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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7.20 또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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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5.07.19 상대주의
  5. 2015.07.17 상대주의에 관하여ㅡ삶으로의 회귀 그 이후: 삶과 이데올로기ㅡ 2
  6. 2015.07.16 이단
  7. 2015.07.16 공자와 유교

헬스

일상 2015. 7. 24. 18:31


다니는 헬스장에서 챌린지를 하길래 참가했다. 한 달간 운동해서 체지방 빠진 비율과 근육증가율을 기준으로 등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본인의 게으름도 있지만 일주일 넘게 몸살에 시달리느라 한 달 중에서 절반을 못갔다. 지방-1kg, 근육 +0.7kg의 결과긴 하지만, 역시나 28명 중에 꼴찌다=_=... 개인적으로 정말 아쉽다. 뭐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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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일상 2015. 7. 20. 09:41

또래와 내 인생을 비교해보면 참 처참하다. 난 흔히 말하는 스펙도 하나도 없고, 과외도 안 하고, 과생활도 없고, 이젠 동아리도 안 하니 정말 주위에 사람이 없다. 남들보다 멍청하기까지하니 내 인생은 답이 없다.

가끔씩 그네들의 인생을 보면 너무 즐거워보여서 기분이 심란하다. 함께 대등하게 대화나눌 사람이 없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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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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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집인 Black clouds&Silver Lining에 수록된 곡입니다. 당시 멤버였던 마이크 포트노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만든 곡이라고 하네요.

 

 





심심해서 번역해봤음. 실화이기도 하고 가사가 너무 좋아서. 과거 드러머였던 포트노이가 아버지를 기리며 썼던 곡. 맘대로 자르고 붙이고 해석했음. 포트노이 시점.




(현재시점:포트노이가 곡을 쓰며)...


Remember days of yesterday
How it flew so fast
The two score and a year we had,
I thought it would always last
Those summer days and west coast dreams
I wished would never end
A young boy and his father,
Idol and best friend


추억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그날들이 빨리 흘러갔던가
우리가 함께했던 사십하고도 일년,
나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어
그 여름날들과, 서해안에서 가졌던 꿈이 떠올라
난 그날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
그때 나는 아직 소년이었고
아버지는 나만의 아이돌이자, 최고의 친구였어


I'll always remember
Those were the best of times
A lifetime together
I'll never forget


난 언제나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거야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나날이었어
난 결코 그때를 잊을 수 없어


...


(과거시점:포트노이가 아버지와 어린시절 함께 했던 추억들)


The morning shows on the radio
The case of the missing dog
Lying on the pillows at the old 812
Watching Harold and Maude
The record shops, the stickball fields
My home away from home
And when we weren't together
The hours on the phone


아침에 일어나니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어
누군가의 잃어버린 개에 대한 이야기였어
베개에 파뭍혀 "해롤드와 모드"라는 영화를 봤어
레코드 샵과 스틱볼 경기장들, 모두 집처럼 다녔었지
우리가 같이 있지 않을 땐 몇 시간이고 통화를 했어


I'll always remember
Those were the best of times
I'll cherish them forever
The best of times


언제까지고 기억할 거야
그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이었어
영원토록 그날들을 기릴거야


...


(과거시점:아버지의 죽음)


But then came the call
Our lives changed forever more
"You can pray for a change
But prepare for the end..."

갑자기 연락이 왔어
우리들은 영원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어
의사가 이렇게 말하더군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별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현재시점:회상이 끝남)


The fleeting winds of time
Flying through each day
All the things I should've done
But time just slipped away
Remember seize the day
Life goes by in the blink of an eye
With so much left to say

시간은 너무 빨라
하루하루가 어째서 그렇게 빨라야만 했던걸까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라
하지만 시간이 갑자기 날아가버렸어
지금 있는 기회를 놓치지마
인생은 눈깜빡할 사이에 할말을 너무도 많이 남겨둔채 지나가버리니까


These were the best of times
I'll miss these days
Your spirit lit my life each day

이 이야기들은 내 인생의 마지막 추억들이었어
그때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 같아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내 인생을 이어가게 만들어


...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아버지를 추모하며)


Thank you for the inspiration
Thank you for the smiles
All the unconditional love
That carried me for miles
It carried me for miles
But most of all thank you for my life

내게 영감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를 위해 웃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사랑,
모두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아버지의 사랑은 저를 지금까지 숨쉬게 해요
아버지, 무엇보다도
제 아버지가 되주셔서 감사했습니다



These were the best of times
I'll miss these days
Your spirit lit my life each day
My heart is bleeding bad
But I'll be OK
Your spirit guides my life each day


