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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단상 2015. 8. 5. 00:24


내가 아주 큰 영향을 받은 입장이 비트겐슈타인 후기 이론이다. 완전 잊고 있었는데, 이 부분을 다시 연재해야겠다. 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입장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허무맹랑한 뚱딴지 같은 말이다. 대개 이런 류의 질문은 관념론을 전제하기가 쉽고, 나오는 결론도 이데올로기적이게 될 것이다. 관념론자가 아니라면 질문이 둥둥 떠다니는 언어상황부터 분석해야한다.

개인적으로 텍스트 바깥, 언어 바깥, 감각 밖은 모두 형이상학의 믿음을 전제한다고 본다. 결국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작동성/효과성'에 따라 밖의 무언가를 전제하게 된다. 물리법칙이나 논리법칙이 대개 그렇다.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은 것들. 인과율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흄의 주장처럼 선후사건만 존재하고 효과에 따라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살아갈 뿐이다. 과학이 내일 모레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그냥 그렇게 믿을 뿐이다. 효과가 있어보이고,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유교적 방식에 따라 나는 이런 효과성/작동성을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종교에도 적용하고 싶다. 종교나 철학 학문, 이데올로기는 참인가? 그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믿는가.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리법칙처럼 모든 대상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개개인으로 범위를 좁히면 누구나 작동가능성을 기준으로 뭔가를 택하고 판단한다.

내 삶에서 작동가능하다고 여겨지면, 그게 다다. 돈이든 종교든 음식이든 이데올로기든 학문이든. '진리'에 대한 물음은 그러므로 없어져야 할 대상이고, 다만 "진린지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나한테 맞으면 되는거아니우?"하는 식이 되어야한다. 어떤 식으로든 진리라는 이름은 타인에게 폭력을 낳는다. 그리고 진리가 실재한다면, 그것 또한 작동하지 않겠는가?

(자간설명 :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에서 진리란 무엇인가의 질문이 질문 자체가 아닌 언어적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그 질문 자체에 절대적 대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리가 해체되고, 스스로에게 가장 확신이 가는 작동가능성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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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주장'과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서술한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읽는데에 큰 무리도 없고, 자신의 신앙과 배치되지도 않기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 읽겠지만,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라는 거대한 텍스트 밖에서 보면 이 책은 간증서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결국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그것들의 근거나 원인, 혹은 목표점이 '하나님'이나 '예수'에 있다고 지속적으로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는 '신자'라는 입장에서 당연한 서술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기 편한 신앙간증서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152 페이지이지만 여백도 많고, 일상언어로 가벼운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3시간만에 읽을 수 있었다.

 

