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보고서

<타자로의 초월을 통한 새로운 윤리학적 모델의 제시를 중심으로>

 

 

레비나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 사건으로 가족을 상실하는 사건을 겪게 된다. 또한 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군인포로로 잡혀 눈앞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는 것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레비나스는 이 사건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며,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사유했다. 시간과 타자및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이 사건을 문제의식으로 뿌리 깊게 가지고 있으며, 철학이라는 틀 안에서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낸 기존의 서양철학 전반을 분석하고, 또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기반을 기존의 서양철학 전체로 지목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기존의 서양철학은 타자를 타자로 두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 안으로 환원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들 철학에서는 타자의 존재가 배제되었었다. 타자 배제는 나와는 다름을 무시하고 그들을 단일적으로 나의 관념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런 철학에 다양성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수적인 다양성일 뿐이며, 환원되지 않는, 환원할 수 없는 질적인 다양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철학은 근본에 있어 전체주의적이다. 이런 철학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의 존재와 가치를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주장하며, 따라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를 거부하고 말살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이런 전체주의 철학은 히틀러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철학적 토대였다. 유대인 민족은 독일에서 계속 해서 거주했던 전통 게르만 민족과는 분명 다른 민족이었다. 즉 유대인 민족은 독일에서 다름을 소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히틀러주의는 유대인민족의 다름이라는 속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게르만 민족의 절대성을 토대로 삼았다. 이는 기존의 서양철학이 답습했던 타자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타자를 말살하는 철학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레비나스는 이런 실존적인 비극을 인지하고, 또한 해결하고자 그의 철학적 사상을 전개하였다.

위에 언급했듯이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철학에 있어서 부재한 것은 바로 타자의 지위라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 전반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타자를 사유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 안의 타자혹은 (의 관념으)로 환원되는 타자였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타자의 지위를 재고할 것을 당부하며, 타자는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한한 낯선이로서의 지위를 지닌다고 역설한다. 그는 전체주의 철학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자를 그 무엇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타자의 지위를 온전히 타자만의 것으로 두는 새로운 철학을 제시한다.

