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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파일이 논문 최종제출안이고, 둘째가 초안입니다. 크게 다른 건 없으니 둘 중 아무거나 선택해서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상대주의에 관하여ㅡ철학·학문·이성의 붕괴와 재건축ㅡ

 

 

<요약>

상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을 부정하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 또는 저 입장이 아니라 철학, 학문, 이성이 처한 논리적인 현실이다. 본고는 상대주의적 현실이 철학에 의미하는 바를 고찰하며, 이를 통해 철학·학문·이성은 이론의 영역에서 붕괴됨을 밝힌다. 붕괴된 이성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님(無)으로 규정하고, 이성이 아닌 삶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한다. 삶으로 돌아온 이성은 삶에 의해 재규정되며 철학과 학문은 삶에 의해 의미를 되찾게 된다. 본고는 위와 같은 논지를 우선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소개를 통해 전개하며, 논의를 철학·학문·이성·삶으로 넓혀간다.

 

주제어 : 절대주의, 상대주의, 이성, 삶

 

 

Ⅰ. 들어가며

 

 

이 시대에 철학이란 외연이 매우 넓어져서, 철학을 정의하기란 매우 힘든 작업이고, 한 개인이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서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방향을 잡아두고자 한다.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흐름에서 철학함이란 다분히 ‘사유 극한의 체험’을 의미하고 철학이란 철학함의 언어적 표현이라 하겠다.

 철학함을 사유 극한의 체험으로 이해한다면, 철학자의 임무는 철학적 사유의 끝을 탐구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철학적 사유의 두 극단에 있는 상대주의, 절대주의를 탐구하여 그것들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각주:1] 실체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상대주의는 부정되고, 상대주의에서 절대주의는 부정된다. 특히 상대주의는 많은 경우에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선 철학의 선이해에 의해서, 철학은 부정당하는 상대주의를 자신의 영역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의 경우인 절대주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위의 대치되는 두 입장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극한의 철학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Ⅱ. 상대주의

 

 

 이 글에서는 우선 아래와 같은 테제를 포함하는 철학적인 주장들을 모두 상대주의로 규정하고자 한다.

 

“nothing exists; and if anything exists it is unknowable; and if it exists and is knowable, yet it cannot be indicated to others.”[각주:2]

 

 위의 세 가지 테제는 고르기아스의 3대 난제로 알려져 있다. 세 가지 난제는 결국 진리를 설정하는 ‘기준의 부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각주:3] 즉, 이런 맥락에서 상대주의란 절대적인 기준, 더 나아가 기준을 부정하는 철학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상대주의란 결국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한다’라고 말하는 셈인데, 이에 대해서 형식논리적인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상대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한다’는 테제를 자신의 입장으로 삼는다면, 형식논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한다’는 테제에 대해서 그것 자체를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의 테제 자체가 상대주의에게 있어서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에 상대주의는 자신의 테제에 의해서 부정되고 만다. 즉,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하다면 상대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하다고 말하는 자체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부재하게 된다. 따라서 형식논리에 의하면 상대주의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식논리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상대주의는 절대주의의 입장에서도 비판받을 수 있다. 상대주의는 결국 보편적인 진리와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지향점이 부재하게 된다. 상대주의에게 있어서 어떤 가치체계가 존재하든지 그것을 따를 이론적인 근거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절대주의의 입장에서 상대주의는 가치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영역에서 상대주의자는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상대주의적 삶은 아무것도 아님(無)과 같다. 이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절대주의자들은 현실적 삶의 영위, 가치체계의 설립을 위해서 상대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셈이다. 더 구체적인 영역에서, 상대주의적 입장에서는 도덕적 삶이란 불가능하다. 도덕적인 삶을 영위해야 할 이유와 근거가 없다고 상대주의는 말한다. 바람직한 인간상, 사회상을 논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상대주의자에게는 어떤 정당성도 지니지 않는다. 이는 윤리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어떠

한 절대주의들에 있어서 지양되어야 할 것이고, 비판될 것이다.

 

 두 가지 비판에 대해서 상대주의는 논박되는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상대주의는 위와 같은 비판들에 대해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절대주의는 상대주의를 ‘지향점 부재’라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지향점 부재가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지향점 부재가 비판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절대주의적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체계일 텐데, 상대주의는 이에 대해서 그 체계의 근거와 기준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형식논리에게도 통한다. 형식논리의 상대주의 공격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형식논리의 타당성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절대주의를 공격했던 것처럼 형식논리를 공격할 수 있다.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형식논리를 절대화할 이론적인 근거는 없다.

