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간관계상(像)

일상 2014. 3. 25. 23:48

 

오늘 있었던 일들로 과거를 소급하여 나를 돌아본다.

 

나의 인간관계상은 어떤가.

 

나는 기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는데 목적주의적 성향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높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사유하기를 자처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항상 생각의 홍수 속에 빠져살다보니 행위를 결정할 때, 그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타인이라는 존재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떠오르는 것이 적다.

 

누군가 나와 같은 것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영역을 공유하고 있어도 그렇다.

 

나는 솔직히 누군가와 탁 터놓고 학문적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싶다. 머리가 아프겠지만 나는 그게 나의 감성에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니는 영역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나와 생활을 오래 공유하지 않는 이상(혹은 서로가 무리하여 서로를 알아가려고 하지 않는 이상!) 크게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나는 소심하다고, 부끄러워한다고, 조용하다고 들어왔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인간이 고마워하는 행위'에 대한 대중 일반의 인식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과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감사의 구별에 대해서.

 

쉽지 않다.

 

대화란 기본적으로 서로의 의견차이를 보이는 것이나, 혹은 이해하려는 행위에 기초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관심 영역 자체가 상이하게 존재한다면, 이는 매우 힘든 일이다. 서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타이틀에 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자주 든다.

 

그래서 나와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가지는 것들이 너무나 동일한데, 그것을 물어볼 수 있고 물어볼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갈려있고, 그 질문들 중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배반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더욱.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처럼 대놓고 모두에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나와 수업을 같이 들었던, 듣는, 들을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배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매우 들떠있다.

 

물론, 타인은 항상 그것에 대해 나처럼일 수 없으므로 나는 매우 자제하는 편이다.

 

즉, 나는 타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나를 드러내지 않고 깎아내려야 하는 경향이 있다.

 

뭐.. 이는 내가 본격적으로 학문세계에 진입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도 있을 문제일지도 모른다

(러셀과 프레게의 학문적인 서신들. 러셀과 화이트헤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등의 친구이면서 학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지금 나는 학문의 영역에서 조금 벗어난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고, 따라서 나는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아야 하고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나에게 과제이며 풀리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심각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는 내가 아싸가 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하다.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색한 침묵을 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무슨 대화를 하는가.

 

난 아직도 여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

 

이야기가 샜는데, 내가 목적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학문'의 영역에서 항상 활동하려고 애쓰고, 이는 내 사유에서 나의 '목적'에 해당한다. 인간관계도 유비적으로 그렇게 나에겐 인식되는 듯하다.

 

만남이라는 것은 특정 목적이 있을 수 있다. 만남 자체가 목적이기도 할 수도 있고(나에게는 아직 너무나 어려운 부분),  학회/동아리 등의 특정 목적을 가질 수도 있다.

 

나의 만남에 대한 인식은 후자에 치우쳐져 있다.

 

특정 목적을 가진 만남은 나에게는 그나마 단순하고 편하다. 목적을 가지고 대화의 주제를 그것으로 끌고 가면 되니까.

 

가령 내가 좋아하는 학문의 영역. 하나의 주제나 문제를 나두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된다.

 

하지만 일상의 만남은 만남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고, 이는 나에게 어려운 문제다.

 

목적이 주어지지 않은 만남은 참 어렵다.

 

...

 

내가 이 글을 써낸 직접적인 이유는 오늘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ㅡ물론 이에 대한 사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ㅡ.

 

나는 오늘 특정 집단에 관한 밥자리에 초대되었고, 나는 별일이 없어 그곳에 참가하였다ㅡ목적적인 인간관계상을 그리는 나에게 '참가'라는 단어가 더 편함을 미리 말해둔다ㅡ.

 

나는 거기서 심각한 불편함을 느꼈다ㅡ차라리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었다ㅡ.

 

밥을 먹으면서 생각해보았고, 오늘 그 뒤로 그에 대해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특정 집단'의 목적성 아래서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가 벌어질 줄 알았다ㅡ이는 나의 전형적인 오류이다ㅡ.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 매우 일상적인 친목을 쌓아가는 모임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나의 인식의 착오에서 벌어진 것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나는 one-to-one relation의 형태의 모임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아 또한 당황하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한 두세마디 뱉었나?

 

나는 기본적으로 3명 이상의 모임에서 말하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3명 이상 나와 함께 있었다면 내가 얼마나 입을 잘 다물고 있는지 알 것이다.

 

이런 걸 알리 없는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이는 과거부터 변하지 않은 나에 관한 높은 개연성의 사건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수에 속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제나 소수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나는 오늘 그 모임에서 그 소수가 나였다고 생각한다ㅡ언제나 그러듯이ㅡ.

 

언제나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지는데, 면역 때문인지 요즘은 그렇지 심하지도 않다. 게다가 그런 자괴감에 빠질 시간에 과제나 공부해야 할 양이 많기 때문에 빠져있을 수 없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 너무나 자주 부딪히게 되면, 나는 그저 '그렇군. 역시.'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저 그 모임이 끝나고 도서관에 와서 "아 공부할 시간이..."하고 잠시 탄식을 뱉었을 뿐이다.

 

뭐 생각되는 반론으로는 '그러면 스스로 상황에 뛰어들어 네가 대화를 이끌지 그래?'가 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반박할 능력이 없다. 나라는 존재가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ㅡ또 누군가는 왜 그럴 능력이 없느냐 누구나 대화의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느냐라고 하겠지만ㅡ.

 

여튼, 복잡미묘하고 나를 다시 한번 위축시키는 모임이었던 것 같다.

 

...

 

내 일부 생각에 귀납적인 요소를 더해주기도 했다.

 

난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에 독신주의를 선호하는데, 집단에 대한 이런 경험이 많기 때문이기도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한 요소가 되는 거기도 하지만...

 

...

 

내가 속해있는 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것을 거부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의 해석학적 현상인 매개와 '이해'를 도모하는데, 나는 이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해서, 나의 경험체계는 나의 감성에게 "역시. 인생은 혼자야. 뭐 그냥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내 원하는 대로만 사는 거지.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어. 회의주의는 인생의 진리이지." 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은 정 반대의 것을 말한다.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만들어졌고, 아무도 혼자서만 존재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그 간격을 좁히고 좁혀서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더 나은 공동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나의 경험체계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나는 이 두 간극 사이에서 큰 고민과 절망에 빠져있었고, 지금은 덜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기는 하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내 회의주의에 결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여튼, 다시 한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모임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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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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