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Open Letter To Myself(내게 보내는 공개편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노래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있죠.


Always the one with a face on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던,
Always the one with never enough
언제나 결코 충분하지 않았던,
He was the boy that broke your trust
그는 네 신뢰를 부순 소년이었어
Because he was never around enough
왜냐면 그는 결코 충분히 곁에 있어주지 않았거든
We sit around and hear these stories
우린 둘러 앉아서 이 이야기들을 들어
Wishing we were somewhere else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How I wish that I could find the words to save this
이 관계를 구하기 위해 내가 딱 맞는 말들을 알고 있었더라면..
My so called friend
친구였던
My so called friend
친구여..
When will we see you again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I was the one with the face on
나는 가면을 쓴
I was the one with never enough
결코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I was the boy that broke your trust
네 믿음을 깨버린 소년이었어
Because I was never around enough
난 네 곁에 충분히 있어주지 못했고
I sit around and tell these stories
난 그저 세월을 보내며 이 이야기를 해
Wishing I was somewhere else
"내가 차라리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이라고.
Oh how I wish I found the words to save this
"내가 너를 위한 더 나은 말들을 알고 있었다면"이라고.

My so called friend
내 친구여
My so called friend
내 친구였던..
I wish I found the words to save this
내가 너를 위한 더 나은 말들을 알았더라면.
I'm pushing it out, out
난 스스로에게 압박을 받아
Find the words to save this
이 편지를 위한 말들을
I'm pushing it out, out, out
스스로를 압박해
My so called friend
친구였던
My so called friend
친구여
When will we see you again
내가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My so called friend
친구여
My so called friend
친구였던..
When will we see you again
우린 다시 볼 수 있을까?
When will we see you again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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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


Heartburn(가슴앓이)

 아키텍츠라고 거친 노래만 하는 건 아니란 말씀.. 물론 2011년에 나온 곡이라 그렇고, 지금은 이런 노래는 안 만들죠.. 좀 아쉽습니다.. 모솔이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감은 잘 하는 편이라 이 노래 들으면 왠지 마음이 쓰라립니다. 유튜브에 댓글에 보면 너무 슬픈 사연들도 있어요. 전 여자친구가 자기가 너무 힘든데 그게 관계를 힘들게 만들 것 같고 남자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며 이별을 고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노래가 반드시 연인에 관한 노래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친구일수도, 가족일수도, 지인일수도, 동물일수도 있겠죠.

Burn everything you have
네가 가진 짐을 모두 불태우고
And leave it all behind
이젠 떠나
Lose all your inhibitions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돼
I'll take the mess you made
내가 네가 엉망으로 만든 것들을 가져가서
And I'll make it beautiful
아름답게 만들거야
Oh if time only stood still forever
오, 시간이 이대로 멈춰주기를..
Ohhh
Hold out your hand
네 손을 내밀어서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내가 널 미소짓게 만들 사람이야
Hold out your hand
네 손을 내밀어서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again
내가 널 다시 미소짓게 만들 사람이니까
Hold out your hand
네 손을 내밀어서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줘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내가 널 다시 웃게 만들고 싶어
Hold out your hand
네 손을 꺼내서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줘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again
내가 널 다시 미소짓게 만들거야
This moment that we're in
우리가 있는 이 순간이
Is slow and disappointing
너무 느리고 슬퍼
Time will never stand still for ever
시간은 절대 이대로 있지 않겠지..
If you take this chance we've got
우리가 마주친 이 기회를 네가 놓지 않는다면
We can make it beautiful
우리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거야
If you'd take my word
네가 내 말을 받아들여준다면
I'd be your saviour
난 네 구원자가 되도록 할게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어봐
And lean upon me
그리고 내게 기대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네가 널 미소짓게 만들거니까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봐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again
네가 널 다시 미소짓게 만들게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어서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줘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내가 널 미소짓게 만들거야
Hold out your hand
네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줘
I'll be the one to make you smile again
내가 널 다시 미소짓게 만들거야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Hold out your hand
손을 내밀고
And lean upon me
내게 기대
Ohhhhhhhh
Burn everything you have
네가 가진 짐을 모두 태우고
And leave it all behind
떠나
Lose all your inhibitions
네 모습 그대로 있어도 돼
I took the mess you made
내가 널 받아들이고
And I made it beautiful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으니까
Oh if time only stood still forever
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Forever
영원히..


Posted by 괴델
,

 철학적 양심에서, 최대한 정직한 자세로 나의 인식구조를 살펴보면 기초적인 발상이 흄과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당연한데, 그것이 내가 흄에게서 배운 최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흄은 인과개념이란 인위적이며 의식 안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래서 (물리적 의미에서) 가장 좋게 봐주면 인과란 어떤 사건의 발생이 일정한 사건을 수반해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기술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건이 사건을 수반할 때 그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런 연쇄를 발생시켰다고 생각한다. 흄은 그런 인과개념은 의식 속에서 결코 발생할 수 없다는 논증을 펼쳤고, 우리가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사건이 사건을 수반하는 것을 매우 많이 보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어떤 힘이 작용한다고 판단해서라고 했다. 흄은 우리 인식에 인과는 결코 주어지지 않고, 우리에게는 사건의 선후만이 포착된다고 하였다. 특정한 환경 안에서, 내가 공을 들고 공을 손에서 놓으면 공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정말 그런가?). 우리는 이 현상을 이해하기위해 온갖 개념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곤 하는데, 흄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저것뿐이라고 기술한다. 우리의 의식에는 물리적 사건들의 연쇄만 포착되고, 그것들 사이에 상호작용한다고 여겨지는 어떤가는 의식에 주어지지 않는다. 내게 있어 그런 것들은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만든 인식적 구성물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구성물들은 내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나의 의식이 무엇을 포착하는지 잊어버리게 한다. 나는 내 의식 안에서 인식론적으로 왜곡된 인지를 바로잡는 과정을 계속 거쳐오고 있고,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이에 대해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인식적 구성물을 해체한다는 게 어떤 한 가지 영역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중구난방으로 여러 대상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추상적인 대상의 존재론적 성격을 밝히려고 한다. 가령 수와 명제가 있을 수 있다. 수학자들은 수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하는데, 연구의 대상이 되는 수는 감각되지 않고 보이는 것은 숫자뿐이다. 그렇다면 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플라톤적 관념에서 수학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 우리가 인식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수를 인식적 구성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연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수를 인식의 구성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이 부분에서는 곤란해한다.

 

 나는 관념, 개념이라는 것의 존재론적 위치를 묻고 싶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고, 그들은 무엇인가? 나는 물리적인 관점에서 관념과 개념이라는 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나는 도대체 추상적인 성질을 가지는 단어를 어떻게 배우게 되었고, 철학적 지위를 묻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잘 사용하고 있는걸까? 

 