그날들은 제게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그날들을 그리워할거에요
당신과의 추억은 이젠 제 삶의 의미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요
하지만 괜찮을거에요
아버지의 삶이 저를 계속 이끌어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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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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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

일상 2015. 7. 19. 01:47

 

 

 

 막 올라온 '상대주의에 관하여ㅡ삶으로의 회귀 그 이후 : 삶과 이데올로기ㅡ'는 사실 작년에 썼어야 했던 글이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미루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원래는 본래 글의 부록 2에 있었던 내용인데, 철학과는 약간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해서 내용을 뺐었는데, 글을 따로 파서 본격적으로 쓰다보니 9페이지가 되었다.

 

'삶과 이데올로기'를 기획하면서는 사실 정치철학도 조금 넣어볼까했는데, 역시나 전에 썼던 글의 성격 때문인지 넣기가 꺼려져서 빼게 되었다. 그러나 굳이 넣지 않더라도, 글을 잘 이해한 독자라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해본다.

 

 상대주의 시리즈를 완성하려면 아직 한 파트가 더 남아있다. 본글에 있었던 부록 1을 쓰는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삶으로의 회귀 이후 학문과 이성의 지위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 역시 본 글의 주제와는 약간 상이해질 수 있고, 글쓰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기에 아에 따로 빼버렸다. 1년만에 부록2를 썼으니, 부록1는 또 언제 나오련지 모르겠다. 그쪽 글은 아마 본래의 글과 흄, 과학주의, 해석학, 프래그머티즘의 견해를 분석하는 식으로 내 의견이 전개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삶에서는 제임스식의 프래그머티즘, 학문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흄을 매우 좋아하니 좀더 자세히 공부해보고 써야할 것 같다.

 

 사실 방학에 기독교에 대해서 장문의 글을 썼고, 상대주의에 관한 글도 하나 썼으니 이만하면 많이 썼지 않나싶다ㅋ 지인들에게 읽어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나지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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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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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4 9페이지 분량입니다. 7월 17일 저녁부터 19일 1시 30분까지 썼습니다.

 

※ 본고는 '상대주의에 관하여ㅡ철학·학문·이성의 붕괴와 재건축ㅡ'의 'Ⅴ.삶' 이후에 쓰여지는 글입니다. 따라서 Ⅰ-Ⅴ까지의 내용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 글은 논문으로 제출된 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은 모두 버리고 논리만을 적었으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 글만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이 글은 제출용이 아니라 다른 스타일로 글을 전개했으니, 읽다보시면 그냥 이해가 되실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Ⅵ. 이데올로기[각주:1]

 

 삶으로의 회귀 이후 삶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체험과 경험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삶으로부터 연역된 것이고, 그런 하에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람마다 삶의 입장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현실적인 충돌은 불가피하다. 삶의 입장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면, 우리가 삶의 입장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이 입장은 얼마나 합리적인가'라기보다는, '이 입장을 어떻게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을까'일 것이다.[각주:2] 이는 정치적인 충동으로, 자신이 믿는 가치를 현실의 영역에서 타인들에게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의 논의를 불러일으킨다.[각주:3] 따라서 이에 가장 근접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여러 학자의 정의들이 있지만, 본고는 이데올로기를 ‘공동체적 삶의 입장’이라고 정의한다. ‘삶의 입장’이라는 것은 이성이 아닌 삶에서부터 쌓아올려진 입장을 뜻한다. Ⅴ에서 규정된 삶의 특성상 ‘삶의 입장’은 어떤 이론에 의해서 분쇄될 수 없다. 삶의 입장은 개인의 삶에 의해 절대시되기 때문에, 삶의 입장이 분쇄된다면 그에 합응하는 개인의 삶과 체험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같은 삶의 입장을 지닌 집단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데올로기는 삶으로부터 연역된 입장이지만, ‘입장’인 한에서 삶에서 쌓아올려진 특정 전제들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삶의 영역에서 그 전제들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 전제들은 이성의 영역 내에서는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순수한 이론의 영역에서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취하는 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 중 한명이라도 그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절대시화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데올로기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인 것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이론체계로서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정밀한 체계를 지닌 ‘이론’으로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론체계로서 제시된 이데올로기는 이성적 활동에 의해 증명되거나 반증되지 않는다. 이성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공동체원의 삶에서는 이데올로기는 절대시되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데올로기는 절대시될 수 없다. 바로 이 간격에서 이데올로기를 지니지 않거나 다른 이데올로기를 지닌 개인들에게 어떻게 자신이 지닌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가 문제시된다.

