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2권) 6장 연민 : 비극적 곤경들

 

1. 감정과 윤리적 규범

 

 “감정 그 자체는 개인적인 윤리적 숙고뿐만 아니라 공적인 윤리적 숙고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하는가? 사람의 의지와 규칙을 준수할 수 있는 능력보다 감정에 의존해도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 사회질서는 단지 공정한 규칙 및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일군의 제도를 창조하기보다는 감정을 함양하고 그것에 호소해야 할까?(547)”

 

 이를 위해서 저자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탐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연민이 사적 삶뿐만 아니라 공적 삶에서도 합리적인 숙고와 바람직한 행동을 위한 훌륭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548). 우선, 연민(compassion)은 잠정적으로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 의해 초래되는 감정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이런 정의 하에서 연민은 pity, 공감(empathy), 동정(sympathy)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일상적으로 pity는 대상이 되는 자에 대해서, 관찰자가 생색을 내거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pity를 보통 번역되는 ‘연민’으로 번역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 다른 감정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감/감정이입(empathy)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가치중립적으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정의할 것인데, 이에 따르면 공감과 연민은 같은 말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동정(측은한 생각이 든다)과 연민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구분을 제시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용례에 따르면 동정보다 연민의 경우 고통의 대상이나 관찰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가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상에서 쓰이는 감정들과 위의 정의에 의해 주어진 연민이라는 감정을 분리시켜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기초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2에서는 연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른 감정들과 다르며, 연민을 다룬 철학자들은 연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연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 연민의 인지적 구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편의상 Ar)에 따르면 연민이란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해 느끼는 고통스런 감정”이라고 말하고, 여기서의 불행이란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상에게 닥친 것으로 믿는 불행”을 의미한다. Ar은 이 감정이 발동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인지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1) 대상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믿음 혹은 평가

(2) 대상이 해당되는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3) 대상에게 고통이 일어나게 된 가능성만큼 관찰자 역시 그런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저자는 연민을 우선은 타인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하였다(이런 정의는 나중에 좀더 구체화되고 엄밀하게 제시된다). 이것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는 Ar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 가지 모두 직관적임을 보일 것이나, 저자는 결과적으로 (3)은 연민이라는 감정과는 독립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른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연민의 정의를 완전하게 내린다.

우선, 위의 조건을 만족하는 연민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필록테테스는 착한 사람으로 훌륭한 병사였다. 그리스군 편에 가담해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러 가던 길에 그는 끔찍한 불행을 만난다. 순전히 우연으로 렘노스 섬에서 성역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벌로 성소를 지키는 뱀에게 발을 물린다. 그의 발에서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지독한 고통으로 그가 퍼붓는 저주는 다른 병사들의 종교 의식을 망쳐버린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섬에 홀로 남겨두는데, 절름발이가 된 그에게는 활과 화살 말고는 어떤 자원도 없으며 또한 식량이기도 한 동물 말고는 친구 하나 없다.

10년 후 그들이 그를 데리러 돌아온다. 그의 활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정군 지도자들은 필록테테스를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곤경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를 속여 데리고 갈 궁리만 한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의 합창단은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심지어 그를 보기도 전에 그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상상한다. 그리고 지휘관들의 냉담함에 대한 항의에 들어간다.

 

 [(합창단)나는 그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구나. 돌보아 줄 사람 하나 없이 다정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늘 혼자서 몹쓸 병을 앓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없을 때마다 당황할 것이란 생각을 하면.. 아아, 신들의 계략이여! 아아,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 불쌍한 인간 종족이여!]

 

 [(필록테테스가 지휘관인 네옵톨레모스에게 하는 말)그대가 나를 구해주시고, 그대가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네옵톨레모스)···나는 마음속으로 저 사람에게 깊은 동정을 느끼네(deinos oiktos)]

 

 이제부터 좀더 세밀하게 위의 인지적 조건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1)에 대해서 “어떤 것이 대상에게 심각한 고통인가”를 묻는다면 단순하게 “크기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심각함”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불행이 크기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우선 Ar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죽음, 신체적 폭행, 학대, 노화, 질병, 굶주림, 친구의 결여, 친구와의 이별, 육체적 유약함, 몰골이 흉해지는 것,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는 것, 기대했던 바가 뒤집어지는 것, 좋은 전망의 부재.”

 

 현대에 와서 클라크라는 학자는 그 크기를 만족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파트너의 부정, 사랑하는 이의 죽음, 질병, 신체적·정신적 장애, 부상, 트라우마, 성폭력, 신체적 학대, 범죄의 희생양, 재난의 희생자, 홈리스가 되는 것, 불임, 이혼, 차별받는 것,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 역할에 대한 압박감, 원치 않는 임신, 매력 없는 외모, 교통사고, 차 고장, 집문제, 무심한 부모, 경쟁력 상실, 우울증, 두려움, 공적 모욕, 피곤, 악평, 지루함, 짜증나는 일 등”

 

 Ar과 클라크가 기술한 ‘크기가 있는 고통’은 공유하는 것이 많지만 같은 층위는 아니다. 이것으로 볼 때 크기가 있는 고통 즉 불행을 “골칫거리가 당대의 지배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불행은 사회마다 기준이 다르고, 또한 삶의 양식의 변화 역시 기준을 달리하는데 기여를 한다. 그러나 Ar이나 클라크 모두 그 재난들이 (당대의) 핵심적인 재난임은 모두가 일치를 보고 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러나 크기에 대한 평가가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연민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아니기도 하다. 가령 다음의 두 사례를 살펴보자.

 

 “로마 귀족인 Q는 아프리카에서 공작의 혓바닥을 배로 실어 보냈지만 중간에 중단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그 결과 그날 저녁 만찬이 완전 재앙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는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친구인 세네카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세네카는 웃는다.”

