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서평

 

저자일본서기의 각 사료 안에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또한 일본서기각 사료간의 관계를 따져서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것들을 입증하기 위해서광개토대왕비문,송서,삼국사기,신찬성씨록등의 사료와 고고학적 연구결과 등을 인용하여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했다. 따라서 책에 실린 저자의 연구결과는 대부분 타당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자는 신공황후(징구우황후) 49년조 기사에서 일본이 강진을 남만(南蠻)으로 표현한 것에서 군대가 백제 것임을 파악했다. 또한 파견된 세 장군 중에서 '아라따와께·카가와께란'이 허구일 가능성이 높음을 밝혔다. 그리고 남은 장군인 목라근자의 성인 목()이 백제의 성임을 밝혀냈고,삼국사기를 통해 목만치가 실존인물임을 밝혀냈다. 따라서 사실관계로만 보자면, 백제장군인 목라근자가 신라 격파 후 가야7국을 정벌하고 마한지역을 정벌한 것이다. 이것은 근초고왕 당시 마한지역 정복사실과도 합치하므로 징구우황후 49년조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논쟁에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왜의 활약을 밝혀낸 것이 그 일부가 되겠다. 저자 말대로 내륙을 거쳐 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야와 백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임나·백제는 일본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 한다. 게다가 백제와 가야를 통과하기 때문에 404년 기사에 왜()로 대표되는 세력은 왜·가야·백제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논증을 통해 그 주체를 백제로 판명했다. 396년의 기사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패배했기 때문에 복수의 명분이 있다. 또한 백제는 397년에 직지를 인질로 야마토 정권에 보냈다. 일본에 고대국가 발전에 필요한 철() 등을 보내었고, 일본은 400년과 404년에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따라서 선후관계로 보았을 때 일본은 백제의 용병으로 온 것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제시한 더 확실한 증거는 가야와 왜가 그 주체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연맹왕국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왜와 백제를 동원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또한 일본은 백제를 영향 하에 두었다는 자료도 없고 그 명분도 없다. 이런 자료들을 보았을 때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나는 백제·가야·왜로 대표되는 왜는 백제가 그 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신공황후 49년조와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를 제외하고도 백제와 임나의 관계, 한반도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 백제 왕조와 야마토 왕조의 혈연관계, 소가(蘇我)씨의 도래인(渡來人), 염수진의 백제계설 등은 타당하고 반박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것을 밝히려면 저자의 모든 주장에서 그 근거와 자료들을 제시해야 하겠지만,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 나타난 모든 자료들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두 사례만 제시했다. 그러나 저자의 대부분의 주장이 타당하고 신빙성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주장이나 근거들은 수정·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왕과 목만치에 관한 일부 내용이 거기에 해당된다.

우선 저자는 야마토 정권이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나는 400년과 404년 전투에서 야마토 정권의 역할(백제의 용병)을 한 세대가 지나자 잊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세대가 지나 전쟁이 왜가 주체인 무용담으로 남아서 중국에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를 요청했다는 주장이다.송서』「왜전에는 찬()이 죽고 아우 진()438년에 왜왕에 등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형제인 찬()과 진()은 동시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 같은 세대의 사람이고, ()이 죽기 전까지 왕족이었을 진()이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진()에 이르러, 400·404년 전투의 주체를 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잠시 보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이 송에 보낸 관직 요청에는 어떠한 의도가 담겨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당시의 백제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직지왕(直支王)과 그 아들인 구이신왕(久爾辛王)을 살펴보아야 한다. 일단 저자가 직지왕의 부인인 팔수부인(八須夫人)을 일본 천황가 사람이라고 한 것은 동의한다. 그렇다면, 직지왕과 팔수부인의 아들인 구이신왕은 반쪽은 백제인이고 반쪽은 일본인라고 말할 수 있다. 427년에 구이신왕이 요절하고, 비유왕이 왕위에 오른다. 비유왕은삼국사기에 구이신왕의 아들인지 전지왕(직지왕)의 서자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라 직지왕의 서자로 생각된다.