 

 이데올로기의 수행은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인 참이라고 가정하고 수행하는 공동체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증명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우선 이데올로기가 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참여는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외부의 사람에게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믿음의 생산과 재생산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이론적으로 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이론적인 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영역에서만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일 수 있으므로,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문제는 이론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바뀌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의 수행자는 이데올로기 외부의 사람에게 이데올로기가 이론적인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신, 그것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믿음을 만들기 위한 어떤 행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만들기 위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즉, 믿음을 만들기 위한 믿음과 믿음 사이의 순환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 내부에 있는 사람은 이데올로기 밖에 있는 사람을 위와 같은 구조 안에 넣어주면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이 행위는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자가 이데올로기 밖에 있는 자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이데올로기의 수행자는 삶의 직접적인 개입[각주:4]을 통해 이데올로기 외부의 사람의 삶을 변화시킴으로서 외부인을 위와 같은 구조 속에 넣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데올로기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지며 재생산된다.[각주:5]

 

 

Ⅳ-Ⅰ. 법, 도덕 이데올로기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덕을 숭고한 가치로 여기며, 결국은 (올바른) 법과 도덕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옳을 수 있는지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그저 '도덕과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계속 주장해왔고 이를 숭고한 가치로 여기는 공동체원들의 물리적인 수단에 의해 그것들이 강제되어왔다는 것뿐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도덕과 법의 지위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도덕과 법을 지켜야하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본고는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상대주의적 입장에 따라, 그 근거는 이론적으로는 없다고 본다.[각주:6] 그렇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흉악 범죄자라고 사회가 규정짓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흉악 범죄자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상을 들이밀며 "인간도 아니다", "짐승이다",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는 '이론적인 근거'는 없고, 다만 그들이 삶에서 경험해온 것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런 존재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흉악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는가? 그런 근거가 있는가? 본고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는데,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는 상당히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법이나 도덕에 이성적인 근거가 없이, 그저 공동체원이 그를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예비 범죄자나, 범죄자들에 대해 그들의 행위를 내면으로부터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누군가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그에 성공했다면,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본고에 따라 그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그저 다른 삶의 기준에 의해 행위를 했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주의적 논리를 받아들이는 예비 범죄자는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사회에 만연한다면, 이는 홉스가 원시상태의 인간에 대해서 언급했던 오로지 공포만이 가득한 혼란의 상태일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더라도, 우리가 그를 내면으로부터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논의는 어떻게 이해 되어야하는가.

 

 필자는 위와 같은 상황이 인간이 직면한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고는 상대주의적 입장에 따라 극악 범죄자와 평범한 사람의 인생 중에서 어떠한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본다. 그런 판단을 위해서는 어떠한 정당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준의 절대성은 본고의 논지에 따라 부정된다. 또한 범죄자의 인생을 체험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범죄자에게 비난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옳을 수 있는가?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범죄자의 인생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낫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개인의 삶이 그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나 비도덕성이 일상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은 도덕이나 법 자체에 고유한 지위가 있거나 사후세계에 절대적인 심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거대한 공동체적 삶이 그를 삶에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있지 않고, 범죄를 거부하는 공동체원들의 집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도덕이나 법에 쓰인 논리란 법, 도덕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물리적인 폭력 이후에 차후적으로 처벌에 대한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일 뿐이다.[각주:7] 특별히 징벌로서의 법이란 국가단위의 거대한 폭력이 직접적인 현실에서 사회에 속한 존재들이 자신에 반하지 못하도록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데올로기의 합리성과 이론성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타자에게 이를 강제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방법은 이론이나 대화가 아닌, 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물리적인 수단[각주:8]'을 통해서이다.[각주:9] 실제로 현실에서는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처벌을 가해지고,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무너지게 된다. 도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더라도, 주변인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며 크게는 금전적인 손실까지 입을 수 있다.[각주:10] 물리적인 폭력만이 이데올로기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며, 공동체가 가진 온갖 권력들[각주:11]을 사용하여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처벌 같은 경우, 처벌에 대한 상상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실제적으로 거부할 수 없을 뿐더러, 이데올로기의 논리들은 거부가 아닌 준수해야 하는 대상임을 내재화하게 된다. 이를 내재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이데올로기 내부의 개개인들은 이를 자기자신에게만 강제하지 않고 타인에게도 강제하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이를 통해 모든 공동체원들은 서로가 서로의 자연스러운 감시자가 되며 더욱 강력히 이데올로기에 묶이게 된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논리들을 잘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고 그 관념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이는 공동체원들의 독려와 칭찬 등도 한몫한다).

