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철사 기말 페이퍼

수업 2020. 3. 25. 13:45

<교육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 지식·진로·인격에 대하여> 

나는 교육, 특히 학교교육의 주된 역할이 지식·진로·인격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선정도서들을 보면서, 또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반추해보며 내가 받아온 교육들을 위의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 혹은 하지 못한 것, 따라서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언급할 것이다.

우선 교육이 지식·진로·인격과 관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지식전달로서의 교육은 실제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이 지식전달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진로와 인격이 학교현장과 관련되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선 진로에 대해서, 적어도 내가 겪어온 학교현장에서는 그것은 학교의 책임이 아니라 학생 개인의 책임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교사들은 진로는 자신이 정해야 하는 만큼 자신이 직접 여러 가지를 찾아보아야하고, 그에 따라 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학교와 관련되더라도, 교사들은 매우 소극적인 측면에서, 학생들이 잘하는 과목들에 대해서 그쪽 방면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나는 진로 역시 교육의 현장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대한민국 현실 안에서, 학생들이 직접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진로를 선택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의 경우에도 중학교 시절부터 수능을 보기까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길게는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이는 당면한 대학과 수능이라는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학생시절 진로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학생 입장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대학에 가기 위해 제도적으로 주어진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와 친구들은 따라서 우리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여건이 부족했다. ,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주말에 남는 시간에 진로를 고민하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주어진 적이 없었고, 학교 외에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이 학생 개개인들에게만 맡겨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이 진로에 대해 여러 가지를 탐구할 수 없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학교와 입시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학생이 진로를 고민할 수 없는 것에 학교의 책임이 크다면, 그것을 풀어나갈 실마리 역시 학교가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 정도의 약한 이유라도 학교에서 진로에 관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인격교육이 있다. 이는 우선 클래스를 살펴보자. 책에서 많은 아이들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또한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가 없거나 부모가 불법체류자이거나 약자에 속했다. 책의 서술들을 보면 명시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환경들이 생활태도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사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들만을 바라보고, 그 아이의 생활태도가 나쁘다는 것만 지적하거나 처벌하거나 분노를 표출하거나 할 뿐이다. , 책에서 서술되는 교사들은 아이들의 배후에 있는 환경들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조롱한다. 나는 책에서 나타나는 교사와 아이들과의 작용이 감정노동에 속하며, 교사도 사람이기에 화도 내고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학교차원에서는 그런 것들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소설뿐만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의 인격문제에 대해 그것은 학교교육의 영역이 아니며 가정교육에서 끝났어야한다고 말하면서 처벌을 하거나 경고를 주는데서 그친다. 나는 교사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학교교육제도가 인격을 교육으로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이 학교교육 안에서 해결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단순하다. 교육제도 안이 아니면 해결되기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격교육이 가능하다면, 학생의 입장에서 그것은 가정 혹은 학교에서 일어나야 한다. 만약 인격교육이 가정과 학교 모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높은 확률로 그것은 학생 스스로 인격을 깨쳐야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높은 확률로 인격이 무엇인지, 왜 도덕적인 규범들이나 사회적인 규범을 지켜야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을 것이다. 학교나 가정 외에 그런 것들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교육은 학교나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에서, 인격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교육이 가정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인격을 부모를 포함한 환경에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 학부모는 아이의 인격에 대해서 시간상 많은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부모의 인격적 성숙도가 아이의 인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적어도 임의로 태어난다는 관점에서는 매우 우연적인 요소에 인격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학교에서 학생들의 태도에 따라 처벌하고 매우 높은 강도에서 퇴학시키는 것은,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요소에 따라 학생을 대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성찰할 기회도 없이 살아온 바, 그런 삶의 관성에 따라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다르게 태어났으면 처벌받지 않을 우연성에 인격이라는 요소가 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가에서 가정에 인격교육과 관련된 제도를 만들거나, 그것이 학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정은 매우 사적인 공간으로 국가가 일부일처제라는 가족의 형태를 제외하면 규제할 수 있는 것이 크게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인격의 문제는 학교가 맡아야 하며, 교육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위와 같은 생각에 따르면, 나는 학교가 지식·진로·인격의 문제를 교육이라는 제도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로와 인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루었으므로, 당분간 나는 내가 느꼈던 지식교육의 문제와 관련된 학교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정확히 화재 감시원에서 공격하는 지점에서 현재의 지식교육 방식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주인공의 주장을 좀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교육은 실제현실이 아니라 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책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는 계량적으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기계적인 서술로만 쓰일 수는 없다. 역사는 현실에 대해서 말하며, (적어도 시간여행을 겪은 주인공에게는) 전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현실의 영역이 아닌 말의 영역에서, 기계적인 서술의 영역에서 배운다. 말하자면, 우리는 역사 안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그 생생한 현장과 체험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어떤 공감과 공유가 없이 말로만 배우는 것이다. 더 강한 주장으로 나는 학교교육의 모든 교육이 말에 대한 것이며, 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록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직접적인 현실들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함축을 지니고 어떤 것이었는지를 체험할 수 없다.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교과의 경우 적어도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이론을 가르치며, 그것들이 적용되는 사례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하고, 말로써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직접적인 현실이었고, 실제로 현실에 관한 것이 학생들의 직접적인 인생에 닿지 못하고 말로써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학교 안에서의 지식 문제에 대해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관념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 지식교육은 말로써 대상을 그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적으로 그것을 현실에 와 닿게 해야 한다. 가령 사회교과에서 나타나는 이론들이나 현상에 관련하여 가장 현실과 가까운 지점에서 어느 정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관련한 시청각자료를 사용하거나, 학생들이 직접 문제의식이 있는 주제를 뽑아서 정기적으로 글을 쓰거나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학생들이 학습내용이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곳에 가서 적용을 하거나, 답습하는 과제를 통해 현실로서 교육내용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로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학교가 직접 학생들이 탐구할 시간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만큼, 학교에서 내용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 진로에 관련된 수업이 정기적으로 열려야만 한다. 이미 서울권의 몇몇 학교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교육청에서 직접 진로와 관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진로상담을 전문적으로 하는 단체들을 교육청에서 고용해서 정기적으로 학생들에게 학교 안과 밖에서 여러 진로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학생들은 각기 분야의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실제 현장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그런 일이 없었고, 고등학교에서는 3년 동안 2-3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것이 배정된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관심 있는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연락할 수 있고, 가능하다면 지속적으로 단체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진로상담단체를 국가에서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클래스의 일부에서처럼 단순히 아이들이 무슨 과목을 잘하고 흥미를 보이는 것 같다고 그쪽으로 진로를 정해보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과 인격이 관련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나는 학교가 학생의 인격을 담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교사에 의한 개별적인 상담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측면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클래스에서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여러 학생의 퇴학까지 이르는 것은 그것을 학교 내에서 제대로 다루어줄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학생 간의 불화나, 교사와 학생 간의 문제가 있을 때 우선은 교내 전문상담교사를 통해 중개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사들 역시 정기적으로 전문상담교사를 통해서 학생들의 인격문제에 대한 세미나를 수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격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중고등학교에 윤리라는 새로운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목은 시험이 없으며, P/F로만 평가해야하고, 매 수업마다 윤리적인 이슈들(역지사지, 페미니즘, 가부장주의 등)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주로 학생의 토론이 있어야 하고, 교사는 그것들에 대해 학생들이 각각의 윤리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최소한 두 번의 글쓰기가 있어야 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윤리관 등을 교사와 상호작용하며 교정하거나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이것이 포괄적인 의미에서 학생들이 균형 있는 윤리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격을 다루는 과목의 문제는 예비교사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교육대나 사범대에는 예비교사의 인격을 다루는 과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수업 역시 P/F로 이루어지며 교양필수 혹은 전공필수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목에서는 3-5명 정도가 한 그룹을 이루어 한 학기를 이어나간다. 학생들과 교사의 갈등, 학생들과 학생들의 갈등, 교사와 학생의 역할, 인격이라는 주제로 매 시간 짧은 텍스트가 주어질 것이다. 수업시간 내에 예비교사들은 텍스트로부터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갈등의 경험에 대해서 같은 그룹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주어진 문제 상황에서 어떤 것이 가장 최선의 방안이며, 교사 개인과 제도가 더 보완할 수 있는 측면은 무엇인지를 나누어야 한다. 이를 통해 매주 수기를 작성하여 교수에게 제출하며, 교수는 학생들과 적어도 한 차례 수기를 기반으로 인격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위에 제시된 내용들이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선정도서들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thing before word라는 리얼리즘의 사조처럼, 나는 지식교육이 단순히 어떤 말들의 언어적 결합들을 습득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말들이 지시하는 것은 현실의 어떤 대상들이고, 따라서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배워야하는 것은 실제 현실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들의 부족한 진로고민 시간들이 학교의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의미 있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구체적으로는 수도권의 몇몇 학교에서 사업체들을 통해 시행되는 진로상담들이 제도화되고, 나아가서는 학생들이 직접 단체와 연결되어서 진로에 대해 탐구할 수 있었으면 했다.

