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까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인 언어그림이론에서 모사설(copy theory), 진리함수론(truth-function)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그 유명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의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언어그림이론 : 명제가 아닌 문장들

언어그림이론에 나타난 모사설에 따르면 모든 요소명제는 단 하나의 원자사실에 1-1대응합니다. 따라서 명제 또한 하나의 사실에 대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명제가 될 수 있을까요?

"신은 존재한다",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인간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장미는 아름답다"

위의 문장들은 명제가 될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저 '문장'들이 명제라고 한다면, 논리적 절차에 의해 항상 참/거짓이 되는 분석명제가 아닌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종합명제가 되어야 하는데, 종합명제라면 과학자들이 요소명제의 진리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저 문장들은 진리치가 정해질 수 있나요?

저 문장들은 진리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저 문장들은 참 또는 거짓만을 진리치로 가지는 명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죠.

저 문장들은 우리가 감각가능한 세계의 사실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서술된 각각의 문장들은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에 대응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에 관한 주장들은 명제가 아닙니다. 세계의 사실에 1-1대응하는 뭔가를 찾아낼 수 없고, 명제의 진리치가 정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에 대해서 어떤 개념으로 설명하는지 자세히 봅시다.


언어그림이론 : 무의미(meaningless)와 헛소리(nonsense)

비트겐슈타인은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이 신비(mystery)의 영역에 속한다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그와 같은 문장들은 진리치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 주장이나 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언어로써는 아무것도 결정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종교 등에 관한 것들을 신비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언어'로써 결정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로써 그것들에 관해서 뭔가를 주장하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헛소리(nonsense)가 됩니다. 언어 밖의 영역을 언어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필연적 모순을 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신비로운 것들이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기도에 대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 형이상학에 대해서 "언어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비로운 것들(the mystical) 전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신비의 영역에 있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학이나 수학, 논리학에 의해서 세계 내부의 사실들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 세계 밖에 있는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은 사실의 영역이 아닙니다. 언어 밖에 있고, 세계 밖에 있고, 따라서 세계에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명제가 아니고, 신비로운 것들입니다.

이것들에 대해서 뭔가 '말'하려는 순간 우리는 헛소리(nonsense)를 하게 되죠. 주의할 점은 이것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논리학, 과학이 차지하는 삶의 영역보다 그 외의 영역, 즉, 신비로운 것들이 차지하는 영역이 더 많고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이 세계 내의 모든 질문들을 답한다고 해도 "나는 왜 사는가, 생존본능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 등은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세계 내에, 위의 질문들은 세계 밖에 즉, 신비로운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무의미한 것은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것(meaningless)은 '3+5 = 파란색'과 같은 것입니다.


언어그림이론 : 보여질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것(the mystical)

신비로운 것에 대해서 말하려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 오류를 범하게 되고, 따라서 헛소리를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비로운 것에 대해서는 완벽한 침묵을 지켜야 할까요?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이와 같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단지 그것들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언어의 한계 밖, 다시 말해 세계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은 세계 내의 표현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것들을 신비로운 것들이라고 하고 그것들은 말해질 수 없고, 단지 보여질 뿐이라고 합니다.

 신비로운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말해질 수 없고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입니다.

가령, 미적인 것(예술)에 대해서 우리는 뭔가를 말하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헛소리(nonsense)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피카소의 그림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러 가지 표현을 써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림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 외에 세계와 언어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그것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등 또한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논거>>의 명제들, <<논고>> 자체도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할 때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소리를 하고 있고, 따라서 <<논고>> 자체는 무의미(meaningless)하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상 <<논고>> 자체는 무의미하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언어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등 <<논고>> 자체는 신비로운 영역을 '보여줄 뿐이다'고 해석하는 것이 좀더 비트겐슈타인에 가까운 해석이라고 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보다는 뭔가를 보여주는(showing)ㅡ언어와 세계의 관계, 세계 밖의 것 등ㅡ '행위예술가'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논고>> 자체는 세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보여 줄 따름'이니까요.

 

언어는 위와 같은 신비로운 것들에 대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어떠한 것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좀더 살펴봅시다.

 

 

언어그림이론 : 요소명제만이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언어는 항상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릴까요? 아닙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비로운 것들은 세계 밖에 있고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명제만이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요소명제는 원자사실에 대한 그림이죠. 나머지 명제와 신비로운 것들은 모두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이자 요소명제들의 논리적 결합입니다. 명제 자체는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요소명제가 세계의 원자사실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고, 이것들을 결합한 게 명제죠. 명제 자체는 요소명제의 논리적 결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명제는 그 자체로는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나머지 신비로운 것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어 밖에, 세계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당연히 그림을 그릴 수 없죠.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 탐구는 이 정도가 됩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며 조금씩 나머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언어그림이론 : 언어철학, 그리고 세계

 

 언어그림이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요소명제에 대해서만 그림을 그리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와 세계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그 자체는 비트겐슈타인과 <<논고>>에 의해서 그저 보여질 뿐입니다. 언어가 세계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머지 부분은 명제와 신비로운 것이 있습니다. 요소명제와 명제 자체는 세계에서 각각 원자사실과 사실에 각각 대응됩니다. 이들은 모두 세계 내의 것에 해당합니다. 특히 명제의 경우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눌 수 있는데, 분석명제는 수학/논리학, 종합명제는 과학이 담당합니다.

 

이것들까지는 말할 수 있는 범위, 언어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범위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제외한 신비로운 영역 자체는 언어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영역 자체는 세계와 언어 밖에 있고, 따라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고, 과학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신비로운 영역의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습니다. 즉, 이것들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언어그림이론을 펼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서, 언어가 세계의 그림을 그리는 한에 있어서는 명확히 말을 하고,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되지 않는 신비로운 영역에 대해서는 과학자나 수학자나 논리학자들이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행위 자체가 언어 밖에 있는 것을 언어 내로 표현하려는 헛소리(nonsense)이니까요. 그것들은 과학자들의 영역이 아니고, 단지 그 자체로 나두고 '보여질 수 있을 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의 임무를 그와 같이 설정합니다. 언어와 세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배제를 하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로써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합니다.

 

즉,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것들은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는 것이 언어그림이론의 결론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이론은 이 정도의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의 영향, 논리실증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전기 사상의 오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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