 

 위와 같은 비판·재비판에 대해서 상대주의는 기준의 부재를 통해 스스로가 인식론적으로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상대주의의 정당화를 통해 위의 논지에 대해서 좀더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주의를 살펴보기 위해 ‘체계·구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구조/체계로 논리학 내의 여러 논리체계들을 살펴볼 수 있다.[각주:4] 논리학의 여러 논리체계들을 추상적으로나마 살펴봄으로 구조/체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어느 정도 추상화된 논리학의 체계들은 스스로를 공리체계로서 제시한다. 공리체계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명제인 ‘공리’로부터 연역적으로 쌓아올려진 체계를 이른다. 논리학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체계들은 공리체계로서 특정 공리들ㅡ전제들ㅡ이 있다. 공리체계로서 제시되는 논리체계 A와 B에 대해서, A와 B는 자신의 공리들로부터 한정된 영역에만 관심이 있다. 즉, 자신의 연구영역이 체계의 공리들로부터 규정되는 것이다. 만약 두 체계에서 사용되는 공리들이 상이하다면, 공리체계들을 포함하는 어떤 상위체계가 없는 이상, 두 체계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인식론적으로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상이한 공리체계는 서로 상대성을 지니게 된다ㅡ앞으로 이를 ‘논리체계의 상대성’이라고 하자ㅡ. 논리체계의 상대성을 지닌 체계들에 대해서, 그 비교기준은 논리학적 체계 내부에서는 찾을 수 없다. 논리학에서는 A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 B에서는 타당할 수 있고, 역도 성립한다. 이 둘 사이의 우열은 논리체계들 내부에서는 가릴 수 없다. 동어반복이지만, 체계들의 원리들이 다르고, 실질적으로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다른 체계들 사이의 우열을 가르고자 한다면, 두 논리체계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을 가져와야 한다.

 

 이제 논리체계의 상대성을 논리학 밖의 임의의 체계에 대해서 논해보기로 하자.[각주:5][각주:6] 어떤 체계든 특정 전제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로부터 여러 가지 논의들을 부가한다. 어떤 복잡한 두 체계도 사상(捨象)을 거친다면 다른 원리/전제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약 서로 다른 원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두 체계는 사실상 같은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체계에 대해서 비교를 하고자한다면, 그 전제들에 대해서 비교를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전제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비교되는 전제들을 포괄할 수 있는 어떤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체계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논의되는 영역과는 층위가 다른 어떤 체계가 필요하다. 만약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상위의 체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체계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곧 상위체계의 원리가 정당화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상위체계의 원리가 정당화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위체계의 원리를 포함하는 또 다른 상위체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적이며,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체계들의 비교는 무한적인 근거를 묻게 되고, 이는 곧 체계의 비교가 적어도 인식의 영역에서는 무의미함을 나타낸다.

 

 체계의 비교뿐만 아니라 단일적으로 체계의 정당화를 하는 것도 무한적인 작업이다. 위와 같은 과정으로 체계에 대한 근거를 묻는 것은 무한적으로 이어지며, 인식의 영역에서 체계의 정당화는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만약 어떤 체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를 포함하는 체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가 이해되고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당화 역시 무한적으로 이어지고, 인식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근거를 찾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무한적으로 소급될 뿐인 근거란 근거를 찾으려는 인간의 영역에서는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기준에 대해서 더 이상 소급하여 근거를 물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준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약한 의미로 이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에 모순이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더 이상 근거를 위로 소급할 수 없는 기준인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근거를 다시 위로 소급해서 정당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근거가 존재한다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다. 오로지 알 수 있는 것은 체계의 정당화란 불가능하며, 근거는 무한히 나열될 뿐이라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논의들과 다를 바가 없다. 상대주의는 모든 체계들에 있어서 그 체계들의 전제·원리·근거·기준들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각주:7] 즉, 원리들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은 부재하다. 원리들을 비교하고자 한다면, 결국 그 전제들을 비교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그 체계는 비교대상들의 원리를 포함하는 상위 체계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체계의 정당성을 누군가 묻는다면, 역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의 상위 체계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무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인 영역에서 어떤 구조·체계들의 비교는 인식론적으로 허무하다는 것이다. 즉, 둘을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부재한다ㅡ곧 기준이 부재한다ㅡ. 결국 이 입장에서 보면, 상대주의는 타당할 수밖에 없다. 고르기아스의 난제를 다시 살펴보자.

