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A4 22 페이지, 본문+후기 A4 24 페이지입니다. 쓰고 보니 문미에 있어야 할 내용이 문두에 있기도 하니, 끝까지 읽어보시지 않으면 "왜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이런 논리를 펴지?"하기가 쉽습니다. 순서를 바꾸기가 애매하게 되어 양해부탁드립니다.

 

※ 저는 현재는 신앙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good news)의 핵심은 신약에서 바울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전하듯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가 2000년 전에 실제로 육체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이 주된 복음이라고 생각됩니다.[각주:1] 이는 기독교의 성도들이 고난 끝에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누구나 알 법한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기본 복음은 이렇지만, 여기에 물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이를 보증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존재라는 것도요.

 

 기독교인들께는 미안하지만, 과연 이것은 사실일까요?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창조주가 있고, 아담과 하와를 통해 에덴을 구상하셨고, 그들의 타락을 보고, 구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나가셨고, 예수를 보내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인류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셨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현대인의 대다수는 이 사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7)"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합리적이라는 학문 중에 하나인 과학을 중심으로 본다면, 현대인은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기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 외에도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스럽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처음으로 묘사됩니다만,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당장 법원에서 며칠 전의 일 가지고도 판사가 엇갈리는 증언으로 고민하는데, 몇 년전도 아닌 도무지 시계를 알 수 없는 언급을 하는 이 때에 관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적지 않은 분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소급하여 전하기도 합니다만, 과학주의를 고수하시는 분들께서는 '인간이 부활할 수 있다'는 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겁니다. 언급했듯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혹은 철학과나 신학과에서 제1원인론을 가져와서 신의 존재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제1원인론이란 쉽게 말하면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요소들은 모두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처음에는 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각주:2] 그러나 이 논리도 완벽한 논리는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이 유대교/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걸 입증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는 구절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라는 구절이 같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만약 육체가 없다는 말로부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다'라는 것을 유도해내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교회다니시는 분은 거의 반자동적으로 하나님은 물질로 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 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물리적인 성질을 전혀 지니지 않은 영적이라는 존재가 우주라는 거대한 '물질'을 만들 수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전지전능'으로만으로 믿기에는 부담이 큽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힘(영)으로써 물질을 만들었을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은 하나님 자신에게 속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다는 것으로, 유(有)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물질계에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것입니까. 그저 믿으라고 하기에는 비신자에게는 짐이 무거운 듯합니다. 또한 하나님에게 존재하는 영적인 힘으로써 뭔가를 만드신다면, 하나님이 사용하신 힘의 속성이 어느 정도는 전달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물질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사용한 힘의 속성(영)이 창조과정에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물질을 만들었다는 창세기 1장 1절은 액면 그대로 믿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부활의 역사성이나 논리를 통한 신의 존재성 입증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은 모두 가능성에 불과하고,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거나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은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기독교는 철학적 논리를 통해 신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철학적으로도 칸트 등 적잖은 학자들이 논리를 통한 신존재 입증에 대한 불가능성을 논파하였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예수부활에 대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논리를 펼쳐가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논지들도 많지만 대개 논리를 몇 단계 뛰어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교계에서는 지적 설계론을 꽤나 괜찮게 생각하고 내놓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넘은 것으로, 상상력을 채우기에는 괜찮지만 논리적 입증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본다면, 기독교는 완전히 틀린 것이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저는 인식의 측면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을 뿐, '실제로' 위의 논리들이 완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게 경험하지 못한 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각주:3] 결국은 누가 뭐라하든 무슨 논리를 세우든 확실하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그들이 사용해온 모든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을 때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확실한 신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고 기독교에는 무슨 희망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결코 직관으로 신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신의 속성이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환경과 배경으로 인해 나타난 어떠한 믿음일 겁니다. 특정 사실에 대해서 불확실한 판단을 내릴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어떠한 '믿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령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한기가 들고 오싹한 느낌이 들면, 누군가는 "유령이 아닐까?"하고 생각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뒤에 누가 쫓아오나?"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장소는 물리적 조건이 그렇게 좋지 않네~"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모두 개인들의 환경과 평소 가지고 있던 어떠한 믿음들이 작용한 것이죠. 사실 이런 사례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믿음을 투영시킵니다. 사실 뉴스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에 대해, 지인들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이 신실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두 직접 확인하지 않았지만요. 그 만큼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믿음이라는 요소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들이 모두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 같이 매우 추상적인 존재는 더욱이요.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저는 하나님을 믿어요"라는 표현을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여러 정보들이 모두 옳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입증/반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믿음'과 '믿지 않음'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저 그들의 환경과 믿음에 의해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과 배경이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이고, 기독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요.

 

 가장 흔한 케이스가 모태신앙입니다. 그저 어린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타성으로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고 쭉 가거나, 혹은 신에 대한 의심을 했지만 남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크게 언급할 바가 없습니다. 둘째 경우는 조금 복잡한 경우입니다. 만약 신이 존재할 가능성과 그 신이 하나님일 가능성, 예수의 부활이 사실일 가능성, 성경의 기적이 사실일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뇌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제 논지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명확히 실존한다는 것은 한낱 인간인 우리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하나님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음을 조금씩 인지하면서부터 고민이 시작될 겁니다.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다면, 이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기도를 많이 하거라.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자"에 응하여 그들을 신뢰하여 그래도 믿기로 다짐했거나, 공동체에서의 추억/즐거움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각주:4]. 곰곰히 생각하여 위의 문단들에 나타난 제 생각과 같이 하게 되었다면, 쉽게 신앙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약 의심이 있음에도 의심을 지우지 않고 신앙을 유지한다면, 여러 고민을 통해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삶보다 그래도 신앙을 가지는 삶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ㅡ여기에는 사회정의나, 도덕성, 개인의 행복 등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방금 언급한 공동체의 즐거움도 있을 것입니다ㅡ. 혹은 믿음을 버리기에는 너무 대가가 크므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자료들을 보아 의심을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태신앙 외에는 '새신자'가 있을 뿐입니다. 역시 경우마다 다르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언급하겠습니다. 대부분이 지인의 권유를 받아 정착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순수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공동체가 주는 사랑에 감응하여 신자가 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혹은 계속 교회에 있으며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들로 신자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신자가 되고 신앙을 유지하는 이유는 크게 '타성'과 '공동체의 사랑', '기타' 정도가 될까요? 저는 솔직히 타성을 제외한다면, 공동체의 사랑이 신앙을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에 대한 믿음(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주었고, 그들에게 의심을 눌러버릴만큼 큰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교리를 풀어가는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라고 기록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가장 큰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꼽았습니다. 도대체 왜 성경이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는지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로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이를 실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고대 이스라엘 권력집단이 민족의 단합을 위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가공했을 수도 있습니다ㅡ후자의 경우, 예수는 당시의 종교, 도덕, 사회의 타락에 대해 개혁을 외친 청년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ㅡ.