 

“인도의 한 시골 부락에 사는 여성 R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데다 교육도 초등학교 1학년 이상은 마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불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건강하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리 없으며 교육의 혜택과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람직한 여성에 대한 해당 문화의 견해를 너무나 철저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훌륭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으며 여성으로서는 의당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녀 및 그녀와 같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해당 주의 지방 개발청 사람들은 깊이 감동해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재난의 크기는 대상이 생각하는 것과 관찰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며, 연민을 발생시키는 인지적 조건은 관찰자가 인지하는 고통의 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관찰자가 느끼는 인간애적인 괴로움은 고통받는 자의 감정의 반영과는 무관하다.

 

 흥미로운 점은, 관찰자는 R에 대해서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가, 좋은 삶인가에 대한 관념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연민의 상황에는 잘사는 것과 관련된 관찰자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크기와는 무관한 이야기이지만, 후에 행복주의라는 개념과 이것이 연관이 있음을 밝힐 것이다.

 

 둘째(2)로 “대상이 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은 대상의 고통에 대한 응당/부당에 대한 판단이 개입되어 있고, 연민의 경우 그런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이 부당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인식이나 행위와 무관하게 어떤 (피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주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비행기 추락사고, 범죄를 당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잘못으로 잘못된 상황에 처한 경우에도 연민은 가능하다. 말하자면 대상이 받는 고통이 잘못에 비해 과중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부모는 다 큰 아이가 빠지게 된 곤궁에 대해 연민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아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두 단계로 나누어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아이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청소년이라는 조건ㅡ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ㅡ은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맹목성과 함께 일정한 유형의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종류의 잘못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아이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청소년이 되는 것에 따르는 곤경의 일부처럼 보이지 않는 실수에 대해서는 그와 똑같은 방식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10대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낄 가능성이 크지만, 개를 고문하고 죽인 10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후자는 어떤 종류의 ‘불운’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16살이 되는 불운의 일부인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사회학자인 랜디스는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동안 탁원한 연민의 수사학자로 미국인들로 하여금 경제적 재앙을 홍수나 모래 폭풍처럼 본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밀어닥친 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대공황(Depression)’이라는 용어조차 대가다운 솜씨로 만들어낸 말로, 당시의 경제 상황을 허리케인(열대성 저기압depression) 그리고 이어진 갑작스런 홍수와 연결시켰다.”

 

 엄밀하게 후자는 위의 사례에 맞지 않지만, 루스벨트에게 대공황의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은 충분히 그것이 루스벨트가 예상할 수 없었을 성질이고 그가 그것을 초래했더라도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사례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즉, 둘째 인지적 조건은 대상의 행동이나 의지를 넘어서 책임질 수 없는 범위로 일이 커지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런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앞의 필록테테스의 사례가 그렇고,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게 운명지어져버린 오이디푸스의 사례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청중들은 연민을 느끼도록 요구받는다. 클라크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불운이란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힘의 희생양이 되는 것,” “자초하는 바람에 나타나는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닌 결과.”

 

 (1)에서 보았듯이 (2) 역시 사회에 따라 어떤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적 조건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필연적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사회에 따라 인식기준이 다르다. 가령, 저자가 기술하기에는 미국의 사람들은 여성이 성범죄를 당하는 것이나, 가난한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위험한 장소를 혼자 걷는 등 여성이 그것을 ‘자초했다’는 인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난 역시 그러하다. 가난은 곤경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면 해소되는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남용은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닥친 일로 간주하기도 해서, 그런 대상들에게는 연민을 품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같은 사회 내에서도 다른 공동체들은 위의 상황에 대해 피해자의 행동과는 무관하다고 보고 연민을 느낄 것이다. 즉, 어떤 사건이 행동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필연적인 불운인가에 대해서는 사회, 공동체마다 다를 수 있다. (2)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정리하자면 사람들의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무엇이 부당한 고통인가에 대해서는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Ar이 세우는 마지막 조건(3)은 대상에 대해서 관찰자가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인지하는 조건이다. Ar은 이에 대해 연민이란 “자기

자신이, 즉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과 관련되어 있다. 위의 필록테테스의 사례에서도 그는 독자들과, 지휘관에게 이것은 자신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대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경우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봄으로써 타인에 대한 연민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설명할 수 있다.

 

 “어째서 국왕들은 신하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없는가? 그들 자신은 절대 신하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자들은 가난뱅이들에게 그다지도 냉혹한가? 그들은 가난뱅이가 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귀족은 평민에게 그토록 큰 경멸을 주는가? 귀족은 결코 평민이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어느 누구도 내일은 오늘 자기가 도와주는 사람 같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제자는 저 영광의 높은 곳으로부터 불행한 자들의 고뇌를, 그리고 불쌍한 자들의 노고를 내려다보는 습관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가 그들을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들을 동정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기대는 하지마라. 그처럼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이 자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또 그들의 모든 재앙이 다 자기 발밑에 있다는 것, 예측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수많은 사건이 당장이라도 그를 그곳에 묻히게 할 수도 있음을 그에게 잘 이해시켜라. 그에게 출생에 대해서도, 건강에 대해서나 재산에 대해서도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않게 가르치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 “그들과 비슷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획일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사회나 가족의 가르침, 문화적 차이가 크다면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배심원단들의 배경에 따라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말하는 상황에 대해서 연민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계급, 종교, 인종, 젠더, 성적 취향 등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럼에도 정리하자면 타인과 나의 어떤 공통성(community)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의 고통이 사실로 다가온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들어가 있는 의미 또한 파악할 수 있을 때로 한정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이 아니라 무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령 스피노자는 동물과 인간의 공통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을 고문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이해(3)는 연민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저자의 의견(행복주의)을 살펴보자.