 

“nothing exists; and if anything exists it is unknowable; and if it exists and is knowable, yet it cannot be indicated to others."

 

 첫째 난제는 어떤 것을 존재로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난제는 안다는 것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난제는 이해의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주장은 앞선 논리체계의 상대성 테제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어떤 주장도 고르기아스의 3대 난제를 벗어날 수 없고, 상대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상대주의란 결국 이 또는 저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철학이 처한 ㅡ더 나아가 학문과 이성(理性)이 처한ㅡ 실제적인 현실을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각주:8] 그렇다면 결국 어떤 철학도 논리적인 영역에서 자기 자신 내부에서 보편성, 절대성, 일반성을 지닐 수 없게 된다. 상대주의적 현실에서 철학이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상대주의 현실 앞에서 모든 철학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철학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서 미뤄두었던 철학의 다른 한 극단인 절대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 절대주의

 

 

Ⅱ에서는 절대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고 ‘절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Ⅱ에서 상대주의를 어느 정도 다루었기 때문에, 이제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주의를 ‘상대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논지에 따르면 상대주의는 어떤 입장이 아니라 철학/학문/이성이 처한 처참한 현실임이 분명하다.[각주:9] 그렇다면 절대주의란 일단 ‘어떠한 기준도 부재한 철학적 현실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론적 현실의 영역이고, 절대주의는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지, 어떤 이론이나 입장에 의해서 부정될 수는 없다. 절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나 그에 합응하는 체계가 존재함을 뜻하는데, 이에 따르면 절대주의는 철학이 처한 현실에 대한 자기부정인가라는 물음이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절대주의는 일반적인 정의방식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때, 절대주의는 ‘특정 대상을 분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나 가치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주장하면, 절대주의는 자신이 처한 상대주의적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모순이다. 따라서 절대주의란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기준을 ‘요청’하는 철학적 입장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적 현실로부터 철학 일반, 혹은 가치체계와 삶 일반을 옹호하려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주의란 철학이 스스로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론적인 요청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상대주의자들은 Ⅱ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기준이 없음을 가지고 절대주의를 비판했었다. 즉, 상대주의자라고 이해되는 철학자들은 절대주의를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로 잘못 이해하여 절대주의를 기준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비판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절대적인 기준을 요청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위와 같은 비판은 어느 정도 무의미해 보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플라톤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현상계와 이데아를 구분하고 “이데아는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적 현실에서 이데아는 존재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모든 근거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타당하다는 이성적인 근거는 존재할 수 없다. 그 근거가 존재한다하더라도 그 근거가 옳다는 다른 기준 혹은 근거를 확정할 수 없다. 플라톤이 문자 그대로 단적으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이는 그가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실제로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보다는 “이데아가 존재하는 세계를 요청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각주:10]

 