 적지 많은 사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이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치유를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분들은 그런건 다 세뇌를 위한 초석에 불과하고, 그런건 종교가 아닌 상담이 담당해야한다고 강경하게 말하시겠지만요). 작용의 측면에서 저는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근본교리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며, 삶에 소망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모태신앙이나 새신자들을 교회에 머물게 한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이 제대로 교인들에게 전파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와 티켓으로 무장하고 비신자들을 맹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길 가는 사람을 길게 잡아두고, 교회 나오라고 길게 이야기하시는 분들[각주:5]. 그리고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는 교인들. 무작정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일반화하여 타인에게 통용하려하는 사람들. 타인은 틀리고 자신은 반드시 맞(아야만 한)다는 사람들.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만, 이들은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고,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회 밖에서도 그럴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전도사파의 분열, 대형교회 건축사업 문제, 성도들간의 뒷담화 등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교회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성직자가 성추행을 하거나, 회개와 사랑을 외치는 개신교인들이 헌금횡령도 하고 건축사업을 먼저 따려고 하거나, 작게는 새신자를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거나.

 

 기독교가 주는 사랑의 위안도 있지만, 사랑은 커녕 문제만 일으키는 사례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 좀 길게 돌아가서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근본교리가 '사랑'을 받고 타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독교가 걸었을 법한 길, 그리고 기독교가 놓친 것들에 대해서요.

 

 

 우리가 타인에게 뭔가를 설득하는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아마 서로 의견을 나누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그 사람의 대답을 듣고 의견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지요. 한두사람에게 설득을 한다면 이 방법이 정말 좋겠지만, 만약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집단이면 어떨까요? 작게는 지역공동체나 어떤 단체의 사람들, 크게는 국가와 민족이라면요? 시공간적으로 모든 사람을 일일이 만나 그들에게 맞는 대화를 하며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하게 됩니다. 미디어를 통해 대표자들이 대화를 한다고 해도, 그들이 대화가 모든 사례를 커버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수단을 통해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많은 타인에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효율적인 수단이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고대에 이를 가능하게 만든 수단은 '믿음체계'를 고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숙적이나 백성에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하늘(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은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이라는 개념도 있었고, 신탁을 받는 신관들도 있어 백성들에게 이에 대한 믿음을 만들었고 자신을 따르게 했습니다. 어릴 적에 읽어봤을 법한 그리스/로마 신화도 그에 해당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실제로 '제우스' 같은 개념을 빌려와서, 사회를 유지하고 그들의 일상을 유지하였습니다. 고대에서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권력자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사회전반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방법을 택했을까요?

 

 답은 이미 위에서 제시하였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끌어왔습니다. 종교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자신의 정당성을 평범한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둠으로서 그들은 표를 얻었습니다. 누군가는 "뭐 그렇게 조잡한 걸 누가 믿겠어?"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힘을 동원해서 그들은 사회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사고관과 삶의 방식을 하늘이나 신 등에 맞추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과 사고관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그런 믿음체계에 익숙해지게 되면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는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에서 자식으로 계속 내려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그렇게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그를 믿지는 않았을텐데 어떻게 된 걸까요? 이 역시 간단합니다. 지역공동체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의 발언은 신뢰성을 얻기 쉬웠고, 계속 해서 같은 발언을 듣게 되면 그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이미 기존에 다른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처음 듣는 정보에 대해서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근대에는 가치관이나 사회의 입장들이 쉽게 전달되곤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이에 근간이 되는 유대교 역시 다른 고대적인 삶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전해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라는 종교가 정치적인 목적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단합을 위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의 대상으로서 우선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는지는 그 시간을 살지 않았던 우리가 알기에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교/기독교는 그들에게 전해져 오는 모종의 기록들(제사를 지내는 방법, 유월절 등의 기념일을 기리는 방법, 여러 가지 계명 등)이 지켜졌던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대교라는 '믿음체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전해져오는 기록들을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전파하고 이를 지키게 할 수 있는 수단은 유대교라는 거대한 믿음체계였을 것입니다. 다른 믿음체계도 동일하지만 유대교/기독교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민족이 기록들을 전승해나가고 믿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보증해줄 어떠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체계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체계를 지탱해주는 이론적 존재자가 없으면 믿기가 힘들어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그들의 삶에 끌어들였습니다.[각주:6]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어떠한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세계에 존재하는 그들과 같은 존재라면, 믿음체계를 지탱해주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는 여러 의견의 차이가 있을 것인데,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있는 그들과 대등한 존재라면, 이에 쉽게 반대하는 이스라엘인이 꼭 있을 것이니까요.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과 대등하지 않은 존재이기 위해 다른 세계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혹은 기록들을 지키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 기록들과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다른 세계의 '하나님'을 끌어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행위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할 때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존재가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역의 무언가를 끌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들과는 다른 속성을 지닐 것이고 그로부터 정당성이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입법을 위해 타국의 사례를 가져오며 이를 우선적으로 '선진국'의 사례라고 놓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법한 다른 집단(가령 전문가집단)으로부터 정당성을 주장하거나하는 것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ㅡ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해당하는 사례에 적합하거나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동떨어진 다른 존재이니까요ㅡ.

 

 하나님이란 개념은 대략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현실의 인간에게 전해지게 되었을 겁니다. 이세계에 있는 하나님은 보통의 정당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정당성까지 확보해주는 존재로, 이를 위해 보통의 다름이 아닌 '완전한 다름'의 존재이게 되었습니다. 소모되어 사라지는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영'이라는 개념으로, 기록의 절대성을 위해 '완전한 신'이자 '창조주'라는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전승은 절대성을 보증받게 됩니다.

 

 현실의 인간에게 각인되게 된 하나님이란 개념은 공동체의 유지와 삶을 위해서 단순히 소모성으로만 사용될 수 없었기에, 여러 변화에 대처하고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전해준다고 믿어지는 존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에 해당합니다. 그 외에도 기록을 전승하기 위해 랍비 등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의 존재와 함께 이론적 체계인 교리도 정교해지고, 이제 조금씩 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

 

 

 수학자이자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파스칼이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걸까요, 아니면 특정 행위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전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파스칼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 행위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속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매우 치명적인 수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신의 존재성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완전히 없는 것이라면 개념이라는 형식으로도 등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완전히 불신의 상태일 것이고, 완전히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100%의 확신을 지닐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행위가 필요했고, 또한 이는 치명적으로 효율적인 수단이었습니다.신자든 비신자든 회당과 교회에 나와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일정한 '행위'를 통해 믿음을 키워나가고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말씀을 듣고, 조금이라도 같이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비교적 친근하게 만들고, 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만듭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종교의식'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또한 기도의 경우 회당에만 나와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도록 되어있었기에 더욱 믿음은 유지되기가 쉬웠습니다(이슬람교를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격신'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대화를 하면서 신뢰관계를 더욱 쌓게 되는 영향도 있겠습니다.

 

 더욱 치명적으로는 '안식일'의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행위들이 불규칙적으로 언제는 했다가 안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때에 의무적으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물리적인 장소인 회당(기독교의 경우는 교회)이 있습니다. 직접 회당에 가서 종교의식을 지속하는 행위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신자'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지위를 가지는 것과 동일한 과정입니다. 가령 우리는 DNA검사를 하거나 가족관계확인서를 떼어와서 "이 사람들은 내 부모구나"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정이라고 설정된 공간에서 같이 살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이들을 '부모'라고 부르고, 자신을 '자식'이라고 부르게 되는 겁니다. 행위를 통해 우리는 어떤 직함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무엇보다 그와 관련된 이름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인들도 그랬습니다. 회당에 직접 나가 여러 행위들을 반복함으로써, 그와 관련된 이름인 '신자'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살아온 전체 삶을 구성하고, 개인의 삶의 방식이자 신뢰하는 공동체의 구성방식이었기 때문에, 믿음체계에 반하는 무언가가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대교라는 종교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을 겁니다.