인격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이 많았다. 내가 제시한 것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 같으나, 적어도 나는 인격의 문제가 단순히 가정사적인 문제나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실제적 폭력뿐만 아니라, 인격의 어긋남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폭력의 영역일텐데, 전자는 그를 해결하는 절차가 있는 반면, 후자는 단순히 개인의 성품문제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고 학교나 사회에서 어떻게 함양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격의 문제가 학교에서, 더 나아가서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맞벌이나 여러 환경으로 직접적으로 할 수 없는 가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가는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는 갈등을 조정하는 전문상담교사가 있어야하고, 학생들은 학교라는 정규적인 틀 안에서 인성교육을 배워야만 한다. 나는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균형적인 인격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으면 했다. 또한 클래스와 같이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교사들, 혹은 갈등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교사들을 위해서 교직수업에서 자신의 교육관을 나누고 학교 갈등의 문제를 예비교사들끼리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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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에 쓴 건데 지금 읽으면 너무 오글거립니다.



투영으로서의 교육에 대하여.hwp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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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철사 레포트

수업 2020. 3. 25. 13:44

독일전환기의 청소년운동

  

전환기의 독일청소년운동은 슈테글리츠의 김나지움의 도보여행 그룹인 반더포겔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반더포겔떠돌다, 유랑하다는 말과 의 합성으로 철새’ ‘떠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독일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으로 문명화와 이농현상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독일의 자연이 파괴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또한 제도적 권위주의가 동시에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산업화된 도시문화를 거부하고 농촌지역의 자연으로 귀속하고자 하는 반더포겔이 탄생했고, 그 양식이 발전되어 청소년운동이 전개되었다.

반더포겔을 기반으로 한 청소년운동은 문명화된 집·학교 등을 벗어나 시골에서 친자연적인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보통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휴일과 방학에 자연을 찾아 시골로 갔다고 한다. 그들은 그들 단체의 통일된 복장으로 시골로 도보여행을 하였다. 헛간에서 자기도 하고, 직접 음식을 해먹고, 시골에 들러 사람들에게 민요와 민속춤을 배우는 등 친자연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이들은 민요와 민속춤을 발굴하고 이를 보존하여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청소년운동단체(반더포겔)에 속한 이들은 대도시의 문명과 권위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서로 협동하여 정신적인 자유를 찾고자 했다. 이들은 도보여행마다 인간의 존재의미와 자연에 관한 토론을 하였고, 문명의 편리와 이성주의에 반하는 몸을 움직이는 단순한 생활을 하며 자연 안에서 우정·독립심·자유·자기결정 등 인간의 본유의 가치를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은 공산주의 등의 급진적인 사회혁명 대신에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저항으로 낭만주의를 택했다. 그들은 반문명운동과 자연과의 합일운동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사람이 없는 숲속으로 완전히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 집단들이었다.

이들은 최초의 청소년단체로, 과격하지도 않고 또래들이 결집하여 헛간에서 자고 자연생활을 하며 토론을 하고 민요를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적인 것, 민속적인 것에 대한, 민요에 대한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들은 이런 행위들을 통해 결속력을 다지고 자기들 세대에 대한 자기의식을 만들어나갔다. 일부 반더포겔 단체는 여학생의 입단을 허용함으로써 여학생들이 당시에는 가능하지 않던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이는 독일여성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것들에 저항하는 우리라는 의식을 가진 집단이었고, 이들은 당대의 어떤 계층(성인, 부모, 학교)과도 달랐고, 청소년이라는 독립적인 세대를 인식하게 하였고, 비로소 청소년의 세기를 열었다.


이민희, 한국과 독일의 청소년운동에 관한 비교사적 연구 - 청소년운동을 통한 21세기 한국사회 변혁의 가능성 모색, 청소년학연구, 18(2011) p. 349382.

 

사지원, 20세기 전환기의 독일 청소년운동 : 반 문명운동」『독일어문학, 56(2012) p. 201-221.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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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타자보고서

<타자로의 초월을 통한 새로운 윤리학적 모델의 제시를 중심으로>

 

 

레비나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 사건으로 가족을 상실하는 사건을 겪게 된다. 또한 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군인포로로 잡혀 눈앞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는 것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레비나스는 이 사건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며,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사유했다. 시간과 타자및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이 사건을 문제의식으로 뿌리 깊게 가지고 있으며, 철학이라는 틀 안에서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낸 기존의 서양철학 전반을 분석하고, 또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기반을 기존의 서양철학 전체로 지목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기존의 서양철학은 타자를 타자로 두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 안으로 환원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들 철학에서는 타자의 존재가 배제되었었다. 타자 배제는 나와는 다름을 무시하고 그들을 단일적으로 나의 관념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런 철학에 다양성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수적인 다양성일 뿐이며, 환원되지 않는, 환원할 수 없는 질적인 다양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철학은 근본에 있어 전체주의적이다. 이런 철학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의 존재와 가치를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주장하며, 따라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를 거부하고 말살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이런 전체주의 철학은 히틀러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철학적 토대였다. 유대인 민족은 독일에서 계속 해서 거주했던 전통 게르만 민족과는 분명 다른 민족이었다. 즉 유대인 민족은 독일에서 다름을 소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히틀러주의는 유대인민족의 다름이라는 속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게르만 민족의 절대성을 토대로 삼았다. 이는 기존의 서양철학이 답습했던 타자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타자를 말살하는 철학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레비나스는 이런 실존적인 비극을 인지하고, 또한 해결하고자 그의 철학적 사상을 전개하였다.

위에 언급했듯이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철학에 있어서 부재한 것은 바로 타자의 지위라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 전반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타자를 사유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 안의 타자혹은 (의 관념으)로 환원되는 타자였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타자의 지위를 재고할 것을 당부하며, 타자는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한한 낯선이로서의 지위를 지닌다고 역설한다. 그는 전체주의 철학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자를 그 무엇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타자의 지위를 온전히 타자만의 것으로 두는 새로운 철학을 제시한다.