시간과 타자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어떻게도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로서의 타자를 제시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낯선이로만 설정하지 않고, 더 강하게 타자에 대한 윤리학을 제시한다. 본론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에 있어 동등한 윤리적 지위가 있다고 인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나는 타자에게 빚진 바있으며, 타자는 나에게 과부, 나그네의 얼굴로 윤리적 명령을 하는 주인(어야 하), 이런 비대칭적 지위에서만이 진정한 윤리적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런 타자에 대한 인식이 기반되어야 환원론적인 전체주의의 철학, 히틀러주의 등이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하에서, 시간과 타자의 주된 목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와 같은 타자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 정당화하는가이다. 이는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과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환원되지 않는 비대칭적 타자에 대한 모델이 가능한가하는 것은 결국 그런 타자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가 가능한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자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성립은 전체주의 철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된 고민이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철학은 타자에 대한 질적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고 그 어떤 대상도 아닌 바로 주체가 타자를 (주체의 관념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타자에 있어 핵심목적은 타자를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로서 두는, 그리고 그 타자에게 비대칭적 윤리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성의 가능성을 다루는 것이다. 본론에서 살펴보겠지만, 실제로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그런 주체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레비나스식의 새로운 주체성의 성립에 있어 쉽게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윤리적 관계에 있어 비대칭성이 결국은 주체의 주체성/자기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 즉 주체성이 소멸되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주체-타자의 윤리적 관계에 있어 둘 사이의 대칭성이 요구되는데, 어떻게 동등하지 않은 주체-타자의 관계가 윤리적 모델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시간과 타자에서 나타나는 핵심질문이다. , 레비나스식의 주체성과 타자관념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문제는 주체의 주체성/자기성이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타자로의 (비대칭적이고 윤리학적인) 초월이 가능한가하는 점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레비나스는 향유로서 주체가 주체성을 확보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크게 세 가지의 단계를 통하여 서술한다. 우선적으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문제였던 존재와 존재자를 주체의 출현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 다음으로는 향유를 통한 주체의 정립을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향유적 주체의 한계를 밝히고, 서론에서 언급했던 성격을 지니는 타자에로의 주체의 초월을 다룬다. 본론과 결론을 통해 드러나겠지만, 마지막 단계는 결국 서론에서 레비나스가 유도하고자했던 주체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우선, 레비나스는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레비나스는 에 대해서, ‘와 관계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나는 ○○와 사랑을 한다”, “나는 밥을 먹는다등과 같이 타동사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타동사적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혹은 나는 있다)”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타자를 목적어로 지니지 않은 채 주어-자동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문장에서부터 레비나스는 다른 상태들, 관계들과 달리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동사적 상태라고 한다. 말하자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관계 맺는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있음혹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하이데거를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는 존재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가 가능하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이를 위해 상상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제거해보자고 한다. 레비나스는 상상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파괴했을 때 남는 것은 단순히 있다(il y a)’는 사실뿐이라고 한다. 그저 있다는 사실에는 어떤 존재자도 수용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존재자들은 이미 상상 안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식으로 그저 있음’, ‘존재에 대한 논의를 꺼내지만, 다른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상상 역시 (어느 정도 이미지의 차원도 있지만) 언어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상상 속에서 존재자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나는 있다’, ‘○○가 있다’, ‘존재자는 있다는 등의 모든 문장에서 존재자를 제거해버리는 작업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한다’, ‘모든 (각각의) 존재자는 있다는 문장은 참일 것이다. 이런 한에서 존재자들은 주어-술어관계에서 있음’ ‘존재()’라는 술어에 대해 주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우리는 있다를 술어로 적용할 수 있다. 존재자에 대해 있다는 술어를 귀속시키는 모든 문장들에 있어서 만약 주어에 있는 존재자들을 모두 파괴해버리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당연하게도 남는 것은 그저 있다’, ‘존재한다는 동사, 사실뿐이다. 그 외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이한 점은,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어떤 존재자도 담겨져 있지 않다(상상적으로 파괴했기에). , 하이데거와는 달리 존재자 없는 존재가 가능하다. 또한, 인칭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자를 (주어로) 수용한다는 것인데, 이 그저 있다는 것에는 이미 존재자들이 파괴되었기에 어떤 인칭도 수용할 수 없다. , ‘있다는 것 자체, 존재는 비인칭적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으로부터 존재는 익명적이라고 말한다. 이 존재는 어떤 존재자에도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위와 같은 그저 있다’, ‘존재자 없는 존재를 악과 부조리로 규정한다. 레비나스는 존재함,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부조리로 불면의 상태를 예시로 들고 있다. 가령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를 기다리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잠에 들지 못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불면에 있을 수 있다. 이는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수면에 들지 않는 것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고, 영문도 모른 채로 잠들지 못하고 그저 있다는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의도치 않는 불면의 상태는 누구에게나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적 고통을 안겨준다. 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저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아주 강한 부조리를 느끼게 한다. , 벗어날 수 없는, 그저 있다는 익명의 존재의 성격은 그것을 겪는 이로 하여금 부조리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이 상황에서는 불면이 언제 일어났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상태라는 것이다. 존재가 이렇듯 시작도 끝도 없이 그저 있다는 사실밖에 가진 것이 없다면, 존재자 없는 존재에서 어떻게 존재자, 주체가 출현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일상적으로는 다르지만, 아주 특이한 의식의 개념을 내놓는다.

