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2권) 6장 연민 : 비극적 곤경들

 

1. 감정과 윤리적 규범

 

 “감정 그 자체는 개인적인 윤리적 숙고뿐만 아니라 공적인 윤리적 숙고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하는가? 사람의 의지와 규칙을 준수할 수 있는 능력보다 감정에 의존해도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 사회질서는 단지 공정한 규칙 및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일군의 제도를 창조하기보다는 감정을 함양하고 그것에 호소해야 할까?(547)”

 

 이를 위해서 저자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탐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연민이 사적 삶뿐만 아니라 공적 삶에서도 합리적인 숙고와 바람직한 행동을 위한 훌륭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548). 우선, 연민(compassion)은 잠정적으로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 의해 초래되는 감정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이런 정의 하에서 연민은 pity, 공감(empathy), 동정(sympathy)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일상적으로 pity는 대상이 되는 자에 대해서, 관찰자가 생색을 내거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pity를 보통 번역되는 ‘연민’으로 번역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 다른 감정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감/감정이입(empathy)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가치중립적으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정의할 것인데, 이에 따르면 공감과 연민은 같은 말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동정(측은한 생각이 든다)과 연민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구분을 제시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용례에 따르면 동정보다 연민의 경우 고통의 대상이나 관찰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가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상에서 쓰이는 감정들과 위의 정의에 의해 주어진 연민이라는 감정을 분리시켜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기초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2에서는 연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른 감정들과 다르며, 연민을 다룬 철학자들은 연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연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 연민의 인지적 구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편의상 Ar)에 따르면 연민이란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해 느끼는 고통스런 감정”이라고 말하고, 여기서의 불행이란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상에게 닥친 것으로 믿는 불행”을 의미한다. Ar은 이 감정이 발동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인지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1) 대상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믿음 혹은 평가

(2) 대상이 해당되는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3) 대상에게 고통이 일어나게 된 가능성만큼 관찰자 역시 그런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저자는 연민을 우선은 타인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하였다(이런 정의는 나중에 좀더 구체화되고 엄밀하게 제시된다). 이것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는 Ar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 가지 모두 직관적임을 보일 것이나, 저자는 결과적으로 (3)은 연민이라는 감정과는 독립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른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연민의 정의를 완전하게 내린다.

우선, 위의 조건을 만족하는 연민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필록테테스는 착한 사람으로 훌륭한 병사였다. 그리스군 편에 가담해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러 가던 길에 그는 끔찍한 불행을 만난다. 순전히 우연으로 렘노스 섬에서 성역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벌로 성소를 지키는 뱀에게 발을 물린다. 그의 발에서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지독한 고통으로 그가 퍼붓는 저주는 다른 병사들의 종교 의식을 망쳐버린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섬에 홀로 남겨두는데, 절름발이가 된 그에게는 활과 화살 말고는 어떤 자원도 없으며 또한 식량이기도 한 동물 말고는 친구 하나 없다.

10년 후 그들이 그를 데리러 돌아온다. 그의 활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정군 지도자들은 필록테테스를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곤경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를 속여 데리고 갈 궁리만 한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의 합창단은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심지어 그를 보기도 전에 그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상상한다. 그리고 지휘관들의 냉담함에 대한 항의에 들어간다.

 

 [(합창단)나는 그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구나. 돌보아 줄 사람 하나 없이 다정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늘 혼자서 몹쓸 병을 앓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없을 때마다 당황할 것이란 생각을 하면.. 아아, 신들의 계략이여! 아아,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 불쌍한 인간 종족이여!]

 

 [(필록테테스가 지휘관인 네옵톨레모스에게 하는 말)그대가 나를 구해주시고, 그대가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네옵톨레모스)···나는 마음속으로 저 사람에게 깊은 동정을 느끼네(deinos oiktos)]

 

 이제부터 좀더 세밀하게 위의 인지적 조건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1)에 대해서 “어떤 것이 대상에게 심각한 고통인가”를 묻는다면 단순하게 “크기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심각함”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불행이 크기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우선 Ar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죽음, 신체적 폭행, 학대, 노화, 질병, 굶주림, 친구의 결여, 친구와의 이별, 육체적 유약함, 몰골이 흉해지는 것,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는 것, 기대했던 바가 뒤집어지는 것, 좋은 전망의 부재.”