시간과 타자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어떻게도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로서의 타자를 제시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낯선이로만 설정하지 않고, 더 강하게 타자에 대한 윤리학을 제시한다. 본론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에 있어 동등한 윤리적 지위가 있다고 인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나는 타자에게 빚진 바있으며, 타자는 나에게 과부, 나그네의 얼굴로 윤리적 명령을 하는 주인(어야 하), 이런 비대칭적 지위에서만이 진정한 윤리적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런 타자에 대한 인식이 기반되어야 환원론적인 전체주의의 철학, 히틀러주의 등이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하에서, 시간과 타자의 주된 목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와 같은 타자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 정당화하는가이다. 이는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과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환원되지 않는 비대칭적 타자에 대한 모델이 가능한가하는 것은 결국 그런 타자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가 가능한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자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성립은 전체주의 철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된 고민이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철학은 타자에 대한 질적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고 그 어떤 대상도 아닌 바로 주체가 타자를 (주체의 관념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타자에 있어 핵심목적은 타자를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로서 두는, 그리고 그 타자에게 비대칭적 윤리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성의 가능성을 다루는 것이다. 본론에서 살펴보겠지만, 실제로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그런 주체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레비나스식의 새로운 주체성의 성립에 있어 쉽게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윤리적 관계에 있어 비대칭성이 결국은 주체의 주체성/자기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 즉 주체성이 소멸되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주체-타자의 윤리적 관계에 있어 둘 사이의 대칭성이 요구되는데, 어떻게 동등하지 않은 주체-타자의 관계가 윤리적 모델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시간과 타자에서 나타나는 핵심질문이다. , 레비나스식의 주체성과 타자관념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문제는 주체의 주체성/자기성이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타자로의 (비대칭적이고 윤리학적인) 초월이 가능한가하는 점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레비나스는 향유로서 주체가 주체성을 확보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크게 세 가지의 단계를 통하여 서술한다. 우선적으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문제였던 존재와 존재자를 주체의 출현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 다음으로는 향유를 통한 주체의 정립을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향유적 주체의 한계를 밝히고, 서론에서 언급했던 성격을 지니는 타자에로의 주체의 초월을 다룬다. 본론과 결론을 통해 드러나겠지만, 마지막 단계는 결국 서론에서 레비나스가 유도하고자했던 주체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우선, 레비나스는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레비나스는 에 대해서, ‘와 관계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나는 ○○와 사랑을 한다”, “나는 밥을 먹는다등과 같이 타동사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타동사적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혹은 나는 있다)”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타자를 목적어로 지니지 않은 채 주어-자동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문장에서부터 레비나스는 다른 상태들, 관계들과 달리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동사적 상태라고 한다. 말하자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관계 맺는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있음혹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하이데거를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는 존재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가 가능하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이를 위해 상상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제거해보자고 한다. 레비나스는 상상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파괴했을 때 남는 것은 단순히 있다(il y a)’는 사실뿐이라고 한다. 그저 있다는 사실에는 어떤 존재자도 수용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존재자들은 이미 상상 안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식으로 그저 있음’, ‘존재에 대한 논의를 꺼내지만, 다른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상상 역시 (어느 정도 이미지의 차원도 있지만) 언어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상상 속에서 존재자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나는 있다’, ‘○○가 있다’, ‘존재자는 있다는 등의 모든 문장에서 존재자를 제거해버리는 작업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한다’, ‘모든 (각각의) 존재자는 있다는 문장은 참일 것이다. 이런 한에서 존재자들은 주어-술어관계에서 있음’ ‘존재()’라는 술어에 대해 주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우리는 있다를 술어로 적용할 수 있다. 존재자에 대해 있다는 술어를 귀속시키는 모든 문장들에 있어서 만약 주어에 있는 존재자들을 모두 파괴해버리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당연하게도 남는 것은 그저 있다’, ‘존재한다는 동사, 사실뿐이다. 그 외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이한 점은,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어떤 존재자도 담겨져 있지 않다(상상적으로 파괴했기에). , 하이데거와는 달리 존재자 없는 존재가 가능하다. 또한, 인칭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자를 (주어로) 수용한다는 것인데, 이 그저 있다는 것에는 이미 존재자들이 파괴되었기에 어떤 인칭도 수용할 수 없다. , ‘있다는 것 자체, 존재는 비인칭적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으로부터 존재는 익명적이라고 말한다. 이 존재는 어떤 존재자에도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위와 같은 그저 있다’, ‘존재자 없는 존재를 악과 부조리로 규정한다. 레비나스는 존재함,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부조리로 불면의 상태를 예시로 들고 있다. 가령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를 기다리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잠에 들지 못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불면에 있을 수 있다. 이는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수면에 들지 않는 것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고, 영문도 모른 채로 잠들지 못하고 그저 있다는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의도치 않는 불면의 상태는 누구에게나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적 고통을 안겨준다. 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저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아주 강한 부조리를 느끼게 한다. , 벗어날 수 없는, 그저 있다는 익명의 존재의 성격은 그것을 겪는 이로 하여금 부조리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이 상황에서는 불면이 언제 일어났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상태라는 것이다. 존재가 이렇듯 시작도 끝도 없이 그저 있다는 사실밖에 가진 것이 없다면, 존재자 없는 존재에서 어떻게 존재자, 주체가 출현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일상적으로는 다르지만, 아주 특이한 의식의 개념을 내놓는다.

레비나스는 의식이란 홀로서기라고 한다. 홀로서기란 존재자가 있다는 술어, ‘존재함을 스스로 떠맡는 사건이다. , 의식이란 동사적 존재인 있다가 주어인 이름(명사)에 귀속되는 사건이며, 주체가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사건이다. 의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자, 주체의 탄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가능조건으로서 시간을 끌고 온다. 레비나스는 홀로서기의 사건 자체가 바로 현재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어제, 오늘, 내일의 물리학적 시간축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현재란 주체가 어떤 인칭, 존재자도 수용하는 않는 익명적인 존재, 있음에 균열을 내는 순간, , 존재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바로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 앞에서 홀로서기를 언급한 것과 같이 이는 그저 있다는 것에서 이름(명사)이 존재를 소유하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레비나스는 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를 통해 지금’, ‘여기서순간마다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 주체는 홀로서기가 일어나는 매순간으로의 현재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고, 순간마다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을 의지대로 선택하는 자유는 아니지만, 존재함을 소유로 갖는 자신을 정립하고 순간마다 자신으로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다. , 존재의 익명성 속에 함몰되지 않고 존재자 자신으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주체는 동일성이라는 자기관계 하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얽매이게 된다. 주체는 존재를 떠맡은 그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거주하고, 노동하고, 먹는 등의 고된 물질적인 행위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은 그저 살아 있기위해서 매일매일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사서 먹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가야 한다. 이는 주체가 존재를 자신의 어깨로 떠맡게 된 매순간 가지게 되는 고통의 짐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주체의 물질성이라고 하고, 물질은 홀로서기의 불행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물질계 안에서 주체들이 그저 있다는 사실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의 고된 일들을 하고 살아간다는 그것은 누구에게나 뿌리 깊은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주체의 출현은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짊어지는 힘겨운 사건이다. ,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서 오는 부조리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시각을 좀더 넓혀서 타인으로의 초월을 보기 전에 우리가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질들과 관계 맺는 그 공간을 살펴보자고 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먹거리들의 집합이라고 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세계를 도구의 총체로 보는 도구적 세계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우리가 세계 안의 대상들, 먹거리들과 관계하는 방식을 향유라고 정의한다. 가령 세계 안에는 음식, , 공기, 햇빛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이것들과 관계 맺을 때, 향유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음식과 관계를 맺을 때, 먹는 것을 수단화하여 사는 목적도 있지 않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음식 자체를 어떤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음식 자체가 최종 목적이며, 이것은 음식을 즐기는 것, 즉 향유하는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들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예시로, 공기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은 공기를 수단으로 해서 생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이성을 발휘하여 이론적으로 과학적 지식에 도달할 때만이 가능한 생각이다. 그 이전에 세계를 향유하는 인간은 산책하면서, 등산하면서, 나와는 다른 공기를 내 안으로 들여와 그 공기를 즐긴다. 산책할 때 우리는 이 공기가 나의 생존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공기가 상쾌하고 즐겁다고 한다. , 공기를 향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세계의 대상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향유의 방식이라고 한다(따라서 이는 세계의 대상을 도구로써 보는 하이데거의 도구적 세계관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향유라는 건 어떤 특성을 갖는가?

