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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2.18 음...
  3. 2014.02.17 칸토어의 무한수 2
  4. 2014.02.17 연애와 관련된 논리적 문제
  5. 2014.02.14 학문 3
  6. 2014.02.13 간만의 서울
  7. 2014.02.12 칸트와 랑시에르의 역사철학/정치철학에 대한 생각

 

경험론과 합리론

 

인식론적으로 경험론과 합리론은 '지식(혹은 인식)은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나누어진 입장입니다.

 

경험론은 '감각체계(오감)'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고, 합리론은 '이성(理性)' 혹은 '사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먼저, 대표적인 합리론자로는 데카르트가 있습니다.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죠.

 

쉽게 말해서, 인간의 존재규정이 '사유'로써 이루어지고, 지식이나 인식 또한 사유로써 타당성을 인정받는 다는 겁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크게 두 가지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1. 사유실체와 연장실체의 이원론

 

사유실체는 쉽게 말해서 '생각 그 자체'입니다. 사유안에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제거했을 때 남는 '사유의 틀'이죠.

 

연장실체는 '연장성(延長性)'을 내포합니다. 물질계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특정 공간들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걸 물질의 '연장성'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실체입니다. 사유실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유하고 규정지은 관념들이 물질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겠죠. 그래서 도입된 개념이 '연장실체'입니다. 사유실체와 독립적으로 연장성을 지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수학적으로는 연장실체 개념을 하나의 공리쯤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문제는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냐는 겁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가 사유함(사유실체)으로써 대상이 물질계(연장실체)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 두 대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다른 예로는, 우리가 '오른 팔 들어'라고 생각하고 팔에 명령을 내리는데, 명령(사유)과 행위(연장성)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런 이원론에 빠지고 나서부터 의학, 광학 등의 여러 분야를 공부합니다. '어떻게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가 관계를 맺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요. 뭐... 그래서 과학의 여러 분야가 발달했다고도 합니다.

 

 

2. 기계론적 사고관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철저히 '사유'를 중요시합니다. 사유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사유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철저한 사고관은 단 한가지 기준으로 존재를 판명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획일화합니다. '사유'로요. 그래서 세계를 연역적인 것으로만 판단하고,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기계론적 사고관이지요.

 

 

 

 

넘어와서, 경험론은 이에 대립하는 입장입니다. 대표적으로 로크와 흄이 있습니다.

 

경험론은 우리의 지식이나 인식을 모두 '경험가능성'을 기준으로 나눕니다.

 

감각기관에 의해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절대자(신)는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경험론적 입장에서는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험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경험불가능성의 문제

 

 

 우리는 '자아'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자아는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일까요?

 

 경험론적으로 자아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계' 자체는 경험가능할까요? 역시, 경험론자들에게는 경험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엄청난 문제를 불러옵니다. '경험가능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게 된다면, 존재하게 되는 건 없을 수도 있게 되니까요.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관념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교관념, 양상관념, 크기관념 등

 

근데 이것들은 경험가능할까요?

 

인식론적인 언어로 이런 문제를 '결합'의 문제라고 합니다. 대상과 대상을 엮는 관념이 결합이죠.

 

경험론적으로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경험론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2. 결합문제의 주관성

 

A와 B라는 대상이 인식론적으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결합관계는 세 가지 양상관계를 지닐 수 있겠군요.

 

즉, A와 B의 결합관계는 우연성, 개연성, 필연성 중에 한 가지를 만족하게 됩니다.

 

경험론에 따르자면, 우리가 대상과 대상을 결합시켰을 때, 그것들이 결합관계를 갖는 것은 주관적이라고 합니다. 즉, 필연성이 없고 개연적이거나 우연적이라는 것이죠. 경험론의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연성'이 더 타당합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흰우유만 제품으로 생산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거기서 자란 사람은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초코우유 등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겠지요.

 

따라서, 그 지역사람들은 '우유는 흰우유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우유들도 생산하고 유통합니다. 그렇다면, 흰우유만 우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합관계(우유와 흰우유)는 필연적인 걸까요?

