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논리학에서는 만약 ...이면 ...이다 혹은 if ..., then ...이라는 문장의 진리치를 기호 '→' 에 관한 진리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사실 논리학을 처음 공부하면 사람들이 가장 헷갈리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여기에 속합니다. 여기에서는 일차논리의 조건문에 대한 정당화와 일차논리적 규정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비직관적인 사례들을 보겠습니다.

우선 고전논리에서 조건문은 실질조건문(material implication)으로 규정되는데, 이 말은 조건문에 기술되는 명제들(전건과 후건)의 진리값에 의해 기계적으로 그 진리값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명제 p와 q가 주어졌을 때 p→q의 진리값은 p가 거짓이거나 q가 참일 때 참으로 정의되고 나머지일 때는 거짓으로 정의됩니다. 정리하자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p

q

p→q

T

T

T

T

F

F

F

T

T

F

F

T


 이런 정의를 내리는데는 다음과 같은 정당화가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전제가 참일 때 결론도 참이면 조건문이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a가 자연수라면 a는 유리수이다'는 명제가 참인 이유는 전건인 a가 자연수라는 가정이 주어진다면 결론 역시 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건이 거짓이고 결론이 거짓이라면 조건문 역시 거짓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가령 'a가 유리수라면 a의 허수부분은 1이다'는 문장을 거짓으로 보이는 이유는 전건은 참이지만 후건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전건이 거짓인 경우에도 조건문을 참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기엔 비직관적입니다. 가령 친구랑 내일 밥을 먹는데 '내가 내일 중식을 먹는다면 내일 밥값을 내줄게'라는 조건문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내일이 왔을 때 중식이 아니라 한식을 먹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위 조건문의 전건은 거짓입니다. 그럴 때 일상적으로 저 조건문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경우 조건문의 참거짓을 가릴 때는 우선 전건이 참인 경우로 많은 경우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의 진리치는 그 명제를 구성하는 명제들의 진리값에 의존하여 유일하게 결정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본다면, 전건이 거짓인 경우에도 조건문의 진리치를 정의해주어야 합니다. 우선 여기서 일상적인 조건문의 의미와 고전논리에서의 조건문의 의미차이가 발생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조건문의 전건이 거짓인 경우 조건문의 진리치를 정한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정당화가 제시될 수 있습니다.

1.전건과 후건 모두 거짓일 때
(i) 이 경우에는 동일률이 부정됩니다. A가 거짓인 경우 A→A를 규정하게 되고 동일률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전건과 후건이 모두 거짓일 때 조건문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ii) 1+1=3→(3+1+1)=6이라는 명제를 봅시다. 전건과 후건 모두 거짓입니다만, 1+1=3이라면 덧셈에 관한 규칙과 =의 의미, 숫자들의 정의에 의해서 3+1+1은 3+(1+1)=3+3=6이 됩니다. 이 경우 조건문을 논증으로 본다면 전제인 1+1=3에 수학적으로 타당한 추론규칙을 적용해서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논증의 타당성이 추론규칙들, 논증의 형식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경우 전건과 후건이 거짓인 경우 조건문 전체를 거짓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워보일 수 있습니다.
(iii) 수학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아직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지지 않은 p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명제가 참일 때 어떤 명제 q를 이끌어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수학학술지에는 p이면 q이다는 명제에 대한 증명이 실릴 것이고 다들 조건문 p→q가 참이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왜냐면 p에다가 수학적으로 타당한 형식들과 기존에 주어진 정리들을 가지고 적용해서 q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정리들을 증명하다보니 q가 거짓임이 밝혀졌고 p 역시 다른 경로로 거짓임이 밝혀졌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p→q가 거짓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당한 추론규칙을 사용해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례들에 따라 조건문이 전건과 후건이 모두 거짓일 때 조건문을 참으로 규정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전건이 거짓이고 후건이 참일 때


