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자들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학자는 단연컨대 토마스 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나마 알다시피 그는 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패러다임은 과학자 집단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콰인에서도 그랬지만, 토마스 쿤에서도 직접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읽으시다보면 그와의 연관점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쿤의 혁명적인 주장 : 과학은 사회다

 쿤 이전까지는 과학을 평면적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나 반증주의는 아에 과학의 구조를 논하지 않았고, 콰인은 중심부-주변부의 구조를 제시했지만, 이는 매우 단순한 도식이었습니다. 쿤은 과학에 분명한 구조가 있으며, 그 구조는 콰인처럼 단순하게 평면적인 도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과학은 매우 입체적인 구조를 지닌다고 하며 과학을 하나의 사회로 여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그는 과학의 구조를 종교의 구조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쿤이 보기에 종교에는 핵심교리가 있고 주변적인 교리들이 있고, 교리들을 가르치고, 지지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쿤은 과학 역시 중심이론이 있고, 주변적인 이론이나 결과물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부분까지는 콰인의 이론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에 더해 과학에는 과학이론, 구조를 지지하고 가르치는 '과학자 집단(각 전공자들의 학회 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과학 역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하나의 사회이며 사회현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학이 사회현상에 가까운지를, 또한 사회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그만의 독창적인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패러다임(paradigm) : 과학의 이론적 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크게 '분야 매트릭스(disciplinary matrix)'와 '모범 예제(exemplar)'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분야 매트릭스(paradigm as disciplinary matrix)는 핵심이론, 이론적인 가정들, 실험방법에 대한 지침, 과학적 테크닉들(가령 미분방정식을 푸는 방법들), 무엇이 해당 과학분야의 연구방법인가에 대한 합의, 과학이 가진 형이상학적인 믿음 등을 총체하는 단어입니다. 모범 예제(paradigm as exemplar)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패러다임'의 의미인데, 과학적 연구의 모범 사례에 대한 합의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물리학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어떤 접근방식으로, 어떤 수식을 써서 그 문제를 풀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모범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입니다ㅡ물론 이는 분야 매트릭스로서의 패러다임을 전제합니다ㅡ. 가령 쿤은 뉴턴의 『Principia Mathematica(수학의 원리)』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합니다. 뉴턴의 저서에는 뉴턴의 법칙과 뉴턴이 제시한 실험테크닉, 수학적 테크닉(미적분)도 있지만(이는 분야 매트릭스), 뉴턴의 이론을 적용해서 당면한 과학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 제시되어있습니다(모범 예제). 뉴턴의 저서는 물리학적 문제(puzzle)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고전역학 시대의 과학자 집단은 그 방법론들을 받아들여 연구를 진행합니다.


 후차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쿤은 과학의 변화란 곧 패러다임의 변화이고, 이는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곧 정치적 혁명이며, 종교의 개종과 같다고 합니다. 누적적으로, 점진적으로 과학이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급격한 문제들이나 심각한 위기를 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ㅡ정확히는 여러 문제들이 쌓이다가 그것들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혁명이 일어납니다ㅡ. 마치 갑작스럽게 정치적 혁명이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고,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점진적일 수 없듯이, 패러다임의 변화 역시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간 것이 혁명적으로, 한순간에 바뀐 것과 가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에서 '개종'을 언급한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과학의 역사란 곧 패러다임 변천인데, 패러다임의 변화는 반증주의처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대담하게 가설을 내세우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례가 나올 경우 과학이론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과학자 집단에서는 그런 사례를 '오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는 실험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정짓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신고 있는 양말을 삼키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 콰인과 쿤은 비슷한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론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과학이론 자체가 붕괴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니까요. 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주장은 과학이론이 패러다임을 지닌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과학이 구조가 없이 단순히 원자론-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사례가 단 한가지만 나오더라도 패러다임은 붕괴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핵심이론들이 있고, 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관료제적인(즉 입체적인) 매뉴얼들이 있고, 각 이론들은 콰인이 주장한 것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 집단은 패러다임에 반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오류' 등으로 치환하고, 이론의 중심부가 큰 타격을 입을 때까지는 패러다임에 반하는 퍼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치명적인 타격이 왔을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비로소 일어나게 됩니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을 때,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 받아들인 패러다임은 서로 상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간의 논쟁은 될 수 있겠습니다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과학에는 진보가 없다'는 주장을 피게 됩니다. 그는 그에 대해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 패러다임의 곧 과학의 변화를 진보라고 할 만한 기준이 있는가?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을 때,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비교할 수 있는 직접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합니다. 즉, 둘 중 어떤 패러다임이 더 옳은 것인지, 더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보기 힘들듯이, 패러다임 역시 서로 다른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즉, 두 패러다임의 비교는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하는 공약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통약불가능성'의 개념입니다. 가령 17세기에 뉴턴역학이 등장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뉴턴은 그저 중력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는 혁신적인 방식이기도 했지만, 물질의 움직임이나 중력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 못했습니다.[각주:1]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등의 형이상학자들의 이론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형이상학적인). 그들에 비하면 뉴턴의 설명은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뉴턴역학이 받아들여지고 난 다음에는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부족 등을 기준으로 뉴턴을 바라보는 방식은 사라졌습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현대 물리학이 인정하는 네 가지 기초적이 힘이든)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뉴턴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설명으로 따지면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의 방식이 더 나을 수 있었습니다만, 사람들은 뉴턴의 기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둘은 서로 비교가능할까요? 쿤은 뉴턴 이전의 패러다임과 뉴턴의 패러다임으로 옮겨오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둘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쿤은 그러한 패러다임의 통약불가능성을 1.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 2. 관찰의 통약불가능성 3.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1.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Methological Incommensurability)


 뉴턴 이전과 뉴턴 이후는 서로 비교방법이나 비교기준이 달라졌고,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뉴턴 이전에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당대의 기준에 일관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랐으나, 뉴턴 이후는 뉴턴의 방식대로 눈 앞의 현상을 잘 설명하기만 되면 되었습니다. 쿤에 따르면 서로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둘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각주:2] 각각의 패러다임은 해결하려는 문제가 다르고, 그에 대한 접근방식도 다릅니다. 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에는 기계적으로 우위를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자 집단의 decision making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첫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


2. 관찰 통약불가능성(Observational Incommensurability)