 

 현대에 와서 클라크라는 학자는 그 크기를 만족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파트너의 부정, 사랑하는 이의 죽음, 질병, 신체적·정신적 장애, 부상, 트라우마, 성폭력, 신체적 학대, 범죄의 희생양, 재난의 희생자, 홈리스가 되는 것, 불임, 이혼, 차별받는 것,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 역할에 대한 압박감, 원치 않는 임신, 매력 없는 외모, 교통사고, 차 고장, 집문제, 무심한 부모, 경쟁력 상실, 우울증, 두려움, 공적 모욕, 피곤, 악평, 지루함, 짜증나는 일 등”

 

 Ar과 클라크가 기술한 ‘크기가 있는 고통’은 공유하는 것이 많지만 같은 층위는 아니다. 이것으로 볼 때 크기가 있는 고통 즉 불행을 “골칫거리가 당대의 지배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불행은 사회마다 기준이 다르고, 또한 삶의 양식의 변화 역시 기준을 달리하는데 기여를 한다. 그러나 Ar이나 클라크 모두 그 재난들이 (당대의) 핵심적인 재난임은 모두가 일치를 보고 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러나 크기에 대한 평가가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연민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아니기도 하다. 가령 다음의 두 사례를 살펴보자.

 

 “로마 귀족인 Q는 아프리카에서 공작의 혓바닥을 배로 실어 보냈지만 중간에 중단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그 결과 그날 저녁 만찬이 완전 재앙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는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친구인 세네카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세네카는 웃는다.”

 

“인도의 한 시골 부락에 사는 여성 R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데다 교육도 초등학교 1학년 이상은 마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불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건강하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리 없으며 교육의 혜택과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람직한 여성에 대한 해당 문화의 견해를 너무나 철저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훌륭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으며 여성으로서는 의당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녀 및 그녀와 같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해당 주의 지방 개발청 사람들은 깊이 감동해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재난의 크기는 대상이 생각하는 것과 관찰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며, 연민을 발생시키는 인지적 조건은 관찰자가 인지하는 고통의 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관찰자가 느끼는 인간애적인 괴로움은 고통받는 자의 감정의 반영과는 무관하다.

 

 흥미로운 점은, 관찰자는 R에 대해서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가, 좋은 삶인가에 대한 관념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연민의 상황에는 잘사는 것과 관련된 관찰자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크기와는 무관한 이야기이지만, 후에 행복주의라는 개념과 이것이 연관이 있음을 밝힐 것이다.

 

 둘째(2)로 “대상이 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은 대상의 고통에 대한 응당/부당에 대한 판단이 개입되어 있고, 연민의 경우 그런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이 부당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인식이나 행위와 무관하게 어떤 (피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주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비행기 추락사고, 범죄를 당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잘못으로 잘못된 상황에 처한 경우에도 연민은 가능하다. 말하자면 대상이 받는 고통이 잘못에 비해 과중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부모는 다 큰 아이가 빠지게 된 곤궁에 대해 연민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아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두 단계로 나누어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아이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청소년이라는 조건ㅡ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ㅡ은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맹목성과 함께 일정한 유형의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종류의 잘못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아이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청소년이 되는 것에 따르는 곤경의 일부처럼 보이지 않는 실수에 대해서는 그와 똑같은 방식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10대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낄 가능성이 크지만, 개를 고문하고 죽인 10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후자는 어떤 종류의 ‘불운’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16살이 되는 불운의 일부인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사회학자인 랜디스는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동안 탁원한 연민의 수사학자로 미국인들로 하여금 경제적 재앙을 홍수나 모래 폭풍처럼 본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밀어닥친 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대공황(Depression)’이라는 용어조차 대가다운 솜씨로 만들어낸 말로, 당시의 경제 상황을 허리케인(열대성 저기압depression) 그리고 이어진 갑작스런 홍수와 연결시켰다.”

 

 엄밀하게 후자는 위의 사례에 맞지 않지만, 루스벨트에게 대공황의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은 충분히 그것이 루스벨트가 예상할 수 없었을 성질이고 그가 그것을 초래했더라도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사례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즉, 둘째 인지적 조건은 대상의 행동이나 의지를 넘어서 책임질 수 없는 범위로 일이 커지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런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앞의 필록테테스의 사례가 그렇고,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게 운명지어져버린 오이디푸스의 사례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청중들은 연민을 느끼도록 요구받는다. 클라크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불운이란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힘의 희생양이 되는 것,” “자초하는 바람에 나타나는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닌 결과.”