 

 유대교가 비록 이렇게 체계를 갖추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리적이고 이론적 체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원만하게 만들기 위한 치명적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공동체'입니다. 이들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있는 자에게 기도를 함께 해주며, 조언을 해주고, 교리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잡아주려고 합니다. 이런 방식 중에는 '체험'을 강조하는 강력한 방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교회나 성당다니시는 분은 '삶을 통한 전도'라든가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낸다/증명한다'라는 말에 익숙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부분이 큽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원들의 삶을 보고서, 그 삶에서 드러나는 신의 모습을 보고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개인들이 유대교(/기독교)를 믿게 된 개인적인 체험들, 삶의 변화 등을 알려주고, 평소의 신실하고 정직한 모습 등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의 변화와 체험들의 뒤에 하나님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매우 공동체원들을 강력하게 묶어주는 수단입니다. 여기에 관련된 성경구절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가 있습니다. 추상적인 교리나 기도보다는, 직접적인 현실에 있는 공동체원들의 체험은 의심을 지우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살펴보았는데,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믿음체계는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를 제외한 기본적인 교리가 동일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체제도 위의 서술과 동일합니다. 기독교는 위의 과정들을 통해 근본교리인 '사랑'을 배우고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도덕성 문제 등으로 비판과 비난을 동시에 사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강력한 체계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우선 제가 서술한 강력한 믿음체계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전술했듯이, 기독교는 자신의 근본교리인 '사랑'을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방법으로 전하기 위해서 믿음체계를 가지

고 있습니다. 비록 믿음체계 전체가 향하고 있는 것이 '사랑'은 맞지만, 이를 위해 과할 정도로 수많은 장치들이 신에 대한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당장 교회에서 많은 설교들이 사랑보다는 신에 대한 신뢰에 맞추어져 있는 것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신을 향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도록 지속적으로 훈련되어왔고, 당연히 반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각주:7] 기독교인이 교회나 성당에서 저처럼 "우리는 신의 존재성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다."고 말하고 교리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수단이 과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격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믿음을 담보하기 위해 심판이나 종말론적인 구절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질이 흐려진 믿음과 그러한 구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다면, 한때 유행했던 불상 참수, 땅 밟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죠(저는 심지어 이를 옹호하는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현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3-5)

 

 좀더 분석적으로 들어간다면, '하나님'이란 개념의 성격도 어느 정도 이런 일들에 큰 기여를 합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유일한 절대자'입니다. 그러한 성격에 힘입어 십계명에는 위와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떠한 삶의 중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위는 비기독교인에게 설파되는 것은 아니며, 믿는 자에게만 요구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를 오해하여 비신자에게 위와 같은 사상을 전제로 깔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종교, 우상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며 타인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비인정(다원주의 거부)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는 성경과 신에 대한 '믿음'이 극도로 강조된 기독교 분위기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 여러 가지 문제들은 대개 자신의 '믿음'과 '소망'이 그릇되게 결합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소망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실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성경을 제외한다면 불가능합니다.[각주:8] 그러나 자신의 소망을 소중히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서 자신이 어느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하나님에서 찾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누군가가 보증해주었으면 하고, 당연하게도 절대성을 지닌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찾는 것이죠. 자신이 어느 기업에 들어간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거나, 불교사찰에 가서 땅밟기를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환한다든가, 교회의 여러 사업들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지나친 강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행위와 믿음이 절대적인 사실이기를 바라기에, 타인의 의견을 묵살하고, 듣더라도 머리에서 쉽게 지워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신앙과 개인의 심리적인 의식과 소망들이 잘못되어 나타나면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본 주제에서 좀 벗어나지만 윗 문단의 마지막 문단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과학화' 현상을 언급할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물리적 불가능성에 가까운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거나, 이에 대한 역사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의 여러 이적이나 기적들,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라 믿어지는 것들은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에서 그것을 증명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그냥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성경적으로 보자면, 그런 이적들은 평범한 과학들이 실험을 통해서 재현을 할 수가 없고, 오로지 성령의 임하심,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죠. 따라서 성경에 언급된 기적들은 과학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 게 오히려 그들의 신앙에 좋습니다. 대표적으로 탄소측정법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언급과 함께 에덴동산의 시기를 6000년 전으로 잡아, 지구 혹은 우주의 나이를 6000년 전으로 보는 극단적인 입장도 있습니다. 현대과학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더라도, 그들의 주장은 근거를 내세우기 어려운 가설만이 존재합니다(가설로서는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사실탐구의 입장에서는 크게 가치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물리 같은 과학을 동원하지 않고, 역사적 자료들의 과학성/신뢰성을 통해 입증을 하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언급은 과거를 살지 않는 현재에서는 절대적일 수가 없고, '개연성'을 보여주기에는 괜찮지만 그 역시 가능성의 측면에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못합니다. 이 모두 자신이 믿고 소망하는 것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이고, 대개 우리가 아는 상식들과는 비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상식이 절대성의 측면에서 모두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판단하는 수준의 것들은 모두 상식이라 믿어지는 것들과 일관성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같은 대상에 대해 일관된 시각을 갖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큰 반감이나 의문을 갖게 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그 비일관성에 대한 허용을 설명해야하는데, 응당 이는 다른 비일상성을 불러오므로 순환적인 논리가 되기 쉬우므로, 타인에게 이를 납득시키기란 매우 어렵게 됩니다).[각주:9]

 

 

 기독교가 걸었던 길과 잘못들을 언급하기 위해 상당히 길게 돌아왔습니다만, 이 정도가 제 사견을 펼치기 위한 위한 서막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설명'에 가까웠다면, 지금부터는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제 의견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로 '기독교는 믿을 만한가/기독교인이 되어도 되는 것인가', '성경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기독교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상적인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현재로부터 인과를 추측해나간다. 그러나 과거는 어둠에 쌓여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는 무엇을 이유로 현재에 등장하는 것일까?