 쿤은 각각의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각자의 분야 매트릭스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이론들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콰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론의 관찰의존성(theory-dependence of observation)'을 제시합니다. 과학자 집단은 패러다임에 속한 기존의 연구들, 실험결과, 이론들을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같은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다른 결과를 내놓습니다. 방법론적 통약불가능성에 의해 현상을 해석하는 테크닉이나 추론방식은 패러다임에 의해 달리 됩니다. 쿤은 패러다임들이 현상에 대한 동일한 추론방식, 동일한 해석방식을 내놓더라도, 각각의 패러다임의 주어진 데이터/현상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고 합니다. 즉,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데이터로부터 정보를 얻는 추론방식이나 데이터의 해석방식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 데이터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는 각각의 패러다임에 의해 달리된다고 합니다ㅡ즉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세계를 봅니다ㅡ. 이것이 두 번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


3.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Semantical Incommensurability)


 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끼리의 용어는 서로 치환되거나 번역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같은 과학적 용어라도 패러다임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그 의미는 각각의 패러다임의 한쪽으로 속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가령 고대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등장하는 '원자(atom)'와 근대 물리학의 개념으로서의 달톤의 '원자(atom)'라는 개념은 서로 치환되거나 겹치는 부분이 없다고 합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개념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위해 도입된 철학적 개념이고, 근대물리학의 원자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니까요. 실제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결코 쪼개질 수 없고 세계를 구성하는 무한한 질료이자 서로 독립적인 가장 기본 단위'의 개념이지만, 근대의 원자개념은 현대에 와서 더 작은 단위(쿼크 등으로)로 나뉠 수 있고, 유한한 실체들입니다.


 쿤은 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질량(mass)'에 대한 개념 또한 서로 포함관계에 있거나 하지 않고 완전히 공통성이 없다고 합니다. 가령 뉴턴의 질량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라 질량의 총량은 변하지 않지만, 아인슈타인에서는 질량은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쿤은 둘은 같은 용어이지만 서로 논리적으로 치환되거나 하지 않고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뉴턴-아인슈타인 이론의 정설은 뉴턴은 거시세계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유용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거시와 미시세계를 모두 설명하기에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적 진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쿤에 있어서는 사용되는 개념마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다름'이 강조되게 됩니다. 이것이 셋째 통약불가능성입니다.[각주:3]


셋째 통약불가능성은 특히 쿤의 전체론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질량'이라는 언어의 의미가 변한 것은, 각각의 패러다임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방법론에, 과학적 테크닉도 다릅니다. 또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패러다임 내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이름은 같더라도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는 원자론-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각각이 어떤 언어체계 내부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왔다고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쿤은 위와 같은 세 가지 통약불가능성을 기준으로 패러다임은 서로 치환이 불가능하고, 어느쪽이 어느 쪽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패러다임은 서로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에 상대주의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즉, 과학에 진보가 없고 다를 뿐이라면 도대체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무슨 의미가 있냐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진보가 없다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달톤의 원자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뉴턴으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논쟁입니다. 진보를 논할 수 있으려면 그를 논할 어떤 기준이 필요한데,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서로 다를 뿐이기에 그에 대한 공통적인 기준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통약불가능성에서 그가 논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쿤은 그러한 비판에 대해 자신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며, 패러다임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설명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정확성(accuracy) 2. 일관성(consistency) 3. 범위(scope) 4. 단순성(simplicity) 5. 생산성(fruitfulness)


 '정확성'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을 때 패러다임의 이론이 동일한 과학분야 내에서 기존의 관찰들과 실험들에 대해 모순을 낳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관성'은 동일한 과학분야뿐만 아니라 관련된 과학이론들과 모순을 낳지 않아야함을 의미합니다. '범위'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나타냅니다. '단순성'은 패러다임이 단순하면서 어떠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 '단순성'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 혼란스러워지거나 고립되는 경우가 적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을 때 향후 과학연구에 불을 붙일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패러다임을 통해 이러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고, 과거에 밝혀지지 않은 관계들을 설명하고 밝힐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쿤은 정확성이 높고, 더 일관적이고, 설명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단순하고, 생산성이 높은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패러다임들이 통약불가능할지라도 비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위와 같은 기준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각주:4]


 쿤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가지고 과학이론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지금부터는 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의 역사 : 패러다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쿤은 과학의 역사의 구조를 '전과학(prescience)-정상과학(normal science)-위기-혁명-새로운 정상과학-새로운 위기-...'로 제시했습니다.


 '전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 이전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패러다임'이 부재한 학문단계를 의미합니다. 정상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어떤 것이 '패러다임'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분야 매트릭스, 모범 예제로의 패러다임이 말해주지만, 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학문 공동체입니다. 패러다임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100%에 수렴하도록 같은 분야 매트릭스, 모범 예제를 수용해야만 합니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기가 아닌 시대(곧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모든 학자들이 한 현상에 대해 같은 해석을 내놓아야 하며, 모순되거나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동일한 학문적 방법론이나 세계관, 과학적 테크닉, 현상에 대한 해석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학문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주 이론에 대해 이견(異見)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학문 공동체 내에서 만장일치에 가깝게 인정된다면(사실상 일상적인 수준에서 만장일치라고 보는 게 좋습니다), 비로소 그 학문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 간의 메커니즘을 따지는 현대의 어떤 학문도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학, 통계학, 심리학 등을 사회'과학'이라고 부르지만 쿤의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꽁트나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양적 연구가 대세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긴 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현상에 대한 해석이 양적 연구만으로는 완전히 하나로 겹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에 대해 실증주의적 연구(양적 연구)와 해석학적 연구(곧 질적 연구), 변증법적 연구방법 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합니다. 쿤의 기준에 따르면 과학에서는 그런 논란 자체가 불가능해야 합니다. 게다가 사회과학에서 모든 학자들이 하나의 세계관, 동일한 연구방법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론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가 있지는 않습니다.[각주:5] 즉, 사회과학에는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각주:6] 결론적으로, 어떤 학문이 과학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전환기가 아닐 때에 유일한 패러다임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전과학에서 비로소 패러다임이 탄생하면, 그 학문은 과학이 되며, 그 상태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합니다(혹은 통상과학이라고도 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패러다임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며, 각종 퍼즐들을 풀게 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 항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예외사항이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상과학 시기에 패러다임의 문제를 발견한 사람은 과학자 집단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가령 뉴턴시기에 아인슈타인을 주장하게 되면, 그 사람은 패러다임을 벗어난 과학자로서 고전역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에게서 공격을 받습니다. 혹은 문제가 있는 부분만 일부수정하거나 변칙사례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고 합니다. 이는 반증주의적인 생각과는 반대이며, 콰인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정상과학의 시기에서 예외나 변칙사례가 쌓이고 강력하게 제시되어서 패러다임의 중심부, 세계관, 기본적인 가정들을 흔들게 되면 그때가 바로 패러다임 '위기'의 때입니다. 쿤은 위기의 때에 정상과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론적 혁신을 주장하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문제를 잘 해결해줄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나타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과의 경쟁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때에 위기에 처한 과학을 '비통상적 과학(extraorinary science)'라고 부릅니다.기존의 패러다임을 지닌 비통상적 과학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줄 것으로 보이는 과학이론 사이에 경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통약불가능성에 의해서 이들의 논쟁이 결코 어떤 것이 더 논증적이고 옳은 것인가를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경쟁하는 과학자들은 서로 인신공격도 하고,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학문(주로 철학)적 영역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하고, 각각의 과학이론이 함축할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따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쿤은 패러다임의 논쟁은 논증의 문제가 아닌 '설득'의 문제이며, 이는 곧 과학자 공동체의 문제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생활양식이 전혀 다른 공동체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하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쿤은 이때에 과학자 집단이 위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기준으로 패러다임을 고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쿤은 이것이 과학이론의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비통상적 과학에서 새로운 과학이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것과 같으며, 종교에서의 개종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패러다임의 전환은 갑작스럽게 혁명적으로 일어납니다. 비통상적 과학은 이제 더 이상 패러다임이 되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긴 과학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의 시기가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고 나서는 전에 있었던 형이상학적 논쟁들과 과학 분야 이외의 논쟁은 모두 종료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과학자집단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따르게 됩니다. 새로운 정상과학은 다시 위와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거치게 되며, 이는 지속됩니다.