 

 저자는 우선 초월적인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권한다. 가령 제우스가 사르페돈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과 연민을 느끼는 경우, 기독교의 신이 인간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경우, 부처가 중생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경우를 위의 문제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가? Ar은 연민을 “자기 자신이, 즉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Ar이라면 초월적인 존재는 인간과 같은 존재(필멸자)가 될 수 없긴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 때문에 연민을 느낀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보다는 다른 이해를 가져볼 것을 권한다.

 

 저자는 (3)의 조건이 행복주의적 판단과의 연관성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행복주의적 판단이란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구상과 관련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로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 좋은 삶에 대한 가치기준들과 그에 관련한 계획, 목표들과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가령 기독교의 신의 경우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목표와 계획은 인간을 전제해야 하고, 또한 그들이 겪는 불행이 자신의 ‘좋은 목표’나 ‘좋은 삶’에 대한 판단과 매우 벗어나있기 때문에 연민을 겪게 되는 것이다. 부처의 관점에서도 그렇다(특히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아직 그렇지 못한 스님들에 대해서 연민을 품는 경우). 말하자면 행복주의적 판단이란 그 대상이 내 삶의 관심권 안에 있고, 그들의 상태가 내가 그리는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생물이 될 수 없음에도 동물의 굶주림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전혀 경험하지 못했고 그러지 못할 차원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행복주의와 Ar의 (3)의 조건에 대해서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현재 존재하는 아이의 목표와 다른 사람(심지어 멀리 있는 타자들)은 아이 자신이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ㅡ이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의 중요한 일부라는 행복주의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다리로 이어주는 건축물의 일부이다. 인간이 잘사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구비한 관찰자는 사람들이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굶주림, 장애, 질병, 예속에 시달리는 세계를 보게 된다. 그는 식량 같은 재산, 건강, 시민권, 자유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자신이 그러한 재산이 안정적으로 보장된 안전하고 특권적인 사람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지는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그는 거지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생각을 외부로 향하도록 이끌어 재산과 재원의 분배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 배치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최악의 사람들ㅡ가난한 사람들,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 여성들, 하인들ㅡ의 운명이 최대한 좋은 사회를 원하게 될 것이다.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통해 자기이익 자체는 사회의 바닥을 높이는 원칙을 선택하는 것을 촉진한다.”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저자는 연민에는 세 가지 연민의 인지적 구조가 있다고 말한다.

 

(1)크기에 대한 판단(심각하게 나쁜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났다)

(2)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사람이 이 고통을 자초한 것이 아니다)

(3)행복주의적 판단(이 사람 또는 생명체는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의 중요한 요소, 목적으로 그에게 좋은 일을 촉진해야 한다)

 

 또한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은 위의 사례와 같이 행복주의적 판단을 형성하기 위한 인식적 보조물이라고 한다.

 

3. 감정이입과 연민

 

 저자는 감정이입이 연민을 함축하지도 않고, 연민이 감정이입을 함축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 들었던 예시에서, 어떤 사디스트는 타인을 고문할 때에 상대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 고통에 이입함으로써 오히려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이때 그 고문자는 자신이 고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곤경에 처한 범죄자의 행위에 대해 경험적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연민을 낳지는 않는다. 또한 아침마당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할지라도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기획하는 행복한 삶과 동떨어졌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복주의적 판단이 결여되어있다. 따라서 감정이입이 연민을 항상 함축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연민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감정이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으로 감정이입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령 우리는 결코 고등생명체처럼 인지능력을 결여한 동물이 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 즉 재구성이 불가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ㅡ이는 생명체에 대해서 어떠해야 한다는 행복주의적 판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ㅡ. 전지전능한 신 역시 그렇다. 전지하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에게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모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 혹은,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가령 일상에서 옛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럼에도 감정이입과 연민 사이의 모종의 연관은 있다. 2의 사례에서 보았지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인 행복주의적 판단을 정확히 내리는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도 타인에 대해 연민을 느낄 때 감정이입이 동반된다는 심리학 실험들도 존재한다(일상적인 직관도 그러한듯하다).

 

 4. 연민과 이타주의 5. 연민의 장애물

 

종종 연민은 자선행위와 연관되기도 하는데, 위의 행복주의적 판단과 연관지어 본다면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이상적인 삶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방해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이것들은 수치심이나, 질투, 혐오에 근거한다.

 

ex)남성은 전지전능해야한다/하다는 남성관으로부터 여성적인 것들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서 여성과 약자에 대해서 연민을 느껴도 수치심을 느껴 돕지 않는 경우

 

ex) 자신의 고통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타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질투하는 경우

 

ex)나치세력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

 

6. 연민과 비극

 

 비극 작품들은 우리가 겪지 못한 상황들에 대해서 행복주의적 관점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고, 여러 상황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작품들은 연민 그리고 그에 관련한 이타적인 행동들, 도덕적 규범과 연관지을 수 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는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지만 최종적으로, 1에서 제기된 문제에서 보자면 제도에 감정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연민 그리고 보다 더 큰 관점에서 바람직한 감정을 가질 때에야 타인의 불행과 행복이 자신의 목표와 행복을 달성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복주의적 관점에서 행동할 때 롤즈의 무지의 베일의 사례처럼 더 합리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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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한 윤리학 발제입니다. 책이 1,2,3권으로 나뉘어있는데 1권을 빼고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후반부를 읽을 때 집중력이 많이 날아가서 그런지 후반부는 정리를 잘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에 대해 분석적으로 서술해나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2권은 주로 연민을 다루지만, 1권과 3권은 주제가 다릅니다. 모두 감정에 관한 것으로, 나중에 스스로를 분석하기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조금씩 읽어볼 의향은 있습니다. 그래도 철학책이다보니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컴팩트하게 잘 쓰여진 글이라 좋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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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적 지평에서 바라본 호메로스적 아테(ate)

 

·ate(미망, 어리석음) : 행위자 자신이 수행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전혀 예상치 못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또한 아테와 관련된 모든 상황은 행위자 자신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아테는 관련된 행위로부터 후에 파멸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는 행위자의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시간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지평에 있으며, 인과적으로는 원인-결과의 지평에서 사용된다. 또한 아테 개념은 일리아스에서 중요한 서사적 지평으로 사용된다.