라는 주체가 음식, 공기 등의 먹거리들과 향유라는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양상은 매우 특이하다. 우선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공기에 의존해야 하고, 갈증을 씻기 위해 물에 의존해야 한다. 향유는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숨을 쉰다는 행위 자체,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발휘할 때는 다른 사람,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음식을 눈앞에 줄 수 있어도, 그것을 향유하는가 하지 않는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가 아닌 주체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주체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주권을 행사한다. 레비나스는 이 향유의 순간 다른 누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향유한다는 사실에서 주체의 주체성의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주체 스스로 향유하는 가운데 주체의 내면성이 형성되고, 타자와 나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이런 향유의 주체성은 일종의 자기망각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와의 관계에는 존재함을 끌어안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항상 처해있는데, 세계 안에서는 그 관계를 잊고 다른 대상들과 향유의 관계를 누린다. 가령 누구나 삶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그저 있다는 사실, 벗어날 수 없는 고독의 순간에 처하게 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인 고독함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공간을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니거나, 친구들을 불러 음식을 향유하거나 게임을 하거나하는 등 세계의 대상들과 향유를 누리는 것 같다. 향유는 어느 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의 상황을 잊게 만든다. , 이것들은 일종의 자기망각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향유하는 시간들은 항상 일시적이고, 고독의 순간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단적으로 자기망각, 향유의 밝음에서도 자아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부조리, 고독의 사실을 벗겨낼 수 없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향유를 우리의 감각작용 즉, 일종의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햇빛을 누리고 노동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우리의 감각작용에 관련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특성은 어떠한가? 분명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 자체는 인식하는 주체의 밖에 존재한다. 하지만 인식대상은 감각자료를 통해 우리의 인식 안에 포착된다. 인식대상이 우리 감관 안에 비추이기 때문에 마치 인식대상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만나게 된다. , 향유와 인식은 본질적으로 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안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로 돌아온다. ,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는 향유에서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느 순간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끔찍한 사실로부터 달아나고자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지만, 결국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고독이라는 것과 같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 영원히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끔찍한 사실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그것을 그전까지의 철학에서 무시되어온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다.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면서 필연적으로 타인으로서의 타자를 만나게 된다. 가정에서 부모와 형제, 노동현장에서 동료들, 그리고 같은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것들을 향유하는 타인으로서의 타자 등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이 타자들은 각각이 모두 이미 향유로서의 주체이며, 각각 주체성을 확보한 타자들이다. 이 타자들은 내가 공기를, 음식을 내 안으로 들여보내어 열량을 위한 내 안의 에너지로 향유하듯이, 내 안으로 환원되는 어떤 세계의 먹거리들이 아니다. 이들은 각각 존재함을 끌어안고, 향유를 통해 자신만의 주체성을 확보한, 전적으로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다름을 지닌 무한자로서의 타자다. 이들은 내가 아니며,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론에서 언급했었지만, 기존의 서양철학은 이런 타자의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기존의 서양철학은 유아론(唯我論)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나로 환원하였었다. 대표적으로 이런 철학은 데카르트와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주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관주의란, 인식하는 주관, 주체와 인식되는 객관, 타자를 대립시키고 전자에 존재론적인 우위를 두는 철학이다. 주관주의에서 언제나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는 세계의 중심에 있고, 모든 여타 존재자들은 주관이 인식을 얻기 위한 객체로 설정한다. 타자는 나와 함께 마시고 향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체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주관주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데카르트식의 철학은 결국 인식하는 나의 지위만 있고 인식되는 타자의 지위는 없게 된다. 우리가 향유하는 물질들과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주체인 에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향유되는 물질과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차이가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향유는 결국 인식이고, 결국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처음부터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만들게 한다. 타인으로서의 타자를 인식, 향유의 대상과 차이를 두지 않는다면, 결국은 타자는 데카르트식으로 인식되는 나의 관념으로 환원된다. 여기에는 레비나스가 강렬하게 비판하는 전체주의의 철학이 숨겨져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수학적인, 주관주의적인 철학은 후대에 과학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타자로서의 타인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은 그러한 철학들이 세계대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적인, 전체주의적인 철학은 비극의 씨앗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를 나의 인식의 틀이나 관념으로 환원하지 않는 철학이야말로 홀로코스트나 실존적 비극을 막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지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로 환원되지 않는, 하지만 내가 주체로 성장한 것과 같이 향유의 방식을 통해 주체성을 확보한 타자 사이에 윤리적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와 나는 비대칭적인 관계에 있으며, 그저 그는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비대칭적인 타자로 과부와 고아를 들고 있다. 이러한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서 나타난다. 얼굴은 우리가 마주하는 다른 어떤 대상들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가령 사물들은 사물이 속한 전체 속에서의 부분으로, 혹은 그 기능으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책상은 그것을 이루는 목재, (책상)다리, 그 외에 책상의 형태를 구성하는 각각의 것들의 집합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고, 또한 앉을 수 있는 기능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다. 얼굴은 눈, , 입 등의 단순한 집합으로서도, 얼굴을 이루는 눈··입 등의 기능으로서도 규정될 수 없다. 얼굴은 다른 사물들이 의미를 갖는 부분들의 단순한 집합이나 기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힘이 있다. 레비나스는 그 힘이 얼굴이 상처받을 가능성과 무저항성에 있다고 한다. 타인의 얼굴은 언제나 알 수 없는 폭력을 맞이할 수 있다. 가령 전쟁난민들은 언제나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전쟁으로부터 직접적인 폭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이 폭력을 당할 때 난민들이, 난민들의 얼굴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그 폭력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얼굴은 외부적인 힘에 대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고 한다. 타인의 얼굴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와 닿는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강렬한 어조로 윤리적으로 명령한다. 가령 SNS나 뉴스를 통해 고통으로 얼룩진 시리아 난민을 볼 때, 우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다른 어떤 매개를 거치지 않고도 그들에게서 상처받을 수 있음,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저항성을 느낀다. 그리고 종종 그런 얼굴들로부터 고통으로 얼룩진 난민의 얼굴, 이 전쟁의 폭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를 주위에서 아무도 전달하지 않는데, 매개도 없이 갑자기 느끼게 된다. 타인의 얼굴이 윤리적으로 나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매우 특이한 점은 타인의 얼굴이 고통 받는, 저항할 수 없는 나보다 낮은 지위에서 가다오면서, 결국은 윤리적 명령을 하는 주인의 얼굴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명령이 행해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기존의 삶과 행위, 자유에 제동을 걸게 된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정의로워야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죄책의 경험을 안겨주며 양심을 공격한다. 가령 집에서 호화롭게 안락을 누리며 누워서 TV를 보고 있다가, 전쟁의 상황과 시리아 난민의 죽어가는 얼굴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저들이 저렇게 죽어 가는데 나는 이렇게 가만히, 내 편한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이는 결국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정의로워야함을 명령한다. 이때 시리아 난민의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 명령을 내리는 도덕적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심리적 안락함을 위해 TV 채널을 돌리고 똑같이 누운 자세로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하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이 주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나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가 대칭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나와 타인으로의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고 한다. 타자는 나와 윤리적으로 동등하지 않다. 만약 타자와 내가 윤리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면, 타자는 나보다 고통 받는 낮은 지위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윤리적으로 호소할 권리도 없으며,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향유로서의 주체를 가진 한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이 경우 나는 풍요가운데 남아도는 것을 타인에게 주기 쉽고, 동정이나 반대급부 때문에 타인을 돕게 된다. 레비나스는 따라서 비대칭적으로 타자가 나의 주인인, 내가 윤리적으로 빚진 바 있는 타자를 수용할 때만이 진정한 윤리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과부, 시리아 난민, 나그네와 같은 고통 받는 타자가 나에게 윤리적으로 명령하고 주인의 얼굴을 지닐 때, 나는 비로소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주인으로 받들며 자신의 이기심과 소유를 통한 행복을 내려놓을 수 있다. 타자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그를 주인으로 섬길 때만이, 타자에 대한 윤리적 비대칭성이 이루어져만 진정한 주체성이 성립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홀로코스를 만들었던 강자의 법이 폐기되고 진정한 평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주체의 완성은 위와 같이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지닌, 환원되지 않는 타자를 수용함으로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본론 처음에서부터 계속 물어왔던, 그리고 향유적 주체에서 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져야 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국은 나 자신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 부조리는 윤리적 주체에서 해결되는가?” 타인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윤리적 주체의 완성에 있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사적 이기심을 내려놓고 나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을 수 있다. 타자를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타인을 보살피며, 혹여나 내가 타인을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게 되며, 나의 중심을 나에게서 타인의 미래로 둘 수 있게 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부조리는 어느 정도 타인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번의 질문이 더 있다. “타인이 죽는다면, 나의 윤리적 행위들은 모두 허무로 돌아가고, 타인에로의 윤리적 초월도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출산의 문제를 꺼낸다.