 결국 패러다임의 문제는 과학자 집단이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맨 처음에 언급했던 '과학은 사회다'라는 문장의 의미입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이론에서 언어는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또한 언어의 의미는 언어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생활양식,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체론적인 관점도 쿤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쿤 역시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에서 뉴턴의 '질량'과 아인슈타인의 '질량'개념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유기성 안에서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콰인에서 언급된 '관찰의 이론의존성' 또한 쿤에서도 '패러다임'에 의해 관찰이 달라진다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각주:7] 이는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비판하는 논거가 됩니다(구조의 유기성). 구조에 관해서는 콰인 역시 구조를 이야기했지만, 쿤만큼 상세하게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콰인은 전체론을 전제한 단순한 중심부-주변부의 이론이었다면, 쿤은 그에 더해 과학자 집단의 논쟁들, 과학자 집단의 세계관, 연구방법 등 입체적인 구조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상이 언급할만한 쿤의 과학철학입니다. 이렇게 해서 2014년 5월 4일에 시작한 비트겐슈타인 11부작 연재가 2015년 8월 11일(현재 새벽 1시 50분)에 끝나게 되네요.. 정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집중할 문제도 있고 곧 학기 시작이라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아마 Yudwig님께서 요청하신 '크립키'의 언어철학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ㅡ프레게의 언어철학부터 시작할지 아니면 크립키만 할 것인지는 차후에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ㅡ. 다음 학기에 두 학교에서 불완정성 정리를 배우기도 하기 때문에 마저 못한 괴델을 완성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가설에서 과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뉴턴의 법칙은 그저 과학적 '기술'만 있고,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2. 과학주의를 고수하시는 분들은 약간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현상만 잘 설명하면 되지, 도대체 왜 형이상학적 설명이 필요한가하는 인식 때문에요. 그러나 형이상학과 과학 중에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보시면, 이 문제는 단순히 뉴턴이 낫다는 식으로만 결론이 날수는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3.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은 모르겠습니다.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극한을 취했을 때 나타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니까요. 쿤의 주장은 이해하지만 과학에 진보가 없다는 주장은 섣불리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4. 이 부분은 비판이 많습니다. '통약불가능성'에서 패러다임의 비교불가능성을 논했으면서, 스스로는 진보라 부를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으니 사실상 완전히 일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패러다임끼리의 통약은 불가능하지만, '효용성'의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그가 완전히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5. 가령 고전역학 패러다임 시기에는 자연에 대한 고전역학 이외의 설명방법이 존재한다고 학자들에게 여겨지지 않으며, 이를 부정할 가능성조차 부정됩니다. [본문으로]
  6. 패러다임의 의미가 넓어져서 사회과학에도 쓰이긴 하지만, 쿤의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오로지 '자연과학'에만 패러다임이 존재합니다. [본문으로]
  7. 물론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콰인은 관찰의 이론의존성에도 불가하고 다른 언어체계를 효과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매뉴얼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완벽히 옳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언어체계 내부에서 대략 이 정도의 의미이겠다 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쿤에 있어서는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번역 매뉴얼이 불가능하고, 서로 통약불가능합니다. 콰인에 있어서는 그대로 비슷한 것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쿤에서는 다른 패러다임의 과학자들은 아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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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은 과학철학(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 반증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후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철학자인 콰인, 쿤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콰인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과학철학에 그대로 적용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하지만, 실제로 콰인은 비트겐슈타인을 배운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는 다른 이유에서 전체론을 주창한 인물입니다. 콰인 이후에 나타나는 쿤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콰인은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독립적으로 글을 써야하지만, 토마스 쿤과 후기 사상의 전체론을 생각해봤을 때 콰인을 같이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카테고리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경험론에 관한 두 가지 도그마들(two dogmas to empiricism) :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 비판

 콰인은 주로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반박하면서 전체론으로 넘어간 인물입니다. 「경험론에 관한 두 가지 도그마들」은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를 반박하는 기념적인 논문으로, 논리실증주의가 전제하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과 '환원주의'라는 두 가지 도그마를 비판합니다.