 

cf. 아타스탈리에(atasthalie)는 ate와 대조적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추측했음에도 부적절한 숙고로 인한 어리석음이다. 행위의 결과가 행위 이전에 고려된다는 점에서 ate의 어리석음과는 다르다.

 

ex)헥토르는 트로이아 성벽 밖에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일어난 결과를 두고 자신의 아타스탈리에 탓에 백성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다고

한탄함. 이때 헥토르는 자신의 아타스탈리에가 폴뤼다마스의 충고를 듣지 않은 탓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1) 아가멤논의 경우

“아카이오이족도 종종 그런 말을 하며 나를 비난하곤 했소. 하지만 그 탓은 나에게 있지 않고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과 어둠 속을 헤매는 복수의 여신에게 있소이다. 아킬레우스에게서 내가 손수 명예의 선물을 빼앗던 그날 바로 그분들이 회의장에서 내 마음속에 사나운 아테(ate)를 보내셨기 때문이오. 신이 모든 일을 이루어놓으셨는데 난들 어쩌겠소?”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내놓는 것을 자신의 체면이 손상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손상된 체면을 구하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주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았다. 아가멤논은 여기까지는 자신의 체면을 회복하는 것을 의도했고, 그것을 위해 브리세이스를 뺏으려고 했다. 또한 아킬레우스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를 모독한 결과가 희랍군의 패배라는 여파를 가져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행동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을 아테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여파가 온 후에야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기에 긴 시간의 지평 속에 아테의 개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노인장! 그대는 내 아테를 거짓 없이 사실대로 지적해주었소. 내가 아테에 빠졌다는 걸 부인하지 않겠소. 내가 쓰라린 마음에 복종하여 아테에 빠졌으니, 이를 바로잡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상금을 기꺼이 바치겠소.”

위의 맥락과 동일하지만, 특이한 점은 아테의 원인을 신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과 연관짓고 있다는 것이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도 깨닫게 되겠지요. 아카이오이족 중 가장 용감한 자를 털끝만큼도 존중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테를.” 여기에는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고려되고 있다.

 

2) 아킬레우스의 경우

- 포이닉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무자비한 마음을 억제하라고 권유한다. 포이닉스의 발언 후에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를 ‘거만한 마음의 소유자’로 표현하는데 이는 오만(hybris)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가멤논이 오만하여져서 상황을 그르치고 아테에 빠진 것처럼, 아킬레우스 역시 오만으로부터 아테에 빠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이닉스가 위의 발언을 할 때는 희랍군이 패배하고 있는 도중에도 아킬레우스가 참전하지 않으면 아테에 빠지게 되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오만에 빠져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것이 파멸적인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아테에 빠지게 되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무구를 주면서 주며 트로이의 성벽까지는 가지 말라고 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여 헥토르를 만나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파트로클로스 자신도 아테에 빠진 것이지만, 이를 만든 아킬레우스 역시 아테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헥토르 시신유린 : 아폴론이 “연민(eleos)도 존중/수치(aidos)도 없는 자”라고 말했음에도, 아킬레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는 아킬레우스가 신마저 무시하는 오만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다시 말해 아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아테의 해소 : aidos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아킬레우스의 무자비함과 오만, 아테는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과 존중을 통해 해소된다.

아킬레우스의 경우는 『일리아스』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로부터 시작하여 오만을 통해 아테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용이 후반부에 이르러 그것이 두 번째 분노와 지속되는 오만과 아테에 관하여 서술되고, 마지막에 가서야 프라이모스에 대한 eleos와 aidos를 통해 해소된다. 이렇게 보면 아테는 일리아스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고, 아테가 지닌 서사적 지평을 보여준다 하겠다.

 

3) 아테와 관련한 신적 개입의 문제 : 신적 차원의 합리성과 인간 차원의 비합리성

  아가멤논의 사례와 같이 아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신들의 개입이 언급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아테 개념은 인간의 비합리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구성할 때 합리적인 모형을 그리지만, 그에 관한 행위가 파멸적 결과, 여파를 낳을 것이라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호메로스적 영웅들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이 뜻한 대로 할 수 있음의 한계에 대한 앎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자립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불러오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며, 따라서 인간의 비합리성을 인정한다ㅡ이는 등장인물들이 아테 개념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으로부터 알 수 있다ㅡ.

 

 흥미롭게도 일리아스는 그런 인간의 비합리성을 또 다른 신적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모든 일이 제우스의 계획대로 되었다는 것). 이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비합리적이지만 신적인 차원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인간적 차원에서는 인과의 연쇄가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적인 차원에서는 관련된 인과를 보여줌으로서 세계의 합리성을 설명하려 한 점에서, 일리아스는 일종의 메타적인 합리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설명역할을 하는 합리성까지 마련한 것이다.

 

 

 정준영 씨의 서사적 지평에서 바라본 호메로스적 아테(ate)  라는 논문에 대한 요약입니다. 윤리학 발제했던 두 번째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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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네이버 블로그에서 긁어왔습니다.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 2016년에 들었던 수업일겁니다.

 

 

『일리아스』에서 영웅적 자아의 aidos와 행위패턴

 

·aidos는 맥락에 따라 공경, 존중, 수치, 염치, 부끄러움, 면목, 자존, 명예감, 체면 등으로 사용될 수 있음

 

1. aidos는 공적인 영역에 속해있고, 관련된 행위 기준들은 영웅들의 자아에 내면화된다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를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으로 취급되었다고 분노한다. 이는 아킬레우스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자아의 손상을 입어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즉, aidos는 (공동체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회적 불인정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전투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달아날까를 심히 고민하다가, 결국은 전투에 나서기로 함. 심한 내적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영웅적 면모를 선택했다는 것은 오뒷세우스가 그리스에서 합의하는 이상적인 자아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 이상적 자아가 내재화되었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수 있었고, 고민 끝에 용기를 내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공적인 가치를 담은) 이상적 자아는 영웅들에게 내면화되어있다.