 

 

Ⅵ-Ⅱ. 기독교 이데올로기[각주:12]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를 믿게 되며,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보내게 되는가? 본고의 논지에 따르면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서 신[각주:13]의 존재성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삶에서 어떤 물리적인 작업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된 것이며,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선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직접 '교회[각주:14]'라고 불리는 장소에 주기적으로 참여한다. 이 장소에서는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의 자녀'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교회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이 호칭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공식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형제님'이라든가, '자매님'이라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언급되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호칭이 지시하는 대상과 호칭을 연결 짓게하는 효과가 있다.[각주:15] 이는 여러 방식을 통해 작동한다.

 

 기독교의 공식적인 예배는 크게 '찬양-기도와 신앙고백[각주:16]-말씀-기도(와 찬양)-헌금과 축복-광고[각주:17]'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찬양의 내용은 꼭 그렇다 할 수는 없지만 대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나 '신의 사랑', '복음에 대한 기쁨', '삶의 고난'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자의 경우, 찬양을 하면서 자신에게 각인된 '신'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삶과 연관시킨다. 자신이 신과 함께 하며 했던 여러 체험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수긍을 표한다. 이를 통해 '신'이라는 개념과 기독교인들은 더욱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게 된다. 비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신과의 관계가 없으므로 그저 노래만 부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찬양에 사용되는 언어는 기독교적이므로 그 언어를 듣고 직접 사용함으로써 그는 개념적으로 기독교와 점점 가까워진다. 기도와 신앙고백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기도를 통해 물리적으로 무릎을 꿇거나 손을 모으고 '신'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뇌리에 가져오게 된다. 기도는 성격상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시작하게 된다.[각주:18] 기도를 통해 '신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기도를 하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든, 기도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 사람은 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더욱 보내게 된다. 또한, 기도는 신과 인간만의 개인적인 시간인데, 이를 통해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친밀성을 쌓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각주:19] 이를 통해 누구든지 자기자신과 '나는 신의 자녀'라는 관념을 지속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말씀(설교)'이다. 말씀에는 설교자[각주:20]가 있다. 기독교의 설교는 설교자가 예배당의 맨 앞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설교자의 위치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자리보다는 약간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고, 설교자는 십자가가 그려진 탁상에 위치한다. 이러한 위치선정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효과를 낳게 한다. 우선 설교자가 예배당의 맨 앞, 바닥보다는 약간 높은 쪽에 위치함으로, 예배당의 다른 공간과 설교자의 공간을 분리하게 한다. 이는 청자에게 설교자가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설교자의 위치에서 신의 말씀이 전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서 있는 공간은 곧 신이 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설교가 시작되는 탁상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음으로 인해, 탁상 주변의 공간에 신성하다는 인식을 낳게 한다. 이런 위치 선정은 설교자의 발언에 신뢰와 권위를 실어주며, 청자에게 설교자가 신과 가까운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설교자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므로, 이런 자리선정은 청자는 신을 더욱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설교는 대개 대표적인 성경구절들을 모두가 같이 읽으면서 시작된다. 설교자들은 대개 그에 대해 "하나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라고 한다. 그리고 뒤에는 자신이 그 말씀을 받게 된 계기, 말씀에 대한 해석, 그와 관련된 자신의 체험을 전하며,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청중들에게 보내는 말씀을 당부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실제로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그런 말씀을 어떻게 주었는지, 직접 주었는지는 청중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초반에는 누구나 그의 발언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설교자 자신의 체험을 듣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 강도 높은 신뢰를 보내게 된다. 전술했듯이, 체험은 개인에게만 고유하다. 삶의 체험은 직접 감각을 통해 개인에게 전해지기에, 이를 겪는 개인에게는 확실성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체험의 성격상, 언어를 통해 체험을 듣는 청자의 경우에도 타인의 체험을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를 듣는 청자는 설교자의 고유한 체험을 통해 설교자에게 '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청자는 '신'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되고, 설교자에게 있었던 체험이 자신에게도 나타날 것을 기대하게 된다.[각주:21]

 

 공식적인 예배 외에도 교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부 모임[각주:22]'이 있다. 대개 공식적인 예배 후에는 소규모의 모임이 존재한다. 이 모임에서도 예배는 존재할 수 있으나, 대개 간소하게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식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소규모 모임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같은 지위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신의 삶과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 같이 높은 권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대개 같은 나이대의 평신도들과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이 모임에서는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 쉽다. 이 모임에는 '삶나눔'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삶나눔이란 모두가 자신이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았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이어나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다. 같은 나이대,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라 삶나눔은 대개 매우 진솔하다. 삶나눔 시간에는 솔직한 본인의 경험을 진술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친밀도와 신뢰가 쌓이게 된다. 특히, 고민이 있는 경우는 주위에서 자신이 '체험'한 신을 언급하며 조언해주는데, 체험의 성격상 이러한 작용은 구성원에게 '신'이라는 개념을 자신과 효과적으로 연관짓게 한다.