레비나스는 의식이란 홀로서기라고 한다. 홀로서기란 존재자가 있다는 술어, ‘존재함을 스스로 떠맡는 사건이다. , 의식이란 동사적 존재인 있다가 주어인 이름(명사)에 귀속되는 사건이며, 주체가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사건이다. 의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자, 주체의 탄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가능조건으로서 시간을 끌고 온다. 레비나스는 홀로서기의 사건 자체가 바로 현재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어제, 오늘, 내일의 물리학적 시간축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현재란 주체가 어떤 인칭, 존재자도 수용하는 않는 익명적인 존재, 있음에 균열을 내는 순간, , 존재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바로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 앞에서 홀로서기를 언급한 것과 같이 이는 그저 있다는 것에서 이름(명사)이 존재를 소유하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레비나스는 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를 통해 지금’, ‘여기서순간마다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 주체는 홀로서기가 일어나는 매순간으로의 현재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고, 순간마다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을 의지대로 선택하는 자유는 아니지만, 존재함을 소유로 갖는 자신을 정립하고 순간마다 자신으로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다. , 존재의 익명성 속에 함몰되지 않고 존재자 자신으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주체는 동일성이라는 자기관계 하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얽매이게 된다. 주체는 존재를 떠맡은 그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거주하고, 노동하고, 먹는 등의 고된 물질적인 행위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은 그저 살아 있기위해서 매일매일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사서 먹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가야 한다. 이는 주체가 존재를 자신의 어깨로 떠맡게 된 매순간 가지게 되는 고통의 짐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주체의 물질성이라고 하고, 물질은 홀로서기의 불행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물질계 안에서 주체들이 그저 있다는 사실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의 고된 일들을 하고 살아간다는 그것은 누구에게나 뿌리 깊은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주체의 출현은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짊어지는 힘겨운 사건이다. ,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서 오는 부조리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시각을 좀더 넓혀서 타인으로의 초월을 보기 전에 우리가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질들과 관계 맺는 그 공간을 살펴보자고 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먹거리들의 집합이라고 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세계를 도구의 총체로 보는 도구적 세계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우리가 세계 안의 대상들, 먹거리들과 관계하는 방식을 향유라고 정의한다. 가령 세계 안에는 음식, , 공기, 햇빛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이것들과 관계 맺을 때, 향유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음식과 관계를 맺을 때, 먹는 것을 수단화하여 사는 목적도 있지 않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음식 자체를 어떤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음식 자체가 최종 목적이며, 이것은 음식을 즐기는 것, 즉 향유하는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들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예시로, 공기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은 공기를 수단으로 해서 생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이성을 발휘하여 이론적으로 과학적 지식에 도달할 때만이 가능한 생각이다. 그 이전에 세계를 향유하는 인간은 산책하면서, 등산하면서, 나와는 다른 공기를 내 안으로 들여와 그 공기를 즐긴다. 산책할 때 우리는 이 공기가 나의 생존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공기가 상쾌하고 즐겁다고 한다. , 공기를 향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세계의 대상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향유의 방식이라고 한다(따라서 이는 세계의 대상을 도구로써 보는 하이데거의 도구적 세계관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향유라는 건 어떤 특성을 갖는가?