 

-aidos와 관련된 내적인 자아가 반드시 한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으로의 모욕으로부터 분노를 표출했고, 디오메데스는 아가멤논의 모욕에도 공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아킬레우스의 자긍심으로서의 aidos를, 디오메데스는 공경으로서의 aidos를 보여준다.

 

cf. Ar. 덕을 갖춘 자는 “확고하고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행위”ㅡ내적갈등을 뛰어넘는 경지ㅡ.

 

2. 영웅들은 자긍심(aidos)을 가지고 영웅다운 행위방식을 통해 공동체의 인정/명예(time)를 추구한다.

 

-공동체로부터 주어지는 명예(time)와 aidos는 큰 연관성이 있다. 이상적 가치가 공동체 내부에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영웅들은 행위에 있어 체면(aidos)을 차려야 하고 이는 aidos가 사회적 인정과 큰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메루스에서 사회적 인정을 대표하는 용어는 명예(time)이다.

 

-명예라는 개념이 일리아스에서 반드시 배타성과 경쟁성의 맥락에서만 쓰이지는 않았다.

 

ex) “···내가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인 양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이 아르고스인들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대하던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오.”

 

아킬레우스는 명예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공동체 밖의 존재로 밀려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이 맥락에서는 time를 경쟁적 가치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명예는 공동체적 인정의 징표

 

“그대[아가멤논]와 동등한 선물을 나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소. 치열한 전투의 노고를 더 많이 감당해낸 것은 내 팔이었지만 분배할 때에는 그대의 선물이 월등히 컸소.”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time)”를 누리고 있소.“

아킬레우스가 공정한 분배를 받지 못한 것을 공동체로부터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역으로 아킬레우스가 명예를 공동체적 인정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명예는 (공동체의 승인) 인정의 가치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맥락을 앞으로 돌리자면, 아킬레우스는 공동체적 인정·명예(time)를 받지 못함으로서 수치심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time의 이면에는 aidos(영웅으로서의 자존)가 놓여있다.

 

ex) 전쟁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메넬라오스가 다시 대열로 돌아가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느냐, 도망치느냐를 고민하다가 헥토르가 다가오자 두려움에 도망침.

 

메넬라오스가 이렇게 고민한 것은 비겁한 행동이 공적인 수치심/분노를 사게 될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넬레오스는 영웅으로서의 자존(aidos)을 지켜야 한다는 이상적인 자아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자신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인정을 통해 확인하려는 영웅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패배 자체가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ex)헥토르 “그[아킬레우스]의 손에 영광스럽게 죽는 편이 나에게는 훨씬 더 나을 것.” 이는 자신이 패배하더라도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eleos)과 이에 대한 공경/겸허/존중(aidos)을 통한 분노(menis)의 해소

 

-아킬레우스의 분노1 : 자신이 영웅임에도 명예(time)를 공동체적으로 무시받은 결과에 대한 분노.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소.”

 

→공동체적 가치기준에 호소. 그러나 막상 자신은 다음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자존심(aidos)을 위해 공동체를 배반함.

 

-아킬레우스의 분노2 :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상황에 대한 분노. 아킬레우스는 그리하여 전쟁에 다시 참가함. 이 상황은 분노1처럼 공동체적 인정으로서의 명예(time)와 관련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기에도 모종의 명예와 관련된 맥락이 있다.

 

“내게[아킬레우스]는 그런 명예(time)는 필요치 않아요. 나는 이미 제우스께서 정하신 운명에 따라 명예는 얻었다고 생각해요.” 전자의 명예는 공동체적 인정으로서의 명예다. 분노2에서는 후자의 명예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kleos(명성)으로 표현된다.

“나의 어머니 은족의 여신 테티스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kleos)는 불멸할(aphthiton)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이에 따르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있지만, 명예를 위해 참여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때의 명예는 time가 아니라 kleos이다ㅡ말하자면 역사에 기록될 고귀한 죽음ㅡ. 이와 같은 구도로 보자면 아킬레우스의 두 가지 분노는 모두 명예와 연관되어 있다.

 

-분노의 지속 : 아킬레우스의 두 번째 분노와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비통은 헥토르를 죽이고, 시신을 유린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폴론은 이에 아킬레우스에게 aidos와 eleos(연민)을 결여한 자라고 한다. 또한 헥토르의 어머니인 헤카베도 아킬레우스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이 탄원들을 무시하는데, 그 뒤에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가 같은 말을 하자 탄원을 받아들인다.

 

-분노의 해소 :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의 탄원을 받아들인 이유는 프리아모스와 자신이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똑같은 인간적 조건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신과 인간의 구분에 대한 공경/겸허(aidos)이며, 같은 운명의 인간에 대한 연민(eleos)과 존중(aidos)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 겪는 보편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연민에 관한 존재론적 통찰만이 분노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학기초에 논문 두개를 발제했는데 이 글은 정준영 씨가 쓴 『일리아스』에서 영웅적 자아의 aidos와 행위패턴   이라는 논문에 대한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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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venth Circle(지하 7층)

 모두들 들어보셨겠지만 단테라는 사람이 신곡을 썼습니다. 신곡은 Divine Comedy를 이릅니다. 현대 전에는 코미디는 희극을 뜻했습니다. '신(성한) (희)곡'이라서 신곡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단테가 쓴 대서사시입니다. 지옥편에 그가 쓴 지옥의 구조가 있는데 원형으로 층이 아래로 계속 내려갑니다. 9층까지 내려가고 아래로 갈수록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7층은 폭력의 층입니다. 말 그대로 폭력을 저지른 자들이 벌을 받습니다. 타인에게 폭력을 가한 자,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자살), 신과 자연에 폭력을 가한 자들. 이 곡에서는 이 뜻으로 지하 7층이 쓰이진 않습니다. 이곡에서는 '전쟁이 난무하는 곳'으로 쓰입니다.

