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발표내용입니다

Problem of Univervals in Boethius

포르피리우스는 270년 <<이사고게>>(한글로는 <<입문서>>)라는 20 쪽 가량의 출판하는데, 그는 유(類)/종/차이/고유성/우유성을 이해하는 것이 Aristotle의 <<범주론>>과 논리학의 일반적인 과목인 정의/분할/증명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서문에 적는다. 그는 이것들의 존재론적 질문들은 보류하고 순수한 논리학적 관점에서 이것들을 탐구하자고 한다. 그러나 그가 책에 적은 질문들이 후대에 '보편 논쟁(Problem of Universals)'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 …예를 들어,
(1) 유와 종에 관하여, 그것들이 (자립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 머릿속에만 있는 헛된 생각인지
(2) 만약 존재한다면, 물체적인 것인지 비물체적인 것인지
(3) 그리고 (만약 비물체적인 것에 속한다면) 감각적인 것들과 분리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것들 안에, 혹은 그것들과 연관되어 존재하는지에 대해 나는 따로 다루지 않겠다. …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선대의 철학자들, 그중 특히 소요학파를 따르는 자들이 앞서 언급한 속성들을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는지 지금 네(크리사오리우스)게 설명해 주려고 한다."

 책이 매우 짧은 분량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고 이에 대한 주석은 알렉산드리아 New Platonist의 거장인 암모니우스를 대개 따른다. 그는 위의 이론을 <술어이론(theory of predicate)>으로 판단하였다. 그에 의하면 논리학을 처음 배울 때는 삼단명제를 배우게 되는데 삼단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어떤 형식으로 주어와 술어를 결합해야 참된 명제를 산출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데 그 원리가 <<이사고게>>에서 짧게 언급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참된 명제는 '주어(種)+술어(類)'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유는 언제나 종의 술어가 된다는 법칙에 의해 이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령 "사람은 동물이다"는 문장이 참인 이유는 사람이라는 개념(種)이 동물이라는 개념(類)에 속하기 때문이다. 암모니우스는 따라서 명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를 종과 유로 구분하는 것이 주어와 술어를 확립하는 첫단계라고 하였다. 이에 더해 그는 술어는 주어에 대해 본질적인 속성을 의미하거나 비본질적인 속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에는 유, 종, 차이 , 고유성이 속하고 후자에는 우유성이 속한다고 하였다. 그의 해석으로 인해 <<이사고게>>는 다섯 가지 속성에 대한 학습과 함께 술어이론을 소개하는 Aristotle의 논리학 입문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철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는 '개' '말' '인간' 등의 개념이 Plato의 주장처럼 비가시계에서 이데아로 존재하는지(개의 이데아, 말의 이데아, 인간의 이데아), 아니면 Aristotle이 주장하는 바처럼 개별자 안에 내재한 상태 혹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는지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실재론 후자는 유명론에 속하며 이것이 보편논쟁의 주요 대립된 입장들이다. 이 논쟁은 다분히 Boethinus의 <<이사고게>>에 대한 주석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자면 다음과 같다.

 Boethinus는 우리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사물 안에 구성되어있는 것들이거나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내는 것(가령 켄타우로스) 둘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유/종 등의 범주들은 어디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것에 속한다고 하는데, 그는 비물질적인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가령 신, 영혼, 마음은 물질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 수 등의 수학적 대상들은 그것을 반영하는 물질이 사라지면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가령 원형의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은 원의 수학적 성질을 띠지만 그 대상이 사라지면 원이라는 성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즉, 어떤 대상이 비물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은 감각적인 것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하는 두 가지로 다시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를 펼쳐나간다.

 그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켄타우로스와 수학적 선(線)의 예시이다. 켄타우로스가 거짓된 존재인 이유는 자연본성이 허락하지 않은 대상들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개념들의 결합은 거짓된 문장을 산출하는데, 이에 반해 대상 안에 있는 성질들을 구분하고 그것들을 추상하는 이해는 거짓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 대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광활히 펼쳐져있는 대지에서, 줄자에서 선이라는 것을 추상해낼 수 있고 이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 안에 있는 여러 것들 중에서 하나를 추상하거나 구분하여 낼 수 있고, 우리는 각각의 개별자들에게서 공통성을 추상하여 類를 추상해낼 수 있고 이는 대상들 사이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개별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에 있어 다시 선으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대상들로부터 선이라는 비물리적인 속성을 추상해내고 보편자임을 찾아내지만 우리는 보편자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우리는 수학적 선이라는 개념을 물리세계 내에서 감각할 수 없다. 즉, 우리는 보편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비물리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과 류 또한 보편자임으로 이들은 비물리적인 대상에 속한다.

 마지막 문제는 다음과 같다. 비물리적인 대상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물질과 교류하지 않는 비물질들(가령 신), 감각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비물질들. Boethinus는 보편자는 두 번째에 속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사용된 논증과 마찬가지로 그는 말한다. 우리가 대상 안에서 파악하는 보편자는 대상이 소멸하는 즉시 우리는 그 보편자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즉 대상 안에 있는 보편자는 그 물질 안에 존재가 의존되고 있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해석은 사실 갈릴 수 있다. Boethinus 자신도 <<이사고게>>에 제시된 비물질의 종류가 세 가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물질과 교류하지 않는 비물질(신), 물질에 연관되어 있는 비물질(영혼)ㅡ물질이 소멸해도 존재성이 보장됨ㅡ, 그리고 물질 내에만 존재하는 비물질. 그는 보편자가 세 번째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정리한 뒤에 주석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제시한 것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즉, Plato의 견해를 제시한다. Plato는 이와 같은 방식의 보편자 이해를 하지 않고 보편자가 개별자를 초월하여 하나의 이데아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석은 본래 <<이사고게>>가 <<범주론>>의 입문서이기 때문에 Aristotle의 견해를 적었다고 말하고 있다.

*보이티우스는 종을 개체들의 실체적 유사성으로부터, 유는 종들의 유사함으로부터 수집된 사고라고 정의하고 있다(실체적 유사성은 대상의 본질적 속성을 일컬음).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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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이론의 역사에 관해서는 Robert. I soare의 저술을 보는 것이 좋다. 매우 체계적으로 아이디어들이 역사적으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있다.

