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는 에이어의 논증에 대한 비판>

  

에이어(이하 A)는 그의 저서 Language, Truth and Logic1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선험적인 문장도 아니고 검증가능한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논증한다. 본고는 A의 논증이 세 가지 이유로 부정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 우선은 물리법칙 자체는 감각되지 않고 또한 물질적인 대상이 아님을 밝힐 것이다. 그리하여 물리법칙에 관한 문장이 형이상학적/초월적인 문장이라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이를 통해 물리법칙에 대한 언명들이 A의 기준에서 무의미하지만 일상적인 맥락에서 유의미하다는 것을 밝혀서 결국은 문제를 낳는다는 논증을 보일 것이다. 둘째로는 A의 선험성·검증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의미/무의미를 결정할 수 없음을 보일 것이다. 이는 A가 서술하는 의미/무의미에 대한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음을 기준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의미/무의미의 기준이 제시되더라도,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여 의미의 정당화가 무한하게 일어나므로 의미/무의미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함을 논증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논증을 통해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는 A의 주장이 문제가 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하여 A의 주장을 우선 검토할 것이다. A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i) FT = 유의미한 문장들의 집합(F는 검증가능성을 충족하는 문장들의 집합, T는 선험적인 문장들의 집합)

(ii) M(FT) = (M은 형이상학적 문장들의 집합, ~는 부정기호)

이하 (i)(ii)의 집합을 AP(Ayer Proposition)라고 부르기로 한다. AF에 속하는 문장들은 원칙적으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참/거짓을 나눌 수 있을지를 정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 문장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문장이라고 말한다. T에 대해서는 에이어는 크게 언급하는 바는 없다. (ii)에 대해서, AT보다는 F를 중점으로 논증을 펼친다. , M에 속하는 문장들은 검증가능성의 원리를 충족하지 않는다. 그 문장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경험적 원리/관찰들로부터 참/거짓을 가려야할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A는 그런 문장들을 해결하는 데에 어떤 경험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고, 그런 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M의 원소도 F에 속하지 않는다. 또한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직관적으로 선험적인 문장들도 아니기에 T에 속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A(ii)가 성립한다고 말하고, (i)에 의해 M의 어떠한 원소도 유의미한 문장들의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 , M은 무의미한 문장들의 집합의 부분집합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AP는 물리법칙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이를 위해서 좀 돌아가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바에 따르면,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적인 주장들은 무의미하다. 과학적인 주장들은 물리세계에 대한 선언을 하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물질들의 상호작용 뒤에 있는 물리법칙을 전제하는 것이다. 만약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활동은 없는 것에 대한 활동이 된다. 그러나 없는 것에 대한 주장들이 현실에 대한 강한 제약을 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M에 대한 탐구가 현실에 제약을 준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적어도 유니콘이 없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유니콘에 대해서 이론을 세우거나 하는 것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제약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그것은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문장들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제약한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공학을 전개해나가는데 매우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물리법칙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AP가 물리법칙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리법칙이 실재한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우선 물리법칙은 그 스스로 어떤 물질적 대상과도 같지 않다고 여겨진다. , 물리법칙은 물질계 안에서 원자 혹은 그 아래 단위로 쪼개질 수 있는 어떤 것들과도 같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물리법칙을 물질로서 여겨야하는데, 그렇다면 물리법칙은 특정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그 물질을 보면서 탐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탐구는 물리법칙이라는 어떤 물질을 눈앞에 두고 탐구하는 것 같지 않다. 물리법칙은 물질들의 상호작용들 배후에 있는 어떤 질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령 양자역학의 수식들이 참이라면, 그것들은 어떤 물리적 현상들을 통해 나타나며 현상들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자체는 수식으로 표현되는 어떤 추상적 실재이지 구체적인 물질 자체는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구체적인 물질이라면 관측가능할텐데,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과 물질적인 현상들이지 그것들을 만드는 질서 자체는 아니다. 어떤 물질을 쿼크 단위까지 분해하여 관측하더라도, 쿼크 사이의 질서는 쿼크들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는 것과 같다. , 물리법칙 자체는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물리법칙 자체는 물질세계를 강하게 구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물질도 아니고, 감각으로서 포착되지 않는 추상적인, 초월적인 대상이다. 따라서 물리법칙이 실재한다(혹은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M의 원소).