구이신왕은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재위기간이 8년이라서 19~20살에 죽었을 것이다.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즉위할 때, “외모(外貌)가 아름답고 구변(口辯)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추중(推重) 을 받았다라고 나와있다. 비유왕이 즉위할 때 이미 성인이었다는 의미다. 구이신왕의 나이를 봐서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라 직지왕의 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비유왕이 구이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일본서기응신기 25년조에 “25년 백제 직지왕(전지왕)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모와 서로 정을 통하고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목()씨 일족과 왕모인 팔수부인이 결탁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구이신왕 즉위 당시 12살이었으므로 왕모인 팔수부인이 섭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직지왕은 아신왕까지 주된 세력이었던 진씨(眞氏)를 누르고 해씨(解氏)의 옹립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하여 직지왕 당시 해씨세력인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해수와 해구를 각각 내법좌평, 병관좌평에 임명했다. 아마도 구이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팔수부인은 해씨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응신기 25년조와 같이 목씨와 결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선 논의에 따르면 비유왕은 직지왕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다. 직지왕의 제1부인은 일본인인 팔수부인이므로, 비유왕이 서자라고 한다면 직지왕은 제2부인을 두었을 수밖에 없다. 비유왕이 왕위에 오르고 해씨세력인 해수(解須)를 상좌평으로 둔 것을 보면 제2부인은 해씨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직지왕의 외척세력도 해씨인 것으로 보아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유왕은 해씨의 아들이고, 해씨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씨세력이었던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목씨세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왕은 팔수부인과 목씨세력을 숙청하고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서술한 백제사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비유왕은 이복형제인 구이신왕을 죽이고, 그 세력이었던 팔수부인과 목씨세력을 숙청하고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의 말처럼 5~6세기에는 일본과 백제의 왕실이 인척관계/혈연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에, 일본은 반정을 일으킨 비유왕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왜의 진()왕 등은 자국인 왜와 함께 백제 세력권인 백제·임나·모한의 군사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또한양직공도에서 신라를 백제의 방소국(旁小國)으로 나타내고 있고 양서에서도 신라는 스스로 사절을 보낼 수 없어서 백제를 따라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433년의 나제동맹은 동등한 관계라기보다 백제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라 세력권인 신라·진한또한 왜왕이 군사권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송에 요청한 것이 438년인 것으로 보아, 나제동맹(433)의 이후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왜왕 찬은 송에 4번 조공을 바치는데, 각각 413·421·425·430년이다. 구이신왕은 427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찬이 관직을 요청할 수 있는 건 430년뿐이다. 찬이 왜 430년에 작위를 요청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록을 가지고 조금 추측해볼 수는 있다. 송서』「왜인전421년에는 왜 임금 찬()이 만 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정성을 널리 밝히는 것이 마땅하므로 벼슬을 내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찬은 송에서 관직을 주는 것을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찬이 받지 못한 채 죽었으므로 동생인 진이 즉위하자마자 대신 관직을 요청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소가(蘇我)씨족에 관한 의문이다. 소가씨의 이름이 소가도목을 제외하고 모두 한반도의 이름이라는 것, 부상략기신찬성씨록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소가씨는 백제 목()씨의 후예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목만치가 475년 웅진천도 때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을 지는 의문이 든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개로왕은 문주에게 난을 피해서 나라의 계통을 보존하라고 했다. 그래서 목협만치·조미걸취·문주는 남쪽으로 갔다., 475년에 남쪽으로 하강하여 웅진으로 천도한 것이다. 또한 문주왕 1년조에는 개로왕이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여 문주는 병사 1만을 얻었다고 나온다. 두 사료를 합치면, 개로왕은 문주에게 남쪽으로 세력을 옮기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주와 함께 갔던 목()만치는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신라에 간 것이다. 물론, 개로왕은 세 명을 남쪽으로 보냈으나 문주왕이 남쪽 세력 중에서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문주왕 1년조에는 개로왕이 문주를 신라에 구원 요청하도록 보냈다라고 기록했을 수 있다. 하지만, 475년 당시 고구려군과 백제군이 이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구원을 요청한다면 지리상으로 가깝고 세력이 큰 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전쟁 중이라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건 신라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433년에 맺어진 나제동맹도 있고, 한반도 내에서는 가야보다는 신라의 세력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일본은 백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야마토 정권에 사람을 보내어 용병을 받고 다시 한성으로 건너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게다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바다가 있으므로 시간은 상당히 지체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개로왕이 문주를 신라로 보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혹자는 문주는 신라로, 목만치는 일본으로 구원 요청을 하러 갔을 수도 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일본서기응신기 25년조에 목만치의 도일(渡日)이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목만치가 구원요청을 하러 야마토 정권으로 갔다면, 야마토 정권에서 백제에 군대를 보낸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삼국사기문주왕 기록에는 왜에 관련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자료가 없는 이상 목만치는 475년에 일본에 건너간 것이 아니라 문주와 함께 신라에 구원요청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목만치가 도일했다는 것은 크게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부상략기신찬성씨록의 기록으로 인하여 소가씨가 목()씨의 후예임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만치(木滿致)와 소가만지(蘇我滿智) 이름의 유사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목만치가 475년 전투 때 건너갔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다른 자료들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응신기 25년조의 기록이 414년이냐 420년이냐 475년인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앞서 제시한 삼국사기의 개로왕·문주왕 내용을 목만치와 함께 고려해야하고, 목만치가 475년 전투에 건너갔음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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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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