 

 지금의 논의를 잘 따라왔으면 이해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데올로기는 결코 관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위의 과정은 모두 직접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노래를 부르고,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성립된다. 모든 과정이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뢰는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여러 물리적인 행위들에 체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생겨나고, 특히 구성원들의 체험과 경험담은 큰 효과를 발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속한 사람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도 높은 신뢰를 가지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데올로기 내부의 믿음의 순환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사례를 들었지만, 이는 기독교만의 사례는 아니고 이데올로기 전체가 생산-재생산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느 이데올로기든 이데올로기가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이름이나 지위,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들이 있을 것인데, 그 모든 이름/지위/논리들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는 필수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위와 같은 과정이 어느 이데올로기에나 필수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자신이 겪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내놓게 된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세뇌'라든지 '비합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쉬운데, 이데올로기의 특성상 이는 옳지 않는 비판이다. 이데올로기를 우선 받아들이게 되면, 이는 본인의 삶에서 '참'이라는 판정을 받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이데올로기는 작동하게 되며, 삶의 모든 현상은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거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고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독자에게 이데올로기란 참과 거짓으로 나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옳다"라거나 "공산주의는 틀렸다"라든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모든 것은 미래에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물리적으로 환원될 것이며, 모든 미신은 사라질 것이다"든가 하는 발언을 듣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그렇게 판단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가라고 묻고 싶다.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특히 이 글을 읽는 독자)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물론 삶을 원활하고 역동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를 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며, 표면적인 삶을 살아갈 때는 그리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근본적인 측면에 있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이데올로기란 과연 옳은가? 본고는 그렇지 않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으며, 이데올로기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인간의 삶의 체험이 그를 받아들였고 절대화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이데올로기의 논리는 삶의 표현을 다듬은 것에 불과하다.[각주:23]

 

 누군가는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모든 이데올로기가 이론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면,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택해야 하는 이유는 있으며, 이데올로기란 비교할 수 있으며 비교가능하다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러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데 그 평가들은 모두 틀렸단 말인가?"라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다. 본고는 사람들이 여러 이데올로기에 대해 평가하는 것들은 이론적인 측면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작동가능하고 드러나거나 드러날 수 있는 측면에서만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누구도 이성이 모든 것으로 무(無)로 집어삼키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들의 비교도 그렇다. 이데올로기들의 비교는 개인의 삶에 대한 현실적 '적용', 공동체의 삶에 대한 '적용'에서만이 비교가능하다. 따라서 본고는 독자들에게 "어떤 이데올로기가 더 합리적인가?"가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가 효과적인가(혹은 효율적인가)?"를 묻기를 권한다. 이데올로기의 비교는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혹은 이상적인가, 혹은 이론적인가가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가 효과적인가, 어떤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인 삶의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곧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것과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Ⅶ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Ⅶ. 삶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의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현상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각주:24] - 마르틴 하이데거

 

 