레비나스는 애무, 에로스, 성관계, 그리고 이 과정의 끝에 있는 출산을 통해 타자화 된 나, 아이를 탄생시킨다고 한다. 아이가 없이 인생을 홀로 모든 것을 설계할 때 우리는 결코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럴 때, 마치 기나긴 여행 끝에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이아처럼 원래의 자신의 세계 테두리로 돌아와 늙어 죽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출산함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인생에만, 나의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미래를 아이와의 관계에서 찾게 되고, 무한히 나로 돌아오는 동일자의 영역 밖에서 미래를 찾게 된다. 이를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무한히 돌아오게 되는, 어쩌면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또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성격의 끔찍한 비극에서, 부조리에서 사면받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홀로서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로 돌아오는 자기 자신으로 무한히 돌아오는 비극의 사면이 출산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시간과 타자, 그리고 시간과 타자에 관련한 강영안 교수님의 타인의 얼굴과 논문의 주요한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결론에 도달해서, 우리가 서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 레비나스의 문제의식들이 해결되었는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홀로코스트에 대응할 새로운 주체의 개념, 타자의 개념의 제시가 레비나스의 과제였다. 이는 본론에서 매우 자세하게 살펴보았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혁신적인 주체와 타자의 개념을 제시했다. 타자는 나라는 주체가 그러하듯이 향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성립했고, 그렇게 형성된 타자는 내가 아니다. 그들은 데카르트식으로 나의 어떤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되거나, 어떤 관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의 다름이다. 또한 타인의 얼굴에 있어, 그 얼굴들은 단순한 어떤 부분들의 집합체,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물들로도 환원되지 않았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 주인의 얼굴로 명령하며, 자신의 이기심,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한다고 했다. 주체는 이러한 얼굴에 처해 이를 거부할 수 없다(이를 거부하는 것은 불의이다). 레비나스는 여기에 이르러 주체의 완성을 나를 내려놓고 윤리적 타자를 수용하는 것에 두고 있다. 논리적으로 여기에는 데카르트처럼 타인을 나의 인식대상으로 환원하는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질적 다양성을 거부하는 전체주의의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윤리적 타자는 내 안으로 흡수되는 물질적인 향유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나로 환원되는 어떠한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름을 소유하고 있고, 나에게는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다. 여기에서 서론에서 다루었던,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타자의 개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는 윤리적 비대칭성이 결국은 주체성의 소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리적 비대칭성이 주체성의 소멸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는 주체는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주체를 형성했고, 향유를 통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주권을 발휘함으로 주체성을 확보한다. ,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주체는 이미 확립되어 있다. 또한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갖는 타인의 얼굴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닫힌 이기성의 세계에서 (타자를 통해)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만 몰두하지 않고, 비로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에게서 탈피할 수 있다(본론 끝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출산을 통해 절정을 맞는다). ,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존재는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윤리적 주체로서 완성시킨다.

마지막으로, 도대체 비대칭적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시 된다. 이는 본론에서 매우 자세히 살펴보았었다. 이 문제에 있어 레비나스는 오히려 어떻게 주체와 타자가 동등한 윤리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본론에서 살펴보았지만, 타자와 주체 사이의 윤리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것은 타자를 내가 풍요로울 때 나눠주는 식의 논의밖에는 만들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윤리적 지위가 동등한다면, 나는 동등하다는 그것 때문에 타자를 도와야 할 필요가 없다. 나와 타자가 동등하다는 것은 타자가 나보다 더 고통 받지도 않고, 나보다 더 낮은 지위에 처해있지 않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런 타자에게 나라는 주체가 어떤 윤리적 행위를 할 필요가 있는가? 따라서 레비나스는 진정한 윤리적 관계는 비대칭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타자는 나보다 가난한, 나보다 고통 받는 시리아 난민과, 나그네와 과부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른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얼굴을 바라보는 주체에게 윤리적으로 호소한다. 이때 역설적으로 아무도 옆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 주체는 타인의 얼굴로부터 어쩌면 양심의, 윤리적인 호소를 느낀다. 타인은 처음엔 가난한 나그네의 얼굴로 다가왔지만 어느새 주인의 얼굴로 다가와 나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체는 정의로워야하고, 타자를 윤리적 주인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이기적으로 살아온 삶을 반성하고 윤리적 타자로 초월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면 진정한 윤리적 관계는 결코 동등하게 일어날 수 없다. 비대칭적 윤리적 관계에서만이 비로소 나는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타인을 받들 수 있다. 진정한 윤리성을 타자와 나의 대칭성, 동등함이 아니라 비대칭성에서 찾는 것, 이것이 다른 어떤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레비나스 철학만의 독특함이자 신비로움이다.

