가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강력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언어는 그물처럼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물 안에 있는 요소를 하나 잡아당기면, 그 부분만 따로 빠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부분이 따라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그물망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환원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의미상 연관이 되는 모든 부분을 이해해야 언어의 짜임새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대략 이 정도로 될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철학을 살펴볼 것 같습니다. 그 뒤에는 후기 이론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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