1.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이라는 도그마


 논리실증주의를 기존의 철학을 공격하면서, 철학의 임무는 과학적인 명제 즉, 종합명제에 있는 분석명제들을 엄밀히 정하여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콰인은 두 명제가 구분될 수 있기는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콰인은 분석명제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A bachelor is a unmarried man(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문장은 논리실증주의에서는 분석명제에 해당합니다. '총각'이라는 개념 자체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콰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A bachelor is a bachelor'가 분석명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bachelor 자리에 이음동의어를 넣는다고 그것이 분석명제가 되는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A bachelor is a unmarried man"가 분석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언어체계(영어)를 미리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만약 위의 문장이 분석명제가 되는 언어체계를 알지 못한다면, 위의 문장은 분석명제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분석명제란 엄밀하게는 "A is A"같은 명제만이 가능하고, "A is B"나 "A is C" 등은 분석명제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들이 분석명제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만이 아니라 언어체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지에서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생각만큼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분석명제에 대한 분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전제하기 때문에 세계와 명제에 대해 원자론-환원주의의 1-1대응관계를 전제합니다만, 언어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명제에서 '조선'을 분석명제로 분석한다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있었던 국가를 의미하는 문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단어는 항상 그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헬조선'과 같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하는 용어로도 사용되고, '조선인'의 경우 조선이 없었던 일제강점기에는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2. 환원주의라는 도그마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과학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생각을 펼쳤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그대로 과학에 옮겨와서 과학은 '검증가능한 명제들의 총합'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귀납-검증가능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명제들을 기계적으로 총합한 것이 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콰인은 과학은 그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학의 전체에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냈을 때 그것이 검증이 되고 그것들이 쌓여서 과학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 역시 환원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콰인은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근거로서 전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과학은 구조를 지닌다 : 과학의 중심부와 주변부(전체론)


 콰인은 언어체계는 '중심부(center/core)'와 '주변부(periphery)'로 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언어의 중심부는 쉽게 변하지 않고, 주변부는 주위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고전역학으로 따지자면 뉴턴의 법칙들이 과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뉴턴의 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과학의 주변부를 이룬다고 합니다.


 콰인은 언어체계는 그물망처럼 얽혀있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변부와 중심부도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콰인은 언어체계에서 중심부는 중요한 신념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주변부는 중심부에 비해서 잘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가령 고전역학은 뉴턴의 법칙으로 시작됩니다. 고전역학의 결과들은 모두 뉴턴의 법칙들에 기초하여 그 법칙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과학 역시 각각의 결과들이 중심부-주변부로 강력히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콰인은 고전역학에 반하는 어떤 증거가 나온다면, 뉴턴의 법칙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주변부에 대한 일부 결과만 달리 해석하는 식으로 주변부만 바뀐다고 합니다. 이러한 콰인의 생각은 논리실증주의와 반증주의를 모두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논리실증주의-검증주의자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들을 벽돌로 쌓아 과학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콰인은 그들이 과학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으로 공격합니다. 과학은 단순한 실험적 결과들의 총체가 아닙니다. 각각의 실험결과들은 뉴턴의 법칙과의 연계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작동하며, 각각의 이론들은 과학의 중심부에 있는 법칙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과학이 단순한 종합명제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뉴턴역학을 부정하는 결과가 고전역학 내에 있었다면 그런 지식 역시 당대의 과학에 포함되었어야 할 것입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과학이 뉴턴을 중심부로 두고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과학이 단순한 실험결과들의 총합이 아닌 중심부의 유기적 관계 내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콰인은 포퍼에게는 "가설을 담박하게 세우고 그것이 반증되면 그대로 폭파하면 되는가?"라는 공격을 합니다. 즉, 과학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학이론에 대한 어떤 반증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이론 전체가 부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심부에는 타격이 (거의) 없고, 주변부만 조금 바뀔 뿐이라고 합니다(이 글을 쓰면서 포퍼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것 같아 비트겐슈타인(6)-전기 사상의 영향(2)의 포퍼 부분에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포퍼는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반증되면 가설을 버리고 다른 가설로 옮겨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뉴턴역학이 보여주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콰인은 위와 같은 전체론으로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관찰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대에 널리 알려진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개념입니다.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 객관적 관찰이란 가능한가?


 콰인 이전까지 과학이란 매우 객관적이고 엄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는 '관찰'한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적이라는 전제를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였습니다. 과학은 그러한 관찰과 실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콰인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며, 종래의 과학관과는 완전히 선을 긋습니다.


 콰인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장자의 붕새같이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관찰을 할 때 이미 관찰자는 어떠한 기대나 선입견,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관찰합니다(언어체계라는 건 굳이 영어 한국어 그런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이 전제하는 학문 공동체나 집단의 언어체계도 됩니다). 말하자면, 관찰자는 관찰이라는 행위 이전에 본인만의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존하여 관찰을 시행하고, 그것과 연관하여 현상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설명하자면, 우리가 어떤 실험결과에 어떠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사실을 관찰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해석이 가능하려면 해석틀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관찰 이전에 이미 이론/해석틀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상을 단순히 '본다'라는 것으로만 인지하지 않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ㅡ만약 어떤 이론도 가지지 않고 현상을 바라본다면, 바라본다는 현상만 존재하지 현상에 어떤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ㅡ. 따라서 콰인은 아무 편견 없는 관찰이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콰인은 종래에 투명하게 관찰을 하고 그것이 과학이 된다는 입장을 부정합니다.


 위와 같은 콰인의 견해는 그의 전체론으로 유도된 것이었습니다. 언어란 그물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고, 각각의 언어는 서로서로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적 관찰이라는 것도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생활양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관찰은 그와 관련된 주변 언어와의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고전역학시대에 어떤 것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역학체계에 일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고전역학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미리 전제해놓고 관찰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 외에도 기존의 과학자집단이 고수하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실험방식, 실험에 대한 이론을 관찰의 '이론'으로 두게 됩니다. 과학을 제외하더라도, 개인이 일상에서 가지고 있는 생활양식 또한 하나의 이론으로 작용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본인의 신념과 삶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대한 '이론'을 만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관찰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콰인의 입장에서는 종전처럼의 객관적 관찰이란 불가능하게 됩니다.


 콰인은 이러한 충격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더욱 치명적인 결정타를 날립니다.



 근본적 번역의 미결정성 : 과학은 단 하나만의 사실을 가리키는가?


 누군가 어떤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당연하게도 그 대륙에 사는 사람들과 그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알기 위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발화를 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가령 관찰자가 보기에 원주민들은 토끼가 나타날 때마다 "gavagai"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고, 그 결과 선택지를 "토끼가 나타났다!", "토끼" "토끼새끼다" "토끼 모양을 한 것이 있다!" 정도로 줄였습니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되는 "토끼"를 "gavagai"의 번역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번역은 옳은 것일까요? 콰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우선, 원주민과 관찰자는 전적으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그가 원주민을 관찰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가진 언어체계에서 관찰하기 때문에 원주민이 어떤 의미로 "gavagai"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gavagai'를 '토끼'로 번역한 것은, 그의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보았을 때 가장 흡사한 것이 '토끼'가 아닐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언어 사이에 번역이 확실하려면 같은 현상에 대해 원주민의 언어체계(L1)와 관찰자의 언어체계(L2)가 동일한 관찰/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L1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L2의 방식이 일치되면, 'gavagai'와 '토끼'는 정확한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서로는 다른 이론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현상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다른 언어체계 사이에 근본적인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번역을 지지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번역이 옳은지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콰인의 '근본적 번역의 미결정성'이라는 개념입니다.