이상으로 서론에서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이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평가를 함으로써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말할 것 없는 명작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다른 철학자들이 전혀 관심가지지 않았던 문제를 철학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 누구보다도 실존의 문제에서 철학을 시작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레비나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는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한 사회가 당면해 있는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는 없었다. 레비나스와 동시대의 사르트르나 비판이론의 하버마스 등의 철학자들 역시 전쟁이라는 주제로 실존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그들은 이 문제를 레비나스 만큼 삶의 문제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채 본질을 해체하거나,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성을 도입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레비나스와 같은 타자에 대한 논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존을 고민한 철학자였고, 전쟁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한, 현실과 철학의 접점을 고민했던 철학자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평가에서 눈을 돌려서 당면한 현실에 우리가 레비나스의 철학을 적용함으로서 레비나스의 지위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레비나스 철학은 기존의 칸트식의 의무윤리학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정말 많다. 가령 칸트의 윤리학은 사회계약설의 바탕 하에서 만들어졌다. 루소와 홉스, 로크 이후의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관념은 동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이 합의하에 만들었다는 사회계약설을 따르게 되었다. 칸트의 윤리학적 테제들도 이 사회계약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칸트의 의무윤리학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윤리학적 행위주체들을 전제하고, 그 주체들이 윤리적 상황에서 하려는 행위가 보편화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윤리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런 윤리학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칸트의 의무윤리학에서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A가 윤리적 행위를 받는 B, C에 있어서 차별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칸트에 따르면 아마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법칙 하에 속할 수 있는 도덕규칙일 것이다. AB에게 하는 윤리적 행위를 C에게도 차별 없이 해야 하고, C에게 할 수 있는 윤리적 행위를 B에게도 차별 없이 해야 한다. 그러나 BC가 처한 각각의 상황, 개별성을 무시한 채 무차별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옳은가? 레비나스의 논지를 빌리자면, 누가 더 사회적 약자인지, 누가 더 시리아의 난민, 과부와 나그네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철학은 국가 아래에 있는 모든 윤리 주체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보편화가능성이라는 정언명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동등한 윤리적 주체들인데 동등함 속에서 어떻게 누군가에게 더 윤리적 혜택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일종의 폭력이 있다. 그 폭력은 누가 더 약자인지 고려하지 않는, 누가 더 동등할 수 없는 가난한 윤리적 지위를 지니는가를 고려하지 않는, 모든 윤리적 주체를 전체주의적으로 동일하게 대하는 폭력이다.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적인 관심이 없는 칸트의 철학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존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생각해본다면, 결국 칸트 윤리학의 귀결은 진정으로 타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가 대칭성의 윤리관계를 비판했던 것처럼, 결국 동등한 윤리적 지위를 가진 타자에게 내가 도대체 왜 윤리적 행위를 해야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레비나스적 관점에서 이는 결코 좋은 윤리학이라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눈을 가리고 한손엔 칼, 한손엔 저울(천칭)을 든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의 모습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눈을 가린 여신의 모습 속에는 나그네와 과부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정의의 여신은 스스로 자신의 눈가리개를 풀고 누가 더 약자인지, 누가 더 나그네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그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참고문헌

E.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역), 문예출판사, 1996.

M.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전양범 역), 동서문화사, 2008.

강영안,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성의 철학, 철학과 현실, 25.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김연숙,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인간사랑, 2001.


『시간과 타자』 보고서ㅡ타자로의 초월을 통한 새로운 윤리학적 모델의 제시를 중심으로ㅡ.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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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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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에 속하는 규범적인 문장들은 반드시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만을 하는가>

 

에이어는 규범적인 윤리학적 문장들이 본질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감정주의를 표방한다. 이 글에서는 Language, Truth and Logic에 나타난 에이어의 감정주의에 대한 논증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할 것이다. 감정주의를 소개한 다음에, 규범적인 문장들이 항상 감정표출만으로 해석될 수 없는 사례들을 소개할 것이다. 그러한 사례들을 제시한 다음에 사례들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윤리학적 발화에 있어 감정표출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설득이며, 감정표출은 설득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나타낼 수 있는 기능일 뿐 윤리학적 발화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에이어는 윤리학적인 문장들의 본성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적 문장은 해당 문장이 담고 있는 사실적인 내용 외에 담고 있는 내용은 없고, 다만 그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해당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을 더할 뿐이다. 가령 “you stoled that money”“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의 문장에서 전달하는 사실은 모두 발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돈을 훔쳤다는 것뿐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다만 후자의 문장은 문장에 어떤 분노나 두려움 등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에이어에 따르면 이러한 윤리학적인 문장들은 사실적인 문장들에 비언어적인 표현을 담은 것과 다르지 않다. 가령 위의 두 번째 문장은 첫째 문장에 “!!”를 더하거나 행동이나 목소리에 어떤 감정표출을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에이어는 여기에 더하여 윤리학적 발화가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발생시키거나 (그리하여) 행동을 자극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가령 “It is your duty to tell the truth”라는 문장은 진실함과 관련된 감정을 표출하거나 혹은 (동시에) “Tell the truth”라는 문장과 같은 성격으로 어떤 행위를 하도록 촉발시키는 기능을 한다.

에이어는 자신의 주장을 주관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배제한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적 발화는 단순히 감정표출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는 윤리적 주관주의에서 주장하듯이 윤리학적 문장이 개인(혹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한 기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에서 주관주의는 이 문장이 “I'm angry about the fact that you stoled that money” 등으로 환원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발화자는 당면한 상황에 대해 윤리학적 문장을 발화할 때 그 의미는 발화자가 느끼는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다. ,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윤리학적 문장은 어떤 심리학적인 문장ㅡ감정에 관한 문장ㅡ을 기술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에이어는 윤리학적 발화는 그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윤리학적 발화는 발화자의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고통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그저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이라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이어는 윤리학적 문장들이 감정을 단순히 표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주관주의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관주의에서 윤리학적 문장이 감정에 대한 기술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면, 에이어에서 윤리학적 문장은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저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이기에 윤리학적 문장들은 참 혹은 거짓을 나눌 수 없다. 가령 갑작스러운 고통에 대해 !”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것이 참/거짓으로 나뉘는 성격이 아닌 것과 같다.

에이어의 주장은 다분히 도덕을 감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에이어는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라는 문장을 단순히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위와 같은 문장은 감정과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령 자녀가 부모의 돈을 훔쳤을 때, 충분히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평상시의 어조로 아이에게 위와 같은 문장을 발화할 수 있다. 또한 가설적인 상황에서, 감정은 없지만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판단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강한 인공지능이 있다고 하자. 그 인공지능이 어떠한 판단에 따라 특정한 상황에서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이어의 감정주의에 따른다면 인공지능 역시 감정을 표출해야하지만, 강한 인공지능에 감정에 관한 알고리즘을 부여하지 않는 상상이 가능하다. 실제로 영화 <I, Robot>에서 감정칩이 없는 인공지능들이 인간에게 윤리학적인 발화를 한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윤리학적인 발화가 항상 감정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본질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위와 같은 상황들을 분석함으로써 윤리학적인 발화가 가진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부모는 자식이 돈을 훔친 사실에 대해 분노 등과 같은 도덕적 감정을 담지 않고도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라고 말할 수 있다. 에이어가 주장한 것처럼 부모의 입장에서는 “you must not stole the money” 등의 기능과 같이 자녀가 앞으로 돈을 훔치지 않도록 행위를 촉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경우인데, 이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가령 분노를 표출하여 아이에게 도둑질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낳지 못하기에, 여러 말을 통해서 아이를 설득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런 경우 윤리교육에 있어 부모들은 역지사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 돈을 훔치면 타인의 기분이 나빠지고 그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위와 같은 윤리학적 발화를 하는 것에는 이러한 작용이 들어있다. 다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부모들은 충분히 자녀에 대해 윤리학적 발화를 할 때 가까운 미래에 도둑질을 하지 못하도록 감정을 실어 강하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윤리학적 발화에 있어서 감정표출은 부가될 수 있는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적인 상황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발화를 할 때 본질적인 것은 관련된 행위를 그만두게 하는 일종의 설득이며, 또한 그 설득이 통하지 않을 시 타인에 의하든 부모에 의하든 일종의 벌이 주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는 설득의 기능과 동시에 “if you do those things iteratively, you can be punished”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감정표출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그만두게 하려는 설득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부가할 수 있는 기능일 뿐이다. 이는 강한 인공지능의 사례에서 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감정에 대한 알고리즘이 없는 강한 인공지능이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라고 말할 때, 이는 분명히 어떤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은 아니다. 말 그대로 감정에 대한 알고리즘이 없다고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이런 발화를 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인공지능이 기초적인 치안과 같은 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위와 같은 발화는 그런 행위들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도중에 나오는 발화일 수 있고, 또한 지속될 시에 공권력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음을 표현할 것이다. 여기서 윤리학적 발화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앞문단과 마찬가지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에 더해 어떤 행위()가 가해질 수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일반화해서 강하게 주장하자면, 나는 일반적으로 윤리학적 문장이 설득을 주된 목적으로 가진다고 하겠다. ‘~하면 안 된다혹은 ‘···이 잘못되었다/it is wrong that...’과 문장은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설득하는 말이며,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에 어떠한 처벌이 가해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형태의 말을 할 때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그런 행위가 앞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it is wrong that...’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런 행위가 (최대한) 일어나지 않는 가능세계를 참으로 만들어지기를 청자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분노 등의 여러 가지 감정을 표출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특정 발화자가 누군가 돈을 훔쳤을 때 굳이 “you acted wrongly in stealing that money”를 발화하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돈을 훔치는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계속될 시에 어떤 식으로든 처벌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도, ‘해야 한다‘···이 옳다/it is right that...’이라고 말할 때도 이는 대상이 되는 행위를 (지향)하도록 일종의 설득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결혼관계나 교우관계에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문장은 그와 관련된 여러 행위들(약속을 지킬 것, 서로가 서로를 도울 것 등등)을 이행할 것을 설득/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장들에 있어 역시 효과를 강하게 줄 수 있는 감정표현이 있다면, 칭찬 등에 수반되는 여러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 ‘···해야 한다의 경우도 감정표출은 설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망정 항상 수반되거나 윤리적 발화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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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는 에이어의 논증에 대한 비판>