 플라톤의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이성적인 존재자인 철인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데아는 요청된다. 철인은 자신의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철인왕으로서 타인들에게 자신이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적인 이성ㅡ곧 이데아ㅡ이 존재해야 한다.[각주:11] 이런 식으로 이데아는 요청될 수 있고, 플라톤 정치체계에서 이데아는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상대주의적인 현실에서, 플라톤이 상정하는 정치체계/가치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를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기준인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상대주의적인 현실에서는 어떤 가치기준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플라톤은 인간이 특정 가치체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되도록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데아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ㅡ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모든 가치체계의 붕괴 속에서 허무의 상태에 남게 된다ㅡ. 플라톤은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이데아를 요청한다. 따라서 “이데아는 존재한다”는 플라톤은 주장은 정치철학·실천철학적인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실천철학적인 요청마저 상대주의적인 현실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론적인 영역에서, 가치체계가 요청되는 식으로 이론세계에 소환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많은 가치체계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가 문제가 된다. 여러 가지 기준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고 좋지 않음에 대한 이성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실천철학적인 입장에서 절대주의는 요청될 수 있을지 몰라도 ‘특정 절대주의’는 요청될 수 없다. 어떤 것을 선택할 지에 대한 이성적인 기준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절대주의도 요청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절대주의의 효용가치의 부재를 역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상대주의적인 현실에서 절대주의를 요청한다는 것은 어쨌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플라톤의 논지가 정당화된다고 하더라도, 상대주의적인 현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플라톤의 정치체계가 실현되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강력하다고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요청된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의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실천철학적인 요청에도 상대주의적인 현실은 현존하고 있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논쟁은 이성의 영역 내에서 무한적으로 순환한다. 상대주의는 절대주의에 대해서 현실을 들이대면서 절대주의를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절대주의는 인간으로의 삶을 위해서 특정 기준과 가치체계를 영원히 요청할 것이다. 상대주의는 그에 대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절대주의에 물을 것이고, 또한 그의 기준과 근거 부족에 대해서 역설할 것이다. 절대주의는 그에 대해서 상대주의적 현실을 허무주의로 규정하며, 인간적 삶의 영위를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이에 대해서 인간이 허무주의적 상태에 머물면 안 되는 이유를 절대주의에 물을 것이고, 또한 그 이유에 대해서 근거부재와 기준부재를 설파할 것이다. 상대주의적 현실은 허무주의를 취하며 극단적으로 삶마저 부정하게 된다.[각주:12] 상대주의적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을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상대주의적 현실과 함께 전적인 허무주의적 현실에 놓이게 된다. 결국 이 상황에서 절대주의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아있고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적인 영역에서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논쟁은 무한히 순환된다. 결국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수밖에 없다. 전자는 아무 지향성 없는 니힐리즘으로 흐르고, 후자는 결국 자신의 내부에 부정할 수 없는 상대주의적 현실을 두고 영원히 상대주의와의 논쟁을 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방식 역시 상대주의적 현실을 극복할 수는 없으며 결국 자신 내부에 영원한 불안을 안고 가는 셈이다.

 

 Ⅲ의 논지에 따르면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적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대주의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절대주의를 버리고 싶지 않은 절대주의자들을 위해서 ‘절대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 다. 절대주의는 정말로 해체되는가를 따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들의 성격을 밝히고, 논의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Ⅳ. 이성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철학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철학적 주장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이론적인 근거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철학이 처한 ‘상대주의적 현실’ 이라고 본고는 서술해왔다. Ⅱ와 Ⅲ의 논의를 통해서는 상대주의적인 현실이 철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일부 드러났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설명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Ⅳ의 작업이며, 이를 통해 철학과 절대주의가 처한 상황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Ⅱ에서는 다분히 철학만이 상대주의적 현실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글 전반부에서 잠깐잠깐 언급했듯이, 이는 철학이라는 특정 학문이 처한 위기가 아니다. 분명히 하자면, 철학과 학문,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이성이 처한 현실이다. 이는 논리체계의 상대성으로 확인된다. 학문 일반의 주장에 대한 여러 근거들이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모두 상대주의적 현실에 처해있다. 주장이 옳다는 근거가 있어야 할 텐데, 이론적인 영역에서 그 주장에 대한 근거가 옳다는 기준이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옳음을 판별할 수 있는, 혹은 다른 무언가를 비교할 수 있는 체계와 기준을 불러오게 된다. 이는 논리적인 영역에서 무한적으로 이어지며, 따라서 모든 학문은 스스로를 학문 일반의 경계 내에서 정당화할 수 없다.

 

 간단한 추론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만 미치지 않고, 이성(理性) 일반의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를 추상화를 거친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그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작업의 극한인 학문이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학문의 한계를 통해서 이성이 보여주는 것은 이성 스스로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추상화를 거친 모든 이성적인 작업들과 주장들은 논리적·이론적·이성적인 영역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 스스로를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이성은 스스로가 상대주의적 현실에 처해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즉, 이성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이성의 한계 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것이 총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논지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본고의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은데,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보다 분명히 될 것이다.