 신앙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치가 있던 부분은 아마 6장이 아닌가싶다. 인간은 '초월성'과 '의미', 그리고 '공동체'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것들이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나님에 대한 내용은 제하더라도, 초월성-의미-공동체라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가끔씩 현실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게으르는 등의 비슷한 성격의 대상들이 나에게서 사라지는 세계를 상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현실을 초월하여 뛰어넘어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는 그런 초월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겐 부정적인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그 이상의 어떤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충동이 있음을 인정한다. '의미'라는 것은 과거 내가 매우 고민했던 단어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만큼 과거의 나에게 '의미'라는 것은 중요한 키워드였다.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이후로는 삶의 의미를 묻지 않게 되었지만, 삶의 국소적인 영역에서 의미라는 것은 꽤나 중요한 것 같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할 때에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따지는 것은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공동체도 그렇다. 나는 대개 대인기피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람을 멀리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이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또한 사람을 원하기도 한다. 공동체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이것 또한 초월의 영역)을 그리기도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월성-의미-공동체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세 가지 키워드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비슷한 식으로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사랑 없는 인간이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이란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신앙서적이다보니 궁극적으로는 그 사랑은 하나님이 채워준다고 주장하지만.. 읽으면서 고대철학이 생각났다. 현대인들은 대개 사랑을 좋은 가치로 설정하곤 하는데, 그게 모두에게 옳지는 않았나 보다. 당장 작년에 배웠던 철학자만 살펴봐도 피지스(physis)를 주장했던 칼리클레스는 강자는 자신의 권력에 의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자연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를 무지막지하게 비난했지만, 모든 사람이 사랑이나 도덕을 귀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상상하며 흐뭇해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한다. 역시 그 사랑이 예수로 채워져야하는가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지만,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내 삶에서 중요한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의 근본적인 주장(모든 주장=>예수/하나님으로 귀결)에는 아직 동조하기 어렵다. 보이는 건 주장이고 검증될만한 것들이 꽤나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적어도 저자가 독자를 기독교인이라고 한정짓지 않았다면, 약간의 문제는 있어보인다. 저자는 러셀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를 읽고 책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 또한 이 책의 독자로 고려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와 기독교적 신의 존재를 우선 가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약간은 문제가 있어보인다. 물론 이 책이 기독교 변증서의 영역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별탈은 없어보이지만.. 읽으면서 느낀 것은 결국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검증'과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이에 관련해서는 『예수는 역사다』를 언젠가 읽어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대답할 때 제발 비유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유가 성립하려면 비교되는 대상들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밝혀야하며(상황적 동일성), 근본적으로 두 대상의 성격이 동일함을 밝혀야 한다(본질적 동일성). 대개 물질에서 관념으로,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비유를 할 때면 항상 철학적으로 '초월'이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물질계의 대상의 비유가 추상적인 개념의 세계에 그대로 통용될 것인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알레고리를 통해 물질->관념 으로의 초월이 정당하다고 느끼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물질은 감각되는 영역에서의 대상이고, 개념/관념은 오로지 논리적인 사고의 영역이기 때문에 두 영역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추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런 세계에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근거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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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조작된 것

단상 2015. 7. 29. 16:29

 

 

 적지 않게 언어 자체가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내포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흔히 관념론이나 합리론 그런 쪽으로 논의가 흐르는데, 개인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나는 '언어는 조작된 것'이라는 생각을 따르고 있다. 본인의 상대주의에 대한 옹호에서 그런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언어는 일상세계에서 직접 보고 듣는 '체험'의 표현이다. 즉, 언어 자체가 독립적으로 미리 존재하여 우리는 그 뒤에 언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흰 도화지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존재가 경험과 인식을 통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게 '진리'라든가 유일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과거에 직접 가서 언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본다면ㅡ과거를 탐구해야하는 입장에서는 대개 그들이 '인간'이라는 큰 타이틀 하에서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옳은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려우나, 고대에도 같은 물리법칙이 작용했을 것이고, 고대에도 사람은 인간이 지닐만한 물리적인 특성을 지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에 일관성을 불러오기 때문에 우선은 이렇게 판단하게 된다ㅡ, 언어란 미리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라는 쪽이 좀더 일관적이게 보인다.

 

 언어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매우 개연적이라고 생각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일상세계의 문장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나 오늘 저녁 스파게티 먹고 싶어"라는 문장에서, 언어가 조작된 것이라면(즉, 언어란 모두 인간이 만든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면), 위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 문장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저런 문장에 아무 거부감이 없지만, 사실 '나(개별자로서 1인칭)'라는 대상과 '오늘' '저녁' '스파게티' '먹다' '싶다(기호)'라는 대상이 얼마나 독립적인 대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각각의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모두 다르며, extension[각주:1]과 connotation[각주:2]도 모두 다름을 알 수 있다. 단언하여 말한다면 위 단어들은 집합에 있어서 매우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상이한 대상들을 그저 나열함에도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다. 현실의 체험에서 우리가 저 단어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도록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이런 결과들로부터 각각의 단어들 사이에 어떠한 강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어들 자체에는 그저 개념에 대한 정의밖에 없다. 그 외에 우리가 연관짓는 것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렇게 뇌를 훈련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에 대해서 동일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인 언어는 어떤가? 특히 철학적인 언어는? 대개 학자들의 경우 어떤 단어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이해와 정의를 내리는데, 미리 그렇게 존재해서 철학자가 발견한 것인가? 아니다. 그저 그러한 언어가 현실에서 사용되는 '맥락'만이 있을 뿐이다. 언어 자체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가 어떤 독립적이고 상황-맥락과 독립적인 절대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가령 자신의 언어가 어떤 객관적인 실체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어사용을 무시하곤 한다. 가령 철학에서 '관념'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관념이라는 단어가 태초부터 미리 개념적으로 존재했고, 우리는 그것을 뒤에서 파악할 뿐인가?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관념'이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여러 다른 이해를 불러오며 사용되던 것을, '내가 보기엔 관념이라는 것은 이렇다'라고 해버린 것인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관념이란 단어가 대중에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언어적 상황뿐이다.