 

http://www.people.cs.uchicago.edu/~soare/History/compute.pdf

www.people.cs.uchicago.edu

 

 

http://www.cs.umd.edu/~gasarch/BLOGPAPERS/soareturing.pdf

www.cs.umd.edu

 

 

 

 

이들의 역사를 보면 침울해진다. 학문의 초기단계라고 하더라도 계산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중요한 정리들이 20대 초반의 학생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간략한 역사로 보자면, 계산이론의 역사는 수학의 엄밀성에 대한 요구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시기로 보자면 이미 뉴턴시대에는 미적분학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없었고, 이것이 19세기가 되어서 큰 문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수학의 기초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많이 일어났고, 수학자들은 수학의 기초는 자연수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ㅡ이는 매우 자연스러운데,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까지를 생각해보면 자연수부터 시작해서 실수로 건너갔다ㅡ. 즉, 수학에 대한 엄밀성을 따지는 것은 자연수체계를 엄밀하게 제시하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이 작업들은 대개 19세기 후반부에 이루어졌다. 자연수에 대한 엄밀한 체계는 대표적으로 페아노가 제시한 공리계가 있다. 이 체계로부터 우리가 믿어온 모든 수학적 작업들이 엄밀하게 증명될 수 있었다. 이 때가 19세기 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수학의 부흥이 있었다. 칸토어라는 학자가 집합이라는 개념을 엄밀하지는 않지만, 개념적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그는 집합을 "어떤 조건을 만족하는 상상할 수 있는 대상들의 모음"과 비슷한 식으로 정의를 내렸다. 수학적으로 엄밀하게는 아니지만, 집합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제시된 것만으로도 이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칸토어는 이렇게 집합을 정의내리고 집합에 관한 일반적인 성질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집합론과 관련해서 또 다른 흥미로운 부흥이 있었다. 흔히 알려진 러셀의 역설과 관련한 이야기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프레게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프레게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수학자로, 사실상 현대수학의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내려왔던 아주 기초적인 논리학(가령 삼단논법)을 엄밀히 제시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and, or, not, for all, there is, if then등 수학에서 기초적으로 쓰이는 일상용어들을 기호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논리학을 기호화했다(이것이 일차논리의 기반이 되었고 기호논리학의 시초가 되었다). 프레게는 모든 수학을 위와 같은 기초적인 논리학적 용어로 환원하려고 했었다. 이는 논리주의로 불리는데, 프레게는 자신의 기호를 바탕으로 수학적 개념들을 논리적 개념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실패로 끝났는데, 여기에 바로 러셀이 등장한다.

 

 러셀은 프레게의 작업들을 보고,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프레게가 암묵적으로 '모든 집합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이 존재한다'를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그런 집합이 없음을 증명하여 프레게에게 편지로 보냈고, 이로 인해 프레게의 논리주의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페아노, 칸토어, 프레게, 러셀이 모두 겹치는 시기가 오게 된다. 러셀의 역설은 프레게의 논리주의를 종결내기도 하였지만, 그의 수학에 대한 공헌은 바로 '모든 집합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이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호로 만드는 것들이 모두 집합이 되지는 않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칸토어의 집합론(현대에 소박한 집합론이라고 부르는)에 대한 문제제기를 낳게 되었다. 이에 의해 집합의 개념을 축소해야하는 일이 벌어졌고, 집합론을 페아노 공리계와 같이 공리들로부터 따라나오는 대상들로 제한하는 일을 만들게 했다. 이 작업을 한 것이 제르멜로와 프렌켈이었고, 이를 ZF 혹은 ZFC 집합론이라고 한다.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프레게는 수학을 논리적 언어로 환원하기 위해서 자연수를 논리적 언어로 환원하려고 했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수학자들이 수체계에 대한 엄밀성을 요구한 것이 자연수에 대한 엄밀성을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레게 역시 비슷한 방식을 채택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프레게가 했던 자연수를 논리적 언어로 환원하려는 방식은 ZF 집합론에서 집합으로 자연수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채택되게 되었다.

 

 ZF 집합론은 자연수를 정의하는 것에 성공했고, 따라서 정수, 유리수, 실수, 복소수 체계를 집합으로 정의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 작업을 바탕으로 현대 수학의 기반이 세워졌고, 현대 수학의 모든 언어는 이를 바탕으로 ZF 집합론을 바탕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ZF 집합론이 마냥 완전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선택공리라는 특이한 공리 때문이었다. 수학에서 일반적으로 집합에서 원소를 뽑을 수 있다는 추론을 너무 당연하게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당시 있었다. 제르멜로, 프랜켈은 이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을 공리로 삼았다ㅡ유한한 집합에서 유한한 원소를 택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분명하지만, 만약 집합의 크기가 무한할 때, 우리는 원소를 무한히 뽑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ㅡ. 당시 수학에서는 이 선택공리가 과연 ZF 집합론에서 증명이 가능한가가 문제시되었다. 이것은 우리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넘어갈 것이지만, 언급만 하자면 괴델과 코헨에 의해 선택공리는 ZF 집합론으로부터 증명도 반증도 되지 않음(즉 독립적)이 증명되었다.

 

 

 ZF 집합론이 세워지고, 수학에는 흥미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힐버트가 제창한 입장인데, 수학에서 참인 모든 문장들이 모두 페아노 공리계나 ZF집합론처럼 어떤 공리들을 통해 나타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모든 수학의 정리들은 어떤 공리계로부터 유한한 길이로 증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유한주의'나 '형식주의'라고 한다. 당대의 수학자들은 페아노 공리계나 ZF 공리계를 바탕으로 유한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이를 위해서 힘을 쏟았다. 그러나 힐버트의 꿈은 한명의 초신성에 의해서 박살나게 된다.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괴델은 지금까지 언급한 작업들을 보고 흥미를 두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학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

 

 1929년, 23살에 괴델은 일차논리학에서의 '완전성 정리'를 증명하게 된다. 이는 '증명가능하다'라는 개념과 '참이다'라는 개념이 서로 같다는 정리이다. 우리의 주제와는 좀 멀리있지만 논리학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정리인데, 이 정리를 바탕으로 논리학의 모든 개념들이 성립하게 된다. 논리학에는 증명을 다루는 증명론, 참의 개념을 다루는 모형론이 있는데, 이들의 정리들이 안전하게 보증될 수 있는 계단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완전성 정리를 바탕으로 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compactness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지니는데, 이를 바탕으로 비표준해석학을 구성할 수 있고, 수학적 모형들을 논리학의 언어로 환원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된다. 괴델의 정리가 없었으면, 현대 논리학의 역사는 없었다는 것에 모든 논리학자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괴델은 이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더 강력한 정리를 증명한다.