(i) 가령 틀린 명제들로부터 참인 명제를 도출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령 3이 짝수라고 한다면 3x2도 짝수입니다. 왜냐면 임의의 자연수 x2는 짝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연역적으로 짝수라는 개념과 x2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3은 짝수다->3x2는 짝수다  는 명제 역시 참으로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건은 틀렸지만 연역하는 수학적 규칙 자체는 바르게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ii) 후건부정규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경우는 확실히 조건문을 참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후건부정규칙은 ~q와 p→q로부터 ~p를 이끌어내는 규칙입니다. 만약 전건이 거짓이고 후건이고 참일 때 조건문을 거짓으로 규정하면 후건부정규칙을 타당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후건부정규칙이 성립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q가 참이고 p→q가 참인 명제를 가져온다면 ~p가 도출됩니다. 세 가지 명제 사이에 모순이 없으려면 우선 p와 q가 모두 거짓이고 p→q가 참이기 때문에 만약 전건과 후건이 거짓일 때 조건문을 거짓으로 만들면 이 경우 p→q가 참이면서 거짓이 됩니다. 따라서 후건부정규칙을 받아들이려면 전건과 후건이 모두 거짓일 때 조건문을 참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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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스키의 논리적 귀결에 대한 분석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존재합니다.

1. 일차논리에서 분석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형식들이 존재한다

 타르스키는 논리적 귀결의 문제는 논리적 형식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만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타르스키의 이해로는 일차논리의 형식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논증들이 존재합니다. 가령
 X is redㅑX is not blue
X is roundㅑX is not square
A is placed at north of B ㅑ B is placed at south of A
는 전제들이 참인 모든 경우에 결론이 참이므로 타당하다고 여겨지지만 일차논리의 형식으로는 분석되지 않습니다. 논리적 형식이 아니라 말의 의미에 의해 타당한 형식들입니다.

2.  ω-rule의 배제

 일차논리학에서 논리적 귀결관계는 compact합니다. 여러 동치인 조건들이 있긴하지만 말하자면 문장들의 집합 Γ과 어떤 문장 A가 있을 때 ΓㅑA(A는 Γ에 속한 문장들의 귀결이다)이면 Γ의 유한한 부분집합 Γ_0가 있어서 Γ_0ㅑA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일차논리학 구조에서 어떤 명제든 유한한 명제/문장들의 집합에 의해서 함축될 수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유한한 문장에 의해서는 함축되지 않고 무한한 문장들의 집합에 의해서만 함축되는 문장이란 있을 수 없는가? 이때 제시되는 게 ω-rule입니다

 ω는 집합론에서 자연수 집합을 나타내는 기호 중에 하나입니다. 자연수는 0과 더하기 1에 닫혀있는 가장 작은 집합입니다. 그래서 자연수 체계에서 우리는 이런 논증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술어 A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A(0), A(1), ..., A(n), ...
------------------------------
xAx
 라고 기대합니다(유한한 문장들로 함축할 수 없을 때 위와 같은 구조를 ω-rule이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각각의 자연수가 A의 성질을 만족하면 모든 자연수에서 그럴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런 논증이 가능하다면 일차논리학에서는 compactness가 성립하기 때문에 유한한 자연수를 잡아서
A(i_0), ... ,A(i_n)ㅑxAx를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무한한 문장들의 집합에 의해서만 함축할 수 있는 자연수체계의 문장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령 모든 자연수 n에 대해서 4n+1은 홀수이다는 명제를 증명하려면 보통 귀납법을 통해서 모든 자연수가 그러함을 증명해야하지만, 일차논리에서는 유한한 자연수들만 보이면 그렇다는 것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사고방식이 아니죠. 이건 왜 그렇게 되냐면, 일차논리에서는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표준적인 모형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수공리계 PA를 만족하는 모형이 여러 개가 있고 표준적인 자연수체계와는 구조가 전혀 다른 모형들이 존재합니다. 일차논리에서는 그런 모형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수에 관한 ω-rule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3. 일차논리의 논리적 귀결관계는 전제들과 결론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음에도 귀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들을 논리적 귀결으로 인정한다