 

 이성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상대주의적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성은 스스로는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즉, 이성이란 이성의 영역·한계 내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無)을 깨닫게 된다. 즉, 이성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고 단지 자신은 無라는 것을 말할 뿐이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순환적인 논쟁에서,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적 현실에 대해서 허무주 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공격했었다. 허무주의는 인간이 극도의 이성적인 삶을 추구했을 때 만 발현될 수 있는 삶의 현실이다ㅡ사유하지 않는 동물은 스스로에 대해 허무를 느낄 수 없 다ㅡ. 인간이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자로 규정한다면, 삶 역시 이성이 처한 현실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삶의 영역에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이성을 따른다면, 삶 역시 이성이 나타내는 바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성은 스스로를 상대주의적 현실을 통해 無로 규정할 뿐이고, 이를 따르는 삶 역시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현실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각주:13]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를 따르는 삶은 체험적으로 이성의 본질인 공허·허무를 겪게 된다.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자로 간주하는 모든 인간은 삶을 통해 ‘이성은 공허하다’는 것 을 깨닫게 된다ㅡ이는 이성적인 주장이 아니라 삶이 이성에게 보내는 하나의 신호이다ㅡ. 이성은 삶을 통해 스스로의 허무함을 드러내는데, 삶은 이를 통해 이성으로부터 눈을 돌려야함을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을 통해 삶은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성이 아닌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체험하게 하는 인간의 ‘삶’이다. 이성 스스로는 無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어떤 깨달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이 아닌 다른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이성이 無임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이 無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이성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하는 인간의 삶이다. 따라서 삶은 철학함이라는 사유 극한의 체험을 통해, 상대주의적 현실·허무주의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성이 아닌 삶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ㅡ이로써 Ⅱ와 Ⅲ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철학·절대주의의 해체문제는 이성이 아닌 삶의 문제로 환원된다ㅡ. 이성은 자신을 해체시킴으로서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자를 붕괴시키고, 철학자들에게 철학과 이성이 아닌 삶으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Ⅴ. 삶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에게 속하게 되는 모든 체험들의 집합이며, 체험이란 삶의 각각의 부분들이다.[각주:14] 삶은 우선적으로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모든 추상화 이전에 놓여 있다. 삶은 기본적으로 추상화의 대상이 아닌, 그저 살아감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삶은 일차적으로 이성 이전에 놓여 있고 논리의 대상이 아니다. 삶은 논리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과학적인 참과 거짓으로 나뉠 수도 없다. 어떤 삶도 옳지도 틀리지도 않다. 특정 삶이 옳고 틀리다는 판단은 오로지 이성이 작동하여 삶을 추상화했을 때만 가능하다. 추상화 이전의 삶은 그저 모든 것을 체험할 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또한 삶은 극단적으로 개개인에게 국한되어 있다. 모든 삶의 체험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그것을 체험하는 개인만의 소유이다. 체험은 개인에게 고유하며 삶과 마찬가지로 참도 거짓도 아니다. 개인에게 고유한 삶과 체험은 타인과의 비교의 대상이 아니고, 참과 거짓의 영역도 아니다. 타인들과의 체험비교는 오로지 이성이 작동했을 때만이 가능하다.[각주:15] 따라서 어떤 체험도 타인에 의해서 긍정되지도 않고, 부정되지도 않는다. 삶과 체험이 비교가능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체험들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삶은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고, 그것들 사이에 좋음/싫음 등의 가치를 형성해나간다. 이는 이성의 관할은 아니며, 삶은 그저 스스로 느끼고 의지하는 바를 따라갈 뿐이다.

 

 전적인 현실성에 둘러싸여 있는 삶은 특정 계기로 추상화를 통해 이성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이성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삶의 영역을 침범한다. 즉, 추상화 이전의 삶을 추상화의 대상으로 두고, 삶의 근거를 삶이 아닌 이성에 두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성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주장들을 허무로 되돌린다. 이로 인해 모든 철학적 주장들과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적 현실 앞에서 붕괴된다. 즉, 원래는 체험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가치들이 그것들이 형성된 삶이 아닌 이성으로 환원되어 허무로 돌아가게 된다. 이성에 의해 부정된 모든 삶은 상대주의적 현실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는데, 이성은 이를 오인하여 공격의 대상을 이성이 아닌 삶으로 돌리고, 삶은 허무밖에 없다고 인식한다. 이것이 모든 것의 절대근거를 삶이 아닌 이성으로 향하게 하는 삶이 처하게 되는 허무주의적 현실이다.