 

 1931년, 25살의 괴델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게 된다. 그의 발표로 모든 수학계가 발칵 뒤집히게 되었는데, 이 정리는 당대의 유한주의를 완전히 박살내버렸기 때문이다. 괴델은 페아노 공리계가 완전하지 않음을 보였다. 페아노 공리계는 자연수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어떤 문장에 대해, 그 문장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더욱이, 페아노 공리계는 스스로 공리계 자신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의 정리의 함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괴델의 정리는 더욱 나아가서 "자연수에서 참인 문장들의 집합은 공리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게 되었다. 즉, 페아노 공리계는 자연수에서 참인 모든 문장들을 모두 포착할 수는 없다. 더욱 일반적인 경우에서, 어떤 공리계가 오더라도 그 공리계는 자연수의 참인 모든 문장을 포착할 수는 없다. 이것이 괴델정리의 함축이었다.

 

 괴델은 힐버트를 정면에서 반박한 셈인데, 첫째로 수학적 공리계가 모든 수학적 참의 개념을 보장할 수 없고(즉, 참인 문장이지만 흥미롭게도 그에 대한 증명이 존재하지 않음), 또한 페아노 공리계가 스스로 무모순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기 때문이다. 괴델의 정리는 흥미롭게도, 페아노 공리계뿐만 아니라 ZF 집합론에도 이것이 똑같다는 것을 보였다. 즉, 집합론 역시 집합론에서 주어지는 어떤 문장을 증명도 반증할 수 없고, 또한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도 없다. 이렇게 힐버트의 꿈은 완전히 무너졌다.

 

 여담으로 페아노 공리계의 무모순성은 페아노 공리계 밖에서 증명될 수 있다. 겐첸이 이를 증명했고, 그는 증명의 길이를 무한하게 설정함으로써 페아노 공리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했다ㅡ그러나 상식적으로 우리가 증명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는 유한한 길이의 증명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직관적이다ㅡ.

 

 

 이제부터 계산이론의 역사가 발발한다. 계산이론의 모형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찾을 수 있다. 괴델은 페아노 공리계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매우 흥미로운 작업들을 했다. 계산이론의 언어로 말하자면, 불완전성 정리는 '자연수의 참인 문장들을 나타낼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하지 않는다(즉 공리화불가능)'를 말한다. 괴델은 논리학의 언어를 코드화했고, 페아노 공리계를 코드화해서, 일반적인 케이스에서 그런 알고리즘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괴델은 정말 천재였다. 1931년에는 컴퓨터도 없었던 시대이고, 암호학이라는 개념이 수학적으로 성립하지 않던 시기였다(매트릭스처럼 수로 암호화된). 현재는 컴퓨터학과에 재학하거나 정수론 후반부를 수강하는 학생이라면 알게 되는 개념이지만, 당시에 누구도 '코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31년은 정말로 그런 시대였다. 괴델은 그런 시대에 수학적 기호들을 수로 코딩하는 방식을 떠올렸고, 그 방식을 바탕으로 논리학의 언어를 수로 환원하였고, 그를 통해 공리계 일반을 수로 표현할 수 있었다. 괴델은 수학적 언어를 수로 환원하고, 그것들간의 기묘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수학적 대상들을 아주 기초적인 함수들로부터 나타내는 방식을 만들었다. 현대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1 함수, 언제나 0을 내놓는 상수함수, 그리고 동일성함수와 합성함수, 재귀함수를 바탕으로 수학적 언어를 재구성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이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22살의 튜링을 자극하였고, 발전되어 비로소 계산이론이라는 학문을 성립시키게 했다.

 

 괴델이 알고리즘에 대한 수학적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신에 수학적 언어를 코딩하고, 그것들에 관한 기초적인 함수들을 구성했다. 튜링은 괴델의 논문을 보면서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장해서 튜링머신이라는 개념을 제창했고 이를 통해 알고리즘이라는 개념이 수학적으로 정의되었다. 또한 그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는데, 바로 모든 알고리즘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에 대한 개념이었다. 현재 밝혀졌다시피 실제로 그런 알고리즘이 존재함이 후대에 증명되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바로 컴퓨터의 개념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컴퓨터에는 엄청난 수의 알고리즘이 있고, 어떤 명령이 주어졌을 때 어떤 알고리즘에 들어가 명령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것이 알고리즘에 대한 알고리즘의 한 사례인데, 이것의 존재성뿐만 아니라 '모든' 알고리즘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의 존재성이 현재 밝혀졌다. 튜링이 직접한 것은 아니지만, 튜링은 이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괴델은 자신이 불완전성 정리에 사용했던 함수들이 원초적인 의미에서 '계산가능하다'라고 언급했었는데, 이것이 조금 더 발전된 개념ㅡrecursive functionsㅡ이 튜링머신에 의해 계산가능한 함수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컴과에서 배우는 모든 알고리즘의 개념들이 튜링머신에 의해 계산되고, 서로가 서로 같은 것을 계산할 수 있다ㅡ정확히는 튜링머신과 같은 것을 계산하지 않으면 그 알고리즘의 개념은 폐기해야 한다ㅡ.

 

 

 이렇게 해서 계산이론의 아주 기초적인 역사가 출발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이런 바탕으로 church, kleene, post 등의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발전하였고, 현대까지 수리논리학의 주요한 분야로서 존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괴델이 정말 모든 걸 해놓은 것 같다. 물론 알고리즘의 정의를 내린 것은 튜링이지만, 수리논리학을 발전시킨 것은 후대의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모든 흔적을 만들어놓은 것은 괴델이기 때문이다. 괴델의 완전성 정리는 모형론을 성립하게 하였고ㅡ물론 후에 Henkin이 세련된 증명방식을 제시했지만, 처음 증명한 것은 괴델이다ㅡ, 불완전성 정리는 튜링에게 영감을 주어서 계산이론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청년 괴델은 23살, 25살에 각각 이것들을 증명했고, 역사 끝까지 남을 업적을 만들어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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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2의 #1~#7까지의 솔루션입니다. 27문제이고 다 풀긴했지만 일일이 다 타이핑하는 게 어렵네요; 학부 세미나에서 12~13장 발제를 맡았고, 12~13장의 솔루션을 모두 TeX로 옮겨볼까했는데 무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장난 아니게 많이 드네요. 그냥 칠판에 나머지는 쓰고, 이왕 만들었으니 만든 건 올려둡니다.

chapter12.pdf
0.03MB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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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msey's test를 해석하는 방향에 있어서 조건문이 참일 확률을 조건부확률로 이해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을 낳기 때문에 폐기해야했습니다. 조건문을 조건부확률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Ramsey's test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Adam's thesis가 있습니다.