 세상에서 어떤 단어 A가 소통되고 있다고 하자. 내가 그 단어를 감각을 통해 수용했을 때, 혹은 기억 속에서 꺼내왔을 때, 나는 자동적으로 그 단어가 사용되었던 상황들을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의식 안에서 유의미하게 공통되어 보이는 감각자료들을 A와 연관지을 것이다.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나는 A를 이해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해당하는 감각자료가 없다든가) A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 뇌는 특정 언어적 신호를 처리할 때 저렇게 한다. 원시인들의 언어가 정확히 그렇다. 아주 간단한 신호 "(네발로 뛰어가는 시늉과 포효)우어어"로 호랑이가 나타나는 상황을 지시할 것이다. 그러다가 호랑이(가 온다!)라는 단어로 그 기능이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때 호랑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특정 감각자료를 지시한다. 원초적인 언어는 특정 신호가 특정 감각자료를 바로 지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원시인들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호랑이 같이 뭔가 눈에 보이게 활동하고 있는 애들, 그리고 뭔가 바람이 불면 조금씩 흔들리는 초록색 무언가가 보인다. 원시인은 처음에 호랑이 곰 등등만을 지시할 수 있었으나, 뭔가 움직이는 애들을 모두 표현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시인은 활동적인 어떤 감각자료들을 동물, 어떤 감각자료들은 식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물론 그림을 그리거나 크어어엉, 정지된 자세 등등이었을 것이다). 사례가 그리 좋진 않지만, 이는 매우 흥미로운 구조다. 동물이라는 신호 안에는 곰 호랑이 등등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바로 어떤 감각자료를 지시하지 않고 다른 언어를 통해 지시한다. 나는 이 과정이 추상화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이 계속 되면, 매우 추상적인 단어가 생기게 되고, 어떤 큰 수 n만큼의 언어적 계층을 지닌 희한한 언어신호가 나타날 것이다. 이 언어신호를 이해하려면 관련된 최소한 n개의 언어신호에 각각 어떤 감각자료들을 대응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호랑이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바로 그에 해당하는 감각자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는, 호랑이처럼 바로 감각자료가 떠올려지지 않는다. 머리에서 이에 포함되는 언어적 신호와 그에 해당하는 감각자료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광장에서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떠오르고, 국회의사당과 국회의원들이 떠오르고, 어릴 때 배웠던 사회의 구조라는 단어를 의식에 내놓고 거기에 대응하는 언어적 신호나 감각자료를 떠올린다. 의식 속에 오는 것도 있지만,  백그라운드에서 처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래서 사회라는 단어를 이해하려면 그 백그라운드에서 뭐가 이루어지는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내 머리에 있는 모든 언어적인 관념은 이렇게 생성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철학적 언어들, 수학적 언어들, 특히 추상적이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수, 명제 등을 위와 같은 방식 이외로 이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원시인에게 1이라는 신호를 보여주면 뇌는 그에 대응될 수 있는 감각자료들(호랑이 한마리, 곰 한마리, 바나나 한개 등등..)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 작업을 처리할 것이다(내게는 아니다. 대수적 의미에서 곱셈의 항등원이라고 정의했던 피기노트 시험지.. 자연수 1이라는 신호를 보았을 때 내가 끄적이던 내용들이 떠오른다. 이렇듯 나는 개념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존재론적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수라는 것은 비물리적인 세계에 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인가? 아니다. 그럼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다. 수라는 개념은 '수'라는 언어에 대응하는 전기신호를 뇌에 흐려보냈을 때 활성화되는 세포/신경망들의 체계, 혹은 집합이다. 뇌가 '수'라는 걸 보았을 때 처리해온 모든 알고리즘의 집합이라고 보아도 된다. 저런 것들은 의식 안에선는 안 보이니, 의식에서 이해하기로는 '수'라는 신호에 대응하는 감각자료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나는 비물리적인 수의 존재론적 위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수'라는 언어신호를 입력받은 사람들의 뇌에 존재한다.

 '사고'라는 추상적 단어도 그렇다. 생각/사고는 내가 모르는 어디에 있지 않다. 내가 '사고'라고 이름 붙여온 전기신호들이 사고다. 내게는 머리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는 청각적 정보가 있다. 내게는 이게 감각되는 전부이고, 사고라는 개념이다. 나는 모든 개념을 이렇게 이해한다(물론 내가 서술할 수 없지만 안다고 감지하는 개념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뇌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외부세계, 외부 대상의 비물리성을 부정한다. 저 단어들에 관련된 모든 언어적 신호는 물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 뇌에서 처리되고 있다. 또한 내가 외부세계나 외부 대상을 상상할 때 나는 어떤 비물리적인 상상도 하지 못한다. 특정 시각적 자료에 신경을 집중한후 360도 눈을 돌려본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개미라고 했을 때(즉 나의 시야가 매우 좁고, 땅 근처만 볼 수 있을 때) 그 감각자료는 어떻게 인식될 것인가 등등을 상상해볼 뿐이다. 모두 의식 안에서 일어난다. 더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을 하자면, 내게 주어지는 모든 자료는 신체가 구조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고, 그 밖에 아무것도 의식 속에 포착되지 않는다. 나는 내 의식 밖의 어떤 것도 인지한 적이 없고, 의식 밖이라는 말을 듣고 대응되는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 상상도 내 의식 안에서 일어난다. 철학에서는 고립주의라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한다. 나는 이것이 실제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건 내 인식적 구성물이다. 존재하는 건 의식밖에 없는데 어떻게 인간의 존재를 인지하고, 대화가 가능하냐고 철학자들이 묻는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대화해왔는지 유아기의 과정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논리적 가능성에서 내 눈 앞에 있는 감각자료가 내 뇌에서 '사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내 신체는 그저 뇌에서 사람과 관련된 정보를 보고 지금 주어진 감각자료가 그 정보들과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람으로 분류할 뿐이다. 실제로는 내 앞에 있는 감각자료가 홀로그램일지, 잘 짜여진 로봇일지, 환각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게 특정 이름으로 카카오톡이 오고 대화가 된다고 하여 인간으로 분류하지만, 알고리즘인지도 모른다. 내 뇌는 그저 과거의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추정했을 뿐이다. 내가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기술하는 것도 그저 나랑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있고, 그들이 내가 말하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것뿐이다. 너무 많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납득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뇌가 처리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방식을 추적해보면 모두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리라 나는 믿는다.

 

 

 이 정도를 읽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사건들의 연속만 존재하면 인간은 왜 인과나 목적 지향 등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내 답변은 아주 짧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사건들의 연속만 의식 안에 포착되지만, 뇌가 그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만 판단하면,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거처럼 될지 안될지 알 수 없으므로 행동정지가 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A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B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뇌는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이 달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즉, 원리적으로 우리가 의식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 사건의 연속이지만, 신체는 생존을 위해서 뇌에 주어진 과거의 감각자료들을 바탕으로 미래의 사건이 어떻게 되리라 기대/예측한다. 자연세계에 투영하는 모든 인식들은 다 이런 양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쓰고 보니 그냥 흄이네=_=..)

 

 내일 개강이라 일찍 자야하니 이 글은 여기에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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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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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물리적 사건은 물리적 원인을 가진다"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리면서, 스스로에게 안심을 주거나, 자신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거나, 타인을 분석할 때 내가 항상 명심하고 있는 문장이다. 너무나 당연한 문장이니까 이 신비롭지도 않은 문장을 소개해서 뭐하나하겠지만, 나는 이 문장을 과학적 대상을 관찰하는 데만 놓지 않고,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물리적 사건이 원인을 가진다면 자연세계에 속한 나라는 인간이 어떤 반응을 했을 때, 반드시 거기에는 물리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생각하는 과학법칙들의 적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내 신체/의식이 인지하는 모든 반응과 행동들은 모두 과학법칙의 적용을 받고, 이것들은 우주가 있었을 때부터 그리 되어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법칙의 일관성을 인지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진 심리적 상태들과 나의 행동방식들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계는 그저 그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구성되어있었을 뿐이다.

 

 오랜기간 동안 나는 내 머리속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리적인 방어를 위해서 싸워야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미 지나갔지만, 뇌는 당시의 감각자료를 저장하고 특정 자극이 주어졌을 때 그 감각자료를 꺼내왔다. 내게는 내 눈앞에 그들은 없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렇게 인지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 내 앞에 있을 때 내 뇌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자료이고, 내 뇌에서 그 기억을 꺼내올 때 나타나는 것도 당시의 감각자료다ㅡ물론 정보의 손실은 발생한다ㅡ. 눈은 특정 자료를 선별해서 뇌로 보내기 위한 수용체에 불과하고, 실제로 보는 것은 뇌이니, 사실상 그들이 내 눈앞에 있든 없든간에 나는 동일한 것을 계속 보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눈앞에 있든 없든 그건 상관없다. 뇌는 모두 같은 감각자료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내 신체는 같은 방식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ptsd 환자들의 삶이 그렇게 끔찍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다. 그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같은 장면을 지속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냥 인간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타인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이 두렵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까봐 무섭고,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 인격적인 비하를 할 것이 무섭고,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볼 것이 무섭다. 내게는 타인으로부터의 모든 공격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고, 그것들에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나는 그것들에 대항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피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나는 심리적 안식처가 없었고, 내가 이게 필요하다고 인지했을 때는 이미 인간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에 원천적으로 누구를 감정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기에 심리적 안식처를 찾는 것이 불가했다.