 우리가 어떤 것의 의미를 물을 때, 그 질문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 질문은 물어지는 대상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본질을 알 수 있는 직관이 주어졌는가?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본질이라 판단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본질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현상뿐이다. 우리는 현상을 통해 그 뒤에 숨어있을 것이라 판단되는 어떠한 관념이나 본질 등을 파악하려고 한다. 현상은 확실하지만 그 뒤의 본질은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판단하기 어렵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삶의 입장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우리는 현상에 대해 그것들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투영한다. 바로 그 투영이 현상에 대한 판단이자 인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질에 대해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인식은 아닌 자신을 현상에 투영한 것일 뿐이다. 이는 곧 '나의 본질'이며, 더 나아가 자기자신에 대한 거울이다(즉, 현상에 대한 본질판단은 자기자신에 대한 거울이다). 만약 개별자로서 '내'가 대상에 투영시킨 '나의 본질'이 아닌, 본질 그 자체를 묻게 된다면 현상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하이데거의 격언을 깨달을 뿐이다. 본질 그 자체를 묻는 것은 어느 선을 넘으면 우리의 삶, 우리가 판단의 근거로 삼는 삶을 떠나게 된다. 우리의 인식과 논리가 닿을 수 없는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인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이 믿는 이데올로기가 가치있기를 바라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미 또한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이데올로기 자체에서는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떠난 의미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현상뿐이다. 누군가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의미가 있기를 바랄 수 있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허공으로 맴돌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에는 본질적인 의미는 없고, 다만 현실적인 의미만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떠나 어떠한 것을 판단할 수가 없다. 현재 인간은 공동체로 삶을 이루고 있고, 누구나 집단을 떠나 살 수가 없다. 작게는 가족, 크게는 국가까지,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여러 가지를 학습하고 내재화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모든 공동체의 모든 논리를 벗어나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의 판단은 대개 유일무이한 개별성을 띠지 않고, 공동체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 것들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버릴 수 있는가? 이는 현상을 그 자체로 바라본다는 장자의 '초월'개념과 같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는 모든 판단중지를 의미한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든 싫든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야만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고 있다.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위는 비단 이데올로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 역시 그렇다. 적지 않은 경우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학성을 띤 의미를 묻기 쉽다. "삶이란 무엇인가" 등의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이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위의 질문은 "내 삶의 체험은 나에게 삶이란 어떠한 것이었고, 어떠한 것이고,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과 이데올로기, 삶의 입장이 내포하는 것들을 떠나 삶 자체에 대해서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얻을 수 없다. 의미있는 것은 오로지 '내 삶'이고 '내 삶과 관련된 의미'이다. 체험을 만드는 현상을 떠난 판단이란 빗나갈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의미가 아닌 '내 삶과 내 체험'에 대해서 묻는다면,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문제를 꺼낼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삶의 입장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삶의 입장을 취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가는 상대주의적 입장에 따라 본고가 답할 바는 아니며, 이는 개개인의 삶에서 결정할 문제이다. 직접적인 삶과 삶이 부딪치는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들어야만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경인, 「상대주의에 관하여ㅡ철학·학문·이성의 붕괴와 재건축ㅡ」

Althusser, Louis,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Trans. by Ben Brewster. London: New left Books, 1971. 127-188.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강성훈, 「랑시에르의 교육학 비판」 『교육철학연구』, 35(2013).

강성훈, 「루소사상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서의 ‘종교’: 플라톤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교육철학』, 49(2010).

김창래, 「고르기아스의 세 번째 난제에 대한 해석학적 대응 ㅡ회의주의와 함께, 그리고 회의주의를 넘어서ㅡ」『철학연구』(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30(2005).

김창래, 「인간의 원상(idea)에 관한 연구: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 개념으로서의 상과 형성」 『철학연구』, 75(2006).

 

 