 콰인의 이러한 견해는 과학의 미결정성을 주장하는 논고가 됩니다. 과학적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현상에 대해 여러 관찰을 할 때, 모든 결과는 항상 하나의 결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경험적 자료는 수학적 논증과는 달라서, 100%의 수렴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실험결과는 그래프 상에서 딱 한점에 unique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문제는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일 것입니다. 콰인은 해석결과는 꼭 하나에 수렴하지 않으며, 실험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다른 결과들을 모두 제외하고, 직선이나 어떤 함수에 수렴하게 그래프를 그리는 것(즉 해석)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기존의 과학적 언어체계와 일관적이고, 현상을 설명하기에 효과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gavagai로 보자면, 세계에 내재하여있는 물리법칙이라는 거대한 언어체계이자 원주민이 보여주는 표현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언어체계를 투영하여 번역을 내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법칙'도 아니고 물리법칙을 소유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에 내재된 물리법칙이라는 언어체계에 대해, 우리의 과학적 방법론, 기존의 이론 등의 언어체계를 전제하여 그들을 관찰합니다. 세계는 어떤 작용을 보일 때 본인의 어떤 법칙 등의 언어체계에 의해 어떤 현상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가진 언어체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관찰을 하고 해석을 내놓는다하더라도, 물리법칙이 아닌 우리로서는 그것이 '옳은 번역'인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결과들과 해석을 제외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콰인의 견해는 과학은 하나의 이론만을 지지하고, 완전한 객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콰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기로 하고, 다음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나마 알고 있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과학철학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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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자들 :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


 철학자들은 대개 어떤 것을 접하고, "이건 뭘까"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 내부에 있는 어떠한 생각에 빠져서 "이건 이거지!"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언어 자체가 독립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요소들을 배제한 채 그 언어의 의미를 고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서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배제한 채 탐구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들이 철학이라는 거대한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이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휴가를 갔을 때 생기는 질병이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언어현실을 따지지 않고 살다가 언어사용이 꼬여버린 존재라고 말합니다. 철학은 언어사용의 잘못됨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을 파리병에서 탈출시킬 때 철학 내부에서 어떤 해답(solution)을 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사고와 언어가 꼬여있는 부분을 해소(dissolve)하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전까지의 철학과 자신의 활동을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활동을 하나의 '치료(therapy)'로 제시합니다. 철학은 파리병에 빠진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치료는 실제적인 언어실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형이상학이란 헛도는 바퀴와 같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자들의 사적언어로 인해 비롯된 것이며, 현실의 언어를 왜곡함으로써 탄생합니다. 이들은 사적언어를 사용하고 실제의 언어를 비틀어 다르게 사용합니다. 이들은 항상 뭔가 거창한 이론을 세우려고 하고, 철학을 통해 뭔가 진리를 수립하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철학이란 이론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밝히기 위한 활동이라고 합니다ㅡ깨우침을 주기 위한 활동ㅡ.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공격하지만 형이상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시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는 정보전달을 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 비유 등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만약 누군가 시를 읽으면서 "이 시에는 도대체 무슨 현실적인 정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시는 그럴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또한 그렇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은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형이상학이 무의미해지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과학적인 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형이상학을 통해서는 과학적인 뭔가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 표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은 의미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철학자들은 언어의 맥락을 무시한채 본인의 상상을 통해 사적인 언어사용을 해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철학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했고, 철학은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현존재라고 불리는 인간(항상 존재존재존재하면서 존재에 관한 언급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은 여러 현실적인,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탄생하고 살아간다는 개념입니다. 인간이란 구체적인 삶의 맥락 하에서 고려될 때 의미가 있다는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벗어나서 과학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에서 전체론을 주장한 콰인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토마스 쿤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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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용도의미론(the use theory of meaning)'으로 불립니다. 그는 전기 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선험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경험적인 방법론을 채택합니다. 즉, 언어와 세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여 1-1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언어에는 반드시 하나의 존재가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로 인해 언어는 세계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입장을 거부하고, 언어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즉, 언어란 인간에 의해 구체적인 상황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됩니다. 용도의미론은 정확히 '언어란 사용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경우는 언어는 초월적으로, 관념적으로 미리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놀이(lanugage ga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언어놀이 : 우리는 현실에서 모두 언어를 가지고 일종의 놀이를 하고 있다

 

 도제식으로 제자를 기르는 목수가 있다고 합시다. 장인은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자에게 수업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벽돌'이란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벽돌'이 꼭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벽돌'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상황A : 목수가 제자에게 집을 짓는 현장에 나가서 벽돌을 어떻게 쌓는지를 보여줍니다. 목수는 제자에게 조금씩 일을 시키기 위해 제자와 제자 옆에 있는 벽돌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벽돌!"

 

상황B : 시간이 지나 제자는 어느 정도 성숙하였고, 목수와 함께 벽돌로 집을 짓는 현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는 제자가 벽돌을 쌓는 부분을 보면서, 벽돌 한 장 만큼의 빈틈을 발견합니다. 목수는 그 빈틈과 제자를 동시에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벽돌!"

 

상황C : 제자와 목수가 착실히 벽돌로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목수와 제자 뒤에는 집에 사용될 수많은 벽돌들이 위로 길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맨 윗쪽의 벽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당장 떨어지려고 합니다. 제자와 약간 거리가 있던 목수는 제자를 바라보며 황급히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벽돌!!"

 

 

각각의 상황에서 목수는 제자에게 모두 "벽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각각의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의 '벽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A에서는 제자에게 "벽돌을 건내라"라는 의미로, B에서는 빈틈에 벽돌을 채우라는 의미로, C에서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하나의 언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상황들이 모두 일종의 '언어놀이'라고 합니다. 언어를 가지고 상황에 따라 놀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는 상황 A, B, C에서 '벽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놀이를 하는 방식은 반드시 하나로만 정해져 있지 않고, 여러 합의에 의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놀이와 같이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A, B, C는 상황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언어의 맥락의존성을 나타냅니다. 어떠한 언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언어가 사용되는 구체적인 언어상황 즉, 언어의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후기 사상에 의하면 언어적 상황/맥락에 따라 수많은 언어놀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언어가 초월적으로/관념적으로 자체적인 어떠한 1-1의 의미나 힘을 지닌다는 전기 사상은 부정됩니다.