 

 내 머리에서는 항상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같은 사람을 매도하는 말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고, 나는 그것들을 일일히 쳐낼 수 있는 감정적 능력이 없었다. 내 의식의 저편에서는 누군가가 내가 도망만 치고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약아빠진 놈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그러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용기도 없는 겁쟁이라고 한다.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가만 나두고 지켜보기만하고 방치하기만하는, 도태된, 아무 가치도 없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의지도 없는 놈. 그딴 식으로 사니까 계속 그렇게 되는거지라고 내 머리속에서 울려왔다. 매우 답답하고, 자기라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거고 이게 보통 사람들의 삶인데 너는 그렇지 못하니까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매도당해야 한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뭐든 받아먹기만하고 스스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인 놈이라는 소리가 내 신체에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울린다. 그 외에도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 매일 이 목소리를 들으며, 이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듣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도 긴장하고 살아왔다. 머리에서 나는 아니야 라고 온갖 이유를 찾아보고 말을 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그 상황에 매몰되었다.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나를 질린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초점을 일부러 흐리게 하고 걷거나, 땅을 보거나, 45도 정도 시선을 아래로 하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상대방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이야기하면 온갖 공포와 긴장 불안 등등으로 인해 뇌가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의식이 없는 시간이 가장 편했다. 눈을 뜨고 사고를 하다보면 그들이 나타나니까. 물론 아직도 그런 일들이 많다. 눈앞에 없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앞에서 대답했다고 말하겠다. 기억에서 감각자료가 주어지든, 오감을 통해서 주어지든, 뇌에게는 모두 동일한 감각자료이니 다르게 처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적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의식 속에서 하나하나 여러 정보처리를 해야하는 것이 보통 여러 이유로 매우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여러 과정은 백그라운드에서 처리하고 의식에서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큰 사건들만 의식으로 올려보내면 된다. 이런 영역은 내 의식이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고, 그런 영역에 의식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개인사적인 정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가 필요하고, 방화벽인 심리적 기제를 강제로 꺼야 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내게 없는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나는 내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학게 되었다. 인식에 관한 모든 것에 관한 내 철학적인 관점은 물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내가 사고할 때 가장 기반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에, 상담을 받고, 성찰해보고, 비교적 여러 가지를 하면서 나는 나의 삶에 이것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게 내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이었고,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로 인해 여러 철학적 생각들이 바뀌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서론이 길다. 이것은 내 성격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습관이다. 머리에 있는 것들은 적어도 내 의식 안에서는 모두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찝찝함을 풀기 위해서 서론이 길어지는 습관이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세상엔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자연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그저 스스로 그러한채 흘러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의지조차 자연의 일부이고 이것조차 자연의 흐르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 미리 주어져있는 법칙, 물리법칙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물리법칙이 일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는 내 의식 속에서 증명할 수 없지만, 내 삶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나는 모든 것이 그저 그러하게 흘러간다는 것, 따라서 이상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신체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활성화되어있는 이상, 내가 손을 베인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래야 하고, 그런 것이다. 이를 심리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겠다. 왜냐면 적어도 나의 의식 안에서는, 내 심상세계에서는 물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인지된 적이 없고, 나는 태어나서 내 신체에 물리적으로 주어진 기능 외에 사용해지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 사고한다는 것은 내 의식세계 속에서는 결코 비물리적인 과정이 아니다. 내가 뭔가를 느낀다는 것은, 내 의식이 뭔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비물리적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뇌 없이 의식이 존재하는 것을 목격한 것도 없고, 뇌 없이 의식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정직하게 관찰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의식활동은 항상 뇌가 관여해왔다. 비물리적인 무언가 있어서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내 의식에 주어지는 것은 물리적인 반응들 뿐이었다. 내게서 신경의 일부를 잘라버리면 나는 의식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물리적인 것밖에 인식할 수 없다. 내 심상세계, 철학적 의미로서의 마음(mind)이 하는 모든 활동은 내 심상세계에서 물리적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나는 심적 세계와 일상에서 흔히 말해지는 외부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물리법칙 하에서 굴러가는 메커니즘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 결론은 오래전에 내린 것이지만, 삶을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최근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 심상세계를 과학적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분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내 심적 세계는 모두 물리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물리법칙은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물리적 대상에게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 법칙은 누구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불리하게 작용하지도 않는다.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대상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물리법칙이 이끄는대로 간다. 그렇다면 나의 심적 사건들, 나의 심적 세계는 어떤가? 내 심리적 반응들, 체계가 물리적인 대상이라면 내가 하는 어떤 반응도 이상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내 유전자는 물리법칙에 종속된 특정한 정보들의 체계로 이루어졌고, 모체에서 뇌가 생기면서부터 뇌가 그 법칙에 따라 작동해온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반응은 물리적으로 정당하다. 그저 내가 가진 유전적 정보와 내가 신체와 뇌가 처리해온 방식대로 감각자료를 입력해주면 그냥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결론에 도달하고 비로소 나는 내가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결론은 필연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의식세계, 내 심상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독립적인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ㅡ언젠가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저 자유의지라는 말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ㅡ. 일상에서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고유한, 무언가 다른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심상세계 안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는 매우 어색하게 들린다. 내게 보이는 것은 뇌 안에 의식의 스위치가 있다는 것과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들이 뇌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과 뇌는 자연법칙에 따라 입력받은대로 출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내게는 그저 의식이 뇌의 연산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뭔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판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뇌는 그저 네트워크 망처럼 감각자료가 주어졌을 때, 과거의 데이터들을 유기적으로 연동해서 가능한 시뮬레이션을 이미지로 만들어서 감각중추와 운동신경에 전기신호를 보낸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나는 내 세포가 내 몸속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키보드를 치고 있을 때 수많은 신경들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엄청나게 빨리 처리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유의지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긍정적인 뇌과학 실험들도 있다(논문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읽고 결과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용은 머리에서 지웠기 때문에) 그렇다고 내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자유의지는 물리적인 개념이고, 간단히 보자면 방금 내가 적은 방식대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인간고유의 기능, 인간의 존엄성인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직관적으로는 불편하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우리의 뇌는 그런 방식의 처리밖에 하지 않아왔으니까. 아주 예전에 쓴 적이 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여기에 간단히 적겠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법적 처벌, 책임이라는 개념은 매우 인간중심적인, 나쁘게 말하면 허구적인 개념이다ㅡ아주 오래전에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이를 논한 적이 있는 것 같다ㅡ. 원시적인 인간이 현재의 나같은 생각을 했을리가 없고, 단지 눈앞의 갈등상황을 종결지어야 하고, 관찰자의 뇌가 인식하기에 유의미하게 관찰할 수 있는건 특정 감각자료(사람)가 물리적인 피해를 발생시켰다는 것이었고, 그런 인물들을 없애왔을 때 집단 내에서 문제가 사라졌고, 또한 집단을 유지하는데에도 좋았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내 심상세계에서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지만, 원시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그저 입력받은대로 법칙에 따라 결과를 내놓았을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책임이라는 개념을 끝까지 밀고나가면 물리법칙을 처벌해야 한다는 웃긴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법칙의 책임을 엉뚱하게 인간에게 전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웃음). 여튼, 나는 책임이란 개념은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개그요소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들어와있는 모든 인식을 나는 이런 식으로 환원하여 이해한다.

 

 종교에 관해서도 그렇다. 나는 모든 종교적인 언어는 특정한 물리적인 현상을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심상세계에서는 그렇게 인식된다. 이런 인식 하에서 종교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할 수도 있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나는 물리주의자인 기독교인이다), 과거부터 언뜻언뜻 글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의식 안에서 비물리적인 영역은 발견되지 않는다. 자유의지도 사실은 위와 같은 물리적인 현상을 지시할 뿐이다. 종교의 가능성은 인간의 삶의 방향제시와, 그 방향을 종교에 속한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연합시킬 것이라 기대되는 관념은 사람들 사이에 유대를 만들고, 비슷한 행동을 유발하고, 사고관을 비슷하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요소를 선동이나 세뇌라는 단어를 써서 비하하지만 그건 매우 잘못된 것이다. 현대에서는 종교의 기능을 미디어가 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매일매일 모든 것에 선동당하고 세뇌당하고 살고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100% 확실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고, 대부분의 정보를 타인의 지적 능력과 나의 추론 능력에 의존해서 받아들인다. 진보/보수 지역에서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가정/학교/또래 등을 통한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우고 받아들이는 모든 방식은 종교적이다. 나는 내가 부모라고 부르는 사람이 부모인지 알길이 없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테스트해본 적이 없는데 잘 믿고 있다. 그리고 철학하기 전에는 자연법칙이 일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흄을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냥 믿고 있다. 그게 내 삶에는 도움이 되니까.