 톰의 죽음으로 인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댄은 '이젠 더 이상 꿈꾸고 싶지 않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깊은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깰 때마다 온갖 감정이 밀려오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톰이 살아있을 때 그와 싸웠던 기억들이 플래시 백 되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가사에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추락하고 있고, 먼지가 되어버리고 싶어합니다. 또한 '차라리 밴드활동을 아에 하지 않았더라면(Maybe it's better to never have been)'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회만 하지 않고 문제에 부딪히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보다 더 강하게 불살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Some of us burn too bright). 그건 매우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손을 꽉 쥐게 됩니다. 

 

I don't wanna dream anymore
난 더 이상 꿈꾸고 싶지 않아
I've buried it all too deep
매우 깊은 곳에 묻었어
Every waking moment is war
잠에서 깨는 모든 순간이 전쟁이야
This is the seventh circle
이곳은 지하 7층이야

I'm stepping off the edge
난 추락하고 있어
I think I'd prefer oblivion
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어
I feel the blood drip from my face
내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느껴
Maybe it's better to never have been
차라리 한번도 오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었을지도 몰라
Too afraid to connect, what can I do to repent?

사람들과 만나는 게 너무 두려워, 난 참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해?
I've got to settle my regrets, but first I've got to accept
회개를 해야겠어, 그러나 우선 받아들여야 해.
Some of us burn too bright, I'm holding on too tight
우리 중 일부는 매우 붉게 타, 난 손을 꽉 쥐고 있어
I think I'm done with reality
난 여기서 끝인 것 같아

 

I don't wanna dream anymore
난 더 이상 꿈꾸고 싶지 않아
I've buried it all too deep
매우 깊은 곳에 묻었어
Every waking moment is war
잠에서 깨는 모든 순간이 전쟁이야
This is the seventh circle
이곳은 지하 7층이야


I don't wanna dream anymore
난 더 이상 꿈꾸고 싶지 않아
I've buried it all too deep
매우 깊은 곳에 묻었어
Every waking moment is war
그런데도 잠에서 깨는 모든 순간이 전쟁이야
This is the seventh circle
이곳은 지하 7층이야


I don't wanna dream anymore
난 더 이상 꿈꾸고 싶지 않아
I've buried it all too deep
매우 깊은 곳에 묻었어
Every waking moment is war
잠에서 깨는 모든 순간이 전쟁이야
This is the seventh circle
이곳은 지하 7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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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ing to heal(살고 싶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쌍둥이 중 한명이 죽을 시 나머지 한 명의 자살률이 꽤 높다고 합니다. Holy Hell(2018) 앨범의 주 작사가인 댄은 죽은 톰의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는 자살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러나 눈 떠보니 그곳은 절벽 끝이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죽으면 신에게 가겠죠, 그래서 자살에 가까워질수록 신에게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자살충동이나 시도, 자살에 가까워지는 모든 건 결코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하죠. 이젠 그것들이 짐승이 되어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그는 이것이 답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톰(성배)이 울타리 너머에 있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그것에 홀려 찾아 마치 이카루스처럼 그것을 향해 투신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 투신했죠.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든, 자신이든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유지를 이어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 하는것이죠.
 악마가 댄에게 "가서 목매달아"라고 속삭이지만, 그는 이제 길을 찾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끝의 끝에 톰을 만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때 죽은 자(톰)는 일어나 댄을 위로할 것입니다. 댄은 이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린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 같은 것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런 쉬운 길은 없습니다. 어렵더라도, 우린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I found my way to the garden
에덴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어
But I couldn't see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어
The cliff edge in front of me
내가 절벽 끝에 서있다는 걸
No cloud can catch me now
이젠 어떤 구름도 날 잡진 못하겠지

It brings me closer to God
그건 날 신에게 가깝게 만들어
But keeps the dirt in the wound
그러나 상처에 통증을 계속 일으켜

And now the beast has teeth
이젠 짐승이 이빨을 가졌어
I've got my hand on my heart
난 내 가슴에 손을 얹었어
I thought that I knew the way
난 내가 길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But I've been torn apart
난 갈기갈기 찢어져왔던거였어

Now I know there's a holy grail
이제 난 성배가 있다는 걸 알아
But it's beyond the pale
그러나 그건 울타리 너머에 있어
Why must we always fly so close to the sun?
우린 왜 항상 태양 가까이 날아가려고 할까(이카루스 신화)
The silhouettes have fallen one by one
하나하나씩 추락한 자들의 그림자가 보여
'Cause we forget that the sun sets
우린 해가 진다는 것과
And we're not long for this world
이 세계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잊어버려
No cloud can catch me now
어떤 구름도 날 잡진 못해

I found my way to the garden
난 에덴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But I couldn't see
날 알지 못했어
The cliff edge in front of me
내가 절벽 끝에 서있다는 걸

The Devil's recruits whisper in my ear
악마가 내게 속삭여
"Go tighten that noose"
"올가미를 꽉 조여"
But it's clear
그러나 이젠 명백해
I've gotta follow the thread
난 이제 이 실을 따라갈거고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미궁에서 실을 따라 빠져나간다는 뜻)
Instead, I'll dream of the end
대신 나는 끝을 꿈꿀 것이라고
And I will raise the dead
그리고 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거야
We're all refusing to feel
우린 모두 느끼지 않으려 해
And yet we're dying to heal
그런데도 우린 그저 (표면적인) 상처를 치료하는데 절박해 해
But there is only now
그러나 우린 현재밖에 살지 않아
And there's no easy way out
그리고 쉬운 길도 없지