 

 철학자들이나 단어를 정의해버리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오류를 범하곤 한다. 단어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 수학의 대상도 그렇다. '수'라는 것은 실존하는가? 아니, '수'라는 것은 플라톤주의적으로 미리 독립되어 존재하는 대상이고,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뿐인가? 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언어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이성능력 속에서 수학이라는 거대한 논리적 언어사용 속에서 수가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수란 우리가 미리 수를 머리에서 정의하고 이해하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수학자집단이 수를 사용하면서부터 그 논리적인 언어사용 속에서 등장했을 뿐이다.

 

 그 외에도 아무 책이나 찾아보면 단어정의를 내리는 경우를 보기가 쉽다. 마치 그것이 (세계가 탄생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미리 있는 것처럼. '단상'의 카테고리에 있기 때문에 더욱 논지를 진행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언어실황을 찾아보면 언어 자체에 큰 힘을 부여하는 것을 보기가 쉬울 것이다. 그것이 마치 인간과 맥락을 떠나 독립적인 어떠한 존재인 것처럼(가령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대개 그 답변이 미리 민주주의가 있어서 계시를 받아 답을 해준 것처럼 느끼기가 쉽다. 민주주의가 뭔가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골똘히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란.."이라든가 "민주주의란 뭘까"같은 형이상학적인 물음보다는 '민주주의'가 사용되는 언어실황을 보아야 한다).

 

 

 

  1. (외연,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들의 집합 ex) 자연수의 외연= {1,2,3,4, ...}) [본문으로]
  2. (내포, 개념이 지니는 공통적인 성질들. ex) 자연수의 내포 = 0에 Successor function을 유한히 적용하여 얻어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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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과 언어적 권력

단상 2015. 7. 28. 22:09



 귀납논리라는 단어를 들어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이는 수학이나 논리학 등의 연역체계가 아닌 체계를 이르는 말입니다(정확히는 가추를 사용하는 체계도 따로 있습니다). 이 체계는 대상에 대한 몇 가지 사례로부터 대상에 대한 일반화를 거치는 명제를 다룹니다. 과학적 판단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우리 삶 전체, 좁게는 일상생활의 대화까지 모두 귀납을 사용합니다. 과학이나 삶에서 대개 귀납의 논리학적 오류(전제가 결론을 정당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런 방법이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항상 객관적 지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언어적 권력을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단연컨대 누구나 일상에서 양화사를 사용할 겁니다. "모든..." "많은..." "적지 않은..." "유일한..." "결코 없는..." 등은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대개 이런 언어들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힘을 실어주기 위해 사용됩니다. 가령 어떤 주장이 긍정적이거나 좋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이를 긍정한다. 많은 근거들이 있다"라든가, 상대의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런 경우는 일부입니다.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도 그에 동의합니다" 등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언어들은 귀납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많다/적다' '유일하다' '불가능하다' 등의 언어가 옳기 위해서는 그에 관련한 모든 사례를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경우 인간이 그런 자료를 모두 알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논리학이라는 학문적 상황을 벗어나 일상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심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발언들은 모두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유한하더라도 수많은 자료를 모두 조사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특히 역사적 판단이나 대형 집단/인간에 대한 판단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통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자신의 발언을 지지하기 위해 통계적 자료를 사용하곤 합니다. '통계적 자료'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쉽습니다. 또한 교수나 연구자라는 신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통계자료를 본인이 직접 검토해보지 않고 결과만 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검증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모두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노력의 문제나 타인에 대한 신뢰로 "그런가보다"하기가 쉽습니다. 이는 반대 입장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으면 매우 개연적인 상황입니다. 물론 상대편이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모두 일상에서 그런 판단을 내리고 발언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지에서 가능한 판단은 양화에 대한 발언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한 확신이나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양화적 언어는 언어적인 권력을 지닙니다. 화자에 대한 신뢰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정치권력에서 "국민들은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국민의 뜻입니다"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알기 쉽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양화를 더함으로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이 경우 자신의 주장을 국민에 대해 양화를 한 것입니다). 반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런가보다"하기 쉽습니다. 거대한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대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작업들이 많이 들어갑니다. 당장 아무 책이나 펼쳐봐도 여러 가지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들에 대해 큰 의심없이 수긍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정치적인) 선동에 쓰일 수 있습니다. 수사학적인 표현과 분위기를 장악하는 방법을 안다면 더욱 자신의 내용을 피력하기가 용이합니다.