 

 인간은 언어놀이에 따라 언어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종교경전의 특정 구절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고, 동시에 동일한 언어가 기도로 사용될 수도 있고, 노래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혹은 적절한 상황에 따라 가벼운 농담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는 여러 언어놀이에 의해 의미가 달리 규정될 수 있습니다.

 

 

 언어놀이 : 본질은 존재하는가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어떠한 대상이든 그 대상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본질(substance)'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substance란 'sub-'과 'stance'의 합성인데, 대상의 '밑에 서 있음'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대상의 밑에 서서 대상을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본질이란 대상에게 내재해있으면서, 불변하는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만들어주는 것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인데, 이는 다른 모든 대상과는 공유하지 않으면서 사과만이 가지고 있고, 사과를 사과로 만들어주는 어떤 불변하는 속성이었습니다. 전통철학에서는 대상에는 이러한 본질이 숨어있으며, 각각의 언어에도 그러한 성질이 있음을 전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언어자체를 분석하여 그 안에 숨어있는 어떠한 속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관념론적인 철학자들에게, 현실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사용되는 언어에는 어떤 관념론적인 것이 숨어있지 않고, 다만 '사용'에 의해 언어가 규정되는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즉, 그는 세계에 미리 내재되어서 대상과 언어를 완전히 규정하는 어떤 언어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란 태초부터 미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놀이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자들이나 본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대상과 대상을 구분지을 수 있는 어떠한 본질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각각의 대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가? 사과와 바나나를 구분지을 수 있는 어떤 본질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 하고, 바나나를 바나나라고 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본질이 없다는 것이 곧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령 게임에는 '게임'이란 단어를 다른 모든 언어, 대상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속성이 존재할까요? 모든 게임에는 사람의 수가 정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며, 승패가 없어도 상관은 없으며, 점수가 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게임에 대해 어떠한 관념적인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실제적인 상황(즉 언어게임)에서 어느 정도의 무언가가 게임이겠고, 어느 정도의 무언가는 게임이 아니겠구나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를 '본질'이 아닌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에서 찾습니다.

 

 

가족 유사성 :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와 언어의 사회성

 

'가족 유사성'이란 가족들을 보면 그들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떤 닮은 꼴을 공유하듯이, 언어에는 어떤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언어가 가진 어떠한 유사성이 있다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언어를 둘러싼 언어게임을 모두 꿰뚫는 본질은 없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딱딱하게 언어란 '이러한 것'이라고 일축된 언어로 언어의 의미를 하나로 고정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는 '대체로 그러한 것' '어느 정도 그러한 것'만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본질이 없고 직관적으로 파악할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념에 시작과 끝, 완전한 한계를 정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서버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위와 같은 입장을 '반본질주의'라고 합니다. 본질은 없고, 가족 유사성 정도만 언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의 의미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간단합니다. 가령 '신사(gentleman)'의 어원은 현대에 쓰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사'란 영국에서 유서 깊은 집안, 귀족 집안의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신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신사들을 보면서 '진정한' 신사란 돈이나 가문이 아닌 그 사람의 품성에서 나와야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발언에 의해, 현재 누군가에게 '신사'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자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만약 언어에 어떤 본질이 있다면, 위와 같은 언어의 변천사에서 완전히 상이한 두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보기에 우리의 눈에는 저 상이한 두 의미를 완전히 꿰뚫는 어떠한 '본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어놀이에 의해 의미가 변천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신사'라는 언어에는 '신사'라면 해야 한다는 어떠한 인식이 '신사'에 합쳐졌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태도로서의 '신사'라는 의미를 만들어낸 사람의 관념에는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사실'로서의 신사와 '태도'로서의 신사는 이상성 안에서 어떠한 대략적인 모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대략 이정도가 '신사'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가족 유사성입니다.

 

 본질 없이 가족 유사성 정도로만 언어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확정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는 대략적으로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가령 '손목'이라는 언어에 대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손목인지를 명확히 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에 대한 의학적인 기준이 있더라도, 그것은 편의상의 기준이지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서로서로 달리 이해되고 달리 사용되는 '손목'이라는 언어 전체를 규정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언어에 대해 명확한 기준(곧 본질)은 없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언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손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손목과 다른 부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질이 없으면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본질이 없어도 가족 유사성에 의해 언어는 이해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정확한 말뜻이 없는데 어떻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언어놀이에는 '일정한 합의'나 '규칙'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목수가 제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벽돌!"이라고 말했을 때 제자가 벽돌을 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그러한 규칙이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높은 목소리로 "벽돌!!"이라고 외쳤을 때 제자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한 것은 제자와 목수가 긴장된 높은 목소리와 '벽돌'이라는 언어의 결합 사이에 어떠한 규칙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의미는 사람들이 합치한 규칙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입장을 '규약주의(conventionalism)'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어떠한 규약들이 가족 유사성을 확보해준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막연하게/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약은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를 배제합니다ㅡ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의미합니다ㅡ. 가령 누군가는 1+1이 3이라는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는 수학적 약속(공리)에 의해 1+1은 2이게 됩니다. 전자는 비록 '규칙'이지만, 규약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동의나 합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적 언어는 언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가족 유사성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규약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가 완전무결한 이성의 법정에 서서 이러이러한 것을 합의된 규칙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정도의 가족 유사성을 통해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며 현실에서 무리 없이 살고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판단의 합치(agreement of judgement)'에 의해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판단의 합치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생활양식 :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생활양식'을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판단의 합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떠한 기호에 대해 이러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 삶에서 그 기호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생활양식의 공유되어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가령 어느 나라에서는 젓가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는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먹습니다. 또한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이러한 음식이 높이 평가받지만, 이러이러한 음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것이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각각의 사회나 국가가 공유하는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생활양식을 공유하지 않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문화적 실례가 일어날 수도 있고 의사소통이 아에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활양식에는 여러 가지가 녹아들어있습니다. 거창하게는 역사에서부터, 공동체의 여러 조직/기구들, 어떠어떠하게 형성된 여러 사회적인 인식들 등등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그러한 것들이 녹아있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언어에는 그 공동체가 기초로 하는 생활양식의 모든 것이 포함되게 됩니다. 즉,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하고 있게 됩니다. 언어 외적인 요소가 언어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이 언어에 대한 전체론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전체론 : 언어는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전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자론과 환원주의부터 알아야 합니다. 원자론이란 어떠한 대상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입장이다. 환원주의는 전체를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부분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원자론과 환원주의가 합쳐져서 전체는 부분의 정확한 합이며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원소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이 나타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입장으로 보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자사실, 요소명제로 환원될 수 있고, 이것들이 세계와 언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언어와 세계에 내재된 1-1대응관계를 발견할수만 있다면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거부합니다.