1-1. Adams' Thesis
Assertability of conditional is Pr(consequent/antecedent)
 A→B가 참일 확률을 Pr(B/A)로 정의하지 않고, A→B의 주장가능성( As(A→B)로 표기)을 Pr(B/A)로 정의하는 방식입니다. 즉, A→B에 대한 주장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사건 A가 주어졌을 때 B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주장가능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법이 있을 수 있고 논란이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참일 가능성이 높으면 주장가능성 역시 높다 정도로 이해합시다. 그렇다면 stalnaker의 thesis랑은 어떻게 다를까요?

Stalnakers' thesis : Pr(A→B)=Pr(B/A)
Adams' thesis : As(A→B)=Pr(B/A) and for statement A which is not conditional, As(A)=Pr(A)

 일단 의미론적으로 접근하자면, Stalnaker's thesis는 A→B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은 사건 A를 가정했을 때 얼마나 B를 신뢰하느냐와 같다고 합니다. 혹은 A→B의 신뢰도는 사건 A가 발생했다고 할때 우리가 B에 대해 가지는 신뢰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Adams' thesis는 A→B에 대한 주장가능성은 A를 가정했을 때 B가 일어날 확률과 같다고 합니다. 신뢰도와 주장가능성이 어떻게 다르냐는 문제가 발생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크게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그냥 신뢰도는 확률로 생각하시고, 주장가능성은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그냥 기호로 놓고 보면 Pr과 As는 다른 함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Adams' thesis는 조건문이 아닌 문장 A에 대해서는 As(A)=Pr(A)라고 하고, 조건문 A→B의 주장가능성 As(A→B)은 Pr(B/A)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주목할점은 Pr이 주어지면 As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증명하지는 않겠습니다). As는 Pr에 의존적인 함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As를 Assertability function이라고 합시다. As는 Pr값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값이 0과 1사이에 존재합니다.

*전자에서는 루이스의 triviality result가 문제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As(A→B)=Pr(B/A)는 Pr(A→B)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A와 B가 서로 동시에 성립할 수 없을 때ㅡ즉 Pr(A&B)=0,
Pr(A→B)=Pr(~A v B)=Pr(~A v (A&B))    (<- 논리적 동치때문에 성립) =Pr(~A)+Pr(A&B)=Pr(~A)
Pr(B/A)=Pr(A&B)/Pr(A)=0
이기 때문에 Pr(~A)값을 0이 아니게 잡으면 서로 다른 값을 가지게 됩니다.


1-2. 확률논리의 함축관계
 위의 논리를 가지고 아담스의 확률적 함축관계(Adams-probabilistic entailment)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Γㅑ
p A  iff  for all ϵ > 0 there exists a δ > 0 such that for all Assertability function As
if As(B) > 1 − δ for all B∈ Γ, then As(A) > 1 − ϵ.

iff ϵ > 0δ > 0 ∀As ( (B∈ Γ As(B)>1−δ)→ As(A) > 1 − ϵ)

쉽게 설명하면 Γ에 있는 문장들의 주장가능성이 1에 가까워질수록 A의 주장가능성도 1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엡실론-델타를 써서 정의를 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함축한다는 의미를 Γ에 있는 모든 문장의 주장가능성이 1일 때 A도 1이다는 것으로 정의하면 conditional free한 문장 A에 대해서 ~Aㅑ
pA→B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판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As(~A)=Pr(~A)=1이면 Pr(A)=이기 때문에 As(A→B)=Pr(A&B)/Pr(A)인데 Pr(A)=0이므로 값이 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값이 0이 되지 않도록 엡실론-델타를 이용해서 저런 식으로 정의합니다.

 Adams' thesis와 이 정의를 가지고 본다면 우리가 고전논리에서 타당한 형식 혹은 논리적 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그렇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색하다고 보았던 문장들을 모두 타당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를 사용하는 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위의 정의에 따른 귀결을 봅시다.
Aㅑ
pB 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As(A)≤As(B)가 성립합니다. 귀류법을 씁시다. As(A)>As(B)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AㅑpB에 의해서 임의의 ϵ > 0에 대해서 어떤  δ > 0가 있어서 As(A)>1-δ이면 As(B)>1-ϵ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a) As(A)=0
 As(A)=0이면 As(A)≤As(B)입니다. 왜냐면 As의 값은 Pr의 범위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s(A)>As(B)이므로 이 경우는 모순입니다
(b) 0<As(A)<1
 As(A)=a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ϵ=1-a로 잡는다면, As(A)>As(B)>1-(1-a)=a입니다. 따라서 As(A)>a가 되고 이는 모순입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순이므로 처음에 가정한 As(A)>As(B)가 틀렸습니다. 따라서 AㅑpB라면 As(A)≤As(B)가 성립합니다. 이제 고전논리에서는 타당하지만 확률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문장들을 보겠습니다.

 
1-3. 확률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문장들

(i)~A→(A→B)  (ii)B→(A→B) (iii)(A→B)→((A&C)→B) (iv)(A→B)→(~B→~A) (v) (A&B→C) (A→(B→C))