 이는 뒤에서 material implication(실질조건문 →에 관한 진리값 정의를 다룸)을 다루면서 자세히 볼 겁니다만 가령 일차논리학에서는 ~A&AB는 항상 성립합니다. 논리적 형식에서는 이는 이렇게 증명됩니다.
1.A&~A   전제
2. A         1에 연언제거규칙
3. A v B    2에 선언도입규칙
4. ~A       1에 연언제거규칙
5. B         3,4 선언제거규칙

 전제가 논리적 모순이면 결론에 무엇이 나오든지 항상 그 논증은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말하자면 A와 ~A와는 관련없는 어떤 명제 B도 위의 도식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장이 어떤 문장들의 귀결이라고 말할 때는 보통 주어진 문장들과 관련있는 규칙들과 문장들만을 사용하여 어떤 문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B가 A나 ~A와 관련이 없는 문장이라면 저런 형식은 매우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가령 1+1=2와 1+1≠2로부터 원은 둥글다는 명제를 귀결시킬 수 있습니다만, 전제들과 결론이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함축되는가가 매우 의문시됩니다. 그렇다면 위에 제시된 논증에 사용된 추론규칙이 일상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때 B를 도입하는 규칙은 선언도입규칙입니다. 즉, A가 있으면 언제든지 A v B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와 연관이 없는 B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차논리의 이런 문제점을 보안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A와 B가 원자문장들을 공유할 때만 선언도입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여러 일차논리의 문제를 보안하려)으로 relevant logic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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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철학에서 논리적 귀결에 관한 문제는 어떤 문장들이 어떤 문장을 함축한다, 어떤 문장들의 귀결이 어떠한 문장이다는 말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어떤 문장(들) A가 B를 함축한다 혹은 B는 A의 귀결이라는 말은 우선 AㅑB로 줄여쓰기로 합시다.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생각은 AㅑB의 의미는 A가 참인 모든 경우에서 B가 참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명확히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에서 A가 참인 경우 B가 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논리적 양상)'이 무엇인지를 논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첫째로 사례대입(substitution of instances)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점은 논리적 귀결의 문제는 논리적 형식의 문제라는 겁니다. 가령 '나는 2018.6.24일 아침밥을 먹으면 당일에 학교를 갈 것이다'는 문장과 '나는 2018.6.24일 아침밥을 먹었다'는 문장은 '나는 그날 학교를 갔다'는 문장을 함축합니다. 이때 귀결관계는 A와 A->B로부터 B가 귀결되는 논리적 형식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장이 어떤 문장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것은 대개 이런 형식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귀결관계 혹은 함축관계의 문제는 논리적 형식의 문제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때 논리적 양상의 문제는 사례대입(substitution of instances)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AㅑB는 A와 B에 대한 모든 대입사례에서 A가 참이면서 B가 거짓인 경우는 없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제한적으로 이때 A와 B가 속하는 언어가 산출할 수 있는 문장들의 집합은 무한집합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언어가 n개의 문장만을 가진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임의의 문장 A1...An+1에 대해서 A1&...Anㅑ A1&...An&An+1가 성립합니다. 이런 기호가 보기 힘드신 사람들은

A1&...An
-------------
 A1&...An&An+1      라고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위 논증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소가 n개밖에 없기 때문에 위의 언어에서는 타당합니다. 따라서 이런 이해에서 언어가 만드는 문장들의 집합의 크기는 항상 무한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의 이해를 대입적 분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볼자노(해석학자로 유명한 bolzano맞습니다)의 이론이고, 이에 밀접히 연관된 타르스키의 해석적 분석(interpretational analysis)도 있습니다.