I found my way to the garden
난 에덴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But I couldn't see
날 알지 못했어
The cliff edge in front of me
내가 절벽 끝에 서있다는 걸

Now I know there's a holy grail
이제 난 성배가 있다는 걸 알아
But it's beyond the pale
그러나 그건 울타리 너머에 있어
Why must we always fly so close to the sun?
우린 왜 항상 태양 가까이 날아가려고 할까(이카루스 신화)
The silhouettes have fallen one by one
하나하나씩 추락한 자들의 그림자가 보여
'Cause we forget that the sun sets
우린 해가 진다는 걸 잊어서
And we're not long for this world
우린 이 세계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잊어버려
No cloud can catch me now
어떤 구름도 날 잡진 못해

I see no silver linings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When the days are so dark
어둠이 우리를 드리울 때에는
So hold a flame to these words
그러니 이 불같은 말들을 꽉 잡아
Enough pressure will create a diamond, oh
"충분한 압력은 다이아몬드를 만들거야, 오"
I see no silver linings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When the days are so dark
어둠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는
So hold a flame to these words
그러니 불 붙여진 이 말들을 꼭 붙들어
Enough pressure will create a diamond
"이 시련이 담금질이 될거야"
Enough pressure will create a diamond
"담금질이 날 강하게 만들거야"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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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Misery(현대의 비극)

 

 영상을 보면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상엔 사람이 화살에 찔려죽었는데 그걸 촬영하는 방송국, 뿌연 안에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꽃이 담긴 물병의 물이 검게 되어있고 앞 사람은 피를 흘리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핸드폰을 하고 자신에게 피가 튀자 그걸 닦고 다시 그대로 돌아가는 사람, 과로로 피 흘리지만 신경쓰지 않는 회사 사람들 등등.. 있습니다.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가사가 달라질 수 있으나 환경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겠습니다.

 가사에 '우린 씨앗을 심었고..' 이 부분 바로 후에 영상에서는 꽃병에 물이 검어지는 걸 보여줍니다. 또한 밴드가 뿌연 상자에 갇혀있는 걸 알 수 있죠.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삼키고 산소를 내놓습니다. 그런데 물병의 물이 썩을 정도가 되었다는 건 이산화탄소가 심각하게 많다는 걸 상징합니다. 같은 상징이 갇혀있는 공간이 매우 뿌옇게 되어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사에서는 '그건 빛이 없이도 자라', 식물이 자라려면 광합성을 위해 빛이 필요한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산화탄소는 빛마저 필요없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좀먹어가면서 크니까요. 그리고 그건 모든 인류(70억)가 기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직접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나아지기'를 기도할 뿐이죠. 그리고 이게 인간이 유일하게 이 사태에 대해 공유하는 것입니다(노력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그래서 지옥엔 악마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인류가 다 악마니까요.

 

 이산화탄소를 심하게 발생시키는 건 심각한 자연파괴, 필요 이상의ㅡ과한 욕심으로 인한ㅡ 개발, 또한 그걸 이루기 위한 인간착취죠. 이건 마치 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끝없는 높이의 빌딩을 세우고 빛이 통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것에 모두가 몰두하죠. 이를 위해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 자연, 인간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우리가 흘리게 한 피를 씻어낼 물이 부족합니다.

 

 이를 주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황제들, 메시야, 마야죠. 마야는 그리스어로 spell(마법)을 뜻합니다. 전 여기서 환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don't be fooled by maya. 마법에 속지 마라. 가짜, 즉 현실을 가리는 환상에 속지 마라는것이죠. 현대의 메시아는 우리를 좀먹게 만들고 근본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지만 더 좋은 기술, 더 빠른 기술, 더 나은 현대적인 개발을 주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기에 열광합니다. 이들은 황제이기도 합니다. 우습게도 황제는 아무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마치 벌거벗은 황제이야기처럼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모두 왕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모두 알면서도 말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그걸 말하는 사람은 이제 어리석은 사람이 되니까요. 세상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모두 알지만 비극적이게도, 반어적이게도, 이제 그걸 말하는 사람은 진부한 바보가 됩니다. 그러나 가사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부술 수 있을 것(brittle bone : 쉽게 부서지는 뼈;;brittle bone disease는 골다공증)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심각함을 진실로 깨닫고 협력한다면요. 그러나 그 불편함 이상으로 우리를 안락하게 하는 이 기술들, 그리고 쉽게 눈 돌리게 하는 환경들(핸드폰 등)이 그렇지 못하게 합니다. 현대적 비극이죠.

 

 이런 것들을 깨달은 화자는 '난 이 노래를 내 안에만 품은 채로 죽지 않겠다'면서 이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또한 노예처럼 빌빌거리며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강하게 나서서 살겠다고 합니다.