(i) ~Ap A→B

 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립한다면 위의 논리에 의해서 As(~A)≤As(A→B)가 됩니다. 이는 정의에 의해 Pr(A)≤Pr(B/A)입니다. 그러나 Pr(A)=1로 잡고 B를 p&~p로 잡으면 Pr(B/A)=Pr(A&B)/Pr(A)=Pr(A&p&~p)가 되는데 논리적 모순인 문장은 확률값이 항상 0입니다. 따라서 1≤0이 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ii) Bp A→B (B가 조건문이 아니라고 합시다)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립한다면 모든 A와 B에 대해 As(B)≤As(A→B)이므로 Pr(B)≤Pr(B/A)가 됩니다. B=~A라고 합시다. 그리고 Pr(B)의 값은 0이 아닌 임의의 값으로 잡읍시다. 그렇다면 Pr(B)는 0이 아니지만 Pr(B/A)=Pr(A&B)/Pr(A)이고 A&B는 논리적 모순이므로 Pr(A&B)=0입니다. 따라서 0이 아닌 값≤0 이라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귀류법에 의해 Bp A→B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iii)(A→B)ㅑ
p((A&C)→B)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립한다면, 모든 경우에 있어
As(A→B)≤As(A&C→B) 이고 정의에 의해 Pr(B/A)≤Pr(B/A&C)입니다. A를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이라고 한다면 Pr(B/A)=Pr(A&B)/Pr(A)=Pr(B)입니다. 왜냐면 A가 논리적 참인 경우 A&B와 B는 동치이고 Pr(A)=1이기 때문입니다. Pr(B/A&C)=Pr(A&B&C)/Pr(A&C)이고 A가 논리적 참이므로 Pr(B&C)/Pr(C)와 동일합니다. 즉, Pr(B)≤Pr(B/C)입니다. C=~B라고 하고 Pr(B)는 0이 아닌 임의의 값으로 잡읍시다. 그렇다면 Pr(B/C)=Pr(B&C)/Pr(C)이지만 B&C는 모순인 문장이므로 Pr(B&C)=0입니다. 따라서 0보다 큰 값≤0이 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따라서 (A→B)ㅑp((A&C)→B)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iv)(A→B)ㅑ
p(~B→~A)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립한다면 모든 경우에 있어 Pr(B/A)≤Pr(~B/~A)가 되어야 합니다. Pr(A)=0.5로 잡는다면 이 식은 Pr(A&B)≤Pr(~A&~B)와 동치입니다. B를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으로 잡는다면, A&B와 A는 동치이므로 Pr(A&B)=Pr(A)=0.5이고, B가 논리적 참이면 ~B는 항상 거짓인 문장/모순인 문장이 되기 때문에 ~A&~B도 모순인 문장입니다. 따라서 Pr(~A&~B)=0이므로 0.5≤0가 됩니다. 이는 모순이므로 (A→B)ㅑp(~B→~A)는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Adams' thesis만이 유일한 조건문에 대한 해석법이라고 믿어야 할까요? 다음글에서는 Adams' thesis를 반대하는 논증을 보고 가능세계론으로 조건문을 해석하는 Similarity account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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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문을 해석하는 방향은 반드시 실질조건문의 방식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언어의 조건문과의 차이를 설명하는데에 반드시 Grice의 conversational implicature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조건문을 조건부확률로 설명하는 Ramsey's test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우선 conversational implicature에 대한 비판을 보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0. A→B ∨ B→A
 실질조건문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언제나 참입니다. 왜냐면 A가 참이면 뒷부분의 선언지가 참이 되고, A가 거짓이면 앞부분의 선언지에 나타난 조건문의 전건이 거짓이기 때문에 A→B는 참이게 되므로 따라서 위의 문장은 A와 B가 어떤 문장이든간에 항상 참이 됩니다. Grice의 conversational implicature는 선언지가 진리함수적(즉 A or B가 참이라는 말은 A와 B 중에서 적어도 하나 이상은 참이라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자연언어에서는 언제든지 위의 문장의 양 선언지가 거짓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령 A = I am right, B = you are right이면, 0의 문장은 if I am right, then you are right, or if you are right, then I am tight이 됩니다.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옳으면 나도 옳다는 문장입니다. 0은 실질조건문에 의해 항상 참인 문장이므로 이 문장은 언제나 참입니다. 제가 내년에 한국이 멸망한다고 말하고, '너'로 지칭되는 사람이 내년이 아니라 내후년에 한국이 멸망한다고 주장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 따라 내년에 한국이 망하면 내년에 망하지 않고 내후년에 망하거나 내년에 망하지 않고 내후년에 한국이 망하면 한국은 내년에 망한다는 문장이 형성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을 안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조건문을 받아들이면 참인 문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선언지는 진리함수적으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위의 논증을 받아들여서 implicature를 폐기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연언어 조건문 = 실질조건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서 조건문을 조건부확률로 이해하는 이론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1-0. 확률론의 공리들(kolmogorov axioms)
 이하의 내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률론의 공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Pr은 명제 혹은 문장들의 집합에서 [0,1]로 가는 함수입니다. Sent(L)이 모든 문장들의 집합이라면 Pr:Sent(L)->[0,1]이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확률론에서는 문장을 사건(event)로 해석합니다. 이 전통에 따라 문장(혹은 명제)와 사건을 구분해서 쓰지 않겠습니다. 이 함수에 대한 공리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0Pr(A)1
2. if A is tautology, Pr(A)=1
3. Pr(AvB)=Pr(A)+Pr(B) if A and B are mutually exclusive(i.e., ~(A&B))

1.어떤 사건에 대한 확률은 항상 0에서 1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 동어반복/논리적으로 참(tautology)인 문장은 항상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가령 A v ~A나 A->A같은 문장들은 확률이 1입니다.
3. A와 B가 mutually exclusive라는 말은 A&B가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A&B)입니다. A와 B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명제와 집합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A와 B를 집합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두 집합이 서로 교집합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조건부확률은 확률함수 Pr이 주어져있을 때 정의되는데, Pr이 정의되어있을 때 Pr(B,A)라는 이항함수는 Pr(B/A)로 표기되고 Pr(A&B)/Pr(B)로 정의됩니다. Pr(B/A)는 조건부확률함수입니다. A가 일어났을 때 B가 일어날 확률을 뜻합니다. A가 일어났을 때 B가 일어날 확률을  Pr(B)/Pr(A)로 하지 않느냐를 물을 수 있습니다만, B가 일어날 확률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와 A가 일어나는 확률, B가 일어나지만 ~A가 일어나는 확률. 따라서 Pr(B)/Pr(A)로 조건부확률을 정의하면 분자에는 A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도 동시에 포함되기 때문에 올바른 정의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A가 일어났을 때 B가 일어날 확률은 Pr(A&B)/Pr(A)로 정의합시다. A와 B를 집합으로 생각하고 밴다이어그램을 그려보면 이해가 빠르실겁니다.