더욱 강한 의미에서, 위의 문장은 검증가능성을 충족하지 못한다. 물리법칙 자체가 감각되거나 물질적 실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물리법칙이 실재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과 같은 위상을 지닌다. A에 따른다면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신에 대한 언명을 참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여나 신은 그렇지 않지만 물리법칙은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현상을 봄으로써 존재한다고 판단이 가능하다는 반론을 한다면, 나는 신에 대한 존재성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기독교적 신을 증거하는 기적들이나 경험적 근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신의 존재성을 밝혀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상을 통해 그것 뒤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존재한다고 판단될 수 있다면, 물리법칙과 신에 대한 언명은 지지하는 현상들의 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형이상학적인 맥락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모두 현상을 통해 현상이 아니고 추상적인, 따라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배후를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AP에서 신에 대한 언명과 물리법칙의 언명에 대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적어도 신의 존재성은 알 수 없으나 물리법칙의 존재성은 과학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AP에서 물리법칙의 존재성에 대한 언명은 형이상학적인 신에 대한 언명과 동일하게 무의미한 것으로 파악된다.

위와 같은 논증들을 통해 AP는 모순적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분명 물리법칙은 존재한다는 문장이 표출하는 내용은 과학활동의 현실성을 위해 참이어야 하고 실제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여지지만, AP를 따르면 이 문장은 형이상학적인 문장이고 무의미한, 어떤 경험이 주어져야 참/거짓을 가릴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문장이다(사소하게 위는 선험적인 수학적/논리학적 문장은 아니다). 이는 완전한 모순이다. 정리하자면, A의 기준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장이면서 의미가 있는 문장이 존재하게 된다. , 형이상학 전부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는 의미/무의미에 대한 구분이다. A1장에서 FT가 의미 있는 문장의 전체를 이룬다는 주장만을 하고 구체적으로 다룬 바가 없다. 말하자면, A(i)의 언명은 FT의 이름을 의미있는 문장들의 집합으로 부르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i)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FT와 상관 없이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후차적으로 (i)에서 서술되는 두 집합이 같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A는 의미에 대한 규정 없이 단순히 FT의 문장들은 의미 있다는 언명만을 하고 있다. 더욱이 A는 어떤 기준에서 T가 의미 있는 문장들의 집합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i)이 정당하다는 A의 주장은 적어도 1장 내에서는 정당화된다고 보기가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ii)만이 성립하는 셈이다. ,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의미나 무의미의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단순히 검증가능성을 만족하지 않고 선험적이지 않은 문장들일 뿐이다. (i)가 만족되지 않는다면, (ii)의 언명은 의미의 차원이 아닌 그저 형이상학적 문장들이 어떤 개념들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논증에 대해 A가 의미/무의미의 기준을 명확히 정의했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아래의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논증하고자 한다. 우선 아래와 같이 정의하자.

(a) A(1) =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들의 집합, (b) A(n+1) = A(n)을 정당화하는 문장들의 집합, (c) P(n) : A(n)은 정당화가 필요하다

(a)(b)가 의미하는 것은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들의 집합 A(1)이 제시되었을 때, A(2)A(1)를 정당화하는 집합들이고, 이것이 자연수의 범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P가 자연수 전체에 대해 성립함을 보일 것이다. 우선 P(1)을 보자. 적어도 의미를 나누는 기준이 제시된다면, 그것들을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A(1)을 정당화하()는 집합 A(2)를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P(1)이 성립한다. P(n)이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A(n)은 정당화가 필요하므로, 이를 지지하는 정당화의 집합 A(n+1)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A(n+1)이 정당화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당화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A(n+1) 역시 정당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P(n+1)이 성립한다. 곧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P(n)은 모든 자연수에 대해 성립한다. 만약 그렇다면, 의미에 대한 정당화는 자연수의 집합(무한집합)만큼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적어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의미/무의미를 가르려는 시도는 무한한 정당화를 불러오므로 실패하게 된다. 물론 위에서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정당화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주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인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게 된다. 주장에 대한 임의의 근거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 근거들을 판단할 어떤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은 근거들을 또 다시 정당화할 것이다. 따라서 임의의 근거들이 주어지더라도 정당화는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위의 증명의 갭은 없다.

만약 이와 같은 나의 증명이 받아들여진다면, A가 명확히 의미/무의미를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고 (i)를 논증하였더라도,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었음을 보여준다. , 의미와 무의미의 기준을 나누고 그로부터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영역으로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물리법칙의 실재성에 대한 문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유의미하지만 AP에는 그럴 수가 없다. 또한 의미를 나누는 A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문장들은 의미·무의미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험성과 검증가능성을 충족하도 않는 문장들일 뿐이다. 또한 A가 의미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그 기준은 무한의 정당화를 불러오고 이는 의미 개념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의 실패를 부른다. ,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B인가 B+맞았었습니다. 5년전에.. 귀납법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사용이라고 지적받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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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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