 

 제가 한 때 고민했던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까마득한 시간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구약시대로 소급하더라도, 완전히 까마득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태초에 대한 언급과 아담과 하와의 창조, 그리고 에덴동산. 이것들은 어느 시대에 살았던 인류든간에 사실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록은 왜 등장했고, 어떻게 등장한 것일까요? 성경에 쓰인 것처럼 성령의 임하심으로 계시를 받고 모세가 쓴 것일까요? 이는 특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서 과거를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으로서는 기록자가 세계에 대한 어떤 인식을 투영시켰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까마득한 시간대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이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반드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과거를 '선택'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각주:10] 그리고 이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선택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이해하지 못해 왔고, 그들이 정말로 그런 과거가 '실존'한다고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성경 역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 중에 한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설정한 인류, 세계, 과거는 무엇이고, 창세기 전반부 필자는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요? 이를 위해서 창세기 전반부에 주목한만한 구절들을 인용하겠습니다. '과거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목적을 가지고 과거를 선택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시면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3-7)

 

 인용이 길지만,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이 구절들은 창세기 전반부 기자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인간은 우선 '신의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다'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 읽으셔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겉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형상이 image와 likenes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흙으로 인간을 지었지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생기'인 것으로 보아, '형상'이라는 것은 신의 속성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신의 속성이라는 것은 추측건대,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등장하는 '공의', '사랑' 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서로 화평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고, 그곳에 선악을 가릴 수 있는 '선악나무'를 세워둡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비로소 존재하게 되지만, 이들은 서로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에게 넘어가고,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약속을 어긴 대가로 이들은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읽으려고 하겠지만, 창세기는 문학작품에 가깝게 보는 게 보는 것이 좋고, 문자 그대로보다는 자간에 있는 숨겨진 의미를 읽으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에서 등장하는 '뱀'이라는 존재는 하와의 외부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내부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하와가 외부의 존재에게 꾀임을 당한 것이고, 후자는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 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간에, 인간은 내외부적인 고난으로부터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기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과오도 저지르는 존재인데, 왜 하필 선악과에 대해서만 하나님은 저렇게 반응하는 걸까요? 이 부분이 창세기 기자의 인간관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선악을 알게하는 과일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현상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여러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선악이라는 것이 과연 한 가지 기준만 존재할까요? 살인이나 간음 등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각각의 사회와 문화에 따라 선악이라는 것은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가령 인도권에서는 소를 도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를 금합니다. 유대교에서는 피가 흘러나오는 날음식을 거부합니다. 특정 부분에서는 선악이라는 개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같은 행위가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나 문화 같은 거창한 이름을 꺼내지 않더라도, 개인과 사회, 개인과 개인 사이의 선악개념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상황에 따라 선악의 개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가 현실에서 본 인간들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서로 가치관과 선악관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 서로 다투고 충돌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야말로 창세기 기자의 현실에 대한 극명한 인식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창세기 기자가 보기에 현실의 여러 문제들은 각자가 모두 다 다른 각자만의 선악관[각주:11]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기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움이나 갈등을 중재할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이고, 이 문제에서는 하나님만이 가지고있는 '본래의 선악관'이 아닐까싶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선악나무'를 도입함으로써, 현실의 인간은 서로 선악관 차이로 매일 싸우지만, 인간이 회귀해야 할 것은 본래의 선악나무가 있어야 할 곳이고, 그를 주재하는 선악의 본질인 '하나님'을 통해 갈등을 줄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사실 이런 방식의 전개는 플라톤이나 하이데거/가다머, 루소 등의 철학자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각주:12]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위와 같은 해석에서는 '왜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알고도 선악과를 눈 앞에다 나두셨고, 뱀이 하와를 유혹하도록 나두었나요?'라고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창세기 기자는 그저 현실의 인간과 그들이 지향해야 할 곳을 말하기 위해 위와 같은 기록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에서 읽어야 할 부분은 곁가지의 자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이자 '인간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입니다. 에덴 동산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는 해석도 좋지만, 인간 내부의 심리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세기 전반부를 해석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를 특정한 인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위의 해석방식을 잘 따라오셨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게 되겠지만, 저는 적지 않게 아담과 하와를 비난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이 아담 혹은 하와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은 아담과 하와를 이러한 혹은 저러한 속성을 지닌 특정한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성경은 그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든가, 정직하였다든가하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기지 않은 것은 창세기 기자가 그들을 '특정한' 인간이 그저 '인간'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특정한 시공간 속의 특정한 인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창세기 기자가 기록한 존재들이며,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존재 특성을 보여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창세기 기자의 입장에서는 선악관/가치관을 통일시켜 줄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구요.

 

 창세기 이후로는 예수라는 존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핵심 키워드입니다. 제가 '믿음체계'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실제로 구약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승되는 기록들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믿음체계가 형성되었으나, 본인들이 하는 행위가 향하고 있는 바를 간과하게 되었습니다. '믿음'만이 중요해지고 본질인 사랑은 가려졌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또한 믿음을 만들기 위해 행해졌던 여러 물리적인 행위들(회당에 나가고,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고 등등)의 영향이 큽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인데요, 특정한 목적을 민족적인 단위에서 실현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절대적인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믿음체계'를 형성하여 그것을 '반드시' 지키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들을 하나로 묶을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신뢰가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유대교 역시 그러하였고, 그 방식은 제가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믿음을 만들고 유지하게 할 치명적인 행위들을 통해서였습니다(회당에 모두가 직접 나가야 하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설교를 듣고 등등). 또 역시 반복이지만, 이런 행위의 본래 목적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지만, 절차 자체가 사랑을 담보해줄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초점이 있다보니, 믿음을 위한 행위가 강조되고 사랑은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등장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위는 개역개정판 번역인데, 새번역판에서 인애는 사랑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 당대에도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각주:13] 그러나 이런 문제는 개인의 탓도 있지만 유대교가 걸었던 구조적인 문제가 매우 컸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저런 구절을 전해도 기존의 틀이 바뀌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지속되다가 이를 타개할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예수'라는 존재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위 구절은 예수가 호세아 6장 6절에 있던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 우선시되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곧 대리자)'로서 등장합니다. '믿음'을 위한 패러다임이 아닌 '사랑'을 위한 패러다임을 위해,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는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하기에 나섭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8-31)

 

 신의 대변자이자 결국은 신 자신인 예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들이 아닌, '사랑'을 최고의 계명으로 단언해버립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유대교는 그대로 유지되고 결국은 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종교(기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보았을 때는, 가치관적으로는 유대교보다는 기독교가 이스라엘 본류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각주:14]

 

 예수의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기존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잡하지만 당대의 사회정치적인 문제도 있었고, 유대교 입장에서는 예수는 그들의 방식을 철저히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는 성경의 예언성취를 위해 십자가 행을 지고, 성경에서의 부활의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성경 내부의 논리로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믿음'의 패러다임이 아닌 '사랑'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응당 되어야하는 것이 맞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행이나 부활에 대해서는 비신자들도 대부분 아는 것이라 생각되므로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는, 예수는 헤겔이란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죽기까지 인간이 된 신'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모든 형식적인 행위가 사랑이나 그릇된 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절차들을 모두 부서버릴 필요가 있었고,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인간-제사-(복잡한 절차)-제사장-성부'가 아닌, 아무런 복잡한 절차 없이 '인간-성자-성부'로 신과 인간을 아주 간단히 중재해버립니다. 이는 복잡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믿음체계가 가지는 문제를 한번에 날려버리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예수의 영혼이 십자가에서 떠나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버리는 사건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믿음체계의 간소화와 함께 예수가 3년 동안 그렇게 강조한 '사랑'은 유대교의 문제를 날려버릴만 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으리라(마12: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노라(마9:13)

 