  

에이어(이하 A)는 그의 저서 Language, Truth and Logic1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선험적인 문장도 아니고 검증가능한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논증한다. 본고는 A의 논증이 세 가지 이유로 부정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 우선은 물리법칙 자체는 감각되지 않고 또한 물질적인 대상이 아님을 밝힐 것이다. 그리하여 물리법칙에 관한 문장이 형이상학적/초월적인 문장이라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이를 통해 물리법칙에 대한 언명들이 A의 기준에서 무의미하지만 일상적인 맥락에서 유의미하다는 것을 밝혀서 결국은 문제를 낳는다는 논증을 보일 것이다. 둘째로는 A의 선험성·검증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의미/무의미를 결정할 수 없음을 보일 것이다. 이는 A가 서술하는 의미/무의미에 대한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음을 기준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의미/무의미의 기준이 제시되더라도,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여 의미의 정당화가 무한하게 일어나므로 의미/무의미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함을 논증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논증을 통해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는 A의 주장이 문제가 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하여 A의 주장을 우선 검토할 것이다. A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i) FT = 유의미한 문장들의 집합(F는 검증가능성을 충족하는 문장들의 집합, T는 선험적인 문장들의 집합)

(ii) M(FT) = (M은 형이상학적 문장들의 집합, ~는 부정기호)

이하 (i)(ii)의 집합을 AP(Ayer Proposition)라고 부르기로 한다. AF에 속하는 문장들은 원칙적으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참/거짓을 나눌 수 있을지를 정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 문장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문장이라고 말한다. T에 대해서는 에이어는 크게 언급하는 바는 없다. (ii)에 대해서, AT보다는 F를 중점으로 논증을 펼친다. , M에 속하는 문장들은 검증가능성의 원리를 충족하지 않는다. 그 문장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경험적 원리/관찰들로부터 참/거짓을 가려야할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A는 그런 문장들을 해결하는 데에 어떤 경험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고, 그런 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M의 원소도 F에 속하지 않는다. 또한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직관적으로 선험적인 문장들도 아니기에 T에 속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A(ii)가 성립한다고 말하고, (i)에 의해 M의 어떠한 원소도 유의미한 문장들의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 , M은 무의미한 문장들의 집합의 부분집합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AP는 물리법칙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이를 위해서 좀 돌아가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바에 따르면,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적인 주장들은 무의미하다. 과학적인 주장들은 물리세계에 대한 선언을 하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물질들의 상호작용 뒤에 있는 물리법칙을 전제하는 것이다. 만약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활동은 없는 것에 대한 활동이 된다. 그러나 없는 것에 대한 주장들이 현실에 대한 강한 제약을 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M에 대한 탐구가 현실에 제약을 준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적어도 유니콘이 없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유니콘에 대해서 이론을 세우거나 하는 것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제약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그것은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문장들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제약한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공학을 전개해나가는데 매우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물리법칙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AP가 물리법칙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리법칙이 실재한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우선 물리법칙은 그 스스로 어떤 물질적 대상과도 같지 않다고 여겨진다. , 물리법칙은 물질계 안에서 원자 혹은 그 아래 단위로 쪼개질 수 있는 어떤 것들과도 같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물리법칙을 물질로서 여겨야하는데, 그렇다면 물리법칙은 특정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그 물질을 보면서 탐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탐구는 물리법칙이라는 어떤 물질을 눈앞에 두고 탐구하는 것 같지 않다. 물리법칙은 물질들의 상호작용들 배후에 있는 어떤 질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령 양자역학의 수식들이 참이라면, 그것들은 어떤 물리적 현상들을 통해 나타나며 현상들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자체는 수식으로 표현되는 어떤 추상적 실재이지 구체적인 물질 자체는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구체적인 물질이라면 관측가능할텐데,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과 물질적인 현상들이지 그것들을 만드는 질서 자체는 아니다. 어떤 물질을 쿼크 단위까지 분해하여 관측하더라도, 쿼크 사이의 질서는 쿼크들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는 것과 같다. , 물리법칙 자체는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물리법칙 자체는 물질세계를 강하게 구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물질도 아니고, 감각으로서 포착되지 않는 추상적인, 초월적인 대상이다. 따라서 물리법칙이 실재한다(혹은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M의 원소).

더욱 강한 의미에서, 위의 문장은 검증가능성을 충족하지 못한다. 물리법칙 자체가 감각되거나 물질적 실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물리법칙이 실재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과 같은 위상을 지닌다. A에 따른다면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신에 대한 언명을 참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여나 신은 그렇지 않지만 물리법칙은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현상을 봄으로써 존재한다고 판단이 가능하다는 반론을 한다면, 나는 신에 대한 존재성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기독교적 신을 증거하는 기적들이나 경험적 근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신의 존재성을 밝혀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상을 통해 그것 뒤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존재한다고 판단될 수 있다면, 물리법칙과 신에 대한 언명은 지지하는 현상들의 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형이상학적인 맥락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모두 현상을 통해 현상이 아니고 추상적인, 따라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배후를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AP에서 신에 대한 언명과 물리법칙의 언명에 대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적어도 신의 존재성은 알 수 없으나 물리법칙의 존재성은 과학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AP에서 물리법칙의 존재성에 대한 언명은 형이상학적인 신에 대한 언명과 동일하게 무의미한 것으로 파악된다.