 

아닙니다.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죠. 다른 지역에 태어났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따라서, 경험론에서 결합관계는 필연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더 나아가 경험체계와 '학문의 위기'를 뜻합니다. 학문이란 대상과 대상사이를 관념들로 엮고, 결합을 시켜놓은 것들의 체계인데, 결합관계 자체가 필연성이 없다면 학문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학문은 그저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게 되니까요.

 

 

경험론의 문제점들은 이와 같습니다.

 

 

 

칸트 이전 18세기까지는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이 서로 접점없이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칸트는 이런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

음...

일상 2014. 2. 18. 00:45

 

 

본전공이 철학인데 학문 포스트는 수학이 압도적으로 많다ㅠㅠㅠㅠ

 

논리학 배우면서 내가 형이상학을 도외시한 건 아닌지...

 

여튼 예전에 기획해두었던 칸트 인식론과 소크라테스~플라톤 이데아론 작성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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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

 

 

무한집합을 수로 나타낼 수 있는가

 

 

칸토어는 흄의 원리를 이용해서 무한수들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포스트했듯이 흄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F=#G  ↔ F≈↔ ∃R[∀x(Fx→∃1y(Rxy ∧ Gy) ∧∀y(Gy→∃1x(Ryx ∧ Fx))]

 

수가 같다는 말의 동치는 개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유한집합뿐만 아니라 무한집합의 경우에도 이 원리를 적용하여 수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 무한수들을 언급하기 전에 수학적인 개념 몇개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denumerable : 자연수 집합과 일대일 대응가능하다

(한글로 가산可算이라고 번역하던데 엄밀한 의미에서 틀린 말입니다. 자연수 집합 자체가 무한집합인데, 무한을 셀 수는 없죠)

 

countable : finite or denumerable. 유한하거나 denumerable함을 뜻합니다.

 

uncountable : 무한하면서도 자연수 집합과 일대일 대응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Denumerable set

 

 

denumerable set에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집합이 있습니다.

 

즉, '자연수의 수=정수의 수=유리수의 수'입니다.

 

물론 자연수의 수가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있겠지만(더 나아가 무한수가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논쟁), 여기서는 그런 논쟁들은 나두고 자연수의 수가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따르기로 합니다.

 

집합론에서는 무한수를 로 표기합니다. aleph(알레프)라고 읽습니다. 최초의 무한수는 0로 자연수 집합의 수와 동일합니다.

 

0와 같은 수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집합의 수입니다. 모두 0로 같은 수입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흄의 원리를 이용합니다.

 

 

자연수 집합은 '0과 그 다음수 관계'를 만족하는 대상들의 집합입니다.[각주:1]

N={0,1,2,3,4...}입니다.

 

집합들 사이에 수가 같기 위해서는 흄의 원리에 의해서 집합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성립해야 합니다.

 

먼저 정수와 자연수의 수를 비교해봅시다.

 

 

모든 자연수는 0 1 2 3 4 등으로 이어지는 모든 수이고, 모든 정수는 … -3 -2 -1 0 1 2 3 … 등으로 이어지는 수입니다.

 

이 수들을 이렇게 대응시킬 수 있겠습니다.

 

 

자연수 

 0

 정수

-1 

-2 

-3 

 3

-4

… 

 

 

이렇게 대응시킨다면, 자연수와 정수는 일대일 대응가능합니다.

 

모든 자연수를 나열하더라도 반드시 정수 하나가 대응될 수 있고, 모든 정수를 나열하더라도 반드시 자연수 하나와 대응될 수 있습니다. 두 집합은 완벽한 일대일 대응이라는 겁니다.

 

이런 관계는 양의 정수, 음의 정수에도 똑같이 나타나며, 홀수 짝수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모두 0로 같은 수입니다.

 

 

유리수는 어떨까요?

 

분모/분자 

-1 

-2 

 1 

 0 

 1

-1 

 2

 -2 

 2

 0

 1/2

 -1/2

 1

 -1

 3

 0

 1/3

 -1/3

 2/3

 -2/3

 4

 0

 1/4

 -1/4

 1/2

 -1/2

 5

 0

 1/5

 -1/5

 2/5

 -2/5

 

 

이런 식으로 나열한다면 유리수를 모두 나열할 수 있습니다.