 개인적으로 저는 위의 구절이 예수가 유대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문제는 예수의 행보와 함께 십자가-부활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정통성을 설파하지만, 그를 믿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죽기까지 인간이 된(혹은 인간을 사랑한) 신이라는 사실을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까지 받아들이게 됩니다.[각주:15] 그러나 여기에서 끝은 아니고, 그는 죽은지 사흘 뒤에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원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을 통해 그가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했으며, 그가 죽기까지 인간이 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죠. 그가 신이라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다시 되살아나는 '부활'을 통해 증명되며, 이런 극적인 사건을 통해 역으로 예수의 모든 행보와 발언들은 신의 말씀으로 권위를 얻게 됩니다. 부활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바울은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종말의 때에 더 이상 고통 없는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뒤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라고 언급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외친 '사랑'을 이들에게 전할 수 있으면서,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자들에게 삶의 소망을 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핍박과 사자밥이 되면서도 고통 속에만 젖어있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들이 그 고통 끝에 고통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예수가 부활의 첫열매가 됨으로써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부활이란 사건은 매우 신자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고, 바울이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헛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저는 위 구절이 성경을 풀어나갈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이 성경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를 바로 위 구절에서 찾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써내려 온 글을 생각하신다면, 위 구절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소망', '하나님/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짓는데에 크게 거부감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고,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설파했으며, 십자가-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소망을 보여줬으며, 바울은 이 모든 사건에 대해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믿음에 대한 과한 강조를 비판하고, 지속적으로 믿음보다는 '사랑'을 강조하고, 후반부의 부활에 와서야 '소망'을 언급했는데요, 바울의 위와 같은 언급 속에서 이제야 정확한 균형을 맞추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바울의 언급대로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사랑'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믿음과 소망이 모두 깎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믿음'이나 '소망'으로 인해 '사랑'이 가려져서는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기독교에서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이 믿음을 요구로 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삶에 대한 '소망'인지, 모두인지는 신이 아닌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바울의 언급대로 '사랑'에 가장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저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있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독교에서 명확히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는 소망과 사랑입니다. 소망은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가지는 개개인들의 바람이자 기대인데, 그 소망하는 내용이 실제로 '참'이라는 판정을 받을지는 소망의 내용이 향하고 있는 시공간을 직접 접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망 또한 불확실성에 서있는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확실하게 현재 우리가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신의 입장에서는 믿음과 소망, 사랑 모두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그러한 전지전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기준으로 사고를 진행시켜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려는 것이 믿음과 사랑, 소망 모두일 수도 있지만, 그 내용들의 참/거짓을 알 수 없는 인간이자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고 와닿는 것이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판단할 수 있으나, 저는 그들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그들이 믿는 것들에는 불가지론적인 내용이 매우 많으며, 결국은 이와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저는 기독교에 합리성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믿음과 소망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소망,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저는 궁극적으로는 믿음과 소망은 모두 사랑을 배우고 전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사회는 기독교가 전하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희생, 사랑, 자비, 인내뿐만 아니라 폭행, 살인, 강도, 전쟁, 고문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전자보다는 후자의 파급력이 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전자를 전하고 유지할 방법보다는, 후자를 개발하고 광범역한 영역에 퍼트릴 수 있는 수단이 더 연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구하고 세계는 전쟁과 기아 등을 반복해왔고, 이는 끊이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매우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 거대한 힘을 가지고 모두를 눌러버릴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사상가인 한비자가 주장한 것처럼, 좋은 의도와 강력한 법과 수단을 지닌 존재가 모두를 지배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지속적으로 오래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죽여버린다!'를 사용하지 않고 좋은 의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의도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의 뇌리에 강력하게 박아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가치는 사랑이며, 이것이 앞서 말한 '좋은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를 강제하는 수단은 하나님과 관련된 '믿음체계'입니다. 그러나 너무 믿음만을 강조하면 유대교처럼 '좋은 의도'가 더 이상 좋은 의도가 아니게 되기 때문에,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믿음체계에서 가장 높은 권위가 있으면서 사랑을 강조해 줄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 존재는 예수이며, 그의 존재성은 성경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성취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부활을 통해 증명됩니다. 그러나 예수 역시 '사랑'만을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아무리 고귀하고 좋은 가치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두가 안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오히려 자기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적대하는 게 인간사회니까요). 따라서 그 역시 모두를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묶어줄 수단이 필요했고, 예수 역시 '믿음'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처럼 사랑 없는, 본질이 흐려진 믿음이 아닌, 사랑이 있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제가 사랑을 강조하긴 했지만, 성경에서는 예수가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5)"라고 발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근본을 사랑으로 삼았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일축하였으며,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기 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라고 말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고, 본질은 사랑에 있으되 이를 만들어줄 구심점을 믿음으로 둔 것입니다(또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본질에 대한 강조와 함께 믿음체계를 간소화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믿음이 흐려지면 믿음을, 그러나 그것이 사랑을 해치면 사랑을 강조했던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떨까요? 사랑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고, 성부/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저 그냥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을까요? 만약 성경에서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영원히 고통만을 안겨준다면, 혹은 이 세계가 끝나 다른 곳으로 가서도 지금과 같이 고통만이 있다면 누가 예수를 믿고 싶어하고 사랑을 원하겠습니까? 세계가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실천할만한 큰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기독교를 믿고 사랑을 실천할 충분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인간이 '좋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어야 할 것입니다(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를 떠올리셔도 됩니다). 성경에서 이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부활의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물려받지 못한 탓에, 인간은 반드시 한번은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은 인간에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게다가 그것이 '나쁨'의 방향이 아닌 '좋음'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듭니다. 영원히 고통없는 삶이 한번의 죽음너머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기독교를 믿고 사랑을 실천할 충분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대개 부활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것이지만, 고통 끝에 새로운 좋은 삶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소망'은 이들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도록하는 것에 큰 영향을 줍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위해 나아가는 자들을 보면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세 박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하나라도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좋음'에 대한 소망이 있고, 중요한 가치로서 사랑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위한 구심점을 마련해주고 소망의 내용을 보증해줄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의미가 없는채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믿음이 향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좋음'의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소망이 없으면, 삶에 고통과 두려움만이 남고 실천할 수 있는 행동력은 극도로 낮아질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부활, 삶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래 향하고 있어야하는 '사랑'이 없다면 맹목성만을 가지고 그저 엇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듯 믿음, 소망, 사랑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삼박자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며, 기독교의 모든 체계를 가능하게 하며, 믿음과 소망이 등장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서술들이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을 의미라고 생각하고, 이 구절이야말로 성경을 꿰뚫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정도가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부분이 아닌가싶습니다. 이제부터는 좀더 기독교 외부적인 이야기와 함께 나머지 주제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약간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어..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 내가 교회에 계속 다녀도 될까..", "딱 봐도 신같은 건 없는데, 교회다니는 인간들은 무슨 생각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네. 누가봐도 친목질하러 다니는 거 아닌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불확실한 걸 내가 어떻게 믿으라고 이렇게 전도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는 천지만물이 아는 사실이에요.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가끔씩은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아. 믿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야지" 등등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서 '나는 기독교인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존재성'을 사실의 문제로서 탐구하려는 자세가 많습니다. 이런 접근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이 선택하고 옳다고 판단하는 것들에 대해 근거를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기독교를 신뢰하는 근거를 대려고 할 것이고, 무신론자는 아니라는 그만의 근거를, 불가지론자는 또한 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 대해 나름의 근거를 댈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근거들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 신의 존재성에 대해 'A0'라는 언급을 했다고 합시다. 여기서 믿고 신뢰하실 분은 그냥 믿으시면 됩니다만, 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A0'을 신뢰할 수 있는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를 'A1'이라고 합시다. 여기서 의심을 멈출 사람은 믿으시면 됩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A1'을 신뢰할 수 있는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를 'A2'라고 합시다. 이제 궁금해야 할 것은 이런 과정이 과연 끝날까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과정이 끝난다고 가정하고, 모두가 납득하게 되는 최종 근거를 'An'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An'이 과연 옳을 수 있을까요? 근거는 인간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될 것입니다. 우리가 'An'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린다면, 그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거는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인간이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는 여러 가정들과 전제들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가령 논리학의 3대 전제인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같은 경우 거의 모든 인류가 동의하고 있을 정도로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그 외의 논리학적인 가정들과, 인간세계의 기본적인 전제들, 학문세계의 여러 전제들이 우리의 판단에 깔려 있습니다. 또한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배경에 의해 더욱 세부적으로 여러 선입견들과 삶의 전제들이 들어가있습니다. 우리가 'An'이란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더라도, 거기에는 인간이 무시할 수 없는 기본 전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인류가 납득하는 근거인 'An'이 있더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An'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가정된 상황이지만, 실제로도 대화를 나누거나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들에 대해 냉철하게 묻게 되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적 상황을 통해 우리는 신에 대해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신은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규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표현을 물질계의 대상에만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속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존재한다'는 표현을 규정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신'뿐만 아니라 수학의 대상인 '수'나 '논리'가 존재하는가/아닌가 역시 같은 의미로 어렵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위의 문단 같이 신의 존재성에 대해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결코 찾을 수 없는 답이고, 찾는다 하더라도 그답이 옳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수단이 없거든요(수단을 찾는다면, 그 수단이 정당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요).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신에 관련된 논의를 아에 포기하는 것은 이와는 독립적인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신의 존재성이 밝혀질 수 없다는 것과 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믿음'의 스펙트럼에 확률을 부여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 같습니다.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힐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0의 믿음을, 절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1의 믿음을, 그렇지 않은 대상들에 대해서는 0<x<1의 확률로서의 믿음을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격상 0과 1은 각각 논리적인 모순과 논리적 참이 해당될 것입니다. 그를 제외한 모든 믿음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가미될 것입니다. 신의 존재성은 믿음의 스펙트럼에서 0과 1에 해당하는 문제일까요? 그렇다면 신은 수학과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논리적인 대상일 것입니다만, 우리는 신이 수학과 논리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은 수학과 논리학의 언어로 신을 판단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의 판단은 우리의 삶에서 쌓아온 여러 가지 정보들과 그것들로부터의 추론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그 정보들은 대개 0과 1사이에 있는 개연적인 것들일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신에 대한 '어떤 귀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그 믿음의 정도가 0에 가까운가, 1에 더 가까운가 정도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죠. 신의 존재가 0과 1의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신이란 '더욱 신뢰할 것인가' 혹은 '더욱 불신할 것인가'의 대상일 뿐입니다. 무신론자라면 0에 가까운 불신을, 열렬한 신자라면 1에 가까운 신뢰를 보낼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신의 존재성과 신에 대한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존재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아 모를 것 같아'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중요한 것은 더 믿을까, 더 믿지 말까입니다(결국 '나는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는 발언이 하나님에 대한 1의 믿음처럼 보이더라도 1이 아니라 0과 1사이의 어떤 믿음이 내재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신의 존재성을 논의에서 제외한다면, 기독교에 대해 신뢰를 더 보낼까, 말까하는 것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일반인들의 언어로 쉽게 말하면 '기독교를 믿을까 말까/기독교를 믿어야 할까 말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합니다. 저는 이 문제는 개인의 '감성체계'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체계란 개인적인 믿음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선호, 개인의 가치관, 개인의 바람, 개인의 사고관, 개인의 세계관, 타인의 시선 등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총괄하는 말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단순하고, 너무 무책임하고 추상적이라고 생각되신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적어보겠습니다.