(단상 카테고리 맨 앞에서부터 한두개 글 읽다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의식 속에서는 종교 경전들이 전하는 영적 세계나, 초월적인 세계, 관념은 모두 내 머리 속에 있는 감각자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해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적 세계를 상상할 때 우리는 사실 물리적인 세계를 수정하여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모두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다. 나는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한다. 저런 가능세계를 머리에 넣고 살아가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또한 나는 종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는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 하에서 종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종교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고, 나는 비도덕적이지 않은 영역 안에서 믿고 행위할 자유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서 나는 종교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의식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는 특정 종교가 맞거나 틀렸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심상세계 안에서 일상적으로 생각되는 개념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최종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나는 결국 모른다. 나는 이 공격받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도피하여 종교를 정당화하고 싶은 건 아니다ㅡ나는 그저 이러한 것들을 모두 구분해보고 싶은 것이다ㅡ. 설령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해도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의 인간으로서의 선택이고, 내가 내 신체가 이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의 행복(여기에는 주위 사람의 행복과 도덕관이 포함된다)을 저해하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삶의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선택하는 것 자체에 대해 타인에게 침해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몇몇 기독교인들에게 삶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을 받았고, 그들의 신념을 매우 존경하고 성스럽게 여긴다. 나는 그들의 행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리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거기에 나의 가치관이나 삶에 대한 판단구조, 사회관, 정치관을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나는 긍정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것이 내게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큰 물리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ㅡ내가 믿는 신은 달리 생각할지도 모른다ㅡ.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신념을 갖든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삶에 대한 선택을 한 것처럼 그들도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특정 감각자료를 처리해왔기에 기독교인인 것뿐이고, 그들은 다른 감각자료를 처리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내 의식 속에서는 이 이상의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본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겠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inner peace를 얻을 수 있었다ㅡ굳이 inner peace를 쓰는 이유는 쿵푸팬더2를 보고 시후(?) 사부가 inner peace를 언급할 때 그 몸가짐을 내가 약간은 얻은 것 같아 그 장면이 계속 기억나기 때문이다ㅡ. 나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내 의식에 있는 과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인 존재다. 이걸 깨닫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나의 과거를 좀더 침착하게 볼 수 있었고, 왜곡된 인지를 교정하도록 길을 틀 수 있었다. 내 뇌는 이런 방식의 삶을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감각자료를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논리적 가능성에 있어서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여담이지만, 나는 물리적 영역이 논리적 영역에 앞선다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개 나같은 우울증 환자나 인지왜곡이 일어난 사람, 심리/행동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저런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뇌는 정직하다. 있는 그대로, 입력받는대로 내놓는다. 내가 내 머리속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도 내게는 기억에조차 남을 수 없다. 내 뇌는 한번도 그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감각자료를 처리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단어들을 들었을 때 그것을 그들처럼 처리하는 신경망이 없다. 경험 없이 가상적으로 상상하여 그들의 결론에 도달해서 그걸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결론을 지시하는 감각자료가 내게는 없다. 인간이 생동감있게 추론하려면 자신이 뇌에 저장하고 있는 감각자료들을 바탕으로 정보손실을 최소한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타인의 언어나 해당하는 감각자료가 저장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추론하면, 추론규칙에 의해 뭔가 결론은 나겠지만 뇌는 단기기억 정도로만 넣고 잊어버릴거다. 도달한 언어적 결론을 뇌에 효과적으로 기억시키려면 그에 해당하는 감각자료가 신체에 입력되어있어야 한다. 머리에 없는 자료로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는 뇌는 입력된 언어에 해당하는 감각자료에 필적하는 정보들을 꺼낼 것이다. 자신에게 없으면 타인의 경험, 미디어 등등 간접적인 것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추론을 한다. 문제는 그렇게 판단할 때는 단순한 변수들만 고려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가 과거와는 다르게 반응할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직접 경험으로 사건을 접할 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온 감각과 신경이 그 사건에 집중되어서 연관되는 모든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그 경험을 기억에 저장하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추론할 때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매우 정확히 자신의 신체에 개연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간접적으로 추론하면 그런게 없다. 따라서 어떤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뇌는 그런 가능성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자신의 신체에 있어 개연적인 추론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곧 머리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에게 다른 가능세계 이야기를 해도 왠만하면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간 = 자유의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뇌가 인식하지도 못할 사이에 저런 판단을 백그라운드에서 내림에도 불구하고ㅡ즉 많은 부분에 있어 의식의 작용이 아니고, 의식이 관여하더라도 그들이 의도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ㅡ 우울증 환자 스스로가 그의 자유의지가 의식이 그렇게 일부러 처리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에게 비물리적인 자유의지같은 건 의식세계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만들어진대로 반응할 뿐이다. 우울증 환자가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겨먹은 분자구조가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고 보면 편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내가 많은 언어를 뇌 속에 넣었음에도 실현하지 못해서, 자학하던 것을 많이 없애주었다.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상태와 반대되는 물리적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추론가능하다. 그걸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또 어려운 문제지만. 여튼, 자학하는 습관을 많이 없앨 수 있었다. 오늘 실패해서 세상이 엿같고 저주스럽고 좌절스러울 때,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한다.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물리적인 기회는 앞으로도 존재하고, 계속 실패하더라도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성공하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과정 하에서 inner peace를 찾고 있다. 스스로의 감정과 독립적인 평안. 모든 건 그러기 마련이라는 걸 깨달으니, 굳이 내 의식이 원하지 않는 반응을 신체가 내놓는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단하는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머리에 넣어두고, 그것을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정당화하고, 단기적인 것들이 실패할 때 그것을 떠올리면 된다ㅡ물론 떠올리게 되는 계기는 물리적으로 여러 번 있어야 할 것이다ㅡ.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다 성공하면 뇌가 그것을 처리하는 신경망을 만들어내고 다른 신경망들과 연동되어 그것들을 바꾸고 뇌에 자리잡을 것이다. 나는 이걸 정당화하고, 내가 신체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한 추론을 믿는다. 이렇게 나는 inner peace를 어느 정도 찾았고, 그렇게 노력 중이다. 여러 감정이 들 때 내가 정당화한 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떠올린다.

 

 또 한 가지, 타인과의 비교도 많이 멈추게 되었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좌절은 자신의 심리적 내집단 안에 넣어둔 타인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속성이 자신보다 월등하고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인식하여 내집단에서 도태될 것 같을 때, 또한 객관적으로 그 원인이 자신에게 귀속된다고 판단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 자체가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그르다.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결합, 배열은 그 사람과 같지 않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되도록 물리적으로 되어있었기에 그리 된 것뿐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뿐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거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과 유사한 정보를 처리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비슷한 감각자료를 입력받았다면 그리 되었을 것이다(물론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내가 그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복사되지 않는 이상 불가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어서,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와서라고 묻는건 좋지 않다. 그건 물리법칙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일관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해 너는 왜!!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넌센스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저 그런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는 넌센스다. 나는 이런 물질이고, 저 사람은 저런 물질이다. 나는 내 방식의 삶이 있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두 개가 같을 수는 없으니, 나는 내 방식대로, 그 사람은 그 사람 방식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물론 이런다고 좌절을 발생시킨 물리적 상황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것은 inner peace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의 정신승리(?)를 위한 정당화다. 내게는 이게 잘 맞는다. 내가 남들보다 못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원리적으로 그냥 그런 것이다. 좌절을 하면 더 괴롭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그러하다는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안정을 찾기 위해 내게 맞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면 된다.

