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과 합리론

 

인식론적으로 경험론과 합리론은 '지식(혹은 인식)은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나누어진 입장입니다.

 

경험론은 '감각체계(오감)'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고, 합리론은 '이성(理性)' 혹은 '사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먼저, 대표적인 합리론자로는 데카르트가 있습니다.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죠.

 

쉽게 말해서, 인간의 존재규정이 '사유'로써 이루어지고, 지식이나 인식 또한 사유로써 타당성을 인정받는 다는 겁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크게 두 가지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1. 사유실체와 연장실체의 이원론

 

사유실체는 쉽게 말해서 '생각 그 자체'입니다. 사유안에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제거했을 때 남는 '사유의 틀'이죠.

 

연장실체는 '연장성(延長性)'을 내포합니다. 물질계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특정 공간들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걸 물질의 '연장성'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실체입니다. 사유실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유하고 규정지은 관념들이 물질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겠죠. 그래서 도입된 개념이 '연장실체'입니다. 사유실체와 독립적으로 연장성을 지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수학적으로는 연장실체 개념을 하나의 공리쯤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문제는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냐는 겁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가 사유함(사유실체)으로써 대상이 물질계(연장실체)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 두 대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다른 예로는, 우리가 '오른 팔 들어'라고 생각하고 팔에 명령을 내리는데, 명령(사유)과 행위(연장성)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런 이원론에 빠지고 나서부터 의학, 광학 등의 여러 분야를 공부합니다. '어떻게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가 관계를 맺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요. 뭐... 그래서 과학의 여러 분야가 발달했다고도 합니다.

 

 

2. 기계론적 사고관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철저히 '사유'를 중요시합니다. 사유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사유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철저한 사고관은 단 한가지 기준으로 존재를 판명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획일화합니다. '사유'로요. 그래서 세계를 연역적인 것으로만 판단하고,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기계론적 사고관이지요.

 

 

 

 

넘어와서, 경험론은 이에 대립하는 입장입니다. 대표적으로 로크와 흄이 있습니다.

 

경험론은 우리의 지식이나 인식을 모두 '경험가능성'을 기준으로 나눕니다.

 

감각기관에 의해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절대자(신)는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경험론적 입장에서는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험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경험불가능성의 문제

 

 

 우리는 '자아'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자아는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일까요?

 

 경험론적으로 자아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계' 자체는 경험가능할까요? 역시, 경험론자들에게는 경험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엄청난 문제를 불러옵니다. '경험가능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게 된다면, 존재하게 되는 건 없을 수도 있게 되니까요.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관념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교관념, 양상관념, 크기관념 등

 

근데 이것들은 경험가능할까요?

 

인식론적인 언어로 이런 문제를 '결합'의 문제라고 합니다. 대상과 대상을 엮는 관념이 결합이죠.

 

경험론적으로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경험론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2. 결합문제의 주관성

 

A와 B라는 대상이 인식론적으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결합관계는 세 가지 양상관계를 지닐 수 있겠군요.

 

즉, A와 B의 결합관계는 우연성, 개연성, 필연성 중에 한 가지를 만족하게 됩니다.

 

경험론에 따르자면, 우리가 대상과 대상을 결합시켰을 때, 그것들이 결합관계를 갖는 것은 주관적이라고 합니다. 즉, 필연성이 없고 개연적이거나 우연적이라는 것이죠. 경험론의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연성'이 더 타당합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흰우유만 제품으로 생산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거기서 자란 사람은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초코우유 등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겠지요.

 

따라서, 그 지역사람들은 '우유는 흰우유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우유들도 생산하고 유통합니다. 그렇다면, 흰우유만 우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합관계(우유와 흰우유)는 필연적인 걸까요?

 

아닙니다.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죠. 다른 지역에 태어났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따라서, 경험론에서 결합관계는 필연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더 나아가 경험체계와 '학문의 위기'를 뜻합니다. 학문이란 대상과 대상사이를 관념들로 엮고, 결합을 시켜놓은 것들의 체계인데, 결합관계 자체가 필연성이 없다면 학문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학문은 그저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게 되니까요.

 

 

경험론의 문제점들은 이와 같습니다.

 

 

 

칸트 이전 18세기까지는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이 서로 접점없이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칸트는 이런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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