 이때 주목해야할 것은 조건부확률함수를 통해 새로운 확률함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기존의 확률함수에서 Pr(A)가 0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A를 고정시켰을 때 PrA라는 함수를 PrA(B)=Pr(B,A)=Pr(B/A)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A가 발생했다고 가정할 때 만들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확률함수입니다. 해보시면 알겠지만 PrA는 확률의 세 가지 공리를 모두 만족합니다.

 위의 공리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정리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임의의 확률함수 Pr에 대해서

a. Pr(~A)=1-Pr(A)
b. A와 B가 논리적 동치라면 Pr(A)=Pr(B)
c. Pr(AvB)=Pr(A)+Pr(B)-Pr(A&B)
d. A→B가 논리적 참이라면 Pr(A)≤Pr(B)

a. 2에 의해 Av~A는 논리적 진리이므로 1=Pr(Av~A)이고 A와 ~A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으므로(mutually exclusive) 3에 의해 1=Pr(Av~A)=Pr(A)+Pr(~A)입니다. 따라서 Pr(~A)=1-Pr(A)입니다.
 a에 의해서 논리적 모순인 문장들은 확률이 0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제논리적으로 A가 논리적 모순이라면, ~A는 논리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Pr(~A)=1-Pr(A)=1이므로 Pr(A)=0입니다. 따라서 불가능한 사건(논리적 모순)을 지칭하는 확률값은 0이고 항상 발생하는 사건을 지칭하는 확률값은 1입니다.

b. A와 B가 논리적 동치라면 A<->B는 논리적 참입니다. 따라서 A와 ~B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또한 Av~B도 논리적 참입니다(A이거나 A가 아닌데, A가 아니라면 ~A인데 ~A는 ~B와 동치이므로 Av~B). 따라서 3에 의해서 1=Pr(Av~B)=Pr(A)+Pr(~B)이고 a에 의해 Pr(~B)=1-Pr(B)입니다. 따라서 1=Pr(A)+1-Pr(B)이고 Pr(A)=Pr(B)입니다.

c. 우리가 아는 건 A와 B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을 때 Pr(AvB)=Pr(A)+Pr(B)라는 것입니다. 이를 활용하여 증명합니다. AvB를 쪼개서 생각합시다. 집합으로 생각하면 v를 합집합기호로 생각해서 서로 겹치는 부분을 따로 떼내어 생각합시다. 즉, AvB를 (A&~B v A&B) v (~A&B v A&B)로 쪼갭시다. 겹치는 부분을 제외하면 (A&~B v A&B) v ~A&B입니다(AvB와 동치). 선언지의 각각의 부분은 서로 동시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Pr(AvB)=Pr( ((A&~B) v (A&B)) v (~A&B) )이고, 이제 3을 이용하면
Pr(AvB)=Pr(A&~B v A&B)+Pr(~A&B)입니다. A&~B v A&B는 A와 동치이므로 b에 의해
Pr(AvB)=Pr(A)+Pr(~A&B)입니다. 3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 Pr(B)의 식을 Pr(~A&B)를 활용해서 만들어봅시다.
논리적 동치를 활용하면 3에 의해 Pr(B)=Pr(~A&B)+Pr(A&B)이므로 위의 식에 대입하면
Pr(AvB)=Pr(A)+Pr(B)-Pr(A&B)가 됩니다.

d. A→B가 논리적 참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1=Pr(A→B)=Pr(~AvB)=Pr(~A)+Pr(B)-Pr(~A&B)입니다. 식을 정리하면 1= 1-Pr(A)+Pr(B)-Pr(~A&B)이 되고 Pr(A)=Pr(B)-Pr(~A&B)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Pr(B)=Pr(A)+Pr(~A&B)입니다. 1에 의해 확률값은 0과 1사이에 있으므로 Pr(A)≤Pr(B)입니다.

 이 결과들을 가지고 이제 자연언어의 조건문을 조건부확률로 생각해봅시다.

1-1. Ramsey's test
 Ramsey's test는 조건문을 받아들이냐 마냐하는 문제는 기존의 믿음체계에 조건문의 전건을 추가했을 때 후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다는 테제입니다. 이 테제를 해석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이번 글에서는 Stalnaker's Hypothesis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2. Stalnaker's Hypothesis

Stalnaker's Hypothesis :  Pr(if A then B)=Pr(A→B)=Pr(B/A)

 말하자면, 조건문이 얼마나 받아들일만한가는 A를 참으로 받아들였을 때 B가 얼마나 그럴듯하냐에 따라 달린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A를 믿음체계 속에 받아들였을 때 다른 믿음들과 A로부터 B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조건문의 신뢰도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가령 박근혜가 탄핵되지 않았다면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자유한국당에서 나왔을 것이다는 문장을 봅시다. 이 문장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박근혜가 탄핵되지 않았다고 할 때, 여러가지 정황들과 사실들, 믿음들로부터 19대 대통령이 자유한국당에서 나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아주 다양한 변수들이 있고 그 변수들을 모두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실질적 측정은 어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조건문에 대한 이런 해석은 가상법적 조건문을 설명하기에 좋습니다. 가령, '내가 너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내가 너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나의 성격과 여러 믿음들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만). 물론 가상법 외에도 예측 등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북한이 북미회담에서 트럼프를 쏴죽인다면 북미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는 문장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의 여러 발언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문장은 상당히 높은 기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의 여러 예측들도 Ramsey's test를 사용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던 가령 '내일은 비가 오더라도 많이 오지는 않겠습니다'는 문장을 뜯어보면, 내일 비가 온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비슷한 기상상황이었던 날들 중에서 비가 많이 오지 않은 날들이 많고 또 여러 정황들을 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해될 수 있습니다.

1-3. Lewis' triviality result

Lewis's triviality result
임의의 확률함수 Pr에 대해서 Pr(A→B)=Pr(B/A)가 성립할 때 Pr(B/A)=Pr(B)또한 성립한다

 조건문의 신뢰도 혹은 참일 확률을 조건부확률로 이해하는 것은 사용하기 매우 좋아보입니다만 루이스에 의해 이런 이해방식은 논리적 모순을 가지는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Pr(B/A)=Pr(B)라면 조건부확률과 절대적확률의 값이 같아지는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Pr(A&B)/Pr(A)=Pr(B)이므로 Pr(A&B)=Pr(A)Pr(B)인데 확률적으로는 A와 B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을 때만 성립합니다. 집합으로 보면 A가 B의 부분집합이라고 하면 Pr(A&B)=Pr(A)이게 되므로 Pr(A)=Pr(A)Pr(B)가 되므로 B가 무엇이든지간에 Pr(B)=1이 됩니다. 따라서 Pr(B)를 1이 아닌 값으로 잡으면 모순을 낳게 되므로 조건문의 신뢰도를 조건부확률로 이해하는 방식은 불가합니다. 이제 증명해봅시다.