 

 

더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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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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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 1들으면 첫주에 실수집합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한다. 유일하다고도 하는데 증명은 생략한다. 증명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지루하고 길기 때문에..인 것 같기도 하고, 대수를 안배우면 up to isomorphism이라는 개념이 생소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실수는 least upper bound property를 만족하는 ordered field가 isomorphic하게 하나밖에 없다는 것으로부터 정의한다. 실수를 정의하는데는 찾아보니 대략 2-3가지 방식이 많이 쓰이는 듯하다. decimal expansion, dedekind cut, cauchy sequence. 존재성을 우선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셋 모두 비슷한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1. cauchy sequence

 Q로는 커버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있다. 가령 x^2=2에 상응하는 x값이 직관적으로는 있을 것 같다. 피타고라스 그림을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Q에는 없다. 그래도 Q만 가지고있으니, x^2=2에 가까워지는 유리수값을 생각해보자. Q로 근사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1, 1.4, 1.41, ... 이렇게 하면 Q에서의 수열이 하나 만들어진다. 얘는 Q에서 수렴하지 않는다. 재밌는 건 그래프를 그려보면 수열의 n값이 커지면 수열의 증가값이 0으로 간다. n이 커지면 수열값들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따라서 적당히 하다보면 얘가 수렴하는 집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Q에서 수렴하지 않는 수열들도 위의 사례와 같이 된다면 수렴할 수 있을까? 시험해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자.

An is cauchy iff for every ε>0 there's N such that |An-Am|<ε for every n,m>N
(N n m은 자연수, ε는 유리수)

그럼 코시수열들의 집합이 실수를 이룰까? 한가지 문제점은, 같은 값으로 가는 것 같은 여러 코시수열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1 1.4 1.41 ...의 수열에서 앞의 유한한 몇개만 완전히 다른 유리수들로 바꿔버리면 두 수열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지만 다른 수열이 되고만다. 우리는 뒤에 (어딘가로 수렴하리라 기대되는) 값만을 원소로 취하고 싶다. 그래야 한 원소가 유일하게 한 값으로 대응되는 보기편한 성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equivalence relation을 만든다.

An~Bn iff for every ε>0 there's N such that |An-Bn|<ε for every n>N.

이제 S를 equivalence class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면 원하는 성질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덧셈 곱셈 스칼라곱, 대소관계, 크기를 정의할 수 있고 S가 ordered field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어렵진 않지만 매우 길고 지루하다. 생략..

 우리가 원했던 every cauchy sequence converges라는 성질이 S에서 성립함을 보일 수 있다. 이는 여러 lemma가 필요하다. 역으로 올라가보자. S위에서 정의된 코시수열 Xn을 유리수 위에서 정의된 코시수열 Rn으로 근사시켜 수렴성을 살펴보자(결국 실수는 십진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을 이용함). |Xn-Rn|<1/n인 Rn을 찾을 수 있는가? 이를 가정한다면, Rn이 수렴하면 삼각부등식을 써서 Xn도 수렴하게 만들 수 있다. 이때 Rn이 코시임은 삼각부등식을 쓰면 쉽게 보여지는데, Rn이 수렴함을 보이려면 S위에서 유리수들로 구성된 코시수열이 수렴함을 보여야 한다. 어렵지 않게 Rn은 [Rn]으로 수렴한다. 따라서 위에서 가정한 게 참임을 보이면 되는데, 이는 임의의 ε>0(유리수)와 S의 원소 x에 대해 어떤 유리수 r이 있어서 |x-r|<ε이 됨을 보이면 된다. x는 [xn]임을 이용하고 r을 코시수열에서 나오는 N값에 대해 r=x_N 으로 놓으면 된다.


 이 집합은 least-upper-bound property를 만족한다(이 성질을 만족하는 field를 complete하다고 한다). 증명하겠지만, complete ordered field는 유일하고 얘를 up to isomorphism 실수라고 명명할 것이다.

S의 completeness의 증명은 여러 방식으로 가능하다. 우선 공집합이 아닌 upper bounded된 집합 X를 가정하자. 그러면 upper bound x를 잡고 X1=x, Xn+1=Xn-1/k(k는 Xn+1이 upper bound가 되게하는 최소의 자연수)를 잡으면 얘는 코시이고 위에 의해 수렴한다. 그값이 least upper bound임을 정의를 따라 보이면 된다.

 혹은, X에서 증가하는 코시수열과 upper bound에서 upper bound로 감소하는 코시수열 두 개가 같은 곳으로 수렴함을 보이면 될 것이다. Wiki에 증명이 실려있다. 우선 X에서 원소 하나를 잡아 A1이라 하고, upper bound를 잡아 B1이라하고 An+1과 Bn+1에 대해서는,
An+Bn/2가 upper bound면 An+1=An, Bn+1=An+Bn/2. 아니라면, An+1=An+Bn/2(얘가 X에 없으면 얘보다 큰 X의 원소를 An+1로 둔다), Bn+1=Bn.

 계산해보면 An은 증가수열이고 Bn은 감소수열이다. 그리고 각각의 Bn은 upper bound라서 An보다 항상 크기 때문에 Bn-An은 B1-A1을 넘지 못하는데, 좀더 구체적으로는
B2-A2=<B1-A1/2 ... Bn+1-An+1=<Bn-An/2다. 정의를 쓰면 나온다. 또한 얘네 둘 수열은 코시인데 아니라면 값이 무한히 증가하거나 감소하기 때문에 An이 S의 원소가 되지 못하고, Bn은 upper bound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두 수열은 수렴하고 그 값이 같다. Bn에 의해 수렴값 L은 upper bound이다. L'<L upper bound를 잡으면 L'<An인 n이 있음을 보이면 끝이다.


2. dedekind cut

 이 방법이 더 증명하기는 편하다.. 루트2를 유리수에 관한 무한수열이 아니라 집합으로 생각해보는 게 이 증명의 아이디어다. 1.414...로 수렴하는 집합을 생각해보면 x^2<2인 모든 유리수의 집합을 x^2=2이게 될 x와 동치시키는 것이 한가지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굳이 2보다 작은 모든 유리수일 필요가 있는가.. 코시수열의 경우 대소관계를 유리수의 대소관계로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으나 이 경우 집합이 대상이 될 것이므로 가능한 건 집합의 포함관계다. 이때 x^2<2와 x^3<3인 집합을 비교하려면 저런 유리수 모두를 포함하게해서 {x|x^2<2} =<{x|x^2<3}로 하면 된다. 이것들을 정의로 내리기 위해, 우선 x^2<2인 집합의 특성을 살펴보자.

(i)아래로 닫혀있음
(ii)가장 큰 원소가 없음

(i)는 대소관계를 만들기 위해 있고, (ii)는 코시수열에서 1 1.4 1.41 1.414 ...등을 집합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를 수식으로 쓰면

nonempty proper subset X of Q is called (dedekind) cut iff
(i)if x belongs to X and y<x, then y belongs to X
(ii)if x belongs to X, then there's y>x belonging to X.

cut이라는 말은 유리수 라인 위에 {x|x^2<2}처럼 딱 선 하나를 딱 컷해서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모든 컷들의 집합을 S라 하면 여기에다가 대소는 포함관계로, 덧셈은 원소들끼리의 덧셈으로, 덧셈의 역원 0*은 {x|x<0}으로 정의가능하고, 곱셈은 양수음수 나눠서 하면 된다. 양수의 경우 그대로 곱하면 된다. 음수는 역원을 생각해서 정의하면 된다. 그러면 ordered field임을 보일 수 있다.

least upper bound의 경우 매우 간단하다. upper boqunded인 공집합이 아닌 X를 잡고 UX를 취하면 끝이다. 대소가 포함관계라 이리 간단하다..