위와 같은 논증들을 통해 AP는 모순적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분명 물리법칙은 존재한다는 문장이 표출하는 내용은 과학활동의 현실성을 위해 참이어야 하고 실제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여지지만, AP를 따르면 이 문장은 형이상학적인 문장이고 무의미한,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참/거짓을 가릴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문장이다(사소하게 위는 선험적인 수학적/논리학적 문장은 아니다). 이는 완전한 모순이다. 정리하자면, A의 기준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장이면서 의미가 있는 문장이 존재하게 된다. , 형이상학 전부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는 의미/무의미에 대한 구분이다. A1장에서 FT가 의미 있는 문장의 전체를 이룬다는 주장만을 하고 구체적으로 다룬 바가 없다. 말하자면, A(i)의 언명은 FT의 이름을 의미있는 문장들의 집합으로 부르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i)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FT와 상관 없이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후차적으로 (i)에서 서술되는 두 집합이 같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A는 의미에 대한 규정 없이 단순히 FT의 문장들은 의미 있다는 언명만을 하고 있다. 더욱이 A는 어떤 기준에서 T가 의미 있는 문장들의 집합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i)이 정당하다는 A의 주장은 적어도 1장 내에서는 정당화된다고 보기가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ii)만이 성립하는 셈이다. ,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의미나 무의미의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단순히 검증가능성을 만족하지 않고 선험적이지 않은 문장들일 뿐이다. (i)가 만족되지 않는다면, (ii)의 언명은 의미의 차원이 아닌 그저 형이상학적 문장들이 어떤 개념들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논증에 대해 A가 의미/무의미의 기준을 명확히 정의했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아래의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논증하고자 한다. 우선 아래와 같이 정의하자.

(a) A(1) =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들의 집합, (b) A(n+1) = A(n)을 정당화하는 문장들의 집합, (c) P(n) : A(n)은 정당화가 필요하다

(a)(b)가 의미하는 것은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들의 집합 A(1)이 제시되었을 때, A(2)A(1)를 정당화하는 집합들이고, 이것이 자연수의 범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P가 자연수 전체에 대해 성립함을 보일 것이다. 우선 P(1)을 보자. 적어도 의미를 나누는 기준이 제시된다면, 그것들을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A(1)을 정당화하()는 집합 A(2)를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P(1)이 성립한다. P(n)이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A(n)은 정당화가 필요하므로, 이를 지지하는 정당화의 집합 A(n+1)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A(n+1)이 정당화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당화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A(n+1) 역시 정당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P(n+1)이 성립한다. 곧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P(n)은 모든 자연수에 대해 성립한다. 만약 그렇다면, 의미에 대한 정당화는 자연수의 집합(무한집합)만큼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적어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의미/무의미를 가르려는 시도는 무한한 정당화를 불러오므로 실패하게 된다. 물론 위에서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주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인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게 된다. 주장에 대한 임의의 근거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 근거들을 판단할 어떤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은 근거들을 또 다시 정당화할 것이다. 따라서 임의의 근거들이 주어지더라도 정당화는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위의 증명의 갭은 없다.

만약 이와 같은 나의 증명이 받아들여진다면, A가 명확히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고 (i)를 논증하였더라도,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었음을 보여준다. , 의미와 무의미의 기준을 나누고 그로부터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영역으로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물리법칙의 실재성에 대한 문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유의미하지만 AP에는 그럴 수가 없다. 또한 의미를 나누는 A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문장들은 의미·무의미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험성과 검증가능성을 충족하도 않는 문장들일 뿐이다. 또한 A가 의미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그 기준은 무한의 정당화를 불러오고 이는 의미 개념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의 실패를 부른다. ,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B인가 B+맞았었습니다. 5년전에.. 귀납법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사용이라고 지적받았었네요


페이퍼1.hwp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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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_=.. 비유가 있는 것도 힘들지만 , 일반적인 문법 구조나 단어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번역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아티스트를 참조하는 경우도 있어서 들어보고 찾아보느라 더 그랬네요. 스킨드레드 노래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링크로 가셔서 앨범들을 보시고 유튜브에 앨범 통째로 검색하시면 합법적으로 저작권이 걸려있는 재생목록들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론 노스레인 앨범 전체를 번역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엔 ALAZKA 같은 좀더 현대적이고 좀더 가볍게 듣기 좋은 메탈코어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사실은 스킨드레드 끝나고 Five Fingers death punch를 하려고 했는데 이미 하신 분이 있어서 링크를 남겨둡니다.

https://blog.naver.com/lethisha

이 분 블로그엔 락/메탈 장르가 4500개 정도 번역되어 올라와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을만한 왠만한 락/메탈 밴드들은 다 있습니다. 아키텍츠의 초기 앨범들도 모두 올라와 있으니 가서 감상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저는 이 블로그에 없는 곡들을 왠만하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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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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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my jam(내가 좋아하는거야!)

 많은 실험들과 요소들이 합쳐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처음에 들었을 때 제 스타일이 아니라 나뒀다가, 영상이 재미있어서 올려봅니다. 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봐보시길 추천합니다. 영어나 가사 몰라도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사 해석하다가 알았는데 중간에 좀 저질인 야한 가사가 있네요=_=.. 아주 잠깐 이런 비슷한 가사가 다른 곡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최대한 은유적으로 쓰려고 해도 안 되네요 



[Pre-Chorus]
Every time that I get around ya
내가 네 주위를 돌아다닐 때마다
Something takes a hold of my soul
무언가 내 영혼을 사로잡는 것 같아
Staring me up until I can't get enough
내가 좋아 미칠 때까지 날 올려다 봐
When you move it makes my sweat turn cold
네가 움직일 때마다 난 전율해

[Chorus]
'Cause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And now I've got you in the palm of my hand
넌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있어
Get all dramatic, erratic, your moves are automatic
모두 과장되게 이리저리 움직여, 너는 이제 반응해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Post-Chorus]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Pre-Chorus]
Every time that I get around ya
내가 네 근처에 있을 때마다
Something takes a hold of my mind
뭔가 날 사로잡아
Three seconds time, I'm 'bout to redline, singing
3초만 기다려, 노래부르기 직전이거든
Ooh, yeah you shake it so fine
넌 괜찮게 흔드는 걸?

[Bridge]
'Cause when you move it slow, my bones start shaking
네가 천천히 리듬을 타면 내 몸이 전율하기 시작해
You move it slow, I can't stop
네가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난 이제 멈출 수 없어!

[Chorus]
'Cause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And now I've got you in the palm of my hand
넌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있어
Get all dramatic, erratic, your moves are automatic
모두 과장되게 이리저리 움직여, 이제 넌 너도 모르게 리듬을 타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I've got you in the palm of my hand
넌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있어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Cause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But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Verse] (가사가 너무 야하네요=_=.. 이런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You know I love the way the girl, them shake it up
여자들이 흔드는 게 너무 마음에 들어
Cyaan with men, only gyal, then make it up
남자들은 안 돼, 여자만, 그리고 짝을 지어
I love strong, I make way long, long, long up
난 센 걸 좋아해, 그리고 아주 아주 길게 할 수 있어
Drop the rythm and the gyal, then give it up
드랍 더 리듬, 그리고 여자들은 환장하지
Confidence from dusk till dawn

해질녘부터 새벽까지 자신 있어
Lock the door and turn the lights on

문을 잠그고 불을 켜
Exodus from the beat of me bone
뼈가 아작날 때까지
Now I'm crawling out by morning
난 이제 아침까지 기어다녀
Pour your sugar all over me

네 설탕을 모두 내게 부어
Wine that body, take you home with me
그 몸을 기름지게 해, 나랑 같이 가자
Feels so good you've got to raise your hands
아주 좋군, put your hands up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Pre-Chorus]
Every time that I get around ya
내가 네 주위를 돌아다닐 때마다
Something takes a hold of my soul
무언가 내 영혼을 사로잡는 것 같아
Staring me up until I can't get enough
내가 좋아 미칠 때까지 날 올려다 봐
When you move it makes my sweat turn cold
네가 움직일 때마다 난 전율해


[Chorus]
'Cause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And now I've got you in the palm of my hand
넌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있어
Get all dramatic, erratic, your moves are automatic
모두 과장되게 이리저리 움직여, 이제 넌 너도 모르게 리듬을 타
You're a freak for the rhythm, slave to the dance
넌 내 리듬의 광팬이고 댄스의 노예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Post-Chorus]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That's my jam
내 스타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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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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