 

위같은 표를 일정한 규칙으로 순서를 매긴다면, 위같은 표는 모두 자연수와 대응되게 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수를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제외한다면 유리수 집합 Q가 되겠죠.

 

저 표에서 반복되는 것들을 지우고, 순서를 매긴다면 자연수 집합과 유리수 집합 또한 일대일 대응하게 됩니다.

 

흄의 원리에 의해서 역시, 자연수 집합의 수와 유리수 집합의 수도 0로 같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수로 보면 짝수=홀수=자연수=정수=유리수=0입니다.

(더 나아가 무한집합 중에서 자연수, 정수, 유리수의 부분집합인 것이 있다면, 그 무한집합은 0값을 가지게 됩니다.)

 

 

Uncountable set

 

 

위에 나열된 집합들과는 다르게 실수의 집합은 non-denumerable합니다.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Cantor's diagonal argument)으로 이를 증명합니다.

 

모든 실수를 나열한다고 합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하다보면 모든 실수를 나열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실수를 제시하더라도 그 실수는 반드시 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라는 수를 정의합시다. 소수점 이하 i+1번째 자리에서 실수ri의 자리수인 dii와 다른 수를 ei로 정의하자는 겁니다.

 

가령 r0의 첫번째 소수자리수가 1이라면 e01이 아닙니다. r2의 세번째 소수자리수가 3이라면 e23이 아니죠.

 

 이런 식으로 해서0.e0e1e2e3....를 만들 수 있습니다.

 

 e0d00이 아니고, e1d11이 아니고 endnn이 아니기 때문에 rii+1번째 소수자리수 dii에 대해서 diien입니다.

 

 따라서 임의의 i에 대해서 0.e0e1e2e3....는 실수 ri의 배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실수의 나열에 위 수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말이죠.

 

이는 실수를 나열할 수 있다는 것에 모순이고, '나열'이라는 것에 자연수의 나열과 대응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실수와 자연수는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물론 이 자체가 '자연수의 수 < 실수의 수' 라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 다른 theorem이 필요합니다.

 

자연수는 실수의 부분집합이고, 실수의 집합과 자연수의 집합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연수의 수보다 실수의 수가 더 크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수의 수보다 실수의 기수가 더 크고, 이는 실수집합 R이 uncountable(non-denumerable)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 실수의 기수(cardinality of the continuum)를 20라고 합니다. 자세한 증명은 칸토어가 제시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연속체 가설(continuum hypothesis)이란 게 있습니다.

 

수식으로 A:0<|A|<20 혹은 |R|=1으로 표기됩니다.

 

즉, 최초의 무한수인 0의 다음수 1가 실수집합의 크기인 20라는 가설이죠.

 

쿠르트 괴델과 폴 코헨이 ZF(C) 공리체계에서 연속체 가설이 결정불가능함을 증명함으로써 연속체 가설은 현재까지는 미지수로 남아있습니다.

 

 

  1. 통상적으로 자연수를 1부터 정의하기도 하지만, 제 모든 포스팅은 자연수를 0부터 시작하는 수학자들의 논리를 따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

후... 글이 두번 모두 날라갔습니다. 버스에서 맛폰으로 끄적끄적하다가 두 번다 날라가버려서, 왠지 임시저장에도 남아있지 않네요. 그래도 언젠가 쓰려고 했던 글이니 다시 써봅니다.

 

 

 

 우선, 연애를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를 포함해서 '두 사람이 서로를 성(性)적으로 사랑하여 지속적으로 만나는 계약관계'로 정의합시다. 이 정의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연애'관념이 모두 들어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연애의 대상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첫인상, 삘(?), 손, 다리, 눈썹, 외모, 몸매, 성격, 학벌, 재산, 직업, 가정, 취미 등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습니다.

