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게는 철학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논리학도 없고, 언어철학도 없고, ZF(C) 집합론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프레게는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혼자서 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기반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 이전으로 이런 시도를 했던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논리학적 관점으로는 논리주의를 주장했고, 이는 이미 연재한 바가 있습니다(티스토리의 경우 수학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고, 네이버의 경우 철학-프레게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의 언어철학적인 기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일성 문제 : identity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a=b"라는 문장을 봅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서술되는 두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보면 매우 어려운 문제를 표출합니다. 만약 동일성에 대한 표현이 a와 b가 같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같은 대상을 두 번 나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a=a"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a=b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도대체 우리가 같은 대상이 같은 대상임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정보를 주는 걸까요? 만약 동일성에 관한 표현이 대상이 같다는 표현에 불과하다면, 분석적인 명제밖에 되지 않고 어떤 정보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일성 문제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많은 정보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가령 과학적으로 전혀 관련없어보였던 개념들이 사실은 같은 개념이고, 같은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즉 어떤 물리적인 두 수식 K와 M이 있을 때 K=M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근데 만약 우리가 동일성 문제를 대상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면 이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일성 표현이 K와 M이 만약 같은 대상이라는 표현에 불과하다면, 같은 대상을 같다고 하는데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프레게는 그래서 동일성에 관한 표현이 대상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사용되는 기호에 관한 표현이라고 한 번 해보자고 합니다. 가령 RO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석기 = RO의 수장"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동일성 표현이 기호들에 관한 표현, 언어에 관한 표현이라면, "=" 앞뒤에 사용된 기호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프레게에 따르면 이 역시 배제되어야 할 가설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동일성을 표현할 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되는 언어들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석기"라는 표현이 "RO의 수장"이라는 표현과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그 대상들에 대해서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기호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우리가 저 문장을 보았을 떄 "오 이런!!!!"하고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프레게는 이 가설의 경우 사용과 언급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a=b"의 문장에서 a와 b는 동일성 기호 하에서 사용되고 있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프레게식으로 이해하려면 ""a"="b""가 되어야 합니다)


 프레게는 그래서 의미/뜻(sense, sinn)과 지시체(reference, bedeutung)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우리가 동일성 표현에서 표현되는 두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놀랄 수 있고, 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서술되는 두 가지가 지시체의 각기 다른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각각을 표현할 때 그 안에는 말하고자 하는 어떠한 바가 있습니다. 프레게는 그 추상적인 무언가를 '의미'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의미가 표현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를 '지시체'라고 불렀습니다. 의미란 우리가 표현을 발화할 때 놓치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이고, 지시체는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입니다. 의미는 지시체의 어떤 측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어느 날 뉴스를 보았는데 "이석기 = RO의 수장"이라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가 "허걱!"하고 놀랄 수 있는 이유는, "이석기"와 "RO의 수장"가 표현하는 지시체는 동일하지만 각각의 표현은 서로 전하고자 하는, 함축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에 담겨있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 지시체가 서로 다른 측면(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즉, 동일성 표현은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 표현들이 말하는 바가 같은 지시체의 측면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를 얻고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만 지시되는 줄 알았던 지시체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란다고 프레게는 말합니다.




 프레게는 논문에다가 이런 류의 삼각형을 넣어두었습니다. 각각의 빨간 선분을 a,b,c 라고 합시다. 각각의 선들이 교차하는 곳에 어떤 점 D가 있습니다. 프레게는 의미는 D라는 것을 다르게 서술하는 그러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D는 a,b의 교차점으로 서술될 수도 있고, b,c 혹은 a,c 혹은 a,b,c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만약 D가 무게중심이라면 A,B,C 좌표의 수치를 더하여 3으로 나누어 나온 점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프레게는 이럴 때 D에 대한 제시방식(mode of presentation)이 다르다고 합니다. 즉, 의미는 같은 대상을 달리 서술할 수 있습니다. a,b의 교차점이라고 말할 때 D에 대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삼각형의 중점이라고 말할 때 D에 대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다릅니다. 프레게 식으로 말하자면 표현들의 지시체는 같지만 표현의 의미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동일성 문제는 지시체가 가지는 서로 다른 측면(의미)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이 됩니다.


 지시체와 의미는 모두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관념이나 느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두 가지가 주관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일상대화가 무의미해집니다. 모두 공통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 엇나가며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일상대화는 분명 주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공통된, 동시에 객관적인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금천구청역'을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서로가 공유하지 않는 주관적인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천구청역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할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객관적인 무언가를 상정하며 말합니다. 따라서 지시체는 객관적입니다. 의미 역시 똑같습니다. 만약 "1+1=2"이라는 표현을 말할 때 우리가 공통적으로 전달하고자 바가 없다면, 수학적 체계는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무의미할 것입니다. "1+1=2"이 표현하는 바가 객관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이를 인지하고 같은 수식을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는 객관적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문장의 지시체는 진리치(T/F)이다