 타르스키는 우선 AㅑB를 어떤 A와 B의 비논리상항의 대입사례 중에 A가 참이면서 B가 거짓인 사례가 없는 경우(혹은 A와 B에 나타난 모든 비논리상항의 대입사례에서 A가 참인 경우 B도 참일때)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는 n이 2이상인 경우 'n개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참임을 정당화하게 됩니다(볼자노는 이. 이는 물리적인 참인 명제일수는 있어도 상상하기는 어렵죠. 가령 유일신만 존재하고 어떤 창조물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능세계를 생각해볼 수 있을겁니다.

 논증은 간단합니다. 우선 어떤 명제가 논리적 진리라는 말은 그 명제가 임의의 명제들의 집합의 귀결이라고 정의합시다. 아니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어떤 명제 A가 있다고 하면 ~(Aㅑxy xy) 입니다. 즉, 어떤 비논리상항의 대입사례가 존재해서 A의 대입사례가 참이면서 뒤의 문장이 거짓인 사례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xy xy에는 어떤 비논리상항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논리상항의 대입사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순이므로 '2개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참입니다. 이는 2를 넘는 모든 자연수에 대해 성립합니다.

 타르스키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모형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모형은 <D,I> 논의의 영역인 D(domain)와 해석 I(interpretation)으로 구성되어있으며, D는 공집합이 아닌 임의의 집합으로 규정됩니다. 주어진 모형 M(model)에서 I는 주어진 비논리상항들에 D에 속하는 원소를 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AㅑB는 A를 참으로 만드는 모든 모형에서 B 역시 참이라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사례대입의 관점에서 보자면 I는 비논리상항에 D에 있는 원소를 대응시키는 일종의 사례를 구성시키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x(MxLx)
Ma
--------------------
La
 는 어떤 모형 M이 와도 즉, a에다가 어떤 해석을 부여하든 타당한 형식입니다. 그에 반해

x(MxLx)
La
--------------------
Ma
는 거짓인 모형이 존재합니다. 가령 Mx는 4의 배수이다 Lx는 2의 배수이다로 정의하고 a를 6으로 하면 이는 전제의 두 문장이 결론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xy xy도 이제 논리적 진리가 아닙니다. I가 무엇이든지 D={0}으로 놓으면 D의 원소는 하나밖에 없으므로 이 모형에서는 거짓이 됩니다.

 타르스키의 이해에서 흥미로운 것은 D가 공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x(x=x)는 논리적 진리라는 점입니다. 어떤 A가 오더라도 Aㅑx(x=x)입니다. 왜냐면 A가 참인 어떤 모형에서도 그 모형은 공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원소가 존재하므로 x(x=x)가 성립합니다. 즉, 타르스키의 논리적 귀결의 분석에서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논리적 진리라는 것이죠.

*논리적 상항은 ~, &, ∨, →, ∀, ∃, = 이런 것들과 변항들(x,y,z...)을 지시합니다. logical constant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제중립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뜻합니다. ~A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가 고정되어있죠. 변항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어떤 지시체를 대입할 수 있는 기호(가령 x는 사람이다)혹은 논의의 영역의 어떤 원소나 모든 원소를 지칭하게 해주는 기호(모든 x는 ---이다, 어떤 x는 ---이다)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a,b,c,d... 같이 D에 의존적으로 의미를 다르게 부여해줄 수 있는 constant들(individual constant라고 부름)이나 f,g 등의 함수기호들, P Q R 등의 술어기호들은 비논리상항이라고 부릅니다.