라는 주체가 음식, 공기 등의 먹거리들과 향유라는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양상은 매우 특이하다. 우선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공기에 의존해야 하고, 갈증을 씻기 위해 물에 의존해야 한다. 향유는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숨을 쉰다는 행위 자체,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발휘할 때는 다른 사람,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음식을 눈앞에 줄 수 있어도, 그것을 향유하는가 하지 않는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가 아닌 주체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주체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주권을 행사한다. 레비나스는 이 향유의 순간 다른 누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향유한다는 사실에서 주체의 주체성의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주체 스스로 향유하는 가운데 주체의 내면성이 형성되고, 타자와 나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이런 향유의 주체성은 일종의 자기망각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와의 관계에는 존재함을 끌어안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항상 처해있는데, 세계 안에서는 그 관계를 잊고 다른 대상들과 향유의 관계를 누린다. 가령 누구나 삶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그저 있다는 사실, 벗어날 수 없는 고독의 순간에 처하게 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인 고독함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공간을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니거나, 친구들을 불러 음식을 향유하거나 게임을 하거나하는 등 세계의 대상들과 향유를 누리는 것 같다. 향유는 어느 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의 상황을 잊게 만든다. , 이것들은 일종의 자기망각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향유하는 시간들은 항상 일시적이고, 고독의 순간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단적으로 자기망각, 향유의 밝음에서도 자아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부조리, 고독의 사실을 벗겨낼 수 없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향유를 우리의 감각작용 즉, 일종의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햇빛을 누리고 노동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우리의 감각작용에 관련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특성은 어떠한가? 분명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 자체는 인식하는 주체의 밖에 존재한다. 하지만 인식대상은 감각자료를 통해 우리의 인식 안에 포착된다. 인식대상이 우리 감관 안에 비추이기 때문에 마치 인식대상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만나게 된다. , 향유와 인식은 본질적으로 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안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로 돌아온다. ,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는 향유에서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느 순간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끔찍한 사실로부터 달아나고자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지만, 결국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고독이라는 것과 같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 영원히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끔찍한 사실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그것을 그전까지의 철학에서 무시되어온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다.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면서 필연적으로 타인으로서의 타자를 만나게 된다. 가정에서 부모와 형제, 노동현장에서 동료들, 그리고 같은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것들을 향유하는 타인으로서의 타자 등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이 타자들은 각각이 모두 이미 향유로서의 주체이며, 각각 주체성을 확보한 타자들이다. 이 타자들은 내가 공기를, 음식을 내 안으로 들여보내어 열량을 위한 내 안의 에너지로 향유하듯이, 내 안으로 환원되는 어떤 세계의 먹거리들이 아니다. 이들은 각각 존재함을 끌어안고, 향유를 통해 자신만의 주체성을 확보한, 전적으로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다름을 지닌 무한자로서의 타자다. 이들은 내가 아니며,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론에서 언급했었지만, 기존의 서양철학은 이런 타자의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기존의 서양철학은 유아론(唯我論)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나로 환원하였었다. 대표적으로 이런 철학은 데카르트와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주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관주의란, 인식하는 주관, 주체와 인식되는 객관, 타자를 대립시키고 전자에 존재론적인 우위를 두는 철학이다. 주관주의에서 언제나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는 세계의 중심에 있고, 모든 여타 존재자들은 주관이 인식을 얻기 위한 객체로 설정한다. 타자는 나와 함께 마시고 향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체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주관주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데카르트식의 철학은 결국 인식하는 나의 지위만 있고 인식되는 타자의 지위는 없게 된다. 우리가 향유하는 물질들과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주체인 에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향유되는 물질과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차이가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향유는 결국 인식이고, 결국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처음부터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만들게 한다. 타인으로서의 타자를 인식, 향유의 대상과 차이를 두지 않는다면, 결국은 타자는 데카르트식으로 인식되는 나의 관념으로 환원된다. 여기에는 레비나스가 강렬하게 비판하는 전체주의의 철학이 숨겨져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수학적인, 주관주의적인 철학은 후대에 과학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타자로서의 타인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은 그러한 철학들이 세계대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적인, 전체주의적인 철학은 비극의 씨앗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를 나의 인식의 틀이나 관념으로 환원하지 않는 철학이야말로 홀로코스트나 실존적 비극을 막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지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로 환원되지 않는, 하지만 내가 주체로 성장한 것과 같이 향유의 방식을 통해 주체성을 확보한 타자 사이에 윤리적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와 나는 비대칭적인 관계에 있으며, 그저 그는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비대칭적인 타자로 과부와 고아를 들고 있다. 이러한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서 나타난다. 얼굴은 우리가 마주하는 다른 어떤 대상들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가령 사물들은 사물이 속한 전체 속에서의 부분으로, 혹은 그 기능으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책상은 그것을 이루는 목재, (책상)다리, 그 외에 책상의 형태를 구성하는 각각의 것들의 집합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고, 또한 앉을 수 있는 기능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다. 얼굴은 눈, , 입 등의 단순한 집합으로서도, 얼굴을 이루는 눈··입 등의 기능으로서도 규정될 수 없다. 얼굴은 다른 사물들이 의미를 갖는 부분들의 단순한 집합이나 기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힘이 있다. 레비나스는 그 힘이 얼굴이 상처받을 가능성과 무저항성에 있다고 한다. 타인의 얼굴은 언제나 알 수 없는 폭력을 맞이할 수 있다. 가령 전쟁난민들은 언제나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전쟁으로부터 직접적인 폭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이 폭력을 당할 때 난민들이, 난민들의 얼굴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그 폭력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얼굴은 외부적인 힘에 대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고 한다. 타인의 얼굴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와 닿는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강렬한 어조로 윤리적으로 명령한다. 가령 SNS나 뉴스를 통해 고통으로 얼룩진 시리아 난민을 볼 때, 우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다른 어떤 매개를 거치지 않고도 그들에게서 상처받을 수 있음,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저항성을 느낀다. 그리고 종종 그런 얼굴들로부터 고통으로 얼룩진 난민의 얼굴, 이 전쟁의 폭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를 주위에서 아무도 전달하지 않는데, 매개도 없이 갑자기 느끼게 된다. 타인의 얼굴이 윤리적으로 나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매우 특이한 점은 타인의 얼굴이 고통 받는, 저항할 수 없는 나보다 낮은 지위에서 가다오면서, 결국은 윤리적 명령을 하는 주인의 얼굴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명령이 행해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기존의 삶과 행위, 자유에 제동을 걸게 된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정의로워야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죄책의 경험을 안겨주며 양심을 공격한다. 가령 집에서 호화롭게 안락을 누리며 누워서 TV를 보고 있다가, 전쟁의 상황과 시리아 난민의 죽어가는 얼굴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저들이 저렇게 죽어 가는데 나는 이렇게 가만히, 내 편한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이는 결국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정의로워야함을 명령한다. 이때 시리아 난민의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 명령을 내리는 도덕적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심리적 안락함을 위해 TV 채널을 돌리고 똑같이 누운 자세로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하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이 주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나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가 대칭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나와 타인으로의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고 한다. 타자는 나와 윤리적으로 동등하지 않다. 만약 타자와 내가 윤리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면, 타자는 나보다 고통 받는 낮은 지위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윤리적으로 호소할 권리도 없으며,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향유로서의 주체를 가진 한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이 경우 나는 풍요가운데 남아도는 것을 타인에게 주기 쉽고, 동정이나 반대급부 때문에 타인을 돕게 된다. 레비나스는 따라서 비대칭적으로 타자가 나의 주인인, 내가 윤리적으로 빚진 바 있는 타자를 수용할 때만이 진정한 윤리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과부, 시리아 난민, 나그네와 같은 고통 받는 타자가 나에게 윤리적으로 명령하고 주인의 얼굴을 지닐 때, 나는 비로소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주인으로 받들며 자신의 이기심과 소유를 통한 행복을 내려놓을 수 있다. 타자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그를 주인으로 섬길 때만이, 타자에 대한 윤리적 비대칭성이 이루어져만 진정한 주체성이 성립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홀로코스를 만들었던 강자의 법이 폐기되고 진정한 평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주체의 완성은 위와 같이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지닌, 환원되지 않는 타자를 수용함으로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본론 처음에서부터 계속 물어왔던, 그리고 향유적 주체에서 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져야 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국은 나 자신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 부조리는 윤리적 주체에서 해결되는가?” 타인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윤리적 주체의 완성에 있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사적 이기심을 내려놓고 나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을 수 있다. 타자를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타인을 보살피며, 혹여나 내가 타인을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게 되며, 나의 중심을 나에게서 타인의 미래로 둘 수 있게 된다.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부조리는 어느 정도 타인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번의 질문이 더 있다. “타인이 죽는다면, 나의 윤리적 행위들은 모두 허무로 돌아가고, 타인에로의 윤리적 초월도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출산의 문제를 꺼낸다.