 우선 Pr(B/A)를 PrA(B)로 적읍시다. PrA(B)는 이제 A가 참일 때 B가 참일 확률입니다. 혹은 A가 발생했을 때 B가 발생할 확률입니다. 루이스의 정리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보조정리 하나가 필요합니다.

(lemma) 임의의 확률함수에 대해 Pr(A
→B)=Pr(B/A)가 성립할 때 Pr((AB)/C)=Pr(B/A&C)도 성립한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 명제는 타당해보입니다. 왜냐면 Pr(A→B/C)는 C가 일어났을 때 A→B가 일어날 확률입니다. 그러나 Pr(A→B)를 Pr(B/A)로 본다면 이는 A가 일어났을 때 B가 일어날 확률입니다. 우리는 이미 C를 가지고 있는데 A도 가정했으므로 결국 Pr(A→B/C)는 C와 A를 가정했을 때 B가 일어날 확률과 같습니다. 이는 Pr(B/A&C)로 적을 수 있습니다. 이제 증명을 해봅시다.

Pr(A→B/C)
=PrC(A→B)
=PrC(B/A) (가정에 의해)
=PrC(B&A)/PrC(A)  (조건부확률의 정의에 의해)
=Pr(B&A/C) / Pr(A/C)   (PrC의 정의에 의해)
=Pr(B&A&C)/Pr(C)  / Pr(A&C)/Pr(C)
=Pr(B&A&C)/Pr(A&C)   (Pr(C)약분)
=Pr(B/A&C)    ( 조건부확률함수의 정의)

이 보조정리를 가지고 드디어 lewis triviality result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Lewis's triviality result
임의의 확률함수 Pr에 대해서 Pr(A→B)=Pr(B/A)가 성립할 때 Pr(B/A)=Pr(B)또한 성립한다

Pr(A→B)
=Pr(B& (A→B))+Pr(~B&(A→B))      ( A→B는(B& (A→B)) v (~B&(A→B))와 동치 )
=Pr(A→B/B)Pr(B)+Pr(A→B/~B)Pr(~B)     (조건부확률의 정의에 의해)
=Pr(B/A&B)Pr(B)+Pr(B/A&~B)Pr(~B)      (보조정리에 의해)
=1x Pr(B)+ 0 x Pr(~B)
=Pr(B)

 마지막에서 둘째 문장은 다음과 같이 증명됩니다.
Pr(B/A&B)=Pr(B&A&B)/Pr(A&B)이고 B&A&B는 A&B와 논리적 동치이므로 분자와 분모가 값이 같아서 1이 됩니다.
Pr(B/A&~B)=Pr(B&A&~B)/Pr(~B)이고 B&A&~B는 논리적 모순이므로 확률값이 항상 0입니다.

 따라서 stalnaker's hypothesis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Ramsey's test에 대한 해석은 stalnaker's hypothesis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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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에서는 자연언어의 조건문과 실질조건문의 용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글에서는 실질조건문이 왜 어색하게 들리는가에 대한 이론을 볼 것입니다. implicature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할 것인데 이 개념을 사용했던 Grice나 Jackson은 실질조건문과 (직설법적) 자연언어 조건문이 서로 진리값이 항상 동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앞선 글에서 보다시피 뭔가 어색하게 들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해서 왜 어색함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자연언어 조건문과 실질조건문이 진리값이 동일하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볼 수 있습니다.

0-1. 자연언어 조건문 if A then B와 not A or B는 서로 진리값이 동일하다.
우선 if A then B를 (직설법적) 자연언어 조건문이라고 하고 이 문장이 성립한다고 합시다. 배중률을 받아들인다면 not A or A가 참입니다. A가 참인 경우에는 if A then B에서 B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가 참인 경우에는 B가 항상 참입니다. 따라서 not A 이거나 B입니다.
 역으로 not A or B가 성립한다고 합시다. 이때 A가 성립한다고 하면, not A는 거짓이므로 'or'가 진리함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B가 성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A를 가정하면 B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즉, if A then B입니다.

0-2. if A then B와 실질조건문 A→B는 진리값이 동일하다(혹은 자연언어적 조건문은 실질조건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명제논리에서 ~A v B와 A→B는 서로 논리적 동치이기 때문에 두 조건문이 서로 진리함수적으로 같다는 말은 결국 if A then B와 ~A v B가 진리값에서 항상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0-1에 의해서 if A then B는 not A or B와 진리값이 동일하고, or가 진리함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A v B와 not A or B는 서로 진리값이 동일합니다. 따라서 0-2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언어 조건문과 실질조건문이 진리치가 동일하다면 왜 일상적으로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사례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존재합니다.

1. Implicature
 implicature는 함축이기는 하지만 (logical) implication과는 달리 조건문으로 이어지는 두 명제 사이에 일종의 약한 함축만이 존재하는 경우를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가령 어떤 물건을 사는데 "이거 너무 비싸요"라고 말한다면 이 문장은 이 물건값을 깎아달라는 말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고전논리학적으로는 두 문장 사이에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왜 실질조건문과 자연언어의 조건문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이론이 존재합니다.

1-1. Conversational Implicature(Grice)
 말하자면 일상대화에서는 대화맥락 사이에 숨겨진 어떤 전제들이나 목적이나 여러 상황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문장들이 생략되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대개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대개 대화상대자들 사이에서는 몇 가지 대화의 준칙(maxims of conversation)이 존재합니다.