3. uniqueness of complete ordered field

 두 field 사이에 order isomorphism이 있음을 보이면 된다. X Y가 complete ordered field이면, 다음과 같은 맵을 잡는다.
f : X->Y
f(a)=sup{q_Y|q_X<a}. q_X는 X에서 유리수 q를 말한다.
(참고로 ordered field는 Q와 isomorphic한 subset을 가진다)
직접 임의의 X Y에 대해 보이는 건 어려우니까 Y를 cauchy나 dedekind로 잡는다. cauchy의 경우 위에서 증명했듯이 수렴하는 수열은 유리수코시수열로 동치시킬 수 있다. 이를 이용하면 되고 cut의 경우 정의에 의해 그냥 된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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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의 연속성(1)

 세상에서 매우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인과는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물리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한다는 것은 그 현상과 관련된 인과들을 정확히 기술한다는 것이고, 어찌보면 이는 매우 복잡한 연속함수일 것이다. 만약 시간이 어느 정도 동안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모든 인과룰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지능력과 기억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현상을 단편적으로, 혹은 그 몇 가지 단편들의 종합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떤 것을 먹고 싶다고 할 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이 현상과 관련된 단편적인 기억들만을 꺼내놓고 거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가령 기억에 없는 어린시절부터 나는 그것을 먹는 것에 익숙했다든가, 뇌가 어떤 성분이 부족해서 그것이 필요했다든가 그에 관한 전체적인 인과는 파악할 수 없다. 내 이전의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고도 말이다. 만약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인과들, 가령 내 유전자의 형성배경들을 논하게 된다면 나는 아주 부분적인 사실밖에는 알 수 없다. 즉, 우리는 현상을 분석할 때 아주 단편적인 사실과 인과들만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수식을 써서 물리적인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려할 때는 우리가 연속적인 인과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t=a라는 식으로 시간을 잘라서 멈추게 한 다음에 그에 연관되는 아주 몇 가지의 함수들로 사태를 바라본다. 그 다음에는 a<t<b로 영역을 넓힌다. 이때 모든 인과가 고려되지도 않고 시간을 짤라서 우리가 원하는 함수만을 고려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수학을 제외하고 과학적 현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에서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한다. 특정 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몇 가지 변수만을 가지고 시간축을 단절시켜 아주 단순한 인과만을 따진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그 결과가 모든 인과와 연속된 시간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면 우리는 모든 인과를 파악하기 어렵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들로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과들의 경우 우리에게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경험들이 충돌하는 경우 문제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은 경험들이 충돌할 때 서로에 대한 다름의 인정과 관용이 필요함을 알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예외적인 것이다. 왜냐면 이것은 내게 주어져 있지 않은 정보로부터 판단과 추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받지 않았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들, 특히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것들로부터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산다. 사람들 사이의 경험이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로만 판단하고 굳이 경험에 없는 예외들을 가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가령 1+2을 계산하는데 우리는 3이라는 값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 우리 경험에 주어진 것이 없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수학과에게 내가 1+2=1인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ㅡ적어도 관련된 인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면ㅡ. 그렇기 때문에 경험의 충돌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나, 교육받지 않았거나, 특수한 성격이 아니거나 매우 자연인의 삶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경험 외의 것을 상정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위의 의미에서 자연인들이 가질 수 있는 반응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히여 이해하거나, 뇌가 수용을 거부하거나, 공격적이 되거나. 훈련되지 않는다면 타인의 경험과 자기의 정보밖에 있는 현상들은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것을 최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하려하고 그래서 "그거 이거 아니야?" 혹은 "그건 이거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대답은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나머지 영역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적어도 그에 대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인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적었듯이 이런 현상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지만 더 큰 인과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항상 인과의 단편만을 보고 살기 때문이다. 개인이 하는 경험은 한정되어있고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인과의 고리도 한정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외의 경험, 미지가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는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알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가령 여러분이 가장 신뢰하는 학문인 수학에서도 우린 알 수 있는게 별로 많지 않다(사실 그게 수학의 재미이자 강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함수들로 표현할 수 있는 함수는 매우 적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수도 별로 없다. 애초에 대부분의 실수는 유리수 방정식의 근이 되지 않고, 심지어 5차 이상의 방정식의 해는 대수적으로 표현자체가 불가하다. 미분방정식에서는 해가 뭔지를 떠나서 근 자체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방정식들이 많다. 이런 진실 하에서 자신이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세상 모든 인과의 고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더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 열린 자세로 상대방에게 경청하고 자신과 다른 경험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뭔가를 모른다는 것은 이제 상대의 책임이 아니다. 인과를 파악하지 못한 나의 무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논리적인 이유로는 위에 상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험의 충돌을 겪어보지 않았거나 그걸 넘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으로 모든 것이 되었던 사람들. 후자의 경우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경우 사람들은 자기의 추론의 성공에 대한 높은 기댓값을 부여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수학적인 세계에서밖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뢰도 1의 확률함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적어도 그들의 경험이 완전한 실패를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갈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는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의 패러다임은 대개 바뀌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고정되어있기 때문이고 그 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들과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이 일정하므로 그 이외의 것을 굳이 상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현상에 부여하는 기댓값은 사실상 1에 가깝다. 물론 나머지 이유들도 많이 있다.

 나는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만 했을 뿐이고, 실제 삶에서의 작동은 이보다도 더 복잡하다. 거기에는 아주 많은 사회적 환경의 문제와 심리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이 실패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도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집착해서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가령 전쟁과 절대적 빈곤을 경험한 세대는 그것이 그들이 삶에 부여하는 가중치에서 가장 높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나머지 것들은 큰 가중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다른 경험들을 우선순위밖으로 놓을 수 있다. 심리적으로 매우 몰려있는 경우 자신의 방어기제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이 취하는 행동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삶에서 다른 행동들은 매우 나쁜 결과를 불러왔고 삶이 그 치명적인 사실에 매우 큰 가중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동의 좋은 결과/행동들 이라는 함수의 값은 어느 시간축에서나 0에 가깝다. 어떻게보면 그들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이 다른 경험을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다른 경험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중치를 두고 있는 경험들을 박살낼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결국은 많은 경험을 접해야하고, 아니라면 이론적으로 위에서 적은 인과의 연속성와 인지의 한계를 설파하는 수밖에 없다(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인간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패러다임/사고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 경험들과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도 파고 들어야만 한다.



이글은 예전에 쓴 글의 연속선상에 있다. "욕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과 비슷한 류의 제목으로 썼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왜냐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는데 그것에 맞지 않는 것이 나올 경우 대개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경험의 충돌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릴 때는 대개 인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것 또한 자연스럽다. 자연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시킨다. 왜냐면 나에게 속하는 성질들을 상대방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대개 많은 것들이 표준화되어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는 교육제도에 의해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동아리를 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같은 문화권에 속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고.. 등등 타인과 나에게 보이는 것들이 대개 비슷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타인에게 투영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생각되는 개인의 고유한 면모를 찾는다. 대개는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성으로 대표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문제의 상황에서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없거나 경험이 충돌할 때 타인의 인성을 문제로 삼는다. 이 또한 맨 처음의 문제에 속한다. 실제 사람들이 판단할 때 삼는 재료는 이것들보다 복잡하겠지만 아무리 복잡해봤자 유한한 정보들이고 한정된 정보들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에 관한 모든 인과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을 문제삼으려고 한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나는 항상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타인의 인성을 문제삼을까?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처럼 그 사람 고유의 무언가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 고유의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위와 같다. 우리는 모든 인과를 알 수 없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정보로 최대한의 판단을 하고 경험들을 바탕으로 신뢰도를 매기고 여러 가중치를 매기고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다. 우리의 몸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인과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판단은 (심리적인 원인을 포함해서) 오류를 내고 마는 것이다. 사실 개인의 고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인 경향이며 습관일 뿐이다. 물리적인 인과에서는 모든 것은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흘러간다. 개인의 고유성은 모두 그 원인과 인과가 있다. 다만 그걸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유하다는 표현을 쓸 뿐이다. 인격은 고유한가? 그 사람에게 큰 원인이 있어 무언가 그에게만 속하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 그런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인과들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인격, 성격이라는 건 그 사람의 태아 때부터의 환경과 그가 접한 경험들과 유전자가 결부된 복합적인 문제다. 만약 고유한 것을 묻고 싶다면 그 유전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전자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부모의 환경과 경험들, 부모의 유전자의 문제, 그리고 확률적으로 물려받았거나 부모와는 다른 형질의 유전자들. 이것들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인과가 연속적이라는 나의 말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개인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할 수 없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임이라는 건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과의 단편을 잘라만든 것이며 이는 인간의 습관에 의해서나 대개는 법적 처벌을 위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물론 이는 정확한 진술은 아니다. 그냥 흐름상 이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제외하고 쓴 것이다). 물리적인 인과에는 책임이란 단어는 없다. 단순히 인과들의 작용만이 존재할뿐. 만약 누군가 고유한 인격의 문제로 개인을 문제삼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사람과 연관된 모든 인과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물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인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표현을 쓰는가? 물론 미묘한 감이 있다. 책임이라는 개념의 성질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이야기를 진행하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타인의 인성을 문제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이럴 때 우리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연관된 인과의 고리를 찾아 거기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도움을 주거나(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므로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그러고싶지 않다면 차라리 그 사람을 그대로 나두는 편이 본인의 감정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낫다. 이해하고 싶지 않거나 어려울 경우 나는 차라리 그 사람을 그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추천한다(불쌍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그 사람은 여러 작용에 의해 그렇게 된 사람일 뿐이니깐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씁니다. 흐름을 해치기 때문에 쓰지 못한 것들이 후반부에 있습니다. 책임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인과가 자연물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하는 문제도 있고, 만약 위의 논지와 같다면 책임을 묻는다는 행위가 과연가능한지의 문제도 있습니다. 우선 결론만 말하자면 책임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는 연속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현상들을 그대로 나둘 수는 없습니다. 가령 위의 논리만을 따라가면 살인이나 강간 같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을 묻지 말아야하는가하는 문제도 발생합니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최소한의 제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적으로만 본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본다면 공동체의 안정과 개개인의 안정을 위해서는 위협적인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현상이 지속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연속적인 인과를 끊고 그 상황을 직접적으로 만든 자를 처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감정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많은 경우 타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큰 의미가 없거나 묻기가 곤란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적어봤습니다.