 

 삶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상대주의적 현실과, 이성적 삶에서의 허무주의적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의 여정을 제시한다. 그것이 이른바 극단적인 의미에서의 철학함, ‘사유 극한의 체험’이다. 이성은 우선 철학을 통해 자신을 정립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자신을 이론적인 체계로써 제시한다ㅡ가령 절대주의ㅡ. 그러나 이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 무한적으로 분쇄되고, 파괴된다. 이성은 철학을 통해 극한으로 스스로를 사유하곤, 자신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밝힌다. 이성은 사유의 영역에서 상대주의적인 현실을, 삶은 허무주의적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삶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이성에게 이성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음을, 이성적 삶이란 허구에 불과하며 허무일 뿐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암시한다. 즉, 삶은 계속해서 삶의 절대근거는 이성이 아닌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유 극한의 체험이다. 이를 통해 이성은 스스로를 해체하고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스스로를 해체시키고 삶으로 돌아온 이성은 비로소 철학·학문·이성, 더 나아가 삶은 절대근거가 삶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성의 관할에서 이성은 근거의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지만, 삶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의 한계 내에서 이성이 제시하는 근거는 모두 이성에 의해 부정된다. 그러나 추상화 이전의 삶과 체험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이성의 절대적인 근거로서 제시될 수 있다. 삶은 부정되지 않고 그저 스스로를 나타내고 표현할 뿐이다.

 

 삶으로 돌아온 이성은 부정되지 않는 절대근거가 삶에 있음을 포착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재정립해나간다. 즉, 원래는 이성 내에만 근거했던 모든 주장들이 삶에 의해 절대시되는 것이다. 이성에 의해 분쇄된 모든 이성적 근거들은 삶에 의해 정당화된다. 모든 철학적 주장들은 그것을 표현하는 개인의 삶에 의해서 긍정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절대화된다. 이성이 아닌 삶에 기반을 둔 철학은 타인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개인의 삶 안에서 무한히 긍정될 뿐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이성에 의해 파괴되었던 모든 철학과 학문은 삶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즉, Ⅱ와 Ⅲ에서 문제시된 절대주의에 대한 해체문제는 삶에 의해 일단락된다.[각주:16]

 

 

【참고문헌】

Aristotle, De Melliso Xenophane Gorgia, in: The works of aristotle, Vol. Ⅵ, ed. by W.D. Ross, trans. by T. Loveday, E. S. Forster, Oxford Univ. press, 1952.

Krausz, Michael, Relativism : interpretation and confrontatio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9.

김창래, 「고르기아스의 세 번째 난제에 대한 해석학적 대응 ㅡ회의주의와 함께, 그리고 회의주의를 넘어서ㅡ」『철학연구』(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30(2005).