 

 (1)에서 보았듯이 (2) 역시 사회에 따라 어떤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적 조건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필연적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사회에 따라 인식기준이 다르다. 가령, 저자가 기술하기에는 미국의 사람들은 여성이 성범죄를 당하는 것이나, 가난한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위험한 장소를 혼자 걷는 등 여성이 그것을 ‘자초했다’는 인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난 역시 그러하다. 가난은 곤경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면 해소되는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남용은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닥친 일로 간주하기도 해서, 그런 대상들에게는 연민을 품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같은 사회 내에서도 다른 공동체들은 위의 상황에 대해 피해자의 행동과는 무관하다고 보고 연민을 느낄 것이다. 즉, 어떤 사건이 행동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필연적인 불운인가에 대해서는 사회, 공동체마다 다를 수 있다. (2)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정리하자면 사람들의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무엇이 부당한 고통인가에 대해서는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Ar이 세우는 마지막 조건(3)은 대상에 대해서 관찰자가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인지하는 조건이다. Ar은 이에 대해 연민이란 “자기

자신이, 즉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과 관련되어 있다. 위의 필록테테스의 사례에서도 그는 독자들과, 지휘관에게 이것은 자신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대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경우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봄으로써 타인에 대한 연민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설명할 수 있다.

 

 “어째서 국왕들은 신하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없는가? 그들 자신은 절대 신하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자들은 가난뱅이들에게 그다지도 냉혹한가? 그들은 가난뱅이가 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귀족은 평민에게 그토록 큰 경멸을 주는가? 귀족은 결코 평민이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어느 누구도 내일은 오늘 자기가 도와주는 사람 같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제자는 저 영광의 높은 곳으로부터 불행한 자들의 고뇌를, 그리고 불쌍한 자들의 노고를 내려다보는 습관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가 그들을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들을 동정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기대는 하지마라. 그처럼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이 자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또 그들의 모든 재앙이 다 자기 발밑에 있다는 것, 예측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수많은 사건이 당장이라도 그를 그곳에 묻히게 할 수도 있음을 그에게 잘 이해시켜라. 그에게 출생에 대해서도, 건강에 대해서나 재산에 대해서도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않게 가르치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 “그들과 비슷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획일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사회나 가족의 가르침, 문화적 차이가 크다면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배심원단들의 배경에 따라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말하는 상황에 대해서 연민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계급, 종교, 인종, 젠더, 성적 취향 등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럼에도 정리하자면 타인과 나의 어떤 공통성(community)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의 고통이 사실로 다가온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들어가 있는 의미 또한 파악할 수 있을 때로 한정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이 아니라 무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령 스피노자는 동물과 인간의 공통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을 고문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이해(3)는 연민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저자의 의견(행복주의)을 살펴보자.

 

 저자는 우선 초월적인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권한다. 가령 제우스가 사르페돈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과 연민을 느끼는 경우, 기독교의 신이 인간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경우, 부처가 중생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경우를 위의 문제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가? Ar은 연민을 “자기 자신이, 즉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Ar이라면 초월적인 존재는 인간과 같은 존재(필멸자)가 될 수 없긴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이 겪으리라고 예상되는 불행 때문에 연민을 느낀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보다는 다른 이해를 가져볼 것을 권한다.

 

 저자는 (3)의 조건이 행복주의적 판단과의 연관성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행복주의적 판단이란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구상과 관련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로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 좋은 삶에 대한 가치기준들과 그에 관련한 계획, 목표들과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가령 기독교의 신의 경우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목표와 계획은 인간을 전제해야 하고, 또한 그들이 겪는 불행이 자신의 ‘좋은 목표’나 ‘좋은 삶’에 대한 판단과 매우 벗어나있기 때문에 연민을 겪게 되는 것이다. 부처의 관점에서도 그렇다(특히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아직 그렇지 못한 스님들에 대해서 연민을 품는 경우). 말하자면 행복주의적 판단이란 그 대상이 내 삶의 관심권 안에 있고, 그들의 상태가 내가 그리는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생물이 될 수 없음에도 동물의 굶주림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전혀 경험하지 못했고 그러지 못할 차원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행복주의와 Ar의 (3)의 조건에 대해서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현재 존재하는 아이의 목표와 다른 사람(심지어 멀리 있는 타자들)은 아이 자신이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ㅡ이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의 중요한 일부라는 행복주의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다리로 이어주는 건축물의 일부이다. 인간이 잘사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구비한 관찰자는 사람들이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굶주림, 장애, 질병, 예속에 시달리는 세계를 보게 된다. 그는 식량 같은 재산, 건강, 시민권, 자유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자신이 그러한 재산이 안정적으로 보장된 안전하고 특권적인 사람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지는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그는 거지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생각을 외부로 향하도록 이끌어 재산과 재원의 분배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 배치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최악의 사람들ㅡ가난한 사람들,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 여성들, 하인들ㅡ의 운명이 최대한 좋은 사회를 원하게 될 것이다.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통해 자기이익 자체는 사회의 바닥을 높이는 원칙을 선택하는 것을 촉진한다.”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저자는 연민에는 세 가지 연민의 인지적 구조가 있다고 말한다.

