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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물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성차의 속성 : 성차는 오로지 경험에 의존적임

 

분석철학에서 강한 물리주의란 비물리적인 속성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물리적인 속성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모든 인과는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입장의 한 가지 방식은 흄의 강한 경험주의적 관점을 추가하는 것이다. , 인간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경험뿐이며 그것 외의 어떠한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가지는 모든 습관과 사고는 원초적으로는 경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고 그 경험은 타인의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타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는 방식 외에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때, 타인의 속성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타인이 가진 유전적 정보들과 주어진 환경들과 경험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이 가진 유전적 정보는 모두 다르고, 주어진 환경과 가진 경험들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 개개인은 경험의 한계를 지니고, 또한 그 한계를 넘어 유전적 속성들의 차이로 인해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물리적 차원에서 인간 개개인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하고, 그런 시도 자체가 허무한 경우가 많다. 인간은 경험의 한계와 유전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 하에서 흥미로운 것은, 개개인은 서로 완전하게는 이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며 또한 그 결과로 타인의 어떠한 행동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연적인 결과이다. 적어도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상대에게 투영하여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배경 하에서 자라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경험 등에 대치되는 사람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럽다. 이는 개인의 인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경험적 한계와 유아기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게 하지 못한 교육의 한계일 것이다. 경험의 한계에 초점을 맞추자면 이는 인간 존재 본연의 비극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비극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어떤 것일까? 단연컨대 성차일 수밖에 없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태어날 때는 XX이거나 XY염색체를 지니고 태어나서 사회에 따라 성별에 맞게 교육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차는 무엇인가? 성차는 성별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 등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는 주로 사고나 성격, 태도, 경험 등이 속할 것이다. 수업에서 제시된 주제들만을 빌려오자면, 우선 성차는 생식기능과 호르몬 분비 등을 제외한다면 모두 경험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왜냐면 특정 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한 가지 행동양식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중국의 모수족이나 인도의 카시족 같은 경우는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남녀의 역할이 반대되어왔다. 두 모계사회 민족에서는 성은 어머니의 것을 따르게 되고 권력과 재산 역시 딸에게로 돌아간다. 카시족의 경우 흥미로운 실험이 존재하는데, (a)양동이에 돈을 넣을 때마다 1달러 50센트를 받음 (b)상대방보다 잘 넣을 때 4달러 50센트를 받음 중에서 한 가지 방식을 택하라고 했을 때 미국남녀는 각각 69, 31%가 후자를 택했고, 카시족 남녀의 경우 39, 54%가 후자를 택했다. 후자가 경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성차에 의한 (경쟁적) 성격의 차이가 경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실험을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성차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성차가 생물학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미미한 부분에서이며 다른 성과의 유의미한 차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카시족에 관한 실험의 결과는 부계사회인 미국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생물학적 요소에 성차가 큰 영향을 받는다면 전통적 여성상에 반하는 잔다르크적인 인물도 실존할 수 없고, 현대사회의 직무적인 면에서나 능력적인 면에서 여성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은 불가했을 것이다. 성격적인 면에 있어서도, 물리적으로 각 사람마다 독특한 성격이 가능함에도 그것이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떠한 성격들이 사회적으로 승인되거나 높은 가치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본래적으로 더 관계적이거나 배려적이거나 감성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본질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성격을 설명할 수가 없다. 배려적이지 않은 여성이라고 그들이 XX염색체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은 (성염색체가 아닌) 타고난 유전자를 제외한다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와 환경, 그리고 교육 등의 수많은 경험적인 요소로 결정된다.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관계를 중요시하는 남성이 존재하며,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존재한다.

위와 같은 논의에 대해서 길리건의 여러 실험사례를 들며 여성은 환경적으로 변할 수는 있으나 그 본래에 있어서 관계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태어날 때부터 여아에게 남아와 같은 장난감과 게임, 경쟁적인 요소들을 가져다주며, 그것이 사회전반적으로 일상적인 것이라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왜냐면 성인들은 사고체계와 습관 등이 대개 완성되어있기 때문에 주위의 사물을 자신의 사고를 투영하여 보지만 어린이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타자로부터 주입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주입된 것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2-3세의 어린이는 종교교육을 통해 총살을 할 수도 있으며, 4살의 어린이도 차량폭탄을 터뜨릴 수 있다. 이 사례들은 유아도 교육을 통해 인간사에서 가장 가장 금기시되는 비윤리적인 영역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극단적인 성격개조마저 가능하다면, 그보다 덜한 성격의 개조 역시 유아에게서 역시 가능할 것이다. 만약 길리건의 실험에서의 딜레마의 상황을 IS의 교육을 받은 여아들에게 같은 실험을 했다면 길리건은 전혀 다른 대답을 얻었을 것이다. IS의 여아들은 미국 백인 주류 사회의 여아들과는 다르게 도둑질이나 협박 등을 통해 약을 얻어내야 한다는 대답을 했을 것이 매우 개연적이다. 이런 결과들로 보았을 때, 성별에 의한 차이로 성격차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환경에 의한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고 따라서 생물학적 요소가 있다하더라도 성격에 유의미한 차이를 주기는 어렵다.