  1. Ⅰ-Ⅴ까지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논리의 대상이 현실을 떠나있었으나, 이 부분부터는 글의 대상이 보다 더 현실에 있다. [본문으로]
  2.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는 이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개개인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제하지 않는 세상을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를 판단할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본고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그런 생각을 타인에게 물리적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3. 즉, 삶으로의 회귀 이후 삶에서는 순수이론으로서의 철학은 종결되고, 오로지 삶의 역동성과 이데올로기들의 충돌만이 남을 뿐이다. [본문으로]
  4. 꼭 직접적인 개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타인의 가치관이나 이득, 기존의 삶의 입장에 얼마나 유사하고, 가까운지를 보여주는 것도 믿음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문으로]
  5. 구체적인 방안은 여기서 언급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이글은 언제까지나 '상대주의 철학'과 연관될 수 있는 부분을 다룰 것이다. 이쪽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교육사회학, 사회학이나 종교학을 공부해보기를 권해드린다. [본문으로]
  6.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나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므로 각주를 통해 짧게나마 언급하겠다. 도덕과 법은 짧게 올라가면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약설, 길게는 자연법이나 신으로부터 연역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은 과연 정말로 옳은가? 신으로부터 연역하는 경우, 우리는 우선 신(절대자)의 존재성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나 본고의 입장에 따라 이론적으로 신을 증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도덕이나 법의 지위가 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응당 인간으로부터 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절대적이지 않은, 합의된 어떠한 것일텐데(혹은 내재적일 수도 있지만 결론은 같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이를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다. 누군가 이를 거부하는 자에게 그의 거부가 자신들의 합의에 따라 절대적으로 틀림을 증명할 수 있는가? 결국 공동체나 국가적 수단에 의해 인간이 이를 통제할 뿐인데, 국가나 공동체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보증되는가? 아마도 이는 사회계약설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성립될 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가 이를 지켜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로크의 '암묵적 동의'라는 개념을 꺼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나 사회이므로, 우리는 그저 실질적인 거부권이 없이 거대한 물리적 폭력 앞에서 체념하며 살아갈 뿐이다. [본문으로]
  7.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육에 의해 그 논리들은 공동체원에게 절대시되며, 물리적인 폭력은 정당화된다. [본문으로]
  8. 이데올로기에 물리적인 수단이 등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에게 가장 영향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닌 구체적인 '살아감'이고, 이에 가장 확실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감각할 수 있는 물리적인 수단임이 틀림 없다. [본문으로]
  9. 모든 이에게 이데올로기를 대화를 통해 받아들이게 할 수 없음도 이에 크게 기여한다. [본문으로]
  10. 물론 물리적인 수단이 반드시 공격적인 것으로만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타자에게 이득이 되거나, 타자의 삶의 입장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물리적인 수단을 적용해서,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도록 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
  11. 금전력, 정치적인 권력, 주변인, 학문적 지식 등 사용할 수 있는 범위는 광범위하다. [본문으로]
  12.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본고는 신의 존재성 여부는 개개인이 삶에서 선택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본고는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신의 존재성과는 독립적인 문제라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이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후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본문으로]
  13. 별다른 언급이 없는 이상, 이후에 언급되는 모든 '신'이란 단어는 신약-구약의 성경에서 언급하는 신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14. 흔히들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믿는 단체이고, 교리적 해석에 따라 개신교와 천주교로 나뉜다. 성경에는 '성당'이나 '교회'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교회'로만 언급하고 있으니, 이에 따라 본고 역시 두 장소 모두 '교회'로 사용한다. 또한 천주교 용어인 '미사(missa)' 역시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언어로, '예배'나 '미사'나 모두 '예배(worship)'로 통일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5. 이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호명테제로 빌려 왔다. [본문으로]
  16. 신앙고백의 순서는 다를 수 있다. 보통 말씀 이전이나 축복 이후에 나온다. [본문으로]
  17. 기독교 언어에서 '광고'란 이후의 순서와 교회 행사에 대한 언급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8. 비기독교인의 경우 '신이시여, 당신이 있다면-'으로 기도가 시작될 것이다. 그 이후의 기도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하는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19. 기독교에서는 기도는 신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소통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즉, 기도란 신과 하는 친밀한 대화라는 것이다. '대화'는 대화하는 자들의 존재와 인격을 인정함으로서 가능하다. 이런 인식 속에서 기도란, 분명히 '신'이라는 개념을 자신과 결합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본문으로]
  20. 대표적으로는 목사나 신부가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전도사, 강도사, 선교사 등이 있다. [본문으로]
  21. 신앙고백이나 헌금 및 축복, 광고는 크게 언급할 바가 없으므로 넘어간다. [본문으로]
  22. 청소년부, 청년부 모임, 장년부 모임 등을 말한다. [본문으로]
  23. 또한 우리는 믿는 것이 참이기를 바라고, 참인 것을 믿기를 바란다. 논리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측면도 크다. [본문으로]
  24. 존재자들의 절대근거인 피안너머의 '존재'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가 왜 그렇게 말한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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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기독교 2015. 7. 16. 21:32

 

 

 

 오늘 길 가다가 팜플렛을 주길래 당연히 그냥 교회인줄 알았는데, 여호와의 증인이었다=_=.. 보통 여증은 남녀 두분이서 검은색 정장입고 팜플렛 판대 세워놓고 관심있는 사람 끌어들이는 식인데, 지방이라 그런지 그냥 전도하시나보다.

 

 또 학원끝나고 오는 길에 어떤 분이 설문조사를 하시길래 응해줬는데 설문결과를 알려주기 위해서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뭔가 신천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보통 설문조사는 만나자고는 안 한다). 우선 내일 학원 끝나는 시간 좀 지나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 생각엔 이쪽 접근방식은 거의 100% 신천지라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나는 순하게 생겼다(즉, 뭐든지 잘 들어줄 것 같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 때문인지 종교 관련해서 너무 많이 얽혀온 것 같다. jms부터 신천지, 여증, 하나님의 교회(집에 찾아오심ㅎㄷㄷ), 대순진리회까지 한두번도 아니고.. 교내에서는 매주 한번 이상은 만나는 것 같다.

 

 나는 왠만하면 남 이야기는 다 들어주고, 주는 팜플렛은 다 받아서 읽는 편인데 그러다보면 피곤한 일이 참 많이 생긴다. 그 때문에 "관심있는거 아니었어?ㅡㅡ" 하는 식으로 뭐든지 오해를 받기도 하고.. 제발 좀 그만 얽혔으면 좋겠다.

