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2015. 9. 6. 03:27



페북에 올린 글입니다.


1. 교회에 형제님께서 family chords를 알려달라길래, 순간 난감했다. 왜냐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모르겠고, 나는 영어는 잘 듣고 잘 읽어도 말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와서 3시간 정도 노트에 10페이지 정도로 family chords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설명을 붙였다. 내일 드려야지! 근데 음악은 귀납적으로 가르칠 때 이해하기 편한데, 너무 연역적으로만 설명한 것 같음..


2. 수련회 때 선물받은 <아버지 빈자리>가 은근히 내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수업 에세이 도서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최근 읽었는데, 같이 생각해보면 참 놀랍다. 과거에 나는 자기성찰도 했지만 그 방향은 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이거나 주로 타자였다. 그러나 최근 위의 책을 포함한 일련의 도서들은 시선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저렇게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고 깊은 자기성찰을 하는 저서들은 쉽게 쓰여져도 진짜 넘사벽이다. '와.. 어떻게 이 정도까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거지??'하는 감탄사를 계속했다..


3. 최근은 스스로에게 무한히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니체가 그러지 않았던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혹시 네이버 수요웹툰 닥터 프로스트 보시는 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프로스트가 나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하고 성찰을 계속하다보니, 내가 이런 감정들과 이런 존재였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페북에 이런 말들을 써도 되련지 모르겠지만, 최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분노를 겪고, 증오도 일어난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이게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예전에는 아니었던 수많은 나들이 보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루에 수십번이라도 고문해서 반xx를 만들어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오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특정인일 수도 있고, 불특정다수일 수도 있고, 대상은 다양하다(스스로를 포함). 요즘 이것 때문에 고민이다. 참는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없는걸로 여긴다고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지금까지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막아놨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상당히 자기기만적이고 무뎌진 상태였다. 왜냐고? 과거엔 이런게 인생에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누군가를 격렬히 쳐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면서 살아가는걸까. 아, 그러나 걱정은 마시길.. 저는 상당히 스스로를 잘 통제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티내지 않습니다. 이 모든건 제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5. 욕망. 나는 삶에서는 칸트주의를 지향하고,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편이다. 왜냐면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내 욕망을 따르는 것은 공리주의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성찰은 "야 정말?"이라는 의문을 불러온다. 도대체 인간에게 욕망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특히 기독교 내부에서 이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걸까. 내가 이해하는 바에서는 성경은 예수의 오심과 부활을 통해 육체의 긍정을 하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상당히 금욕주의적인 구절들이 많다. 당장 잠언만 봐도 모든 구절이 그렇다. 바울 같은 경우는 "임마, 육적인 것은 다 버려."라고 하고, 야고보는 "임마 욕하지마. 하나님께서 다 똑같이 만드셨는데 어찌 그 입으로 저주를 할 수가 있냐?"라고 했다. '건강한 분노' 같은 담론들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성경에서의 대다수의 구절은 분명히 '분노하지말라'고 말하고 있다.


6. 물론 이는 성화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내 문제일터이다. 또한 율법주의적으로 삶을 생각하고, 성경을 대하는 내 태도 때문일터이다. 여튼 요즘은 이것 때문에 괴롭다. 욕망에 솔직하면, 진짜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에게 할 수 없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도 많이 들기 때문에 괴롭다. 성경에서는 욕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문자적으로 그를 대해서, 욕도 안하고(난 아에 일상에서 욕이 차지하는 비율이 0에 가깝다)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 끝없는 분노와 여러 욕망들의 근원을 찾아보고 있는데, 몇가지 개인적인 시원도 보이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사탄(그게 뭐든간에)의 꾀임에 넘어가기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안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고통도, 분노도, 두려움도, 가난함도 모두 끌어 안고 성부께 드렸다. 근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내가 비용서의 모든 것들을 끌어안는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나의 이 끝없는 욕망들을 가져갈 것인가.. 난 아직 신뢰가 부족하다(나는 유물론적 사고관에 익숙하고 아직도 이를 가지고 세계를 쳐다본다).


7.
"주님 저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만큼은 죽음을 불사하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결단코 말하는데,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야, 너 예수랑 같이 다니는 거 우리가 봤어, 맞지?"
"나...나는 결코 그런 사람 몰라!"
"여러분, 이 사람이 갈릴리 예수랑 같이 있던 사람이에요!!"
"아니, 나는 아니라니까? 하나님께 맹세컨대 모른다고.."
"임마, 니 표정에서 예수무리라는 게 나타난다니까?"
"아..아니 모른다니까? 나사렛 예수같은 놈 나는 난 진짜로 모른다고!!!"
(닭이 운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난 딱 베드로 같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항상 베드로 부분에서 멈추게 된다. 위 구절은 내 인상에 강렬히 박혀있다. 개인적으로 통곡하며 도망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성경에서 내가 가장 슬퍼지는 부분이다. 베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고 해야하나 여튼..


