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나타난 논리실증주의, 검증주의, 반증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증주의의 태동

16-18세기의 막대한 과학의 발전으로 그를 옹호하는 철학적 사조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사회를 연구/이해할 때 성경이나 형이상학이 아닌 과학적인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존 로크가 이런 철학을 최초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연을 성경이나 관념적인 형이상학이 아닌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이해한 뉴턴을 보았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서술을 실험, 경험, 검증을 통해 수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당대에는 자연을 성경이나 형이상학으로부터 유도하려는 입장이 컸기 때문에 이는 상당한 쇼크였습니다. 로크는 뉴턴을 보고 인간과 사회 역시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학적 성과를 보고 인간과 사회 역시 뉴턴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과학을 방해하는 상전으로서의 철학과, 과학을 도와주는 조수로서의 철학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증명이 불가능하고 검증도 안 되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는 상전으로서의 철학이었습니다.

로크의 사상적 기반 위에 실증주의(positivism)가 탄생했습니다. 본래 꽁트라는 사회학자/철학자가 만든 단어입니다. 기독교적 관념론과 헤겔 등의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서 사회와 인간을 분석하던 시기에, 뉴턴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세계를 수학적으로 이해했고, 그런 성과는 형이상학과는 달리 ad hoc나 변명 없이 불변하는 성질이었습니다. 꽁트는 이에 기반하여 사회학(당시에는 사회학이 인간을 총체하는 학문 전체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은 수학, 물리학 등 확실한 학문 위에 서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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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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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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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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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그는 "사회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positively!" 즉, 적극적으로 연구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적극적'이라는 것은 수학, 자연과학의 도식 위에서의 '적극성'이었습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 물질을 뛰어넘는 관념으로부터가 아닌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뉴턴이 보여준 것처럼 어떠한 주장이 경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철학에서의 '실증'의 개념입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아직 소박한 수준의 것으로서 '소박한 실증주의'라고 불립니다. 이 실증주의가 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고 러셀 등의 학자를 만나 비로소 '논리실증주의'가 됩니다.


논리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구분에 따라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종합명제만이 유의미한 명제라고 합니다. 종합명제란 곧 자연과학의 명제이며, 자연과학의 타당성은 귀납을 통한 이론/법칙의 형성, 현상에 대한 예측에서 '검증'에 있다고 합니다. 즉, 자연과학이 의미있는 이유는 귀납을 통해 만들어진 종합명제들이 실험(포괄적으로는 경험, 감각)을 통해서 옳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있는 명제란 실증적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주의'라는 과학철학적 입장입니다.

실제로 과학의 명제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고, 확인되면서 그 지위를 획득합니다. 어느 이공대의 과를 진학하든 물리나 화학실험은 반드시 배우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로크나 꽁트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철학을 공격합니다. 대표적으로 러셀 같은 학자가 플라톤부터 칸트, 헤겔에 이르는 모든 형이상학을 공격했습니다. 철학은 '검증'되지 않는 영역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윤리적 명제'는 삶에서는 중요하더라도 학문의 대상,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욱이, 형이상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로크식으로 보면 기존의 철학은 모두 과학을 방해하는 상전으로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철학이 해야 할 일은 종합명제와 분석명제를 구분하고, 분석명제의 언어를 다듬어서 과학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검증가능한 일상적인 어떤 문장에서 그 문장에 있는 단어들의 정의(곧 분석명제)를 1-1로 분명히 제시하고, 모호한 언어들(가령 '물, 水'이라는 언어를 제거하고 O2라는 언어로)을 명확한 언어로 나타내어 과학을 도와주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크식으로는 조수로서의 철학이 되겠습니다.


포퍼 : 검증주의는 검증가능한가?

포퍼는 논리실증주의의 문제를 두 가지로 언급합니다. 귀납의 정당성과 검증가능성의 문제가 그의 비판의 화두였습니다.

귀납 논증이란 '전제-결론'으로 이루어진 논증에서, 전제가 부분적으로 결론을 지지해주는 논증을 의미합니다. 모든 일상적인 판단이나 자연과학적 명제는 이에 속합니다. 귀납이란 여러 사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주장을 만들어내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귀납논증은 연역논증(전제에 결론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논증. 가령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나는 죽는다'는 논증)과는 달리 전제를 아무리 분석해도 결론이 연역논증처럼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가령

a는 지구 중심으로 끌여당겨진다
b도 그렇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물질적 대상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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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내의 모든 대상은 지구 중심으로 끌여당겨진다.

같은 논증은 논리학적으로는 옳지 못합니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란 보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귀납을 통해 만들어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법칙들은 논리적 결함을 가지게 됩니다.

포퍼는 여기에 더해 "과학이 검증가능해야한다는 그 주장은 검증가능한가?"라고 공격합니다. 과학이 검증가능성으로부터 지위를 완벽히 얻으려면, 검증가능성 또한 지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유의미한 것은 종합명제뿐입니다. 애석하게도, "과학은 검증가능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경험적인 종합명제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메타적인, 형이상학적인 명제입니다. 논리실증주의는 형이상학을 배제했지만, 과학의 지위를 세우는데 또 다른 형이상학을 만들어버렸으니, 이론적 모순을 안게 됩니다.

포퍼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반증가능성', '반증주의'를 제시합니다. 과학의 합리성, 이론적 지위는 검증주의가 아닌 반증가능성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학 자체에도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고 여겼고, 검증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과학은 활동의 폭이 좁아진다고 보았습니다(가령 우리의 비교관념이나 판단의 기초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지가 않습니다. 칸트식으로는 선험적 구조이죠). 그는 과학은 실증적으로 반증이 가능한 영역으로 규정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과학철학에서 포퍼의 반증주의는 '오류가능주의'를 택합니다. 그에게 과학이란 시행착오를 거쳐 나아가는 학문입니다. 포퍼는 과학에서는 우선 가설을 세워서 가설이 옳은지 틀린지를 그 뒤에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우선 경험을 통한 귀납을 통해 가설을 후차적으로 만들지만, 포퍼는 귀납과 실험이 아닌 가설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습니다. 가설을 우선 세우고 실험을 해보았을 때 그것이 옳다고 판단되면, 그것이 (당대의) 과학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관은 '대담한 추측과 철저한 반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령 포퍼는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모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설을 세운 것이 아니라, 단 한 개의 사과를 보고 가설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담한 추측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경험적으로는 반박이 가능한 명제입니다(아닌 사례가 있으면 부정되겠죠). 그러나 실제적인 현실에서 반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반증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에서 계속 실험을 하여도 그런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이 과학적 지식이 된다고 합니다(철저한 반박). 실제적 현실에서 반증이 안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포퍼는 가설이 반증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 합니다(즉, 가설을 세워두고 반증이 지속적으로 안 되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의심하기만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포퍼에 생각에 따르면 과학은 반증되지 않는 명제들의 집합이 아닌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들의 집합이 됩니다.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경험적 세계가 아닌 추상적, 관념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기에 그 세계에 대해서는 경험으로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또한 맑스주의가 표방하는 '사회과학' 또한 사이비과학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을 경우,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든가, 모순의 양적 변화가 쌓이지 않았다든가를 표방하여 반증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나 주관주의를 다루면 주제가 유물론과 해석학으로 흐르기 때문에 배제하였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사상으로 뵙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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