 의미와 지시체라는 개념의 도입과 함께 프레게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의미는 문장에 나타난 각각의 요소들의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문장의 지시체는 문장에 나타나는 각각의 지시체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이는 프레게 이후 분석철학자들이 수용하는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의미의 경우 우리가 그 문장이 전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지만, 문장의 지시체의 경우 그것이 직관적으로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도 "이석기는 RO의 수장이다."라는 문장에서 "이석기"의 표현이 지시하는 지시체와 "RO의 수장"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지시체는 같지만, 문장 전체의 지시체가 어떤 것인지는 알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문장의 지시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두 가지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1. 지시체 = 명제 2. 지시체가 없음


 1부터 살펴봅시다. 프레게는 우선 지시체가 명제라고 가정해보자고 합니다. "1+1=2"라는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2 대신에 4/2를 집어넣읍시다. 2와 4/2의 지시체는 같습니다. 프레게는 문장의 요소들에 의미는 다르지만 같은 지시체를 넣으면 문장 전체의 지시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문장 전체가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면, 그 대상은 문장이 서술하는 어떤 방식에 의한 것일텐데, 그 대상은 우리가 문장의 지시체들에 의해 뭔가를 판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장에 뭔가 지시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1+1=2와 1+1=4/2가 가지는 지시체가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프레게에 따르면). 만약 이 생각을 따른다면, 지시체가 명제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두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2는 자연수 2에 대해서 말하고, 후자의 4/2는 4를 2로 나눈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다릅니다(하지만 2와 4/2의 지시체는 같습니다). 문장의 지시체가 요소들의 지시체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는 지시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기각되어야 합니다. 프레게는 대신 명제는 문장의 지시체가 아니라 의미라고 합니다.


 프레게는 지시체가 없다고 또한 가정해보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1+1=2"라는 문장이 주어졌을 때, 서술되는 양항의 지시체를 생각하는 것은 뭔가 문장의 지시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문장의 지시체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서술되는 대상들의 지시체를 파악하려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문장의 지시체가 없다면, 우리가 단어들의 지시체를 찾는 것은 헛짓거리이고, 따라서 이 가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프레게는 놀랍게도 프래그머티즘의 사고로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문장의 지시체는 True라는 대상이거나 False라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것이 지시체인가에 대해서 그는 우리가 어떤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파악하려고 할 때 문장의 구성요소의 지시체를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단어들의 지시체를 파악하려는 그 습관이 설명이 된다면, 참/거짓이 지시체가 아닐 이유가 뭐냐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무슨 개소리인가"할 수도 있지만, 이는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로 꽤나 흥미로운 논증입니다. 여튼, 프레게는 우리가 "1+1=2"에서 각각의 지시체를 찾는 것은 전체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프레게는 T/F라는 지시체는 고정적이며, 문장 안에 있는 표현들을 다른 의미이지만 같은 지시체를 갖는 표현으로 대치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지시체는 같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논증은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습니다.


 흥미로운 결과들 : 지시체가 없는 선언적인 표현들


 프레게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지시체가 없는 선언적인 표현들도 있다고 합니다. 가령 "가장 빠르게 0으로 수렴하는 수열은 특정한 유한한 열 k뒤에 다른 수열들의 k번째 항보다 항상 작다"는 표현이 있다고 합시다. 프레게는 이 경우 이 표현의 지시체를 가릴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가장 빠르게 0으로 수렴하는 수열은 없기 때문입니다(0으로 수렴하는 임의의 수열에 1/n을 곱하면 제시된 수열보다 더 빨리 0으로 수렴). 즉, 프레게는 표현의 일부가 지시체를 결여하고 있다면, 표현 전체의 지시체를 논하는 것이 nonsense라고 합니다.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참/거짓을 논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게의 생각입니다.


 또한 프레게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문장이 아닌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양상표현 : It is necessary that ...

2. 마음에 관한 표현 : I believe that ..., I know that..., I hope that...,  


 위의 표현들은 선언적이지만 문장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that절 이하에 나오는 표현들에 대해 의미는 다르지만 지시체가 같은 표현을 대치했을 경우 표현이 다른 진리치를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봅시다.


3. It is necessary that 7<9.

4. I know that kant wrote the critique of pure reason.


 3, 4는 언뜻 보기에 모두 고정적인 참/거짓을 지닌 문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3에서 7대신에 the number of days of one whole weeks을 넣어봅시다. 7<9는 수학적으로 필연적인 문장이지만, 일주일의 날짜의 수<9는 필연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르게 정의할 가능성도 있고, 또한 지구의 위치나 여러 환경이 달라졌다면 일주일 날짜의 수가 7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즉, 7 대신에 다른 수를 집어넣는다면, 3의 문장의 진리치는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3과 같은 양상에 관한 표현들은 문장이 되지 못합니다.

 4도 똑같습니다. kant 대신에 the writer of groundwork of the metaphysic of morals라는 표현을 넣읍시다. I가 지칭하는 대상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것은 알지만,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저자가 순수이성비판을 썼는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단어의 지시체가 바뀌면 문장의 지시체가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에 관한 표현들도 문장에서 제외됩니다.




※쓰다가 빼먹은 게 있는데, 서로 다른 의미가 같은 지시체를 가질 수는 있지만, 서로 다른 지시체가 같은 의미를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의미가 주어지면 지시체는 자동적으로 결정되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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