 사실 나는 엄청난 겁쟁이라 베드로가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겁쟁이고, 정말 두렵다.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내 선택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러가지로 돌로 쳐맞아가면서 개독개독들으면서 사는 것도 싫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도 많은게 두렵다.


 나는 진짜 사람을 어떻게 잘 고문해서 죽여야할지 수없이 상상해봤고, 심지어 "오 이거 진짜 참신하다"라고 생각할만큼, 별 미친 생각까지 해봤지만(사실 이는 인생사에서 형성된 부당한 권위로부터의 폭력에서 저항할 수 없었기에 망상을 하는 요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나에게는 두려움이 많다.

나는 단언컨대, 나는 내가 온/오프라인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 겁쟁이다. 이에 인생사적 분석은 말하지는 않겠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원인을 찾는 것에 익숙해서 "왜"라고 묻게 되지만, 이는 나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당시의 기억을 강제로 불러오게하기에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고 싶지도 않고, 듣는사람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여튼, 나는 진짜 겁이 많다. (여기까지 읽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글을 읽는 그 누구보다 그렇다고 감히 자부한다.

 

 ivf에 있으면서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서 니체이상의 극심한 분노와 증오, 혐오, 불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된다ㅡ오해하지 말라. '인간'이라고 함은 스스로를 포함하는 것이다ㅡ. 역설적이게도, 나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강한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내 목숨과 타인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중적인 존재다(젠장). 이 이중성은 최근 나를 괴롭게하는 중요한 요소다. 또 다른 이중적 요소가 두려움이다.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갈망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느것이 먼저인지 혹은 동시다발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려움과 갈망을 동시에 놓는 것에 대해서는 심리적 거부감이 없지만,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놓는 것은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떻게 나는 인간에게 분노와 동시에 두려움을 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참 인간이 두렵다. 나는 그 누구든 사람이랑은 친해지기가 참 어렵다. 나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이고 소외적인 존재다.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존재이며, 소외되는 존재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존재다.


 난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심히 두렵다ㅡ내가 원하는 방식이란 나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이면서 철학적인 담론을 할 수 있는자ㅡ. 집단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난 참 두려워진다. 모든 게. 그냥 거기서 베드로처럼 도망가버리고 싶다. 없어져 버리고 싶다. 나는 한마디도 걸 수 없으며, 노력한다한들 무한히 실패할 뿐이다. 그리고 집으로 도망가면서 "아.. 어째서 나는 오늘도 실패했는가.. 다음에는 꼭.."이라고 되뇌인다. 누군가는 해보면 될 것을 왜이리 병신같냐고 물을 수 있다. 실제로도 지금은 인연을 끊은 누군가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고. 나는 논문은 없지만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웃기게도 거의 본능적으로 나는 그런 대화의 구조를 성찰하게 되기도 했다. 여튼, 나는 그런 인물이다.


 분노와 함께 두려움은 내 인생을 지배하는 큰 요소다. 혼자 인맥도 학연도 지연도 없이 돈도 안되는 철학 수학 물리학 이런거나 공부하다가 시간강사하다가 굶어죽을 내 인생도 참 두렵고, 망쳐버린 여러 관계들도 두렵고, 지금의 관계들도 참 두렵고, 다 두렵다.


 나는 이 두려움들의 심원이 내 기본적인 성품과 환경들에 상당히 깊게 연관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나는 결코 인생에서 두려움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없애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지(동시에 인정받고 싶어하는지)를 보았으나, 그는 평생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그늘 아래 있어야 했다. 나도 그럴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할 것은 아니다. 또 시도하고 좌절하면서,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ㅡ이런 인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당췌 이 인간이 왜이리 병신같은 짓거리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dna도 너무나 다르고 살아온 세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ㅡ.


 뭐 그래도 한줌의 빛이 있다면, 그건 단언컨대 예수일 것이다. 하도 기독교가 망해가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ivf공동체는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나를 유일하게 받아준 곳이었다(완전히는 아니지만)ㅡ유약한 니놈을 탓해라!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런 인간이니까ㅡ. 나는 아직도 단한명의 타인도 사랑할 수 없고, 너무나 두려워서 목매달아 죽어버리고 싶지만, 예수는 그나마 인생에서 죽지 않도록 끈을 잡아주는 통로인 것 같다.


 여튼, 최근의 고민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인생 내부의 깊은 두려움(과 좌절), 그리고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끝없는 분노와 두려움과 좌절이 동시에 올라왔다(최대한 자제하면서 글을 썼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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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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