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의 회귀 이후의 기독교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신학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될 수 없다. 그것은 ‘이론’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든 답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무신론적인 작업들, 유신론적인 작업들은 크게 의미가 없다. 이 문제는 이론의 영역이 아니다. 이론으로는 신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플라톤 이래 신존재(이데아, 신, 존재, 부동의 동자) 등에 대한 파악은 항상 ‘이성’을 통해왔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성 이외에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 등 여러 요소들이 신존재를 파악하는데 부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존재는 ‘생성·소멸·변화·운동’를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다. 기독교적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절대성’을 띠어야 하기 때문에, 그에 합응하는 보편화될 수 있는 언어, 이성, 사유를 통해 신존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이성중심주의의 일반론이다. 이는 인간의 여러 요소 중 감각과 감정 등의 요소는 항상 변화하고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막연한 신뢰를 품은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절대화될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 인간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도 가질 수 없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유신론, 무신론 논쟁은 예전에 끝났을 것이다. 애초에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 안에서 절대성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언어를 구성한다. 전제 없이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결국 어떤 사유든, 특정 전제들로부터 귀결된다. 유신론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신존재와 관련한 사유에서 이성적으로 어떤 결론을 낸다고 한들, 그 결론은 그 사람이 추론해내는 ‘입장’으로부터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입장의 전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언어는 ‘인간의 삶’을 추상화시켜 만든 것인데, 언어의 전제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얻게 되는 입장들이란 옳은가? 아니다. 틀리지도 않고, 오히려 그냥 삶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다. 우리의 삶은 그냥 살아감 자체일 뿐이다. 그 안에서 연역된 ‘언어’는 그저 그것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언어가 절대영역으로 가지는 ‘전제’란 우리의 삶이고, 이는 틀리거나 맞지도 않은 것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인간이 언어화하는 어떤 것도 이론적으로 절대화될 수 없다ㅡ그저 삶이 표현될 뿐이지, 이는 절대성과는 무관하다. 그냥 표현일 뿐이다ㅡ. 절대화된다면, 그건 이성(reason)이 삶을 오해한 것이다. 결국 신존재와 관련되어 이성만을 사용해 판단하는 것은 신존재에 대한 어떤 결론도 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이성을 통해서는 절대적인 것은 결코 발견될 수 없다.

 

 언어란 ‘삶의 표출’이다. 신존재를 찾는 이가 이성에서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이성, 이론이 본래 지칭하고 있던 삶이다. 이성적 시도를 통한 절대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론적인 절대성은 불가능하지만, 개별적 삶에서의 절대성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신존재를 찾는 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체험과 삶의 필요가 선행되고, 그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호의’와 긍정적인 입장이 세워지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인들은 어떨까?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를 탐구하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가 이상사회에 가깝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다. 먼저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민주주의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체험이 먼저 있지, 그에 대한 정당화, 생각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그렇다. 이론적으로 무신론보다 유신론이 타당하다고 결론짓고, 예수의 역사적 실존과 부활의 실존에 대한 증명을 해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삶이 있고, 그것이 기독교와 ‘체험적’으로 만난 것이다. 우리의 실제적 삶이 그렇다.

 

 어떤 삶이 도대체 참된 것일까? 그에 대한 절대적인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됨’에 대한 어떤 입장을 전제해야만 답변이 된다. 즉, 어떤 삶도 기본적으로 참되지도, 그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고, 체험하는 어떤 삶도 틀리지 않다. 그런 면에서 삶이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만든 삶의 입장이란 절대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론으로 분쇄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을 ‘이론적’인 것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하려는 모든 시도는 의미가 없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에 대해서 최대한 합리적인 것으로 내놓으려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론은 절대적이지 않고, 항상 자신이 지닌 특정 입장을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고, 유신론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건 이론 때문이 아니다. 그건 삶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입장의 변화는 체험, 삶의 변화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람들이 입장을 바꾸는 것이 그런 형태를 띤다. 그런 면에서 이론적 무신론자는 한명도 없고, 이론적 유신론자는 한명도 없다. 오로지 체험적 무신론과, 체험적 유신론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성/비존재성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계속 강조하듯이 이는 이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인식의 영역에서 신의 존재성여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ㅡ찬양, 기도, 예배, 교제ㅡ을 ‘신과 인간의 소통’으로 보기는 힘들다. 신을 볼 수 없는 인간들에게 보이는 건 오로지 사람들뿐이다. 따라서 내겐 ‘하나님의 말씀을 느꼈다, 들었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느낀다’든가 등의 말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실제로 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에 의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는데 이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신과 인간’의 소통인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것에 답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누군가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을 때, 공동체는 잘 고민해보라고 한다. 실질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다. 공동체는 그가 결정을 내렸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와 신에 대한 입장’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실까? 좀더 고민해보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지으면, ‘아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어’하고 결론을 짓는다. 눈에 보이는 건 인간들일 뿐이다(오해하지 말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의 힘이 있는 것은 체험과 더불어 그것을 ‘하나님의 행위’라는 상상과 결부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신이 나의 기도를 모두 들어준다하더라도, 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로 신에 의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기도가 응답된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남는 건 ‘믿음’의 문제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성경을 읽고 뭔가 깨달을지라도, 그것을 기독교적 신과 연관 짓는 것은 독립적인 이야기다. 감히 내가 생각하기엔, 기독교 신자들은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신과 연관 짓는다. 연관 짓는 것은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이 아무리 ‘강권적으로 역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신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독립적인 문제다. 이것이 해결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