 

 '신의 존재성'을 인간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내가 믿음을 더욱 가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당연히 신의 존재성이 아닌 무언가여야 할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포함한 '자신을 구성하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거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향하는 방향, 자신이 향해야 할 방향까지 있을 것입니다. 자아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타인'들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향한 자신'도 매우 중요하지만, '나를 향한 타인'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타인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면, '타인'의 감성체계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어야 하니까요(물론 모두와 상통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자신이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정도까지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기도 하니까요). 제가 감성체계에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쳐야하는지는 잘 대답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자기 인생에서 맞냐 그렇지 않냐를 따지는 문제이니까요. 제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하라 뭐하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들은 있습니다.

 

 첫째로, 자아와 관련된 일단 기독교의 가치관입니다. 저는 이 부분은 기독교에서 좋게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이 글 전체에서 언급해왔기 때문에 길게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의 교리, 소망-믿음-사랑의 체계, 이것이 자신에게 맞을 것인가 혹은 믿고 싶은가를 잘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둘째로는, 타인의 시선과 크게 관련되는 과학관이 있겠습니다ㅡ기독교의 도덕성과 함께 많은 경우, 성경은 비과학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는 여러 사람들에게 주저함을 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ㅡ. 사실 이 부분은 창조과학회에서 완전히 깎아놓은 것이 많습니다. 기독교를 사실의 영역으로만 분류해서 기독교의 모든 이적과 나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해서 비일관적인 과학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든가 하는 주장들이 바로 이런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혹은 과학의 영역인 진화론을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인 창조론과 같은 영역으로 치고, 대치된다는 주장들도 있습니다만, 충분히 생각해보시면 꼭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사실 이에 대해 언급하려면 글을 길게 따로 파야하기 때문에 일단은 여기서 쓰지 않기로 합니다). 그 외에 여러 이적들이나, 성령잉태설, 부활 같은 것들은 제가 언급했던 믿음-소망-사랑을 구조를 잘 생각해보시면, 과학과 크게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오히려 그런 가능성들을 보며 '왜 성경에 굳이 그런 장치들이 필요해야만 하는가? 그런 것들이 없이 기독교의 가치를 실현할수는 없단 말인가?'하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개인에게 맞기겠습니다(사실 일축하자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싶은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관련하여 또한 언급할만 것으로 '프래그머티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실용주의적 관점인데요, 자신에게 기독교를 믿는 것이 이득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는 의미입니다(이 역시 신의 존재성 여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가능한 관점입니다). 기독교가 비합리적이라 판단하고, 사람들에게 공격받는 것이 싫다하시는 분들은 기독교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다고 판단하시면 되고, 반대인 분들은 반대로 판단하시면 됩니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감성체계와 관련하여 좀더 이론적인 요소도 언급해볼까합니다. '신과 도덕'의 문제, '무신론, 기독교주의 중에 무엇이 좀더 이상적이고 현실적인가'하는 것들입니다.