*타르스키가 D를 공집합이 아닌 경우로 제한한 것은 기술적인 이유입니다. 여러 사례가 존재하는데 가령 prenex normal form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일차논리의 문장이든 양화사를 맨 앞에 나두고 양화사가 없는 문장을 양화사 뒤에 배치시키게한 어떤 문장으로 논리적 동치가 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게 있습니다. D가 공집합일 경우 이 형식이 성립하지 않아서 nice하지 않게 이해되지 않죠. 이에 대해서는 https://math.stackexchange.com/questions/45198/whats-the-deal-with-empty-models-in-first-order-logic  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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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본 대응론은 'X가 참이다'는 말을 어떤 사실이 X에 대응할 때 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타르스키 역시 X가 참이다는 말의 조건을 제시하고자 했는데 이른바 어떤 T-schema(schema for 'is true')를 제시했습니다. 우선 is true라는 말을 진리술어라고 본다면, T-schema는 'S is true iff P'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가령,

English sentence 'snow is white' is true iff snow is white(앞의 문장이 참이라는 말은 실제로 눈이 내릴 때 참)
Korean sentence '눈은 희다' is true iff snow is white

 가 있습니다. 타르스키는 여기서 말해지는 언어(대상언어)와 말하는 언어(메타언어)를 구분합니다. 가령 첫째 문장에서는 대상언어와 메타언어가 영어로 일치합니다. 둘째 문장에서는 대상언어는 한국어인데 메타언어는 영어입니다. '눈은 희다'는 한국어 문장을 korean sentence와 is true라는 영어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희다'는 말이 영어 문장에서 번역되었을 때 참인 이유는 그에 대응하는 snow is white라는 문장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 언어간의 번역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다음과 같이 T-schema를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L1과 L2를 각각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라고 합시다. T를 L2에서의 진리술어라고 합시다. 한국어가 메타언어라면 T(S)는 말은 문장 S가 참이라는 말이고, 메타언어가 영어라면 T(S)는 S is true라는 말입니다. S가 메타언어의 문장일 때 S'는 대상언어에서 메타언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명제를 지칭하는 단칭명사라고 합시다(가령 두번째 사례에서 Korean sentence '눈은 희다') . 그렇다면 T-schema는

T(S') iff S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타르스키는 어떤 술어가 진리술어가 되기 위해서는 T-schema의 모든 사례가 참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위의 논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메타언어에서 대상언어의 모든 문장을 지칭할 수 있어야 합니다(메타언어에서 S'를 지시. 가령 korean sentence '눈은 희다'에서 눈은 희다를 지칭할 수 있어야함)
. 그리고 메타언어에서의 진리조건이 제시되어야하는데, 각 언어에서는 어떤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기초적인 문법조건들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는 어려워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쟁이의 역설 때문에 T-schema는 일상언어에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S =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고 한다면 S가 참이기 위한 조건은 S가 거짓인 조건과 동일합니다. 논리적인 모순이죠. 타르스키는 그 원인을 메타언어와 대상언어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타르스키는 변수통제가 되는 조건에서 그런 언어들의 진리조건을 정의했습니다. 이른바 논리학에 제시되는 모형의 개념이죠.

 타르스키는 통제된 언어들 안에서 어떤 문장들이 참인 몇 가지 조건들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으니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언어 L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L의 집합의 원소는 통제가 되도록 수학의 여러 대상들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문장형성규칙이 있다고 가정합시다(즉 L에서 어떤 글자들이 문장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음). 그리고 문장들의 집합 P가 있다고 합시다. P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문장들이 존재하고 거기에 어떤 작용들 가령 접속사 등을 사용해서 다른 문장들을 만들 수 있다고 합시다. 그 집합을 S라고 합시다. 그럴 때 P에 속한 문장들의 진리치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p가 S에 속할 경우 기호로 ㅑp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p가 L에서 참인 문장으로 밝혀진 경우 ㅑ~p는 ~(ㅑp)로 정의할 수 있고
p와 q가 L에서 참인 경우로 밝혀진 경우 (ㅑp&q)는 ㅑp 이고 ㅑq로 정의할 수 있고
p가 L에서 참일 때 q가 L에서 참이라면 ㅑ(p->q)는 ㅑp일 때 ㅑq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ㅑ는 이제 L에서의 진리술어입니다. 이런 류의 정의방식은 대부분의 논리학의 진리모형에서 택하고 있는 방식으로 타르스키가 제시한 개념들에 기반합니다. 타르스키는 이런 통제된 상황들 하에서 이런 언어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성질들에 대해서 수학적으로 여러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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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대응론은 X라는 문장이 참이라는 말의 정의를 어떤 사실인 Y가 존재해서 X와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때 전제는 각 문장들에 대응하는 사실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
니다. 가령 '문재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는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사실은 문재인이 한국에서 정한 투표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해서 대통령 당선인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1+1=2'라는 문장이 참인 이유는 앞의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과는 다른 사실들에 의해 여러 수학적 정의와 공리들에 의해 참입니다. 즉, 각 명제를 참으로 규정하는 사실들이 다른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sling shot argument에 의하면 진리대응론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가정을 합시다.