 

 그 해결방식이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믿기로 결단한다.’ 그러나 결단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생긴다. ‘절대성’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여전하다.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고 그것에서 안정을 얻고,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절대성’ 즉, 신의 존재성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신은 증명되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에 의해 신이 삶으로 존재할 수 있어도,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신의 존재성은 증명될 수 없고, 오로지 믿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순환이 있다. 비신자들에게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해야 기독교를 믿을 것인데, 신은 증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배, 기도, 찬양에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즉, 신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믿음을 위한 행위가 선행되게 된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행위들 역시 비신자의 어떤 기대와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즉, 체험을 통한 믿음과 믿음 사이의 순환이 발생한다. 결국 남는 건 ‘믿음’밖에 없다. 신의 존재는 독립적이고, 신앙에는 ‘믿음’이 남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기독교인들은 ‘존재한다’보다는 ‘믿는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리고 서술한 바와 같이 믿음은 체험을 통해 가능하다.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들을 보면 보편적인 의미에서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즉, 기독교는 완전무결한 어떤 언어적 표명으로 모두에게 수학적인 수준으로 일반화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가능한 절대성이란 결국 개별적 ‘삶’에서의 절대성이다. 곧 이론적 절대성의 문제는 삶의 절대성문제로 환원된다. 이는 ‘믿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론을 통해서는 이것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의미에서 믿음을 얻고자 한다면, 어떤 접근법이 필요할까? 아마도 이성중심주의적 진리관을 전인격적 진리관으로 전환함으로서 모종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플라톤 이래 전통적인 진리는 이성중심주의적으로 접근되어왔다. 즉, 진리란 생성·소멸·변화·운동하지 않는 실체이며, 진리의 파악은 이성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성을 통해 얻는 진리란 그것이 ‘진리’라고 가릴 수 있는 어떤 기준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이성 스스로는 어떤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며, 기준을 쌓는 것은 개별적인 삶이다. 이성이 발원한 것은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며,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진리가 생성·소멸·변화·운동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우리의 감각과 총체적인 삶을 통해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가? 진리가 온 세계에 퍼져있다면, 불완전한 이성만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사고관은 편협한 것이 아닌가?

 

 인간은 인간의 존재방식대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도 있고, 충동 등의 의지도 있다. 현실의 인간은 이성·감정·의지 삼요소를 지닌 채 그것들을 발현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이 세 가지가 상호작용하며 조화를 이루는 ‘전인격적 방식’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것이 존재론적으로 참이라면, 어째서 인간의 감정적 측면, 의지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채로 오로지 ‘이성’만을 진리를 찾는데 사용하는가? 진리란 이성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전인격적 존재방식으로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이성중심적인 진리관은 부정될 수 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은 자신의 전인격적인 ‘삶’을 중심으로 하여, 그 길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어떤 절대적인 이성적인 표현으로 일반화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 실존에서 자신에게 맞는 진리를 찾아나가는 것에 불과하며, 그렇게 해서 찾아진다고 상상되는 진리란 ‘나’의 진리이지, ‘인간’의 진리일 수는 없다. 인간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파악해야 하는 타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제시된 전인격적 진리관으로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개별적 실존들이 세계에 내재되어있다고 체험하는 어떤 존재론적인 질서들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가령 물리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세계에 물리법칙이 존재론적으로 내재되어있다는 것을 인간이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세계가 자연처럼 어떤 존재론적인 구조를 내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자연세계와 인간세계가 다른 것은 자연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구조의 발견은 타자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인간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구조의 발견은 우선, 다른 인간이 아닌 자신을 ‘반성’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개별적 실존들이 진리를 찾았다고 설정한다면, 그 진리는 자기반성적인 진리일 것이며, 지속적으로 말해왔듯이 타자의 진리도 아닌, 인간의 진리도 아닌 ‘나’의 진리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는 이성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전인격적 삶으로서 인간과 세계를 파악하며, 그에 대해서 어떤 존재론적인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

 

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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