레비나스는 애무, 에로스, 성관계, 그리고 이 과정의 끝에 있는 출산을 통해 타자화 된 나, 아이를 탄생시킨다고 한다. 아이가 없이 인생을 홀로 모든 것을 설계할 때 우리는 결코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럴 때, 마치 기나긴 여행 끝에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이아처럼 원래의 자신의 세계 테두리로 돌아와 늙어 죽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출산함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인생에만, 나의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미래를 아이와의 관계에서 찾게 되고, 무한히 나로 돌아오는 동일자의 영역 밖에서 미래를 찾게 된다. 이를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무한히 돌아오게 되는, 어쩌면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또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성격의 끔찍한 비극에서, 부조리에서 사면받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홀로서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로 돌아오는 자기 자신으로 무한히 돌아오는 비극의 사면이 출산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시간과 타자, 그리고 시간과 타자에 관련한 강영안 교수님의 타인의 얼굴과 논문의 주요한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결론에 도달해서, 우리가 서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 레비나스의 문제의식들이 해결되었는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홀로코스트에 대응할 새로운 주체의 개념, 타자의 개념의 제시가 레비나스의 과제였다. 이는 본론에서 매우 자세하게 살펴보았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혁신적인 주체와 타자의 개념을 제시했다. 타자는 나라는 주체가 그러하듯이 향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성립했고, 그렇게 형성된 타자는 내가 아니다. 그들은 데카르트식으로 나의 어떤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되거나, 어떤 관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의 다름이다. 또한 타인의 얼굴에 있어, 그 얼굴들은 단순한 어떤 부분들의 집합체,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물들로도 환원되지 않았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 주인의 얼굴로 명령하며, 자신의 이기심,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한다고 했다. 주체는 이러한 얼굴에 처해 이를 거부할 수 없다(이를 거부하는 것은 불의이다). 레비나스는 여기에 이르러 주체의 완성을 나를 내려놓고 윤리적 타자를 수용하는 것에 두고 있다. 논리적으로 여기에는 데카르트처럼 타인을 나의 인식대상으로 환원하는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질적 다양성을 거부하는 전체주의의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윤리적 타자는 내 안으로 흡수되는 물질적인 향유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나로 환원되는 어떠한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름을 소유하고 있고, 나에게는 환원되지 않는 낯선이다. 여기에서 서론에서 다루었던,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타자의 개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는 윤리적 비대칭성이 결국은 주체성의 소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리적 비대칭성이 주체성의 소멸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는 주체는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주체를 형성했고, 향유를 통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주권을 발휘함으로 주체성을 확보한다. ,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주체는 이미 확립되어 있다. 또한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갖는 타인의 얼굴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닫힌 이기성의 세계에서 (타자를 통해)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만 몰두하지 않고, 비로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에게서 탈피할 수 있다(본론 끝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출산을 통해 절정을 맞는다). ,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존재는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윤리적 주체로서 완성시킨다.