 전기 사상의 원자론과 환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임의의 단어, 낱말의 의미는 우리가 달리 사용하든 말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낱말의 의미는 언어의 사회성이나 언어 외적인 요소를 고려할 필요 없이 낱말 자체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 이론에서는 언어란 다양한 언어게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초월적 관념론적인 사상은 부정되었습니다. 언어에는 사회성도 들어있고, 게다가 공동체 내적인 요소(생활양식)가 언어에 영향을 미칩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한 의미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언어체계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를 둘러싼 언어체계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체스에 비유합니다. 낱말이란 체스판의 말입니다. 하나의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체스판에 있는 다른 말들의 위치, 하는 역할/해야하는 역할 등도 알아야 합니다. 알고자 하는 체스 하나의 역할과 그 말이 다른 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알아야 비로소 그 체스말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주창한 언어의 전체론입니다.


 그의 전체론에 따르면 언어는 결코 각각의 단어들의 합이 아닙니다.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단어들을 제외하고 그 부분만 따로 빼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각의 단어들은 생활양식, 사회성 등의 영향을 받아 유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그 단어와 관계에 있는 언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원자론과 환원주의처럼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를 단어 각각 낱개로 분석한다면, 단어에 관련된 다른 언어들의 지위와 관계들이 모두 무시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언어가 결코 각각 단어의 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생각을 '밧줄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밧줄은 여러 가지의 실로 만들어져있습니다. 각각의 실들(부분)이 모여 밧줄을 구성합니다. 실들 각각은 약하지만, 실들이 모여 밧줄을 만들게 되면 실들 각각이 가지는 힘보다 강한 힘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끊어지지 않는 밧줄이 됩니다(실들을 위아래로 쌓아놓기만 하면 가위로 한번에 쉽게 짤리지만, 밧줄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밧줄과 같이 언어란 낱개로 보면 엉성하지만, 모두가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강력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언어는 그물처럼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물 안에 있는 요소를 하나 잡아당기면, 그 부분만 따로 빠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부분이 따라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그물망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환원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의미상 연관이 되는 모든 부분을 이해해야 언어의 짜임새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대략 이 정도로 될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철학을 살펴볼 것 같습니다. 그 뒤에는 후기 이론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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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비판한 전기 사상의 오류를 살펴보고, 후기 이론으로 넘어가는 막간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전기 사상의 오류 : 요소명제는 찾아질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는 1-1 대응관계에 있으며, 서로는 서로의 거울이며 언어는 세계를 모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언어적 수단은 원자사실의 거울에 해당하는 요소명제를 통해서입니다. 요소명제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세계의) 대상들의 그림인 이름과 이름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문장입니다. 요소명제는 원자사실에 대응하고, 복합명제는 요소명제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사실 위에 세워진 이론이 진리함수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요소명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문장은 어떻게든 다른 요소로 분해되며, 가장 단순한 문장이더라도 그 문장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가를 증명할 수 있는 방도가 실질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전기 사상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습니다.


전기사상의 오류 : 언어와 세계는 1-1대응하는가?

모사설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는 1-1 대응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는 <<논고>>를 통해 showing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언어생활을 보니 반드시 한 단어가 하나의 대상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에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수학이나 논리학적인 언어가 아닌 이상 현실에서는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 대상도 지시하지 않고,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령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종교인의 '신'과, "손님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손님의 '신'은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같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게에서 '빨간 사과 두 개'를 인지할 때 '사과'라는 언어는 실제 사과를, '빨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색채를 지시합니다. 그러나 '두 개'는 무엇을 지시합니까?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이 언어는 사과가게에서 직접적인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지시한다면 그에 대한 1-1인지를 할 수 있을 텐데, 추상명사인 '둘'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현실에서 대응되는 성격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1-1대응이 일어난다면 애매모호한 단어가 없어야 합니다. 세계는 확정적인 것으로서 언어에 확정적으로 대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목'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며, '빨강'은 어느 색채에서 어느 색채까지인지를 확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이유들로 관념론적이고 선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전기 사상을 버리고 경험적이고 반본질주의적인 언어이론으로 넘어갑니다. 그 이론이 이른바 '용도의미론(the use theory of meaning)'이며, 이 이론은 '언어는 사용에 의해 규정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용도의미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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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나타난 논리실증주의, 검증주의, 반증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증주의의 태동

16-18세기의 막대한 과학의 발전으로 그를 옹호하는 철학적 사조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사회를 연구/이해할 때 성경이나 형이상학이 아닌 과학적인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존 로크가 이런 철학을 최초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연을 성경이나 관념적인 형이상학이 아닌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이해한 뉴턴을 보았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서술을 실험, 경험, 검증을 통해 수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당대에는 자연을 성경이나 형이상학으로부터 유도하려는 입장이 컸기 때문에 이는 상당한 쇼크였습니다. 로크는 뉴턴을 보고 인간과 사회 역시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학적 성과를 보고 인간과 사회 역시 뉴턴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과학을 방해하는 상전으로서의 철학과, 과학을 도와주는 조수로서의 철학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증명이 불가능하고 검증도 안 되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는 상전으로서의 철학이었습니다.

로크의 사상적 기반 위에 실증주의(positivism)가 탄생했습니다. 본래 꽁트라는 사회학자/철학자가 만든 단어입니다. 기독교적 관념론과 헤겔 등의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서 사회와 인간을 분석하던 시기에, 뉴턴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세계를 수학적으로 이해했고, 그런 성과는 형이상학과는 달리 ad hoc나 변명 없이 불변하는 성질이었습니다. 꽁트는 이에 기반하여 사회학(당시에는 사회학이 인간을 총체하는 학문 전체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은 수학, 물리학 등 확실한 학문 위에 서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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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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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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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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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그는 "사회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positively!" 즉, 적극적으로 연구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적극적'이라는 것은 수학, 자연과학의 도식 위에서의 '적극성'이었습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 물질을 뛰어넘는 관념으로부터가 아닌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뉴턴이 보여준 것처럼 어떠한 주장이 경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철학에서의 '실증'의 개념입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아직 소박한 수준의 것으로서 '소박한 실증주의'라고 불립니다. 이 실증주의가 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의 영향을 받고 러셀 등의 학자를 만나 비로소 '논리실증주의'가 됩니다.