 

 

 

 

Seven billion hungry ghosts
70억의 굶주린 유령들
Just a parasite killing its host
그저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일 뿐이야
The emperor wears no clothes, I see those brittle bones
황제는 아무 옷도 입지 않았어, 쉽게 부술 수 있을거야
But we're buried by modern misery
그러나 우린 현대의 비극에 의해 뭍혀버렸어
Modern misery
현대의 비극에 의해

 

There's not enough water in the world
세상에 충분히 물이 많지 않아
To wash the blood from our hands
우리 손에서 피를 씻어내기엔
We planted a seed, its roots will suffocate the soul
우린 씨앗을 심었고, 자라날 것의 뿌리는 우리의 목을 조를거야
It grows without light and feeds from our bones
그건 빛이 없어도 자라고, 우리를 먹고 자라
Hell must be empty, all the devils are here
지옥은 비어있어. 모든 악마가 여기있거든
Singing us the Lord's Prayer; finally, something that we all share
주기도문을 부르면서; 끝내, 우리가 공유하는 게 생겼네 

 

I won't go to the grave with the song still in me
이 노래가 내 안에만 있는 채로 죽지 않겠어

 

What are we hiding in the rain?
빗속에서 도대체 우린 무얼 숨기고 있는걸까?
This is a prison for lost souls
이곳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위한 감옥이야
Another life circles the drain
또 다른 순환이 배수관을 채워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Now we can't see the forest
우린 이제 숲을 볼 수 없고
'Cause there's no light in the black hole
더 이상 빛은 존재하지 않으니
Don't try and tell me we are blessed
내게 우리가 축복받았다 말하려고 하지마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함께 달리곤 했으니까

Are these our new messiahs?
이게 새로운 구원자들이야?
'Cause the saviour has a gun to my head
이들은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Don't be fooled by Maya, the kings are all thieves
환상에 속지마, 모든 왕들은 강도들이야
And the serpents will bite as they please
뱀들은 자기 마음대로 물거야
How has it come to this?
어떻게 사태가 여기까지 왔을까?

 

I won't go to the grave with the song still in me
난 절대 이 노래를 내 안에 품은 채로 죽지 않겠어
And I won't live like a slave begging from my knees
또한 나는 무릎꿇고 구걸하는 노예처럼 살지 않겠어

 

What are we hiding in the rain?
빗속에서 도대체 우린 무얼 숨기고 있는걸까?(지구를 우울하게 만드는 문제들이 빗속에 씻겨가고 흐려짐)
This is a prison for lost souls
이곳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위한 감옥이야
Another life circles the drain
또 다른 순환이 배수관을 채워(즉 이 지옥에 갇힌 인간들이 또 다른 악마들을 만들고 그들이 다시 이짓거리를 한다는 말)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Now we can't see the forest
우린 이제 숲을 볼 수 없고
'Cause there's no light in the black hole
더 이상 빛은 존재하지 않으니
Don't try and tell me we are blessed
내게 우리가 축복받았다 말하려고 하지마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함께 달리곤 했으니까

 

Seven billion hungry ghosts
70억의 굶주린 유령들
Just a parasite killing its host
그저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일 뿐이야
The emperor wears no clothes, I see those brittle bones
황제는 아무 옷도 입지 않았어, 쉽게 부술 수 있을거야
But we're buried by modern misery
그러나 우린 현대의 비극에 의해 뭍혀버렸어
Modern misery
현대의 비극에 의해

I won't go to the grave with the song still in me
난 절대 이 노래를 내 안에 품은 채로 죽지 않겠어
And I won't live like a slave begging from my knees
또한 나는 무릎꿇고 구걸하는 노예처럼 살지 않겠어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We used to run with the wolves

우린 늑대들과 달리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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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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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나온 Alien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전 앨범 Node까지는 마커스가 들어온지 얼마 안 되서 스타일이 크게 정립되지 않은 느낌도 적지 않았는데 Alien은 마커스 이후의 노스레인의 스타일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잘 만든 앨범입니다. 스크리밍, 클린, 가사, 미디어, 드럼, 박자, 기타 등등 모든 요소가 실험적으로, 그리고 아주 잘 융합되어있습니다. Alien 앨범 전체를 추천하지만 개인적인 사연으로 이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Alien 앨범 전체가 마커스 개인사에 관한 노래입니다. Freefall에서 잠깐 다룬 적 있으니 거기도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이 노래는 어머니에 관한 곡입니다. you는 어머니로 표상되죠. 어머니는 마약중독이었고, 마커스의 누나가 집을 나가서  마약문제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때 어머니는 누나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커스는 어머니에게 마음속으로 "이젠 안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이고, 어머니 또한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에서 보내버릴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소재는 이것이지만 전반적으로 학대받은 어린시절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I can't reach your hand
너에게 닿을 수 없어
I can't liberate you
너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도 없어
I know you're alive
네가 살아있음을 알아

but in my heart I've said goodbye
하지만 난 마음 깊은 곳에서 '이젠 안녕'이라고 말해왔어
So tonight, I'm sleepless
그래서 지금, 난 잠들 수 없어


Afraid of what I might become
내가 어떻게 될까봐 정말 두려웠어
Of course I've tried to ignore
물론 난 무시하려고 했지
But still it leaves me feeling numb
하지만 아직도 '그것'들이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I wished I could've done more
난 내가 더 잘할 수 있었으면 했어
It's taken over every cell
그게 내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어
Why are you drowning yourself
난 스스로 물어. "네가 고통받을 때
When you are so unwell?
왜 스스로를 밑바닥으로 끌고가니?"

I can't reach your hand
난 너에게 닿을 수 없어
I can't liberate you
너를 자유롭게 해줄 수도 없어
I know you're alive
네가 살아있는 것도 알지만
but in my heart I've said goodbye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계속 나는 되새겼어 "이젠 안녕"
So tonight, I'm sleepless
그래서 지금, 난 잠들 수가 없어..
Sleepless, sleepless
잠들지 못해..

I keep this out of sight, out of mind
난 이것들을 계속 무시하려고, 마음 속에서 치워버리려고 했어
But I never left it all behind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어
I never left it all behind, behind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어

I can't reach your hand
난 너에게 닿을 수 없어
I can't liberate you
너를 자유롭게 해줄 수도 없어
I know you're alive
네가 살아있는 것도 알지만
but in my heart I've said goodbye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계속 나는 되새겼어 "이젠 안녕"


So tonight, I'm sleepless
그래서 지금, 난 잠들 수가 없어..

I'm sleepless, sleepless

난 잠들 수가 없어
I'm sleepless, sleepless

난 잠들지 못해
I'm sleepless, sleepless
잠들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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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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