마지막으로, 도대체 비대칭적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시 된다. 이는 본론에서 매우 자세히 살펴보았었다. 이 문제에 있어 레비나스는 오히려 어떻게 주체와 타자가 동등한 윤리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본론에서 살펴보았지만, 타자와 주체 사이의 윤리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것은 타자를 내가 풍요로울 때 나눠주는 식의 논의밖에는 만들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윤리적 지위가 동등한다면, 나는 동등하다는 그것 때문에 타자를 도와야 할 필요가 없다. 나와 타자가 동등하다는 것은 타자가 나보다 더 고통 받지도 않고, 나보다 더 낮은 지위에 처해있지 않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런 타자에게 나라는 주체가 어떤 윤리적 행위를 할 필요가 있는가? 따라서 레비나스는 진정한 윤리적 관계는 비대칭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타자는 나보다 가난한, 나보다 고통 받는 시리아 난민과, 나그네와 과부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른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얼굴을 바라보는 주체에게 윤리적으로 호소한다. 이때 역설적으로 아무도 옆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 주체는 타인의 얼굴로부터 어쩌면 양심의, 윤리적인 호소를 느낀다. 타인은 처음엔 가난한 나그네의 얼굴로 다가왔지만 어느새 주인의 얼굴로 다가와 나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체는 정의로워야하고, 타자를 윤리적 주인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이기적으로 살아온 삶을 반성하고 윤리적 타자로 초월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면 진정한 윤리적 관계는 결코 동등하게 일어날 수 없다. 비대칭적 윤리적 관계에서만이 비로소 나는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타인을 받들 수 있다. 진정한 윤리성을 타자와 나의 대칭성, 동등함이 아니라 비대칭성에서 찾는 것, 이것이 다른 어떤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레비나스 철학만의 독특함이자 신비로움이다.