 

 기준이 어떤 것이든 상관은 없지만, 만약 타인을 연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연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n명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를 고를 수 있는 선택자가 이들 개개인을 구별하는 '판단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준이 없다면 n명 모두가 구별되지 않고 똑같이 인식될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n명 중에서 누구를 연애의 대상으로 택할 수 있을까요?(누구를 뽑아도 상관없다)

 

기계적인 확률로는 1/n이 될 겁니다. 모두가 구별되지 않으니 '누구를 뽑아도 상관없다'는 논지에서 아무나 뽑는 것이죠.

 

하지만 실질적인 확률은 0입니다. n명 중에서 1명을 뽑는 경우의 수는 '주머니에 n명의 이름을 넣고 한 명을 뽑는 행위'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주머니에서 뽑는다'는 기준입니다. 만약 이런 기준자체가 부재한다면, 우리는 아무도 뽑을 수 없습니다. 기준 자체가 부재한다면 '아무라도 뽑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라도 뽑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니까요.

 

 즉, 만약 우리에게 연애'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도 (성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연애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지요.

 

 

 연애를 하는데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필연성을 보장받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고 스스로를 재고 연애를 해야 할까요?

 

그건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연애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그 행위를 위한 기준 또한 개인적인 문제이며 책임입니다. 무엇을 기준의 내용으로 채택하든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죠. 다만 제가 언급할 것은 그 기준들에 대한 '틀' 혹은 '형식'일 뿐입니다.

 

 

연애를 하는데는 여러 가지 기준들이 있을 수 있고, 또 그 기준들에 대한 '농도'가 있을 겁니다.

 

가령 손이 예쁜 것에서 매력을 느낀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농도는 보편적으로 0~100%안에 속하겠죠.

 

0이라면 손 자체가 없는 경우일 수 있겠고, 50이라면 평범한 손, 100이라면 완벽한 이쁜 손(아마 현실에는 없을 겁니다)일 겁니다.

 

 

이런 기준들과 농도를 가지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상대방이 만족하는 여러 기준들과 농도들을 수치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연애하는 상대방이 x의 수치를 만족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x<y를 만족하는 y의 수치를 가진 상대방이 당신을 사랑하고, 이를 고백했다고 합시다.

 

단순 수치로는 y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따라서 확률적으로는 'x를 버리고 y로 갈아탈 가능성(개연성)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건 단순히 연애상황이 아닌 기준들로만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가령 x와의 연애를 지속해옴으로써 말미암는 보수성이 있을 겁니다. 보통 '정(情)'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로 압니다.

 

또한 연애 도중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주는 장점들과 만족감들이 있을 겁니다.

 

이와는 반대로 기존의 연애가 주는 부담감들과 단점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x와 y의 수치적인 비교에서 실질적으로 x에는 보수성(정)과 장점+단점(부담감)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투영하는 기준들을 외에도 '버린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생기는 개인적인 위험성들(책임감 포함)과 장점들도 있겠군요.

 

 

이런 비용들과 판단들을 모두 총체해서 z라는 값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x와 y의 단순비교에서 x+z와 y의 비교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 정도 즈음에서 x<y(비용과 부담을 모두 제외하고 단순히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경우)와 x+z<y라는 결과가 있다고 합시다.

 

많은 경우의 수를 포함한 x+z<y가 x<y보다는 보편적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x+z<y인 y라는 수치를 만족하는 대상이 당신에게 고백했다고 합시다.

 

제가 나열한 여러 가지들을 고려한다면, 논리적으로 (거의 완벽히) 기존의 연애대상보다는 y를 만족하는 대상으로 옮기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는 확률적으로 'x+z를 버리고 y로 갈아탈 가능성(개연성)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뭘까요?

 

x+z에서 y로 연애를 옮겨왔습니다. 만약 y를 넘어서는 다른 대상이 자신에게 고백한다면 다시 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수치적으로 맞죠.

 

그런데, 이 문제는 무한적입니다. 다른 대상이 더 낫다면 또 옮길 수 있고, 더 더 나은 대상이 있다면 옮길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글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현재 연애대상이 질리고(x는 충족하여 사귀었으나 z의 값이 -x보다 작음), 마침 다른 사람이 고백했다는 것. 