 

 이쪽은 완전히 악질이라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고.. 예전에 하나님의 교회를 만난 것을 계기로, 개인적으로 겪었던, 지인들이 겪었던 이단접근방식과 후기를 썼었는데 걔네가 신고해서 글 날라간 적도 있는지라 좋은 감정이 없다.. 그때 좀 도움이 되라고 글 진짜 길게 쓰느라 시간을 얼마나 썼는데.. 특히 하나님의 교회랑 신천지는 악질이다 악질.. 네이버 이단상담카페들도 그렇고, 네이버 평의협(평신도이단 대책협의회) 같은 경우는 글이 올라오는 족족 다 신고먹는다. 나도 몇 번 썼었는데, 다 날라가서 화가 많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

 

 

 이단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얼마나 치밀한 논리를 사용하고 어떻게 사람을 현혹시키는지를 진짜 잘 모른다. 실제로 "교회 제대로 다니면 그런 거에 홀릴리가 없잖아?"하는 식인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이단에 빠진 책임을 개인에게만 몰아가는 교인들도 있으니 답이 없다). 내 친구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는 신천지 추수꾼 한명의 엄청난 노력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는 사태까지 이르렀을 정도다(그 교회가 문제였다고 판단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이단에 대해서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국에는 이단 사역하시는 분도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평생 고난의 길이다. 이쪽으로 아시는분은 온갖 이단으로부터 고소, 고발 때문에 고생하시고, 이단상담소가 그쪽 인물들에 의해 공격당하기도 부지기수다. 가족을 들먹이면서 협박도 받으신다니 사실 말 다했다.

 

 한국 교회가 이단에 대해 조금 더 경계심을 가지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어렵다. 교회에서 이단 논리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누구를 섭외하지도 않고, 그냥 교회 잘 다니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나가니깐말이다.. 사실 일반 교회보다는 이단이 더 체계적이기도 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단수가 많지 않음을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 이단은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내 주변에만 해도 얼마나 자주 접할 수 있고, 이단 가족을 가진 분이 적지 않다.. 어느 대학에나 이쪽 모임은 항상 있기도 하고.. 교내에서는 본인 학번/과와 단체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하시지 않을래요?"하면 사실상 100% 이단이다. 정상적인 교회(사실 무엇이 정상적인 교회냐 하면 또 복잡하다)에서는 자체적으로 성경모임이 있기 때문에, 팜플렛 나눠주면서 "저희 교회 한번 방문하지 않으실래요?"라고 접근하지, 성경공부를 빌미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나는 상대주의자라 본인이 뭘믿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지만, 직접 다녀본 결과 그래도 이쪽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고, 사고가 마비된다는 느낌이다.

 

 

... 이 글은 신고먹지 않겠지?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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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유교

단상 2015. 7. 16. 12:30

공자는 그의 애제자인 안회가 사후세계에 대해 물었을 때, "현실세계도 다 모르는데, 내 어찌 사후세계를 알겠는가"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서양과 다르게 전통유교에서는 이론적으로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물론 시간이 지나며 도교 등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상당히 분리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지만). 그래서 "신이 벌하실 거시다!"같은 말보다는 "조상께 부끄럽지 않느냐" "역사가 두렵지 않느냐" "후인들에게 좋은 예는 남기지 못할망정!" 등의 발언이 자주 사용되었다. 서양에서 사람들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신을 불러왔다면, 유교권에서는 주로 역사를 언급했다(물론 天같은 개념도 사용되지만). 도덕을 언급할 때도 성경이나 신으로부터 연역하지 않고 아닌 인간본유의 도덕'감정'에서 "아이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맹자)", "본인만이 즐기는 것보다는 백성모두가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맹자)" 같은 발언을 했다. 도덕을 물리법칙과 연관지어 일상생활을 통제했던 것도 주목할만하다.

공자의 발언에 주목해본다면, 위와 같은 측면들은 헤브라이즘에 대비되는 유교만의 현실주의적인 모습이 아닌가싶다.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니까 대개 "신이 없다면..." 식의 논리를 피기 쉬운데, 유교는 신이 없어도 도덕이 어떻게 인간에게 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가 아닌가싶다.

유교/유학은 기독교나 여타 서양철학과 사상에 비교해서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괜찮은데, 일제가 심어놓은 '조선미개인들!'같은 사고나 양키놈들 문화숭배 때문에 전공자도 없고 많이 안 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다. 자국문화 배척하고 외국문화 숭배하는 건 조선고유의 혈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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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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