---

 제목만 거창한 글입니다=_=.. 뭔가 내용이 더 있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네요.. 사람들은 대개 정치에 쓰이는 수사학이나 여러 방법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 쉬운데, 위와 같은 방법은 잘 쓰이면 좋게도 쓰일 수 있습니다. 가령 제 글을 잘 읽으셨다면 제 글 역시 양화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제 글이 좋은 것인가?하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죠ㅋㅋ). 굳이 구체적으로 수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상에 대한 '단언'이나 '부정', '경향' 등을 동사/형용사 등에 사용하는 방법도 모두 양화적인 표현입니다. 만약 제 글에 설득되셨다면 양화라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큰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평소에 일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유의하면서 듣는다면 이 외에도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평소에 상대의 발언을 유의깊게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않고 양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지적하면 대개 다른 논리를 끌어오면서 굳이 양화적 표현을 맞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 이 역시 '사람들' '대개'가 들어간 양화문장이죠? 양화란 이렇게 재미있는 것입니다ㅋㅋ 양화를 벗어나서 살 수가 없죠 <= 이 역시 양화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러한 문장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 이 역시 '사람들' '이러한 문장'과 '공감' '사실'을 엮은 문장이죠ㅋㅋ 이를 이해하셨다면 인간의 뇌란 얼마나 흥미로운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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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집 Systematic Chaos에 수록된 곡입니다. 인상적인 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9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The water's edge
Is where she waits
Lost soul still wandering
Meant to die
But she's stuck not crossing over

The other side
Is where he waits
His spirit reaching out
Meant to save
But she's too scared
to take his hand

Living in a world without you
(drowning in the past)
Is living in no world at all
So now I call on you

Remember me?
I gave you life
You would not take it
Your suffering
was all in vain
It's almost over now
Don't turn your back on paradise

Feeling scared, she's prepared
To give up everything
She can't stand
to feel like half of her is fading

He will choose
the only way
To rid her of her pain
Take her soul now
The decision has been made

Living in a world without love
(a burden to my soul)
Is living in a worthless world
So I will call on you...

Remember me?
I gave you life
You would not take it
Your suffering
was all in vain
It's almost over
Remember me?
You were so young
How could I tell you?
Remember me?
I am the one
Who saved your life that night

I was the one
who would not abandon you
Even in death
I was the one
who would not leave you
I used my freedom to protect you
And all the while direct you
Do you remember me this time?
Even in death I gave you life
I gave you life

I wanted to deserve a place
A place beside you
This time when I reached out my hand
It reached all the way to heaven

Remember me?
I gave you life
You would not take it
Your suffering
was all in vain
It's almost over now
Goodbye
It's almost over now
Goodbye

It's time
I release you from this life
Don't turn your back on paradise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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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학기

일상 2015. 7. 27. 00:26

 

 

 다음 학기에 아주 높은 확률로 연세대에서 김병한 선생님께 수리논리를 배울 것 같습니다.

 

 학점교류기간은 몰랐기 때문에 허락받고 청강할 생각입니다. 본교에서 신촌까지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그 때문에 본교의 듣고 싶은 수업을 세 개나 빼야했습니다=_=..

 

 다음 학기에는 본교에서 정인교 선생님께서 Computability and Logic를 교재로 강의하시고, 언어철학 강의도 따로 열리기 때문에 심히 기대됩니다.