 

 우선 '신과 도덕'의 문제부터 봅시다. 이는 사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과 종교주의자들의 논쟁입니다만, 기독교에 한정해서 생각하셔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기독교 쪽에서는 '신 없는 도덕이란 불가하다'는 주의고, 무신론은 '신이 없어도 도덕은 가능하다'의 입장입니다. 신 없는 도덕이 불가하다는 입장은 도덕의 정당성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요소로서, 혹은 모두가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이상 사회에 있어야 할 조건으로서 도덕은 등장하곤 합니다. 그만큼 도덕은 인간에게 중요하게 인식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그만큼 지켜져야 하는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만약 도덕의 근거가 절대적인 대상에 있지 않다면, 사실 우리가 절대적인 측면에서 도덕을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막말로 도덕이 절대적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러도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완전범죄를 일으키려 한다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더 나아가 이를 일으킨다면, 우리가 그를 비난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도덕이 그저 한낮 인간이 논의하여 사회가 강제적으로 주입한 것이라면, 그저 거부하면 그만 아니라는 생각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생각이 가능한 것은 모두 도덕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삶이란 이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 현재에만 머문다는 인식도 한몫합니다. 사후에 도덕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 절대적인 판단과 함께 심판이 있다면, 과연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는 논의도 가능합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도덕의 절대적인 근거는 도덕의 주재자이자 심판의 주재자인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도덕을 좋은 가치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신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인류는 문화나 환경에 따라 사고방식이 매우 다른데, 도덕적인 판단 경우 본질적으로는 대개 인류가 비슷하게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도덕이 인간과 독립적인 존재로부터 왔을 것이라 보는 관점입니다.

 무신론적 입장은 이와는 크게 대비됩니다. 우선 도덕이 절대적이려면 그를 절대적인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공격이 가능합니다. '당위'와 '사실'은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범죄자를 그렇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 곧 신의 존재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덕으로부터 신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가능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자면, 신 없는 도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도덕을 신이 만들지 않았고, 인간만의 산물이라고 해도 도덕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높아지는 과학적 분석력과, 경찰력의 동원을 통해 범죄검거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꼭 경찰력이나 과학력, 법의 형벌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고도 잘 도덕을 실천하고 있다는 의견도 가능할 것입니다(이는 결국 종교인이 더욱 도덕적인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각주:16]

 

 무신론과 기독교주의, 무엇이 더 이상적이고 현실적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본인의 감성체계가 어떠한지를 진단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믿음체계를 만들어냅니다ㅡ실제로 그 내용이 참일지 아닐지는 모릅니다ㅡ. 이는 언급했듯이 매우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이 믿음체계에는 따라야 할 예수라는 인간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큰 신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좋든 싫든 그 예수가 전파하는 인간상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깊은 연륜을 가지고 믿음을 실천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에 가깝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상을 설정하고 쫓아가는 것 자체에 공격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인간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따라가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상'이라는 것은 '현실'과 대비되는 것으로, 물질적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이라고 설정한 것을 쫓아가더라도, 그 인간상은 본래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영원한 크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간은 거기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줄뿐인, (이상적인) 모든 인간상이란 그저 헛된 것이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폐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신에 대한 신뢰를 1에 가깝게 보내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나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에 근거하여 성경대로 믿고 행동한다하더라도, 자신이 더 예수에 가까워지고 구원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자신이 확실히 기준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이상적이고 좋은가'에 대해서 위와 같은 비판이 가능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기독교는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치명적인 질문에 과연 이것이 틀린 소망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실현된 사회를 이상적인 세상으로 보고 이에 근거하여 세계를 살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해 사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들이 틀렸다는 것을 설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라는 인간상이 비록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예수에 친숙하거나 이를 추구하는 것에 올바르며, 그들은 그저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가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인간상의 공격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론의 이상성(理想性)에 대해서는 비슷한 식으로 '신이 올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세상 역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로 공격이 가능합니다. 무신론을 이상으로 여기고 도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천주교에서는 연옥에 대해서 설파하면 되고[각주:17], 기독교는 교리에 따라 그런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논리를 피면 됩니다. 또한 무신론적 이상론이 추구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수단을 그들에게 묻다보면, 결국 효율성이나 강력성의 측면에서 기독교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면 됩니다(혹은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근거는 절대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할 것입니다).[각주:18]

 

 '신과 도덕', '무신론과 기독교주의, 무엇이 이상적이고 현실적인가'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중 어떤 논의가 절대적으로 옳다든가하는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판단해야 할 것은 무엇이 본인의 감성과 맞는가/맞지 않는가 정도입니다.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는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대략 이와 같은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요약하자면 간단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허무한 결론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믿어라', '믿고 싶은 것을 믿어라'일 뿐인 의견을 이렇게 길게 썼으니까요. 이에 대한 근거는 결국은 우리는 모두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아왔다는 사실과 함께, 신의 존재성은 불확실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요건으로 생각하는 '신의 존재'는 영원히 안개 속에 가려있다는 사실으로 인하여, 신의 존재성이 믿음/불신을 가지는 것에는 독립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신의 존재성을 누구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을 더 신뢰할까 더 불신할까하고 고민하여 선택을 내리는 것에는 '신의 존재성'이 개입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개인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개인적인 요소란 자아나 타인의 시선 등을 포함한 본인의 '감성체계'이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신뢰나 더 많은 불신은 본인의 감성체계가 기독교와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더 신뢰하고 싶으면 신뢰하라고, 반대의 경우는 더 불신하라고 말하고 있음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는 이상적인 기독교인에 대해서 조금 논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비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적잖은 기독교인들은 제가 기독교인이 향해야 할 모습에 대해서 논하는 것에 대해 강도 높은 불쾌감이 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라고 우선적으로 반응하실 수 있지만, 비기독교인이라고 기독교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고, 이상적인 기독교인에 대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저 지나가는 글 정도로 생각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람직한 기독교인은 첫째로 예수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것처럼 또 어려운 것이 없거든요. 성경에서 예수에 대해 기록한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글자글자 사이에 숨어 있는 의도와 본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의 행보가 단순히 "우와, 주님은 이런 기적도 일으키셨구나!" 정도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사복음서에 오병이어, 칠병이어가 기록되었을 때, 단순히 글자가 말해주는 사건만을 읽어서는 안 되고, 그 사이에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예수는 어떤 의도를 당시에 가지고 있었는가를 읽어낼 수 있어야합니다. 물론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며, 그와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첫째에 속하는 내용이겠지만,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면, 아무리 타인을 사랑하려고 하더라도, 영원히 고통 속에 있을 뿐입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더라도,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특히 타인을 사랑하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할 것인가, 타인의 입장에서 사랑할 것인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지향적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봐야 합니다. 가령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무턱대고 자신이 믿는 교리를 가지고 공격을 한다든가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가 전하고 싶었던 사랑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알기 쉽게, 예수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있어, 어떤 행보를 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삶을 통한 하나님의 존재증명'[각주:19]을 이상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꼽고 싶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는 구절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리는 것에는 기독교가 가진 체계성이나 다른 여러 가지것들을 언급하는 방식도 나쁘지 않지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적인 방식이자, 일상적인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특정한 이론에 의해 삶의 방식을 바꾸기보다는, 삶의 방식이 이론을 선택하고 바꾼다고 생각합니다(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디서부터 형성되고 굳어가는지를 생각해보면 빠릅니다). 따라서 타인에게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본인의 삶의 성화를 통해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이론적인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내용은 대략 큰 맥락으로 보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잠깐 언급한 '진화론과 창조론'은 꼭 대치되어야만 하는가, '도덕과 신',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은 언젠가 따로 길게 써보고 싶은 주제이며, 그 외에도 길게 언급하지 않은 여러 가지 키워드들도 글로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사실 이번 글도 구상만 하고 언젠가 써야지 써야지하다가 겨우 손을 붙잡고 6월 27일~7월 5일 새벽 사이에 쓸 수 있었습니다. 일정 외에 남는 모든 시간을 글쓰는데 사용했으니,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긴 글은 작년에 경희대 컨퍼런스에 제출했던 논문 이후로 처음입니다. 논문 제출 이후로 여러 이유로 글 쓰는 걸 오랫동안 아에 그만두었는데, 오랜만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어서 "아, 그래도 나는 뭐라해도 철학을 놓을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기독교적 주제 외에도 거대하게는 인간의 삶이나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든가 정치라든가 하는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모두 큰 주제들이라 역시 머리에 구상만 있고 또 언제 쓰련지 모르겠네요=_=..