(a)quality
(b)quantity
(c)relevance

 (a)는 대화를 할 때는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b)는 자신이 아는 한에서 최대한의 것을 이야기해야한다는 것이고 (c)는 대화상황과 관련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즉 관련되지 않은 것은 배제).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성립하지 않아도 우리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나중에 가서 그건 올바른 대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난민문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난민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받았을 때 그에 대해서 난민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난민문제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사람들의 의견에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그건 내가 원하던 대화가 아니었다"고 할 것입니다.
 (b)에 대해서는 많은 말장난이 존재합니다. 가령 "(진실은 아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수많은 사례들이 이에 속합니다. 나무위키에 수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https://namu.wiki/w/%EA%B1%B0%EC%A7%93%EB%A7%90%EC%9D%80%20%ED%95%98%EC%A7%80%20%EC%95%8A%EB%8A%94%EB%8B%A4


 가령 친구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 놀러오는데 자기가 아는 음식점이 없어서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맛집을 물어봤다고 합시다. 근데 그 음식점은 토요일에는 닫는 곳이었고 그 친구는 그걸 알았다고 합시다. 친구의 조언을 받은 친구는 근처온 친구와 토요일에 갔다고 합시다. 사실을 알고나면 매우 화가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상대화에서는 '대화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이 아는 사실을 최대한 서술하라'는 원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대화의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당한 사람은 뒤돌아보고 그건 올바른 대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c) 교수님과 시험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때 교수님께 "그 학생은 공부잘해요?"라고 말했을 때 교수가 "그 학생 머리는 좋은데.."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아 머리는 좋은데 성적은 잘 안나오는구나"하고 이해할 겁니다. 왜냐면 대화맥락과 관련없는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학생 머리는 좋은데.."에서 "인성은 별로야"라든가 "수업시간에 잠을 많이 자"를 의도하였다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논리학과 관련해서는 ~AㅑA→B의 어색함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전논리에서는 A→B와 ~A v B는 논리적 동치이고 따라서 ~Aㅑ~A v B를 분석해보는 것으로 어색함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b)준칙에 어긋납니다. ~A가 주장되었으면, ~A v B 중에 더 강한 주장은 ~A이고 따라서 ~A임에도~Av B를 결론으로 내세우는 것은 적은 정보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B라는 쓸데없는 주장을 더한 겁니다. 더욱이 B가 A와 전혀 관련없는 주장이면 더욱 이상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BㅑAB 역시 Bㅑ~A v B이고 B에서 쓸모없는 주장인 ~A를 더하여 B를 주장하지 않고 ~A v B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것이 conversational implicature에 따른 설명입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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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논리학에서 실질조건문은 자연언어의 조건문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1. 자연언어 조건문≠실질조건문

(i)~A→(A→B)  (ii)B→(A→B)  (iii)(A→B) v (B→C) (iv)(A→B)→((A&C)→B)
(v)(A→B)→(~B→~A)

 위 명제들은 모두 고전논리에서 논리적 참인 문장들입니다. 각각이 자연언어의 직설법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i) A=나는 미국인이다 B= 1+1은 2가 아니다
저는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i)에 의해 내가 미국인이라면 1+1≠2이라는 말이 참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인이었더라도 수학적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보다 더 정확히는, 제가 미국인이라는 가정이 어떻게 1+1≠2와 연관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일상언어에서는 결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는 논증입니다. (i)를
~A
-----
A→B
 로 본다면 위의 사례에서 A가 거짓이기 때문에 B가 무엇이든 A→B는 항상 참이 됩니다. 실질조건문에 대한 이해에서 조건문의 전건이 거짓이면 조건문을 참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A와 관련이 없는 임의의 문장 B를 (i)의 형태에서는 항상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밝히겠지만, 일상적인 조건문에서는 전건과 후건이 긴밀히 연관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건과 후건이 전혀 연관이 없는 경우에는 우리가 그 조건문을 매우 어색하게 받아들이거나 거짓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ii)도 동일합니다.

(ii)실질조건문의 정의상 후건이 참이면 전건이 무엇이든지간에 항상 조건문이 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논증도 가능합니다.
2는 가장 작은 소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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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황제가 살아있다면, 2는 가장 작은 소수이다

  매우 어색하게 들립니다. 네로황제가 살아있다는 명제와 2가 가장 작은 소수라는 명제 사이에 아무 연관성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iii) (A→B) v (B→C)
 안암동이 동대문구에 있다면 동대문구는 성북구보다 크거나 동대문구가 성북구보다 크다면 동대문구는 강원도보다 크다.

 고저논리에서 B는 참이거나 거짓인데, B가 참이면 선언의 앞부분이 참이고, B가 거짓이면 선언의 뒷부분이 참입니다. 실질조건문의 정의에 의해 그러합니다. 찾아본 결과 동대문구는 14.22 km^2, 성북구는 24.57 km^2의 크기를 지닙니다. 안암동은 1.32km^2입니다. 그래서 안암동이 동대문구에 있다해도 동대문구보다 성북구가 크므로 '안암동이 동대문구에 있다면 동대문구는 성북구보다 크다'는 명제는 거짓입니다. '동대문구가 성북구보다 크다면 동대문구는 강원도보다 크다'는 명제는 명백히 거짓이죠. 서울보다 강원도보다 3배가까이 넓기 때문에 성북구가 서울전체라고 해도 성북구가 강원도보다 클 수가 없죠. 자연언어의 조건문에서는 명백히 거짓이지만 실질조건문으로는 참인 사례가 이렇게 항상 존재합니다. A,B,C의 명제들의 연관성이나 인과관계에 상관없이 단순히 어떤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이유로 명제들을 분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iv)(A→B)→((A&C)→B)
 열심히 공부한다면 중간고사 성적을 잘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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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하고 중간고사 전에 휴학하면 중간고사 성적을 잘 받을 것이다

 전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결론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죠. 그러나 고전논리에서는 타당한 논증입니다. 역시 문제가 되는 이유는 C 때문입니다.  A,B와의 상관관계없이 C를 아무 명제로 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v)(A→B)→(~B→~A)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면, 비가 많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온다면, 오늘 오후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대우명제라고 볼수도 있고 후건부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저런 식을 받아들이면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매우 비직관적이죠. 이 경우, 자연언어에서는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면, 비가 많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와 '비가 많이 온다'는 문장을 참으로 동시에 만드는 경우를 확률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비가 오느냐 안오느냐는 어떤 기상조건이 주어졌을 때 비가 적게 수반되는 날들과 아닌 날들을 분모로 잡고 수반되는 날을 분자로 잡아서 확률을 계산한 것이고, 만약 그 확률이 높다면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면, 비가 많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는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확률에 의해 '비가 많이 왔다'도 참일 수 있죠. 그러나 그렇다고 '오늘 오후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실질조건문은 자연언어에서의 조건문을 이해하는 방식을 모두 무시하고 참 거짓의 문제로만 환원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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