 

 다음 학기 끝나고 갈고 닦은 결과를 연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ㅋㅋ(불완전성 정리 어렵더이다.. 개념이 복잡해서 어떻게 연재를 해야할지 솔직히 막막합니다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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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단상 2015. 7. 26. 17:36

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한국 아이돌 대중음악을 매우 싫어해왔다. 도대체 음악에 왜 몸매와 얼굴이 필요한지 납득하지 못했고, 립싱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춤도 필요없다고 생각했고, 극단적으로는 자신이 작곡/작사하지 않는 곡을 프로가 자신의 앨범에 넣고 자신의 곡인마냥 부른다는 것 자체에 큰 거부감이 있었다. 당시부터 나는 꾸준히 밴드음악을 선호했기 때문에, 노래는 자신의 삶과 노력이 담긴 자신의 곡으로부터 나와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여러 이유로 타협하여 어느 정도 접었지만, 여전히 나는 한국의 아이돌 문화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tv에 자주 나오는 코드 몇 개를 계속 돌려쓴다는 느낌밖에 못받겠고, 보컬들도 눈
감고 들으면 큰 특성 없이 다 한곳에서 왔다는 느낌이다. 노래시장 역시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지만, 한국은 너무 심하다.

의미 없는 가사에 뻔한 멜로디, 기대되지 않는 노래, 양판소에서 찍어낸듯한 개성 없는 목소리. 길어도 3년 뒤에는 사라질 노래들. 딱 봐도 작곡가나 가수나 노래를 연구한다는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음. 솔직히 가수들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이론적으로 어떤 화성으로 구성되는지 알고 있는지나 알지 궁금하다.
초3때부터 22살 지금까지 스스로 노력하여 작곡/작사하고 하루종일 음악연구하고 소리분석을 하는 음악가들만 들어온 나에게는 이런 문화는 정말 어렵다. 도대체 왜 노래에 자극적인 말들과 장면들이 있어야 하는지 이해불가다.

솔직히 나는 그런 음악들이 최고다하며 듣느니 귀를 잘라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음악들을 싫어한다.

음악은 취향이고 서로 우위는 없다고 다들 말하지만 나는 거기에는 동의 못한다. 음악에는 분명 싸구려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한곡을 위해서 수백번 녹음하고 락에 오페라를 도입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국내 양판소 싸구려 대중음악들의 수준이 같다고 하겠는가.

한국의 이런 흐름은 음악의 이론과 곡 전체의 짜임새를 무시하고 돈만 보는 소속사의 문제도 크지만, 그보다 문제는 막귀인 한국대중들이다.

솔직히 음악성을 보고 노래를 듣는 사람이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오 예쁘네. 노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으니 들어볼까?"하는 식이다. 노래를 노래로 만드는 요소가 아닌 쓸모없는 요소들이 장사에 끼어드는 이유는 대중들이 그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대중들이 음악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그런 대중들 때문에 한국에는 비틀즈가 없고(있었고, 있을 뻔했지만 박정희 군부독재^^와 한국인의 엄청난 막귀에 의해 실패),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국에는 정말로 음악을 음악답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99.9%는 대중 때문에 세션맨이나 하다가 굶어 죽는다. 자신의 막귀를 모르고 노력하는 음악가들에 대해 "이게 뭐야ㅡㅡ"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한국이 음악에서는 일본의 발톱만큼이라도 닮았으면 한다. 일본에는 개성있는 가수들도 많고, 음악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실험적인 노래도 많고, 한국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밴드음악도 선호된다. 얼마나 일본이 노래구성에 신경쓰냐면, 전문가수가 아닌 성우들 노래도 짜임새가 있다. 일본음악을 보면 왜 헬조선 헬조선하는지 알겠다.



※ 글 읽고 불쾌감을 느끼신 한국대중분들께는 죄송합니다. 버스타고 가는데 티비에서 팬티가 보일듯 말듯 치마나 보여주고 유혹이나 하고, 부비부비하면서 이게 노래라고 하는 걸 보니 음악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 느껴져서 화가 나 조금 격하게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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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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