위의 주장에 따라 성차가 경험에 의존적이라면, 경험은 공유되지 않는 지점에서 개개인간에 환원불가하고 이해불가한 지점이 존재한다. 이는 첫 두 문단의 논지에서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그렇다면 성차는 다른 이해불가능성, 환원불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유형인가? 좀더 넓은 논의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개인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환원불가능한 경험들은 비슷한 류의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프랑스 혁명의 주도자이자 프랑스 근대헌법의 아버지인 시에예스라는 인물은 원숭이와 흑인을 교배함으로서 프랑스 시민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백인으로서 인종을 이유로 억압받아온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흑인을 백인과 동일하게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백인이 다른 민족에 의해서 억압받아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주장을 했을 확률은 매우 낮아졌을 것이다. 다른 사례로, 평범한 사람들은 신경/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그에 유사한 자신의 사고나 경험을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차에 의해 발생하는 다른 성들간의 속성들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불가능성은 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기능 차이를 제외한다면, 적어도 성차의 문제는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경험적인 요소로 환원할 수 있고, 이는 단지 성들 간의 경험들의 차이로 인한 이해불가의 요소로 생각된다. 만약 성차가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어떤 속성들로도 환원이 불가한 유일한 본질적인, 존재론적 차이라면, 그것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각각의 성이 쌓아온 경험들이 매우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성차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장애가 없는 사람은 헬렌켈러와 같은 선천적 시청각 언어장애인의 감각과 경험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고, 1급 발달장애인의 행동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뇌의 기능에 있어 생물학적 차이를 보이고 이는 서로가 달리 될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이므로 성차 외에도 인간들 사이에 본질적인 환원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첫 두 문단의 논의를 끌어오자면, 이런 차이는 개개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경험들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환원/이해불가능성의 문제는 다른 성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 문제는 결국 개개인의 유전적 차이와 경험의 한계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이라 전쟁에 참여할 수 없고 사관학교, 군대에 결코 갈 수 없는 성인남성은 군필남성의 화생방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고, 전쟁으로 인한 PTSD를 겪는 참전군인의 발작에 슬퍼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가정환경과 유전적 성격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의 차이의 간극은 좁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성차의 문제가 위와 같은 문제와 동일한 양상이라고 한다면, 이는 집단과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경험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인가? 혹은 이와 같은 논의들이 여성운동의 확장을 방해하는 관점이 되는가? 나는 다른 관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선, 개인들의 경험(가능성)의 차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의 차이도 그렇고, 각 사회마다 승인하거나 가치있게 여기는 경험들에 따라 구성원들의 특정 경험에 대한 인식이나 경험가능한 대상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성차의 문제를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 본연의 경험의 한계로 바라보는 것은 다원론적 관점을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의 한계를 가지고 따라서 이해가능한 영역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누구나 적어도 윤리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경험이나 존재 역시 승인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해불가능한 영역은 여러 차이로 인해 영원히 이해불가능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영역을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보편적인 관점에서 누구나 (각 나라의 헌법 등이 정하는 최저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고, 그것은 위의 논의를 이해하는 한에 있어 경험들의 이해불가능성/환원불가능성에 의해 가려질 수 없다. 만약 이런 관점이 택해진다면, 여성운동이나 카시족에서의 남성인권운동, 퀴어운동 등이 가려질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면 개개인들은 모두 환원불가능한 속성들,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도덕적, 법적 테두리에서 금지되지 않는 것이라면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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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son DE, Genetic relations among procrastination, impulsivity, and goal-management ability: implications for the evolutionary origin of procrastination, Psychol Sci. 2014 Jun;25(6):1178-88

 

Uri Gneezy, Kenneth L. Leonard, John A. List, Gender Differences in Competition: Evidence From a Matrilineal and a Patriarchal Society

 

 

육영수,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 프랑스혁명의 문화사(파주: 돌베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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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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