 

 글은 잘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는 여러 어려운 용어나 난해한 논리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2학년 때 글쓰는 방식을 바꿨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교수님께 제출하는 글마저도 최대한 이해를 도우려고하는 강박증마저 생겼을 정도입니다.. 이 글도 최대한 쉽게 쓰느라,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많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이 길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상적인 기독교인까지의 내용이 A4 22페이지라는 괴랄한 분량이 나왔지만, 시간이 정말 많으실 때 한번쯤 읽어보면 괜찮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쓴 동기는 매우 간단합니다. 언젠가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가 지금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여기에 영향을 끼친 요소는 매우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도 궁금했고, 내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도 궁금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정상적인 기독교인은 될 수 없음을 잠정적으로 결론내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은 비록 최대한 치우치지 않으려 썼지만, 언젠가부터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의 거대한 장치가 아닌가하고 생각한 뒤로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참'이라고 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그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논리와 그러하는 것이 좋을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려는 것도 백분 이해하고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독교로부터 다른 종교나 정치, 철학,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장치들을 분리해낼 수 없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적 사유나, 기독교의 종교적 장치는 기독교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에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해 품었던 특별한 감정이 사라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절대적인 영역에서 사실이기를 바랐으나, 저는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모두 믿고 싶은 것을 정당화하면서 살아갈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저는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과 함께 붕괴하면서, 저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은 더 넓어졌지만, 허무함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가치관에 매우 동의하지만, 성경적으로 본다면 저같은 사상을 지닌자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단언컨대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상적으로 본다면 저는 불가지론자에 가까운데, 불가지론자가 일반신자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는 교회마다 자유주의자라며 공격받을 것이 뻔합니다. 신을 믿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선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가지론적 생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본인의 생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간, 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도 않을 뿐더러, 이상한 취급받기가 쉬울 겁니다. 또한 바뀔 리 없는 생각을 바꾸라는 주변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더욱 힘들 것이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가령 "너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니?"라고 물을 때, 저는 죽을 때까지 "모릅니다"라고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죠.

 

 

 저는 현재 한때 믿었던 사후세계도 믿지 않고, 영혼의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과학주의자나 극단적인 유물론자로 비춰질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들과 저의 판단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말처럼,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인간들이 추상을 통해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 일상세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저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중력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활용을 통해 존재를 역추론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방식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각되는 대상만으로 인간은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고민해왔지만 무엇이 좋은 삶인지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삶은 허무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신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발언은, 사실 신뿐만 아니라 그와 동격이 되는 모든 것들을 지칭합니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후기와 본문을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본문이 아무리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도, 최대한 제가 심리적으로 가까이 하고 싶은 것들은 배제하고 썼기 때문입니다. 후기는 제가 느끼는 것들을 썼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과는 불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통일교, JMS 등에서는 육체부활을 꾸준히 부정하고 영적 부활을 주장합니다만, 그쪽 의견은 기각합니다. [본문으로]
  2. http://imnt.tistory.com/166 참조 [본문으로]
  3.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4.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신자들에게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라는 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즉, 공동체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본문으로]
  5. 성경모임 나오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천지입니다. 교회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면 신천지인줄 알기 때문에 교회를 밝히지 않고 우선 성경모임을 나오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6. 오해하실까봐 그러는데 저는 하나님이 있다고도 안 했고, 없다고도 안 했습니다. [본문으로]
  7. '건강한 의심', '건강한 분노' 등을 설파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신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한 발언들입니다. 믿음을 위한 의심이 아닌 순수한 의심이 허용될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8.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므로, 그런 의견은 기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으로]
  9. 기독교 전체가 이런 주장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주의권에서는 진화론을 배척하지 않거나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꽤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사회계약론을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모든 자연상태는 '사실'이 아니라 목적이 투영된 '설정'입니다. 사회나 철학 여러 가지 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미리 가지고, 이를 전개하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까마득한 과거의 상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부인권설, 자연법에 대한 언급도 똑같습니다. [본문으로]
  11. 고대의 과거에는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려는 관념이 컸기 때문에 '선악관'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겠지만, 현대적으로는 넓게는 가치관이나 사고관 좁게는 인간관, 사회관, 정치관 정도를 떠올리시면 좋지 않을까싶습니다. [본문으로]
  12. 이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식이 '절대주의'로 쉽게 읽힐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다원주의나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강하게 공격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꼭 그들의 공격이 옳은 것은 아니며, 기독교 내부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성 안에서의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도 많이 있는 편입니다. [본문으로]
  13. 여기서 언급되는 '사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술하겠지만, 교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곧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제가 주장하는 '사랑'을 실천한다는 명제 자체가 기독교의 근본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현대까지 전해졌는가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시 종교라는 거대한 '믿음체계'이기 때문에 믿음이 강조될 수밖에 없거든요 [본문으로]
  15. 이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영원을 주는 생명나무를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치명적인 속성입니다. 그만큼 '죽기까지 인간이 된' 신인 것이죠. [본문으로]
  16. 물론 위의 모든 주장들 역시 따지고 보면 모두 반박이 가능합니다만 이 정도에서 나두기로 합니다. [본문으로]
  17. 천주교에서는 기독교처럼 천국-지옥의 이분법이 아닌 천국-연옥-지옥의 삼분법이 존재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같지만, 티끌 없이 살았던 사람들도 아닌 완전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닌 자들은 연옥에 가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본문으로]
  18. '신과 도덕'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양자 모두 비판이 가능하므로, 모두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서로 성향이 '다르다'고만 판단할 수 있으면 좋겠고, 개인의 감성체계가 어디에 가까운가를 살피는 것이 좋지 않나싶습니다. [본문으로]
  19. 위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이고 머리가 아닌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서는, 조금 시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언급하려면 철학적인 글을 따로 파야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간단하게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보편의 영역인 이론으로 절대화될 수 없다면, 그가 증명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개별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증명'은 아니며, 각자의 삶에서의 절대화일 것입니다. 이론은 그리 말하지 않더라도, 본인의 모든 삶과 체험이 그리 말하고 있다면 타인이 뭐라하든 본인에게는 그것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를 통한 삶의 방식이 타인에게 옮겨진다면, 그것이 삶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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