1. 논리적으로 동치인 두 명제 그 명제들이 참일 경우 그 명제들에 대응되는 사실들의 집합은 동일하다.

2. 명제에 있는 단칭명사를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다른 단칭명사로 대체하더라도 명제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즉 이런 류의 명제들은 서로 논리적 동치이다)


 두 가지 가정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보자면, 1과 2모두 직관적입니다.
 1의 경우 가령 p와 q가 논리적 동치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p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은 q를 참으로 만들 것이고, q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도 p를 참으로 만들 것입니다. 왜냐면 두 명제가 논리적 동치라는 것은 'p<->q'이고 이는 '(p->q)&(q->p)'와 논리적 동치이고 후자는 p가 참이면 q도 참이다 그리고 q가 참이면 p도 참이라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에 의해 p가 참이라면 논리적 동치라는 말의 의미에 의해 q가 참이게 되고 따라서 p가 참인 사실은 q를 참으로 만듭니다. 역도 성립합니다. 가령 '눈은 희다'는 명제와 '눈은 희지 않지 않다'는 두 동치인 명제에서 한 가지를 사실로 만드는 명제는 반드시 나머지 명제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의 경우도 직관적입니다. 가령 '문재인은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는 문장을 '2005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사람은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로 바꾼다고 해서 진리치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참인 두 명제는 서로 같은 사실들의 집합을 가진다는 논증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1. 임의의 명제들  T1과 T2가 있다고 하자
2. C라는 명제를 '{x|x=0&T1} = {x|x=0}'로 정의하자
3. D라는 명제를 '{x|x=0&T2} = {x|x=0}'로 정의하자
4. T1이 참이라면 {x|x=0&T1}의 원소는 0하나밖에 없으므로 T1이 참이면 C도 참이다
5. C가 참이고 T1이 거짓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x|x=0&T1}은 공집합이므로 C는 거짓인 명제다. 따라서 귀류법에 의해서 C가 참이면 T1도 참이다.
6. 4와 5에 의해
 C와 T1은 논리적 동치이다
7. 같은 방식으로 D와 T2는 논리적 동치이다
8. 첫 번째 전제에 의해 C와 T1을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의 집합은 동일하고, D와 T2 역시 그렇다.

이제 T1과 T2가 참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x|x=0&T1}와 {x|x=0&T2}의 지시체는 모두 {0}으로 동일하므로 두 번째 전제에 의해 C와 C의 명제에 있는 {x|x=0&T1}를 {x|x=0&T2}로 대체한 두 명제는 논리적 동치입니다. 즉, C와 D는 논리적 동치입니다. 8에 의해 C와 T1, D과 T2는 논리적 동치이므로 T1과 T2가 논리적 동치이게 됩니다. 다시 첫번째 전제에 의해 T1과 T2는 각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의 집합이 동일하게 됩니다. 이는 진리대응론에 모순인데 왜냐면 서로 다른 명제는 서로 다른 사실들에 의해 대응될 수 있다는 전제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직관적으로 '문재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는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이 '1+1=2'를 참으로 만드는 사실들과 같을 수 없죠.