논리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구분에 따라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종합명제만이 유의미한 명제라고 합니다. 종합명제란 곧 자연과학의 명제이며, 자연과학의 타당성은 귀납을 통한 이론/법칙의 형성, 현상에 대한 예측에서 '검증'에 있다고 합니다. 즉, 자연과학이 의미있는 이유는 귀납을 통해 만들어진 종합명제들이 실험(포괄적으로는 경험, 감각)을 통해서 옳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있는 명제란 실증적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주의'라는 과학철학적 입장입니다.

실제로 과학의 명제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고, 확인되면서 그 지위를 획득합니다. 어느 이공대의 과를 진학하든 물리나 화학실험은 반드시 배우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로크나 꽁트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철학을 공격합니다. 대표적으로 러셀 같은 학자가 플라톤부터 칸트, 헤겔에 이르는 모든 형이상학을 공격했습니다. 철학은 '검증'되지 않는 영역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윤리적 명제'는 삶에서는 중요하더라도 학문의 대상,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욱이, 형이상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로크식으로 보면 기존의 철학은 모두 과학을 방해하는 상전으로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철학이 해야 할 일은 종합명제와 분석명제를 구분하고, 분석명제의 언어를 다듬어서 과학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검증가능한 일상적인 어떤 문장에서 그 문장에 있는 단어들의 정의(곧 분석명제)를 1-1로 분명히 제시하고, 모호한 언어들(가령 '물, 水'이라는 언어를 제거하고 O2라는 언어로)을 명확한 언어로 나타내어 과학을 도와주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크식으로는 조수로서의 철학이 되겠습니다.


포퍼 : 검증주의는 검증가능한가?

포퍼는 논리실증주의의 문제를 두 가지로 언급합니다. 귀납의 정당성과 검증가능성의 문제가 그의 비판의 화두였습니다.

귀납 논증이란 '전제-결론'으로 이루어진 논증에서, 전제가 부분적으로 결론을 지지해주는 논증을 의미합니다. 모든 일상적인 판단이나 자연과학적 명제는 이에 속합니다. 귀납이란 여러 사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주장을 만들어내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귀납논증은 연역논증(전제에 결론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논증. 가령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나는 죽는다'는 논증)과는 달리 전제를 아무리 분석해도 결론이 연역논증처럼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가령

a는 지구 중심으로 끌여당겨진다
b도 그렇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물질적 대상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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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내의 모든 대상은 지구 중심으로 끌여당겨진다.

같은 논증은 논리학적으로는 옳지 못합니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란 보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귀납을 통해 만들어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법칙들은 논리적 결함을 가지게 됩니다.

포퍼는 여기에 더해 "과학이 검증가능해야한다는 그 주장은 검증가능한가?"라고 공격합니다. 과학이 검증가능성으로부터 지위를 완벽히 얻으려면, 검증가능성 또한 지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유의미한 것은 종합명제뿐입니다. 애석하게도, "과학은 검증가능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경험적인 종합명제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메타적인, 형이상학적인 명제입니다. 논리실증주의는 형이상학을 배제했지만, 과학의 지위를 세우는데 또 다른 형이상학을 만들어버렸으니, 이론적 모순을 안게 됩니다.

포퍼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반증가능성', '반증주의'를 제시합니다. 과학의 합리성, 이론적 지위는 검증주의가 아닌 반증가능성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학 자체에도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고 여겼고, 검증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과학은 활동의 폭이 좁아진다고 보았습니다(가령 우리의 비교관념이나 판단의 기초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지가 않습니다. 칸트식으로는 선험적 구조이죠). 그는 과학은 실증적으로 반증이 가능한 영역으로 규정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과학철학에서 포퍼의 반증주의는 '오류가능주의'를 택합니다. 그에게 과학이란 시행착오를 거쳐 나아가는 학문입니다. 포퍼는 과학에서는 우선 가설을 세워서 가설이 옳은지 틀린지를 그 뒤에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우선 경험을 통한 귀납을 통해 가설을 후차적으로 만들지만, 포퍼는 귀납과 실험이 아닌 가설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습니다. 가설을 우선 세우고 실험을 해보았을 때 그것이 옳다고 판단되면, 그것이 (당대의) 과학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관은 '대담한 추측과 철저한 반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령 포퍼는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모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설을 세운 것이 아니라, 단 한 개의 사과를 보고 가설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담한 추측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경험적으로는 반박이 가능한 명제입니다(아닌 사례가 있으면 부정되겠죠). 그러나 실제적인 현실에서 반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반증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에서 계속 실험을 하여도 그런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이 과학적 지식이 된다고 합니다(철저한 반박). 실제적 현실에서 반증이 안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포퍼는 가설이 반증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 합니다(즉, 가설을 세워두고 반증이 지속적으로 안 되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의심하기만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포퍼에 생각에 따르면 과학은 반증되지 않는 명제들의 집합이 아닌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들의 집합이 됩니다.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경험적 세계가 아닌 추상적, 관념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기에 그 세계에 대해서는 경험으로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또한 맑스주의가 표방하는 '사회과학' 또한 사이비과학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을 경우,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든가, 모순의 양적 변화가 쌓이지 않았다든가를 표방하여 반증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나 주관주의를 다루면 주제가 유물론과 해석학으로 흐르기 때문에 배제하였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사상으로 뵙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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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물음

단상 2015. 8. 5. 00:41


파시즘, 나치즘, 살인마, 희대의 비도덕적 존재, 악덕 권력자, 사이코패스... 등 평범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존재를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자가 아주 막강한 권력을 가져서 세계를 꽉 쥐고 자기 맘대로 한다고 합시다.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있고, 그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으며, 누구든 처단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디에나 충성심 강한 자들이 있어, 그와 일심동체가 되어 명령을 철저히 수행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끔찍한 일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두렵고 공포스럽고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해 매우 만족하며, 스스로에 대해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기에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논리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자, 여러분 그런 세상에서 여러분은 도대체 그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무 힘도 없습니다. 종교가 있으시다면 사후세계의 심판이라도 빌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현실에서 무엇을 그에게 기대할 수 있죠? 아무 힘 없는 여러분은 무엇으로 그에게 그 행위를 그만두게 할 건가요?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힘도 있고 기쁨에 차 있는데, 어떻게 할 건가요? 어떤 근거로 그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나요? 도대체 어떤 근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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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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