 여러 사건을 겪다보면 저도 사람인지라 화도 나고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저는 그런 경우 많이 생각해보다보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너무 슬픕니다. 사람이 연약한지라 그냥 책임을 묻고 거기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많은 경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움으로 나아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삥뜯는 노숙자들이 그냥 엿같을 수 있습니다. 저도 여러 사연 들어가면서 진짜 현실성있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삥 많이 뜯겨봤습니다. 화도 많이 내고 속으로 욕도 많이했습니다. 버린 돈들도 너무 아까웠고. 그러나 그 사람들은 매우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삶이 그들을 거기로 내몬 것이죠. 사실 사람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도움을 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들을 그냥 욕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이야기를 요청하거나 교회에 데려가거나 센터에 보내거나 친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들의 비열함에 치욕을 떨며 그들은 보살핌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바쁘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보내버리죠. 왜냐면 하고싶지 않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외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기 쉽습니다. 삶이 힘들기도 하고 이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과를 생각하다보면 그들이 과연 잘못이 있는가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에 부닥쳐있을 때에 사람들에게 속은 것이니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만큼 몰려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등등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하는 대처법을 들어왔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한결같아서 너무나 슬펐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그렇게 되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단들에게는 사실 자기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그들을 깔보고 무시하기보다는 정확한 성경구절을 읊어주고 그들이 그렇게 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었고, 종교는 다를지라도 친구는 될 수도 있었을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그곳으로 보냈죠. 너무나 슬픈 사실입니다. 이런 큰 주제들 외에도 친구들 사이의 문제, 인간관계 등등 많은 사례들이 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아주 많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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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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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성 ppt 작성을 위한 내용 초안
*다음주 발표인데 내용초안입니다 그냥 올려봅니다

1. 보부아르는 유아기 때부터 남성에게는 밖에서 뛰어 놀 권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 억압받지 않고 자신을 실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아에게는 그것이 금지되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아에게 주체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형을 줌으로써 통제된다고 말한다.

2. 청소년기ㅡ젊은 처녀ㅡ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고 남성들은 자기실현을 하는 데에 비하여 여성은 그럴 수 없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연인, 사랑, 결혼 등으로 미루게 되고 이것을 막연히 상상하게 된다

3-1. 여성이 처녀성을 잃게 될 때 아주 많은 경우 여성은 현실을 깨닫게 된다. 주입받아왔던,  자기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성에 의한 성적 경험은 난폭하고 상대방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욕망을 실현한다. 그는 성적 행위에 있어서 주체이며, 막 처녀를 잃게 되는 여성은 신체구조상, 또한 수치심과 공포 등의 심리적 원인으로 인하여 주체가 아닌 타자, 수동성에 있게 된다. 가령 성관계는 여성의 동의없이도 가능하지만 남성의 동의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많은 경우 배려받지 못한 여성은 환상과 상상이 깨짐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첫경험은 남성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존재성을 사랑, 연애, 미래의 가정에 두도록 되었고 첫경험은 이것들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여성은 수동적으로 만들어져왔고 남성의 난폭함과 미숙함 속에서 두려움과 배려심, 공포로 저항하기 어렵다. 여성은 자기표현의 대상이 아니기 떄문에 최초의 관계는 여성을 극단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보부아르는 실패한 경험이 자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적고 있다.

3-2. 첫경험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여성은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주체가 아니고, 또한 남성의 욕망에 대해 먹이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삶의 현장에서 제2의성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통해 더욱 부각된다.

 4. 결혼을 통해 여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확한 현실, 부조리한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막연히 기대했던, 상상하도록 주입받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이다. 여성은 그 전과의 삶과는 매우 단절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 전에는 여성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지고 들판을 나갈 수도, 원하는 곳에 갈 수도 있었다. 매우 희박하긴 하여도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주체적인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보부아르가 사례로 드는 결혼은 대개 중매결혼인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이것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면 여성은 아버지의 손에서 다른 남성, 다른 권위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즉 남성에 의해 그녀는 팔려간다. 그녀는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물론 보부아르는 이런 경우 외에 일반적인 결혼형태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그녀가 분석하는 결혼이란 여성을 권위에서 다른 권위로 보내는 것, 이 소유에서 저 소유로 보내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결혼 후의 살을 보면 매우 명확해진다. 여성은 전에는 자유롭게 거닐 수 있었으나 이제는 집안의 네 벽 사이가 그녀의 세계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에게 부여된 일들을 한다.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온갖 가사일을 맡는다. 만약 여성이 이것을 자신의 의지와 자유에 의해서 했다면 그것은 비극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모델로 삼았던 이야기는 여성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을 때이다. 그녀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여성에게 그것은 인정되지 않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이 그 권리를 얻으려면 여성은 모든 남성으로부터 복종을 요구받고 불합리와 싸워야한다. 그녀는 세계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 또한 거부되지만 여성은 자신의 생존을 남성에게 의존해야했다. 그녀는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있어서 결혼은 일종의 자기성취이고 생존 위에 부과된 하나의 욕망일 수 있으나 여성에게는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남성이 가진 주체성을 제거받았고 생존을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과도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여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치 이것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다. 여성은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고 남성은 주거를 제공하는. 또한 그녀는 네 벽에 갇혀산다. 이것이 무서운 점은 다음과 같다.  남성은 가정 밖에서 자신의 취미, 일, 자아를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여성은 가사를 하지만 그것은 헛되고 무의미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아무리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해도 그것은 새로운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다. 매일 같은 반복과 무기력함이 그녀를 지배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시시푸스의 비극과도 같다. 그녀는 매일매일 사라질 일을 계속 지속해야만 한다. 그녀의 시간은 세계와 단절되어있고 결혼 이후로 여성의 시간은 멈추게 된다. 결혼 속에서  자신이 상상하도록 주입받아온 모든 것이 거짓임을 깨닫고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자신을 죽이며 살아간다.