이와 같은 이유로 대응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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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에 있는 단칭명사를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다른 단칭명사로 대체하더라도 명제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고전논리학에서만 성립하는 전제입니다. 명제태도문장 같은 경우 성립하지 않습니다. 명제태도란 명제에 대해 가지는 믿음, 생각, 의견 등을 지칭합니다. 가령 월간순정 노자키군 이라는 만화에서 와카마츠는 성악부의 로렐리아를 좋아합니다만 그 사람이 자기랑 자주 다니는 세오 유즈키라는 걸 모릅니다. 만화에서 성악부의 로렐리아는 노래를 잘하지만 세오 유즈키는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와카마츠는 성악부의 로렐리아는 노래를 잘한다고 믿는다'는 문장에 성악부의 로렐리아를 지칭하는 세오 유즈키로 대체하면 '와카마츠는 세오 유즈키가 노래를 잘한다고 믿는다'는 문장이 되는데 이는 거짓인 문장이죠. 따라서 위의 논증은 명제태도문장들을 제외한 명제들에 대해 관하여 제시된 논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문장들을 제외하면 단칭명사를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다른 단칭명사로 대체하더라도 진리치는 변하지 않겠죠.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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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실질조건문의 정의를 배울 때는 A->B가 참인 경우는 A, B 모두 참이거나 A가 거짓일 때로 그냥 받아들였다. 보통 입문서에는 문장은 반드시 참이거나 거짓이므로 A가 건짓일 때도 A->B는 진리치가 있어야 하므로 편의상 A가 거짓일 때 A->B는 참으로 정하기로 약속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본 결과 굳이 이렇게 정의하는데는 다른 꽤 좋은 직관이 있는 것 같다.

가령 A가 거짓이고 B가 거짓일 때 A->B를 거짓으로 정의한다면, 상당히 비직관적인 결론을 얻는다. 그렇게 정의한 뒤에 A->A를 생각해보자. A가 거짓일 때 정의에 의해 A->A는 거짓이 된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우리는 A가 거짓이더라도 A를 가정하여 A->A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가령 리만가설이 틀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리만가설이 참이라면 리만가설은 참인 것이다'라는 문장은 참이라고 생각한다.

리만가설이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누군가 골드바하의 추측이 참이라는 걸 증명했다고 하자. 즉, '리만가설이 참이라면 골드바하의 추측도 참이다'라는 것이다. 만약 현실에 있어서 리만가설도, 골드바하의 추측도 거짓임이 드러난다고 해서, 리만가설을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골드바하의 추측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 거짓이 되는가?

따라서 우리는 A와 B가 모두 거짓이더라도 A->B를 참으로 정의해야 할 좋은 이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A는 거짓, B는 참일 때 A->B를 거짓으로 정의해보자. 이 역시 심각한 비직관을 낳는다. 이 정의를 따르면 MT를 증명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는 A->B이고 ~B이면 ~A를 추론할 수 없게된다. 정식으로는

(A->B & ~B )-> ~A가 거짓인 경우가 생긴다. A를 거짓으로, B를 참으로 두면 정의에 의해 A->B는 거짓이므로 연언의 정의에 의해 전건 전체는 거짓이다. 그리고 ~의 정의에 의해 ~A는 참이 되므로 조건문 전체는 다시 정의에 의해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이것이 참이라고 상상한다. 사례를 보자.

회장님이 오시면 야근을 한다는 규칙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만약 야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오늘 회장님 안 오셨나보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회장님은 오시지 않았으나 야근은 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 있다고해서 우리는 위와 같은 추론 방식을 거짓이라고 판단하는가? 그런것은 일상적인 직관, 특히 인간은 거짓인 상황을 언제든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긋난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히 A와 B가 거짓이더라도 A->B를 참으로 정의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입문서에는 이런 직관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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