이상으로 서론에서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이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평가를 함으로써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말할 것 없는 명작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다른 철학자들이 전혀 관심가지지 않았던 문제를 철학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 누구보다도 실존의 문제에서 철학을 시작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레비나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는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한 사회가 당면해 있는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는 없었다. 레비나스와 동시대의 사르트르나 비판이론의 하버마스 등의 철학자들 역시 전쟁이라는 주제로 실존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그들은 이 문제를 레비나스 만큼 삶의 문제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채 본질을 해체하거나,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성을 도입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레비나스와 같은 타자에 대한 논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존을 고민한 철학자였고, 전쟁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한, 현실과 철학의 접점을 고민했던 철학자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평가에서 눈을 돌려서 당면한 현실에 우리가 레비나스의 철학을 적용함으로서 레비나스의 지위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레비나스 철학은 기존의 칸트식의 의무윤리학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정말 많다. 가령 칸트의 윤리학은 사회계약설의 바탕 하에서 만들어졌다. 루소와 홉스, 로크 이후의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관념은 동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이 합의하에 만들었다는 사회계약설을 따르게 되었다. 칸트의 윤리학적 테제들도 이 사회계약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칸트의 의무윤리학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윤리학적 행위주체들을 전제하고, 그 주체들이 윤리적 상황에서 하려는 행위가 보편화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윤리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런 윤리학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칸트의 의무윤리학에서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A가 윤리적 행위를 받는 B, C에 있어서 차별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칸트에 따르면 아마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법칙 하에 속할 수 있는 도덕규칙일 것이다. AB에게 하는 윤리적 행위를 C에게도 차별 없이 해야 하고, C에게 할 수 있는 윤리적 행위를 B에게도 차별 없이 해야 한다. 그러나 BC가 처한 각각의 상황, 개별성을 무시한 채 무차별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옳은가? 레비나스의 논지를 빌리자면, 누가 더 사회적 약자인지, 누가 더 시리아의 난민, 과부와 나그네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철학은 국가 아래에 있는 모든 윤리 주체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보편화가능성이라는 정언명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동등한 윤리적 주체들인데 동등함 속에서 어떻게 누군가에게 더 윤리적 혜택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일종의 폭력이 있다. 그 폭력은 누가 더 약자인지 고려하지 않는, 누가 더 동등할 수 없는 가난한 윤리적 지위를 지니는가를 고려하지 않는, 모든 윤리적 주체를 전체주의적으로 동일하게 대하는 폭력이다.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적인 관심이 없는 칸트의 철학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존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윤리적 지위를 생각해본다면, 결국 칸트 윤리학의 귀결은 진정으로 타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가 대칭성의 윤리관계를 비판했던 것처럼, 결국 동등한 윤리적 지위를 가진 타자에게 내가 도대체 왜 윤리적 행위를 해야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레비나스적 관점에서 이는 결코 좋은 윤리학이라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눈을 가리고 한손엔 칼, 한손엔 저울(천칭)을 든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의 모습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눈을 가린 여신의 모습 속에는 나그네와 과부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정의의 여신은 스스로 자신의 눈가리개를 풀고 누가 더 약자인지, 누가 더 나그네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그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참고문헌

E.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역), 문예출판사, 1996.

M.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전양범 역), 동서문화사, 2008.

강영안,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성의 철학, 철학과 현실, 25.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김연숙,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인간사랑, 2001.


『시간과 타자』 보고서ㅡ타자로의 초월을 통한 새로운 윤리학적 모델의 제시를 중심으로ㅡ.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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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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