 5. 이 비극은 어머니에게서 완결된다. 어머니는 꺾인 마음 속에서 가사와 양육이라는 임무를 맞게 된다. 아들을 낳을 경우 여성은 자신에게 삭제된 주체성, 기형적인 결혼구조에 대한 보상으로 아들이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성공을 자신에게 속하기 위해 아들을 자기에게 순종적으로 기르려고 한다. 아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 품을 벗어나야한다. 그녀는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아들에게 있어서도 비극이다. 적지 않은 경우 아들은 기형적인 존재가 되거나 반항적이 되어 비뚤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개 남아들은 주체성을 표출하도록 사회가 강제하기 때문에 이 문제들은 다소간 해결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여아의 경우는 문제가 크다. 여아는 남아보다 더 어머니에 속하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여아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부조리함을 아이에게 투영하여 구박할 수도 있고, 자기자신을 발견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아가 커가면서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면 어머니는 부조리와 세월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을 비교하며 그 소녀에게 질투하며 구타나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결혼할 즈음에는 남편보다 더 여아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도 있다. 왜냐면 여자의 인생은 남성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보호될 수 없고 생존마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6-1.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들은 매우 흥미롭고도 비극적인 현상을 만들어낸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들로부터 판단과 행동을 이어가는데 그 절대적인 수치가 여성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좁은 집만이 그녀의 모든 세계다. 그녀는 남성처럼 배울 수도 없고, 사상, 정치, 학문을 배울 수도 없다. 그녀는 어릴적 부모에게 배운 것들, 그리고 남편에게서 알 수 있는 지식, 사교모임에서 알 수 있는 지식만이 그녀의 것이다. 세계를 접하지 못한 어린이는 막연한 상상에 의해 세계를 구성하고 거기로부터 불안함과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세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 인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이 바로 이와 같다. 여성은 막연한 정보에 의해 세상을 판단하고 신비로운/마술적인 생각을 한다. 또한 여성들은 세계를 사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 깊게 파묻혀있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이것을 여성의 특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남성사회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여성은 접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좁다. 그녀는 또한 욕망을 절제당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할 수 없다. 가사 후 그녀는 아무것도 제공받지 못한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안으로 파고들거나 쾌락에 빠지거나ㅡ관능적이라고 표현되는ㅡ 정신병적인 증세들을 가지게 된다.  이는 어린이가 욕망을 절제당하고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할 때 자기자신으로 파고드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최대치가 그것인 것이다. 여성의 소심함, 비열함, 수동성, 어리숙함 이 모든 것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되도록 환경에 놓여지고 교육받고 상상하도록 주입받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외에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남성은 그럴 수 있으나 여성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신을 자유롭게 실현하면서 여러 경험을 하며 사유의 세계를 넓혀가고 여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은 그렇지 않다. 여성의 소심함은 또한 그들로서는 최대한 합리적인 행동인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자명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절제되어버렸다. 그녀들은 욕망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경험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경험에서 실패에 대한 신뢰도는 1인 것이다. 그녀는 소심하게 되거나 미쳐버리거나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삶에 체념하게 된다.

6-2. (본인의 의견포함) 여성의 히스테릭한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가령 (당대의) 여성은 왜 그렇게 화장에 신경쓰는가, 외모에 집착하는가, 집안의 어떤 것이 더렵혀지는 것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남성들에게 있어서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있다. 일, 가정, 친구관계, 사상, 취미 등등 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전반에 대해서 그들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접하고 있고 그들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자아를 채우고 있다. 그들의 삶에 중요한 것들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있다. 따라서 한 가지에 사소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자신의 자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여성에 비해) 큰 중요도를 차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몸뿐이다. 결혼한 여성은 여기에 가정이 더해진다. 여성에게는 교육도 지식도 사상도 취미도 주어지지 않는다. 결혼 전의 여성은 자신의 개성을 구성할 수 없고 그들에게는 오로지 처녀성의 보존과 미래의 애인/남편에게 주어지기 위한 외모의 치장만이 주어진다. 만약 여성이 처음부터 남성처럼 주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굳이 외모치장에 신경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된다면 외모치장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고 외모에 있어서의 문제란 여러 문제 중에서 하나의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혼 여성에게 있어서 주어진 것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자신의 몸밖에 없으며 이들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녀들은 (생존을 위해) 화장을 하고 매우 외적 아름다움을 위해 비효율적인 옷을 입을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그녀들은 자신의 옷에 흠집이 나는 것, 아주 미량의 얼룩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과도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데 이는 이들에게 외모는 곧 자아의 반영이기 때문에 남성의 입장에서는 매우 사소한 것이지만 여성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이므로 극단적인 반응마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자아가 부서지는 것이다).

 외모치장과 화장과 관련된 여성들의 심리 중에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여성들은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의 자아 전부를 차지하고 삶의 모든 가중치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 치장들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타인/남성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자아와 자존감을 남성에게 의존하게 한다. 여성은 판단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자아를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고 자아를 자신이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했더라도 여성은 혹시라도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하고 불안해한다. 남성이 판단의 주체이며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측면마저 고민하고 자신의 치장이 조금이라도 흐러졌다고 생각할 때에는 매우 남성의 관점에서는 이상한 행동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책에서는 다음의 인용이 있다.

" '내 기분도, 내 태도도, 내 얼굴 표정도 모두 옷에 달렸다'고 마리바슈키르체프는 쓰고 있다. '알몸으로 산책을 하든가, 아니면 자기 육체, 자기 취미, 자기 성격에 따라 옷을 입든가 해야 한다. 나의 이런 조건이 맞지 않을 때 나는 어색하고 평범하고, 따라서 창피스럽게 느껴진다. 기분과 정신은 어떤가? 그것은 누더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리석고 권태로워 몸둘 곳을 모른다.' "

"나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 나를 아름답다고 칭찬해주었으면 한다. 리오바가 나의 모습을 보아 주고 나의 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나는 왜 남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가? 리본이나 tie는 나를 즐겁게 해 준다. 나는 새 가죽띠를 매고 싶다. …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자신의 자아를 보여지는 것, 외모에 두고 있다. 만약 여성이 다양한 경험이 가능했고 자아를 이루는데에 외모 이외의 것이 있었다면 여성은 화장이나 옷이나 몸이 아니라 자신의 취미, 일,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했을 것이다. 또한 후자의 인용문(소피아 톨스토이)은 확실히 자신의 자아가 남성에게 의존해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피아 톨스토이(레오 톨스토이의 아내)의 자아의존성은 다음에 극렬하게 나타난다.

 "나의 질투는 선천적인 병이다. 아마 그를 사랑하고 그이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그와 더불어 오직 그에 의해서만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가 나에 의해서만 꿈꾸고, 생각하고, 나 하나만을 사랑해 주었으면 싶다. … 나는 이오보치카와 떨어지고는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이가 없으면 나는 정말로 불안하다."

 아내의 주인은 남편이며 여성은 그에게 모든 아름다움의 판결권과 자아의 판결권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있어 남성은 모든 것이기에 자신에게 신경써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격렬한 질투를 느끼기고 하고, 위와 같이 자아를 의존하기도 한다.

 외모와 화장, 남성에게의 의존 외에도 여성은 가구, 청소, 깨끗함에 광적으로 몰두하기도 한다. 특히 아이를 아직 갖지 않은 기혼여성에게 주어진일은 요리와 청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일은 그것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그것에서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소한 더러움마저 여성에게는 매우 큰 문제일 수 있다.

 "그녀는 … 냅킨이나 각사탕이나 술병을 세는 등 병적이어서, 고독한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플란넬 천을 손에 들고 이웃 사람과 시시덕거리며 유리창을 닦고 있는 식모를 감독하면서, 그녀의 입에서는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 참을성없이 마구 불러 대는 소리가 내어 나올 때도 있다(130p)"

"휴식을 위한 침대가 있다. 그러나 푸근히 쉬기 위해서는 옆의 마루 위에 눕는 게 좋다. 방석은 너무 새 것이다. 거기에 머리나 발을 대서 더럽힐까 걱정이다. 내가 양탄자를 밟을 때마다 나의 발자국을 지우기 위하여 기계와 걸레를 가진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131p)."

 이런 남성/타인에 대한 자아의 의존, 가사에의 자아의존 등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여성에게는 신경증적인 증세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타자에 대한 자아 의존은 여성을 극도의 불안과 소모, 공허, 신경증에 몰아넣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남성에게 있어 사소한 문제이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인식하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남성에게는 원인없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남성과의 대비에서 보자면 남성은 위와 같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가령 남성은 화장이나 의복에 있어 자유로웠다. 왜냐면 그들에게 있어 의복이나 화장이란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매우 사소한 측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밖에서 뛰어놀거나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자아는 아주 다양한 경험으로 이루어졌다. 친구, 학교, 직장, 동지, 일, 취미 등등 다양한 요소가 자아를 차지했고 굳이 외모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일이었지 그들에게는 외모나 치장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였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외모평가는 남성에게 가해지는 그것과는 다르다. 여성에게 있어 외모평가란 곧 자아의 판결이며 심판에 가깝다. 남성에게 외모는 단순히 자신이 가진 여러 성질 중에서 하나이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그에게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여성이 사회참여를 하면서 현대사회에서도 이는 비슷한 양상으로 간다. 남성에게는 능력이 우선시 되지만 여성에게는 과거 전통과 능력이 모두 요구되기 때문이다. 화장, 외모, 외모치장 등은 여성에게 있어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고 그들의 자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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