 

(1)크기에 대한 판단(심각하게 나쁜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났다)

(2)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사람이 이 고통을 자초한 것이 아니다)

(3)행복주의적 판단(이 사람 또는 생명체는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의 중요한 요소, 목적으로 그에게 좋은 일을 촉진해야 한다)

 

 또한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은 위의 사례와 같이 행복주의적 판단을 형성하기 위한 인식적 보조물이라고 한다.

 

3. 감정이입과 연민

 

 저자는 감정이입이 연민을 함축하지도 않고, 연민이 감정이입을 함축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 들었던 예시에서, 어떤 사디스트는 타인을 고문할 때에 상대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 고통에 이입함으로써 오히려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이때 그 고문자는 자신이 고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곤경에 처한 범죄자의 행위에 대해 경험적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연민을 낳지는 않는다. 또한 아침마당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할지라도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기획하는 행복한 삶과 동떨어졌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복주의적 판단이 결여되어있다. 따라서 감정이입이 연민을 항상 함축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연민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감정이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으로 감정이입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령 우리는 결코 고등생명체처럼 인지능력을 결여한 동물이 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 즉 재구성이 불가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ㅡ이는 생명체에 대해서 어떠해야 한다는 행복주의적 판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ㅡ. 전지전능한 신 역시 그렇다. 전지하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에게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모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 혹은,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가령 일상에서 옛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럼에도 감정이입과 연민 사이의 모종의 연관은 있다. 2의 사례에서 보았지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인 행복주의적 판단을 정확히 내리는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도 타인에 대해 연민을 느낄 때 감정이입이 동반된다는 심리학 실험들도 존재한다(일상적인 직관도 그러한듯하다).

 

 4. 연민과 이타주의 5. 연민의 장애물

 

종종 연민은 자선행위와 연관되기도 하는데, 위의 행복주의적 판단과 연관지어 본다면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이상적인 삶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방해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이것들은 수치심이나, 질투, 혐오에 근거한다.

 

ex)남성은 전지전능해야한다/하다는 남성관으로부터 여성적인 것들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서 여성과 약자에 대해서 연민을 느껴도 수치심을 느껴 돕지 않는 경우

 

ex) 자신의 고통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타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질투하는 경우

 

ex)나치세력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

 

6. 연민과 비극

 

 비극 작품들은 우리가 겪지 못한 상황들에 대해서 행복주의적 관점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고, 여러 상황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작품들은 연민 그리고 그에 관련한 이타적인 행동들, 도덕적 규범과 연관지을 수 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는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지만 최종적으로, 1에서 제기된 문제에서 보자면 제도에 감정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연민 그리고 보다 더 큰 관점에서 바람직한 감정을 가질 때에야 타인의 불행과 행복이 자신의 목표와 행복을 달성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복주의적 관점에서 행동할 때 롤즈의 무지의 베일의 사례처럼 더 합리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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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한 윤리학 발제입니다. 책이 1,2,3권으로 나뉘어있는데 1권을 빼고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후반부를 읽을 때 집중력이 많이 날아가서 그런지 후반부는 정리를 잘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에 대해 분석적으로 서술해나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2권은 주로 연민을 다루지만, 1권과 3권은 주제가 다릅니다. 모두 감정에 관한 것으로, 나중에 스스로를 분석하기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조금씩 읽어볼 의향은 있습니다. 그래도 철학책이다보니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컴팩트하게 잘 쓰여진 글이라 좋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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