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가지론은 양립가능한가에 대한 가능한 의견

(부제 : 불가지론적 유신론자인 칸트에 대한 비판)

 

불가지론은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인식론적으로 신은 이성의 한계, 언어의 한계를 넘은 어떠한 무언가ㅡ더 정확히는 우리는 신 자체에 대해서 어떠한 단어를 부여할 수가 없다. 그것 자체가 이성 밖의 신을 이성 안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말해질 수 없는 을(빈칸은 유도된 것이다. 나는 이를 원칙적으로 어떠한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 고정시킬 수밖에 없음을, 따라서 본질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전제한다ㅡ로 상정된다.

 

만약 신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어느 인간도 그 존재에 대해서 가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다시 말해 불가지론이 정당화된다면 이는 기독교, 더 나아가 종교 그 자체ㅡ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를 하나의 사례로 끌고 왔음을 밝힌다ㅡ와 양립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약간의 단서로 생각해볼 수 없다.

 

신에 대한 어떠한 것도 단언하고 가정할 수 없음은 종교 자체에 대한 것조차 알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로서의 신은 결코 상정될 수 없다. 기독교적 입장에 따르면 역사란 인류의 타락사임과 동시에 구원사이다. 이것은 신이 인간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만약 불가지론을 가정한다면, 방금 말한 명제와 엄청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신이 특정 방식으로 세계에 관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신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신 더 나아가 그것에 관한 어떠한 것에 대한 인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명령이나 말씀, 개입조차 인식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예수가 이 땅에 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자)가 신임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타락사와 구원사는 가능한가. 신에 대한 어떤 인식도 불가능한 존재자가 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을 기록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흔히 말하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그런 능력을 '부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확장하다보면, 모든 종교에서 불가지론은 불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가지론은 어떠한 종교와도 양립가능할 수 없다. 그것은 종교 자체를 무의미화한다. 종교가 하나의 의미체계로 잡기 위해서는 세계의 개입자로서의 신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인식의 범위 밖이라는 불가지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종교인은 불가지론자일 수 없으며 철저한 유신론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는 가능세계 자체가 불가지론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결국 불가지론적 가능세계와 유신론적 가능세계는 하나의 모순관계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가지론적 유신론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에 관한 어떠한 것도 인식할 수 없는데,

그가 유신론자이기를 택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그것은 '요청'하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를 불가지론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에 관련한 철학자는 대표적으로 칸트가 있다.

 

칸트는 인식론적으로 불가지론자에 속한다. 동시에 그는 그의 윤리관에 의해서 신이라는 존재를 요청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물자체를 가능적으로 상정할 수 있지만, 결코 단언적으로 가정할 수 없다." 불가지론자인 그가 신을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을 가능적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신에 대한 요청이며 선택이었다.

 

나는 칸트의 이런 생각에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적 유신론이 무모순함을 밝히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야 이것이 그릇되다는 걸 인지했다. 불가지론과 유신론은 대립적의 관계에 놓여있다.

 

불가지론자가 신이라는 개념을 상정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안은 신존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논증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이성(理性)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불가지론자에게는 '선택'과 '요청'의 개념밖에 남은 게 없다. 이것은 신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공리(axiom)적으로 하나의 가치체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것이다. 불가지론자가 불가지론자이고자 한다면 이러한 접근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선택/요청에 관한 신존재접근은 가장 탁월한 접근법이겠지만, 이것은 불가지론자라는 그의 입장을 통째로 무너트리는 것이다.

 

불가지론자가 신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를 '선택'하고 '요청'한다는 것은 곧 신이 인간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이 그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존재가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 인식가능하다는 것ㅡ여기서의 인식은 의식 일반을 뜻한다ㅡ을 말한다. 불가지론자는 이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불가지론자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요청론적인 접근이지만, 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접근이었음이 이제 분명해진다. 불가지론자는 종교인이 될 수 없다. 불가지론자이다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신론자가 될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불가지론자가 유신론자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모순적인 가능성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불가지론자이면서, 학문 외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이면 된다. 요청론적 접근도 불가능하다면 그는 삶의 영역을 양분화시키면 된다. 이 또한 심각한 모순에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는 작년부터 얼마 전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불가지론적 유신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나의 사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런 사유를 제공한 칸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칸트의 요청적인 신의 접근은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는 문장으로 함축된다.

한 가지 인용을 하고자 한다.

 

"... 그(비트겐슈타인)는 신의 존재 '증명'이라든가 종교에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짜증을 내었다. 내(맬컴)가 언젠가 그에게 '그분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예수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하자, '그것 보게! 그것은 어떤 것을 증명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닐세'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소리쳤다"

 

비트겐슈타인은 신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며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나 역시 신의 존재가 수학처럼 연역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까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지만, 종교인에게 마냥 신의 존재가 믿음의 영역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나와 충돌하고 있는 입장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을 '믿는'다고 한다. 나이브한 용어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한다. 난 이 역시 어느 정도 불가지론적 입장을 전제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들의 발화 속에는 신의 존재가 완전한 사실의 영역이기 보다는 완전히 알 수는 없는 불가지론의 영역에 있음을 어느 정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의 대립어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선택성이 들어가 있다. 믿지 않을 수 있는데 믿는다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발화의 내막 속에는 신의 존재가 완전한 사실의 영역일 수는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불가지론을 어느 정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마련되어 있지만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기약없는 미래로 넘기기로 한다.

 

Posted by 괴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