  1. 철학의 극단의 영역에는 여러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특히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탐구하고자 한다. 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철학이 신적 지혜에 대한 추구를 하기 때문에ㅡ즉, 생성·소멸·변화·운동하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추구ㅡ 탐구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고, 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절대주의를 자신의 입장에서 극단의 사유의 방법을 통해 부정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Aristotle, De Melliso Xenophane Gorgia, in: The works of aristotle, Vol. Ⅵ, ed. by W.D. Ross, trans. by T. Loveday a. E.S. Forster, Oxford Univ. Press, 1952, 979a, 11-13 [본문으로]
  3. 김창래, 「고르기아스의 세 번째 난제에 대한 해석학적 대응 ㅡ회의주의와 함께, 그리고 회의주의를 넘어서ㅡ」『철학연구』(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30(2005), pp. 69-70.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언어가 동일률·모순율·배중률을 기반으로 한 형식논리적 원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언어적 체계를 살피기 이전에 논리학적 체계를 본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서 논리체계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바탕에 있는 어떤 사유함을 살펴본다. [본문으로]
  5. 여기서 체계란 특정 원리와 전제들로부터 쌓아올려진 집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자. [본문으로]
  6. 바로 위에 제시된 논리체계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논리체계의 상대성 테제는 다음부터 제시될 논의들에 대한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정도의 의미다. [본문으로]
  7. 본고는 원리·전제와 근거·기준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나 결국 무한소급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본문으로]
  8. 앞서서는 상대주의를 ‘고르기아스의 3대 난제를 포함하는 모든 철학적 주장’이라고 정의했었으나, 여기까지의 논의에 이르면, 앞선 정의는 지양된다. 본고에서 상대주의는 어떤 주장도 아님을 밝히고 있다. ‘상대주의’라는 표현은 無와 같이 그저 이름붙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어이거나 위와 같은 철학적 현실을 하나의 입장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인식적인 착오에 불과하다. 이런 흐름에서 절대주의, 형식논리의 비판은 어긋나 있다. 절대주의와 형식논리는 상대주의를 하나의 입장으로 간주하고 비판을 했지만, 사실 상대주의는 어떤 입장도 아닌 실제적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대주의를 하나의 입장으로 간주하고자 하면 그것이 그 시도가 허무함을 깨달을 뿐이다. [본문으로]
  9. 철학의 영역에서 상대주의는 분명 실제적인 현실이다. 학문과 이성의 영역에서도 상대주의가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논지를 살펴보면 간단히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Ⅳ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본문으로]
  10.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전적으로 이데아를 요청하기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들이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해석은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입장에서 절대주의를 옹호한다면,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플라톤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부정하진 않지만 실천철학적, 정치철학적 해석에 좀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본문으로]
  11. 철인왕이 이데아를 요청했다고 해서, 이데아가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요청과 존재는 별개의 문제다. 본문의 맥락에서, 철인왕은 자신이 이데아에 대한 앎을 소유했다는 것을 증명해야하는데, 이는 플라톤 체계에 의하면 불가능하다. 대중들은 이데아를 소유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이데아의 앎 또한 대중들의 언어로써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철인왕이 이데아에 대한 앎을 소유했다는 것은 오로지 철인왕 자신밖에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철인왕이 절대적인 이성을 지녔다는 것을 타인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영역은 철학이 아닌 정치와 종교의 영역 즉,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다ㅡ이는 본고의 주된 논의는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면 고려대 교육학과 강성훈 교수의 논문 「루소사상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플라톤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ㅡ. 다만 플라톤의 체계에서 이데아는 이상사회를 위해서 요청될 수밖에 없음을 이 본고는 말하고 있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12. Ⅳ에서 밝히겠지만 ‘-주의’라는 말은 어떤 입장이나 주장을 나타내는 듯한데, ‘상대주의’라는 잘못된 표현과 마찬가지로 허무주의란 어떤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13. 즉, 허무주의란 어떤 사상적 흐름이나 가치체계가 아니다. 허무주의는 그저 이성중심주의를 따르는 모든 이가 안게 되는 삶의 현실이다. 따라서 상대주의가 어떤 입장이 아니듯이, 허무주의 역시 하나의 입장이 아니다. [본문으로]
  14. 삶은 모든 체험의 집합이고, 체험은 삶의 부분이다. 이와 같은 삶의 정의는 순환적이다. 순환적인 정의에서는 정의되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미리 전제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어를 언어 안에서 정의하려고 한다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순환적인 문제에 걸릴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언어 안의 ‘말하기(saying)’가 아니라 언어 밖의 ‘보여주기(showing)’가 필요하다. ‘삶’이라는 언어적인 표현 또한 그렇다. 그러나 다른 개념이 아니라 굳이 삶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는 이유는, 삶이란 본래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보다도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무언가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순환적으로 삶을 정의한 본고는 따라서 독자들이 이미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왜냐면 삶이란 각자에게 모든 순간으로 항상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삶’에 대해서 각주를 다는 것은 삶은 어떻게 ‘추상화’를 통해 완전히 엄밀한 논증으로,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모두에게 현현(顯現)하는 것임을 보여주기(혹은 말해주기) 위해서다. [본문으로]
  15. 타인의 체험과 자신의 체험이 비교가능하려면, 일단 타인의 체험을 전적인 현실로써 겪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삶은 개인단위이고, 타인의 체험은 표현이라는 수단으로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표현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체험의 주인이 아닌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체험비교는 결국 삶의 영역에서 허무하고, 불가능하다. 타인과의 체험비교가 가능하다는 상상은 오로지 이성이 삶의 영역을 추상화하여 작동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삶은 추상화 이전에 놓여있는 전적인 현실이다. [본문으로]
  16. 초안 심사자들께서는 아마도 초안에 있었던 몇 가지 논의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의아할 수도 있겠다. 가장 크게는 ‘Ⅵ. 부가적인 논의들’의 파트가 완성본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삭제된 부분은 삶으로의 회귀 이후 학문의 역할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부분이었다. 본 연구자는 여러 생각 끝에 그것들에 관한 논의는 본고의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제외된 논의들은 언젠가 다른 기회를 통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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