 

이런 경우 연애대상을 바꿀 수 있고, 그러는 것이 수치적으로는 타당합니다.

 

문제는 이 경우가 무한소급적이라는 것이죠.

 

 

...

 

제가 생각해왔던 논지들은 대충 이 정도입니다.

 

연애의 무한소급문제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문제는 일단 글에서 제외했습니다.

 

이 이후의 논의들은 대충 머리에 구상해둔 것들이 있긴 한데, 너무 복잡해서 서술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논지라 쓸 수도 없구요.

 

 

이후의 논지를 대충 끄적여 보자면, 인간을 determined existance로 인식할 것인가, changing existance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수치적으로 환산하여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인가, '도구'적인 존재인가 '목적'적인 존재인가도 문제이겠군요.

 

연애대상의 무한소급문제가 타당한 것인지 타당하지 않은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논쟁이 있겠군요.

 

더 많이 고민해보고 나중에 성과를 글로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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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일상 2014. 2. 14. 10:43
은 끝이 없다.

배우고 생각할 수록, 간학문이 답인 것 같다.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해야 할 일은 많다.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라 단언을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계획은 있다.

...


21학점이라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번 학기에 고등학교 이과수학을 모두 봐야한다. 안그러면 수학 이중이 힘들어지고, 졸업시즌도 늦어질 거다.

정말 자는 시간, 노는 시간을 줄이고 사서 고생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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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서울

일상 2014. 2. 13. 11:48
수련회 애프터가 있어서 서울에 왔다.

2달만이다. 서울 온 겸해서 도서관에 들러 다음학기 전공도서를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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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서울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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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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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론을 배우고 나서 상당히 거슬리는 용어가 하나 생겼다. '모든' 이라는 것. 칸트의 역사철학은 '역사는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로 일축된다. 배울 땐 몰랐는데, 집론을 배우고 나니 저게 다른 의미로 느껴지더라.

모든 능력이라 함은 '살인' '폭력' '전쟁' 등의 부정적인 능력들도 기른다는 것. 그럼 모든 능력이 개발되면, 한 인간은 '신'임과 동시에 '절대악'도 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선과 악이 절대치로 다다른 능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건, 형식논리적 문제가 있지 않을까.

수비교의 정리 중에 하나는 a<b v a=b v a>b가 모든 실수 a b에대해서 성립한다는 것. 이는 실수의 성질인 양수 음수 영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비슷하게 능력의 성향을 비교해서 모든 능력을 positive negative neutral로 나눠볼 수 있겠고, 3성향을 벗어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실재론 전제). 능력의 범주를 저렇게 두고 능력의 전체집합 A(ability)을 세울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집합 A가 유한집합이든 무한집합이든 문제가 있다.

유한하다면, 러셀의 역설을 피할 수 없다.

무한하다면,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근데 이는 불확정요소로써 알 수 없는 바이지만, 인류가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역사는 끝나므로 문제다.


모든 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랑시에르도 마찬가지다.

정치를 모든 치안에 항쟁하는 걸로 정의하고, 민주주의를 '모두가 자신의 지성에 도움을 받아 말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전자의 모든은 크게 문제가 없다(뭐 의미론적으로 따지면 복잡하다만). 후자의 모두는 칸트와 비슷한 문제가 있다.

모두가 말하는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다. 지금 세태만 봐도 알지 않는가. 말 중엔 positive를 의도하는 것도, negative를 의도하는 것도 있다. 근데 모든 말이 허용된다면 악플러들이나 정치비방, 헛소문들도 그냥 나둬야한다. 길거리에서 욕하는 것도 허용된다. 한마디로 카오스.

내 의견으로는 차라리 칸트처럼 '사상과 비판, 표현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는 구조' 식으로 전개했으면 한다.

내가 쓰긴 했지만 뭐... 랑시에르에 대한 이런 수준의 비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에게도 별 흥미가 없다. 이 수준에서 더 나아가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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