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과 달관에 관하여ㅡ체념과 달관의 반전ㅡ

 

전개될 글에서 체념이란 외부세계의 조건들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체화하여, 포기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내적 상태, 달관이란 외부세계에 대한 개념틀을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초월하여 외부세계를 그 자체로 관조하는 내적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다소 이해하기로 한다.

일반적인 언어사용과 대중인식에 있어서 체념달관의 비교는 대부분 달관을 옹호하는 쪽으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체념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느끼게 되는 개념적 연관·감정과, ‘달관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느끼게 되는 것들은 매우 상이하다. 전자의 맥락에는 항상 부정적인 상황과 단어들이 전제되어 있고, 후자의 맥락에는 적지 않은 긍정적인 것들이 전제되어있다. 혹은 전자는 기피되어야 할 것으로, 후자는 추구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좋음의 상태로 인식되어 있다. 이런 인식은 대중뿐만 아니라 개념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있다. 장자를 기반으로 한 도가철학뿐만 아니라, 조선유학의 기풍에도 그런 관념들이 퍼져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들은 항상 옳지는 않으며, 오히려 달관하는 삶보다는 체념하는 삶이 더 좋을 수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달관하는 삶이 언제나 좋지는 않음을, 혹은 달관을 추구하려는 삶 자체가 좋지 않을 수 있음을 서술하고자 한다.

서술된 달관의 정의로부터, 그리고 달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들로부터 달관은 달관을 추구하는, 혹은 달관에 도달한 개인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항상 옳지는 못한데, 달관은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달관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개인에게 평안이 아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달관이란 도추의 관점에서 세계를 그 자체로 바라봄으로서 얻게 되는 평안의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태다. 비트겐슈타인 후기 사상 이후 나타난 언어적 전회의 관점에서 도추의 관점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왔던 여러 환경들과 배경들로부터, 지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항상 여러 문맥들과 언어적 상황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속한 언어·사회공동체로부터 달아나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제나 특정 관점을 전제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개념틀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도추나, 먼 상공을 비행하는 붕새의 관점은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관조의 관점, 달관의 관점 역시 언어를 통해 상상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언어 안에 있는 것이지 결코 언어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관조란 인간이 태어나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여 개념을 살아가는 이상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이데아적 세계에서는 가능한 이상적인 관점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음을 분명하다. 그러나 달관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달관을 추구하는 삶이 결코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상태에는 도달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상적인 상태를 상상적으로 가정하고 그 인간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달관이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달관을 추구하는 삶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달관을 추구하는 삶을 살펴보도록 하자.

달관이 현실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상태이지만, 그것을 쫓아가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이 달관이라면, 삶을 살아가면서 달관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에 무한히 다가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노력이 지속된다면, 달관하는 삶을 추구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달관에 더더욱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불교에 막 입문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주지스님이 되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불교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불교적 인간상, 불교적 진리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이런 관점에도 치명적인 공격이 있다.

특정 삶을 전제하고 살아가는 것, 특정 인간상을 전제하고 살아가는 것은 항상 그 뒤에 고통을 수반한다. 아무리 달관하는 삶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달관은 도달될 수 없고, 달관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달관하지 못하는 부분은 남아 있다. 물론 달관을 추구함으로서 달관하지 못하는 불안의 감정들, 평안하지 못한 것들을 조금씩 줄여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구하는 대상이 결코 소유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언제나 달관하지 못하는 모습들, 부정적인 감정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달관이라는 하나의 상()이라는 절대적인 모습과 괴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괴리에서 나타나는 효과란 어쩌면 달관을 뛰어넘는 괴로움을 낳을 수도 있다. , 달관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어쩌면 달관에서 멀어져서 괴로움과 불안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달관을 추구하는 삶은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쁠 수 있다. 달관과 달관을 추구하는 삶이 부정된 이제 체념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체념이란 일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회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체념하는 삶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체념이 좋음의 상태일 수도 있다. 체념은 외부세계의 조건에 대해서 좌절하여 자신의 목표 등을 포기하거나 외부세계의 조건에 순응함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체념에 대해서 많은 경우 체념이 어떤 절대적인 나쁨의 상태에 있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령 현대 일본에서 나타나는 사토리족의 사례나, 부당한 사회적 폭력에 대한 순응·체념은 누가 보기에도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사례 외에 체념이 긍정적인 효과를 낫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누군가 특정 목표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것을 거의 포기한 채로 체념하고 있다고 하자. 체념하는 상태에만 계속 머문다면 좋지 않을 수 있으나, 체념할 수밖에 없다면 상황을 직시하고 목표를 수정하거나 버리고 다른 것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체념은 목표를 버릴 수밖에 없음을 체념하고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사족을 달자면, 달관은 이런 상황에 필요하지 않다. 부정적인 현실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그 자체로 인정하며 평안을 누리는 것은 현실부정에 불과하며, 현실의 상황을 바꿀 원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부정적인 현실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달관하여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의 상황에 부정적인 감정을 체화(體化)한 후에 체념을 통해 어떻게 목표를 다르게 설정할 것인가이다.

개인적인 차원 외에, 사회적 차원에서 특정한 경우 체념이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다수에 의해 좋다고 여겨진 사회가 있고, 근본적인 부분에서 소수의 반대자가 있을 경우 만약 소수가 그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면, 소수에게 필요한 덕목은 사회에 대한 체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혼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는 사회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동의된 규칙에 의해서 결정하게 되는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규칙에 의한 결정이 이루어질 경우 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은 공동체를 위해 결정에 체념해야만 한다. 그 외에도 정치적인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자신의 입장에 체념하게 만들 것인가이다. 이런 관점들에서 체념은 필요하며 정당화된다.

전체적인 논의를 정리하자면, 달관은 도달할 수 없으며 달관을 추구하는 삶 또한 삶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 차원에서 체념은 기존의 목표를 버리거나 수정함으로 다른 방향으로의 이행을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또한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합의된 규칙들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체념이 요구되고, 그런 점에서 체념은 특정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개개인들에게 요구되는 좋은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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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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