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의 '주장'과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서술한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읽는데에 큰 무리도 없고, 자신의 신앙과 배치되지도 않기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 읽겠지만,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라는 거대한 텍스트 밖에서 보면 이 책은 간증서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결국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그것들의 근거나 원인, 혹은 목표점이 '하나님'이나 '예수'에 있다고 지속적으로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는 '신자'라는 입장에서 당연한 서술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기 편한 신앙간증서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152 페이지이지만 여백도 많고, 일상언어로 가벼운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3시간만에 읽을 수 있었다.

 

 신앙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치가 있던 부분은 아마 6장이 아닌가싶다. 인간은 '초월성'과 '의미', 그리고 '공동체'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것들이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나님에 대한 내용은 제하더라도, 초월성-의미-공동체라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가끔씩 현실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게으르는 등의 비슷한 성격의 대상들이 나에게서 사라지는 세계를 상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현실을 초월하여 뛰어넘어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는 그런 초월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겐 부정적인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그 이상의 어떤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충동이 있음을 인정한다. '의미'라는 것은 과거 내가 매우 고민했던 단어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만큼 과거의 나에게 '의미'라는 것은 중요한 키워드였다.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이후로는 삶의 의미를 묻지 않게 되었지만, 삶의 국소적인 영역에서 의미라는 것은 꽤나 중요한 것 같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할 때에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따지는 것은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공동체도 그렇다. 나는 대개 대인기피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람을 멀리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이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또한 사람을 원하기도 한다. 공동체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이것 또한 초월의 영역)을 그리기도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월성-의미-공동체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세 가지 키워드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비슷한 식으로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사랑 없는 인간이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이란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신앙서적이다보니 궁극적으로는 그 사랑은 하나님이 채워준다고 주장하지만.. 읽으면서 고대철학이 생각났다. 현대인들은 대개 사랑을 좋은 가치로 설정하곤 하는데, 그게 모두에게 옳지는 않았나 보다. 당장 작년에 배웠던 철학자만 살펴봐도 피지스(physis)를 주장했던 칼리클레스는 강자는 자신의 권력에 의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자연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를 무지막지하게 비난했지만, 모든 사람이 사랑이나 도덕을 귀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상상하며 흐뭇해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한다. 역시 그 사랑이 예수로 채워져야하는가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지만,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내 삶에서 중요한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의 근본적인 주장(모든 주장=>예수/하나님으로 귀결)에는 아직 동조하기 어렵다. 보이는 건 주장이고 검증될만한 것들이 꽤나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적어도 저자가 독자를 기독교인이라고 한정짓지 않았다면, 약간의 문제는 있어보인다. 저자는 러셀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를 읽고 책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 또한 이 책의 독자로 고려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와 기독교적 신의 존재를 우선 가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약간은 문제가 있어보인다. 물론 이 책이 기독교 변증서의 영역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별탈은 없어보이지만.. 읽으면서 느낀 것은 결국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검증'과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이에 관련해서는 『예수는 역사다』를 언젠가 읽어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대답할 때 제발 비유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유가 성립하려면 비교되는 대상들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밝혀야하며(상황적 동일성), 근본적으로 두 대상의 성격이 동일함을 밝혀야 한다(본질적 동일성). 대개 물질에서 관념으로,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비유를 할 때면 항상 철학적으로 '초월'이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물질계의 대상의 비유가 추상적인 개념의 세계에 그대로 통용될 것인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알레고리를 통해 물질->관념 으로의 초월이 정당하다고 느끼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물질은 감각되는 영역에서의 대상이고, 개념/관념은 오로지 논리적인 사고의 영역이기 때문에 두 영역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추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런 세계에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근거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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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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